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존속 살해범의 편지 - 그리고 그 밖의 짧은 글들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유예진 옮김 / 현암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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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차에 적신 마들렌. 그 마들렌을 입 안에 넣는 순간 살아나는 기억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과거로의 여정을 시작하는 이 장면에 대해 수없이 들어왔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커녕 프루스트의 글 한 줄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보고 싶긴 한데 그 전에 프루스트의 짧은 산문들을 모은 이 책으로 가볍게 몸을 풀어보는 게 좋겠다 싶었다. 프루스트는 이 책에서 "한 작가의 책을 한 권만 읽는 것은 그를 단 한 번 만나는 것과 같다."(p. 66.)고 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이 책으로 그를 처음 만나는 셈이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을 계속 만날지 말지 결정하게 되는 것처럼, 나와 프루스트의 만남이 계속 이어질지는 이 책이 결정할 터였다.


  내가 이 책에서 만난 프루스트는 엉뚱하지만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당대 최고의 평론가였던 생트뵈브의 문학 이론을 반박하는 비평서 『생트뵈브에 반박하여』서문에서는 뜬금없이 어린 시절 여름을 보냈던 할아버지 댁에서의 기억들을 풀어놓고, 친구 자크에밀 블랑슈의 저서 『화가의 이야기』서문에서는 외종조부 댁에서의 추억과 친구들 앞에서 자신이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것을 숨겼던 옛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생트뵈브의 문학 이론이 왜 비판을 받아야 하는지, 블랑슈의 문학과 미술 세계는 어떤지 알고 싶었던 독자들로서는 당황스럽겠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기억의 단편들이 얼마나 생동감 있게 반짝이는지 그의 기억 속에 함께 잠기게 된다. 할아버지 댁 요리사가 가져다 준 빵을 차에 적셔 한 입 베어 문 순간, "입 안에 퍼지던 차의 향과 한결 더 부드러워진 빵의 감촉, 제라늄과 오렌지나무 향"(p. 128.)이 읽고 있는 내 입 안에서도 퍼져 나가는 것 같고, 외종조부 댁 부엌에 놓인 크리스털 식칼 받침대에서 반사된 무지갯빛과 그뤼에르 치즈, 살구가 내뿜은 향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신비로운 분위기가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늘 자신의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그 감각에 새겨진 것들을 언제라도 바로 지금 겪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되살려 낼 수 있으며, 글을 통해 그것을 다른 사람들까지 느낄 수 있게 하는 사람이다. 귀족 부인의 무도회에 초대받아 잘 차려입고 가다가 자신이 부잣집 자제인 것을 모르는 친구와 마주쳐 진땀을 뺐던 일은 유쾌한 필치로 그려지고 있다. 그의 유머 감각은 이 부분뿐만 아니라 책 곳곳에서 튀어나와 읽는 사람을 슬며시 미소 짓게 만든다.


  그는 차창 밖으로 지나쳐 가는 시골집들과 그 집들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를 보고서도 이런 따뜻한 글을 쓴다. "배나무에 기대어 있는 어떤 집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 나무에 의지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예전처럼 자신들이 배나무를 보호해 주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 집들은 배나무의 가지들이 한없이 여리고 열정으로 가득했던 때를 떠올리며 먹먹해진 가슴에 그것을 꼭 안고 있었다."(p. 113.)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무생물인 낡은 시골집과 어떤 감정 표현도 할 수 없는 배나무에서 가슴 뭉클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그 뒤에 이어진 세 종탑 이야기도 정겹다. 길을 가면서 보였다 안 보였다, 커졌다 작아졌다, 서로 뒤서거니 앞서거니 하는 세 개의 종탑들은 그저 오래전에 세워진 낡은 건물이 아니라 먼 길을 여행해 온 프루스트에게 손짓을 하는 정겨운 존재들이다. 그는 보고 듣고 경험하는 어떤 것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를 느끼며, 그것을 맑은 서정으로 그려낸다.


