블랙 톰의 발라드
빅터 라발 지음, 이동현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1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기존 소설의 캐릭터와 설정을 다른 작가가 그대로 가져와 만들어낸 2차 창작 소설은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하지만 나름대로의 의의를 지니고 있고 작품성도 뛰어난 2차 창작 소설도 있다도미니카 출신 작가 진 리스는 『제인 에어』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캐릭터 버사 앙투아네트 메이슨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를 썼다원작에서 주인공 제인을 위협하는 미치광이로 나오던 버사에게 자기 목소리와 서사가 주어지면서그녀를 파멸로 몰아간 제국주의와 가부장주의의 추악함이 드러난다.

  『블랙 톰의 발라드』도 그런 2차 창작 소설 중 하나이다이 소설은 공포 문학의 대가로 불리는 미국 소설가 하워드 러브크래프트의 단편 「레드훅의 공포 」를 비판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레드훅의 공포 」는 1920년대한 괴짜 노인이 뉴욕의 레드훅 지역에 있는 집을 사들이고 그곳에 수상한 사람들을 불러 모아한 형사가 그의 행적을 뒤쫓는 내용의 단편이다문제는 백인 작가인 러브크래프트가 이 작품에서 타 인종에 대한 편견과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이 소설에서 흑인동양인무슬림들혼혈 인종들은 빈민가 구석구석에 숨어 흉악 범죄를 저지르고 그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한 일을 꾸미는 것으로 묘사된다.

  흑인 작가인 빅터 라발은 원작에서 어두운 밤 낡은 집의 창문 뒤에 숨어 수상쩍은 웃음을 흘리던 흑인 청년들 중 한 명에게 찰스 토머스 테스터라는 이름과 서사를 부여했다사람들에게 토미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그는타 인종에 대한 근거 없는 공포에 시달렸던 러브크래프트의 시선을 걷어내고 보면 악당도 괴물도 아닌 평범한 청년이다그는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번 돈으로 늙고 병든 아버지를 부양하고 있다토미는 딱히 머리가 좋지도 않고 특별한 재능도 없지만 식비와 주거비가끔 도박을 할 용돈만 있으면 삶에 만족하는 순박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레드훅의 공포 」의 주인공 로버트 수댐이 그의 앞에 나타나면서그의 삶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수댐은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토미를 발견하고그에게 자신의 저택에서 열리는 파티에 와서 노래와 연주를 해 주면 500달러를 주겠다는 제안을 한다자신과 아버지의 몇 달치 생활비는 되는 거금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 토미는 매우 기뻐했지만, 1920년대 당시 흑인이 혼자 백인의 집에 찾아가는 것은 곰과 레슬링을 하러 가는’ 것만큼이나 위험한 일이었다토미는 수댐의 집에 찾아가다가 자신을 뒤쫓는 백인 소년들에게 위협을 당한다러브크래프트의 타 인종에 대한 공포가 막연하고 근거 없는 것인 반면토미가 백인들에게서 느끼는 공포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다토미에게는 백인의 노여움을 사지 않도록 그들 앞에서 착하고 순종적인 흑인인 척하는 것이 일상일 정도였다.