  남들이 포착하지 못하는 것을 포착하는 예민한 성정 때문인지, 미술과 문학 평론에서는 그만의 독특한 안목과 뚜렷한 주관을 드러낸다. 영국의 저명한 예술평론가 존 러스킨 전문가로 이름났던 그는, 러스킨의 예술 평론을 사랑하지만 그가 겉으로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강조하면서도 사실은 미술 작품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본다. 러스킨은 프랑스 아미앵의 중세 성당들에 관해 쓴 책 『아미앵의 성서』에서 자신이 글로 묘사하는 성당의 부분들을 그대로 담은 사진이 아니라 보다 암시적이고 글로 묘사된 것과는 관계가 먼 사진을 선택했다는데, 나라면 그의 이런 불친절한 글과 그림의 배치를 비판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러스킨의 엉뚱한 도판 배치에서 그의 정신 세계 속 독창성과 유머 감각을 발견한다. 플로베르의 글에서는 접속사 '그리고'를 남들이 쓸 법한 곳에 쓰지 않고 남들이 쓰지 않는 곳에 쓰는 플로베르 문체의 특징에서 그의 문법적 독창성을 발견한다. 친구 블랑슈가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에는 살롱 여주인들이 고상한 말투로 그의 작품을 무시하다, 그의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은 이후로는 그 고상한 말투로 '예전부터 이 그림을 좋아했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신랄한 유머 감각이 드러난다. 그가 어찌나 가차 없고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풍자하는지, 내가 당대의 작가나 화가였다면 그와 친구나 지인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그 두 가지 경우가 아니라면 프루스트는 참 사랑스러운 친구나 지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앞으로도 프루스트를 계속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짧은 글과 장편소설은 호흡이 다르겠지만 그는 여전히 프루스트고 사랑스러움과 섬세함도 여전할 것이다. 좋은 만남이 되는 데는 분위기도 한몫하는데, 이 책의 편집과 디자인은 프루스트의 글 특유의 섬세한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 하늘색 바탕에 푸른색 줄무늬가 그려진 표지와 그 표지에 그려진, 회중시계 위에 앉아 차를 마시는 신사를 그린 일러스트(현대 한국인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것인데도 프루스트가 살던 당시 어느 소설이나 신문에 실렸을 법한 그림체다), 살구색 속표지와 그 위에 얹은 프루스트의 흑백 사진들까지. 마침표와 말줄임표에 쓰인 점들까지 다이아몬드 모양이다. 이 책의 내용 중 러스킨 관련 평론들이 조금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평론들도 곱씹어서 찬찬히 읽어 보면 프루스트만의 서정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프루스트와의 기분 좋은 첫 만남이다.


P.S. 이 책에 실린 글 「프루스트에 의한 프루스트」는 스무 살 무렵의 프루스트가 다양한 개인적인 질문들에 짤막하게 답변한 글이다. 프랑스의 TV 문학 대담 프로그램 <아포스트로피>에서는 진행자가 방송 끝에 초대 작가에게 이 글의 문항들로 질문하면서 이 '프루스트 설문지'가 더 유명해졌다. 이 질문은 각 작가의 취향과 개성, 고민, 가치관들을 즉흥적이면서 자유롭게 드러내는 방식이다. 나도 해보았는데 개인적인 글이라 숨은 글 기능으로 숨겨 놓았다. 질문들이 궁금하면 열어보시고, 그에 대한 프루스트의 답이 궁금하면 책을 읽어보시길.


*모바일, 앱에서는 숨은 글 기능이 적용되지 않으니 서평만 읽고 싶다면 여기까지만 읽으면 됩니다.


접힌 부분 펼치기 ▼ 블로거 B가 말하는 블로거 B

 내 성격의 주요 특징: 호불호가 심히 뚜렷함. 한 번 마음을 연 사람에게는 충실하지만 한 번 마음을 닫은 사람에게는 쉽게 다시 마음을 열지 않음.