  토미가 수댐의 저택에 도착하자수댐은 책으로 가득 쌓인 서재로 그를 안내한다수댐은 토미에게 토미가 살고 있는 할렘이 어떤 지역인지 말한다. “경찰은 치안 유지와 갱생을 단념해 버렸고차라리 그 병든 지역으로부터 외부 세계를 보호하고자 방벽을 세우는 쪽을 택했어.” 그의 이 말은 「레드훅의 공포 」에서 그대로 가져온 구절이다러브크래프트와 수댐에게 할렘은 온갖 비백인과 혼혈 인종들이 들끓어 음모를 꾸미고 범죄를 저지르는 병든 지역이었지만토미에게는 아버지와 따뜻한 집이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공간이었다. 그랬기에 그는 제가 여태껏 살던 곳에 관한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다고 대답한다여기에서 작가가 러브크래프트의 인종 차별적인 시선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뭐 이런 미친 백인놈이 다 있나 생각하던 토미의 눈앞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분명히 뉴욕의 야경이 펼쳐져야 할 창밖으로 바닷속 풍경이 보이는 것이다수댐은 대양의 해저에 한 왕이 잠들어 있고그가 잠에서 깨어나 돌아오면 토미의 인종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의 비참함은 끝날 것이라고 말한다하지만 잠든 왕이 깨어나도록 도운 자신들에게는 큰 보상이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하룻밤 동안 상상도 못할 일을 보고 듣고 경험하고 할렘으로 돌아온 토미는 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되었다자신들이 추적하던 수댐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토미를 의심하고 추적하던 백인 사립탐정 하워드가토미의 집을 불시 검문하다 그의 아버지가 총을 들고 있는 것으로 잘못 보고 총을 쏜 것이다토미의 아버지는 그저 기타를 들고 있을 뿐이었다아무 무기도 들고 있지 않은 노인에게 탄창이 다 빌 때까지 총을 쏴 놓고도하워드는 자신이 정당방위를 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그는 토미에게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아버지의 죽음에 충격을 받아 얼어붙어 버린 토미의 모습을 보고 아버지가 죽어도 슬퍼하지 않는다며, 흑인들은 개미나 벌 같이 감정이 없는 존재라고 경멸한다하워드와 함께 수댐의 행적을 쫓던 백인 형사 말론은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도 하워드의 악행을 방관하고토미에게 동정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흑인 청년 한 명이 백인들의 폭력에 복수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그랬기에 토미는 스스로 수댐의 부하가 되어 그가 외계 종족에서 받은 무시무시한 힘을 얻는다얼마 되지 않아 한 흑인이 피에 젖은 기타를 들고 다니며 수댐의 부관 노릇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뉴욕에 퍼진다순박한 청년 토미에서 무시무시한 범죄자 블랙 톰이 된 그는 수댐의 충성스러운 종 노릇을 하다결정적인 순간에 백인들에게 복수를 한다그를 자기 집에 붙잡아둬서 아버지를 지키지 못하게 한 수댐도죄 없는 아버지를 잔인하게 죽인 하워드도 그의 손에 잔인하게 살해당한다모든 일을 방관하기만 했던 말론은 눈꺼풀이 도려내져다시는 자신이 외면했던 것들에게서 눈을 돌릴 수 없게 된다그리고 토미는 신의 실패작인 인류 전체를 잠든 왕으로 불리는 외계 신과 그 일족에게 넘겨버린다.

  복수를 끝낸 토미에게 남은 것은 허무와 슬픔뿐이다복수를 마친 뒤 그는 절친한 친구 벅아이를 찾아간다온몸이 피로 물든 끔찍한 토미의 모습을 보고 무서운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하면서도벅아이는 그를 여전히 예전의 토미로 대한다그러나 토미는 결코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었고예전에 누렸던 평범한 행복도 다시는 되찾을 수 없었다토미는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벅아이에게 말한 뒤 창문에서 뛰어내린다더 이상 평범한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닫고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놓는 토미의 모습에서,「레드훅의 공포 」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느껴진다약자의 입장에 서 본 사람만이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슬픔이다.

  「레드훅의 공포 」는 타 인종에 대한 편견과 혐오로 뒤범벅이 되어 있고서사와 대화도 빈약한 졸작이다빅터 라발은 원작에서 그저 배경으로 그려졌던 인물에게 그만의 이름과 서사를 부여하면서러브크래프트의 타 인종에 대한 공포가 환상에 불과하고 그 타 인종 또한 피와 살감정이 있는 똑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단순히 타 인종과 미지의 외계에 대한 공포만을 그린 원작과 달리『블랙 톰의 발라드』는 늘 폭력과 죽음의 공포에 노출되어 있었던 약자들의 슬픔을 담고 있다. 1920년대를 살아간 백인 러브크래프트는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슬픔이다이런 점에서 『블랙 톰의 발라드』는 원작을 넘어서서 원작이 담아내지 못했던 것들을 담아낸 훌륭한 재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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