남성에게 바라는 자질: 여성을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 지성과 이성, 감성


여성에게 바라는 자질: 남들이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뚝심


친구들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질 만큼 힘이 되어주는 것


주요 단점: 디테일에 너무 집착함, 좋아하는 일을 하다 꼭 해야 할 일을 못할 때가 있음


가장 좋아하는 활동: 책이나 영화에서 본 이야기를 갖고 또 다른 이야기 상상하기


행복이란: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


가장 큰 불행은 무엇일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사는 것


되고자 하는 것: 좋은 책을 만드는 편집자


살고 싶은 국가: 모두가 자기 성별이나 인종, 성적 지향 때문에 불안해하거나 차별당하지 않고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


좋아하는 색: 하얀색, 하늘색, 남색, 파란색, 하얀색과 파란색 계통 색의 조합


좋아하는 꽃: 벚꽃, 주황색 나리, 장미


좋아하는 새: 제비(프루스트와 같음)


좋아하는 산문 작가: 피천득, 레프 톨스토이, 스콧 피츠제럴드, 박상영


좋아하는 시인: 백석, 윤동주, 정호승


좋아하는 픽션 남주인공: 피에르 베주호프(레프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좋아하는 픽션 여주인공: 최서희(박경리,『토지』)


좋아하는 작곡가: 장범준, 브람스


좋아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앙리 마티스, 마르크 샤갈, 요하네스 판 페르메이르


실제 삶에서 존경하는 영웅: 위근우 기자


역사 속에서 존경하는 여자 영웅: 로자 파크스, 가네코 후미코


무엇보다 가장 싫어하는 것: 층간소음, 더러운 화장실(둘 중 어느 게 더 싫은지 고를 수 없음)


가장 혐오하는 역사적 사건: 난징 대학살


가장 좋아하는 군사적 사건: 말 안 듣는 교회 후배 놈들 입대함(아쉽게도 지금은 다 제대함)


내게 있었으면 하는 능력: 외국어 능력,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를 다 잘하고 싶고 가능하면 아랍어랑 힌디어도 하고 싶음,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


어떻게 죽었으면 하는가: 침대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현재 나의 정신 상태: 할 일이 너무 없어 무기력한 상태


가장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잘못: 몰라서 저지른 잘못


나의 모토: 내 페이스를 잃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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홉스 - 리바이어던의 탄생 문제적 인간 14
엘로이시어스 마티니치 지음, 진석용 옮김 / 교양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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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머스 홉스'라고 했을 때 생각나는 것은 그가『리바이어던』의 저자라는 것과 "만인은 만인에게 늑대"라는 말을 했다는 것뿐이었다. 중학생 때 사회 시간에 공부했던 것들, 고등학생 때 사회탐구 과목에서 공부했던 것들을 어쩌면 이렇게 남김없이 잊어버릴 수 있을까. 지금의 내 지식 상태가 너무 심각하다 싶어, 홉스의 전기인 이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토머스 홉스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사상을 펼쳤는지, 그의 삶과 사상에 어떤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 상황이 영향을 미쳤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홉스는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 말기(16세기 말)에 부유하지 않은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인 캐번디시 가의 가정교사이자 비서로 수십 년을 일하면서, 고용주들의 정치 활동을 옆에서 지켜보고 학문적 역량을 쌓아왔다. 왕이 모든 권력을 쥐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왕당파였기 때문에, 공화파와 왕당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을 때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10여 년 동안 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크롬웰의 공화정 시기가 끝나고 왕정이 복고된 시기에도, 자신의 사상에 대한 숱한 오해로 인해 다른 사상가들과 끊임없이 논쟁했을 뿐만 아니라 저서들이 출간 금지되기까지 했다. 이런 파란만장한 삶이 그의 사상을 만들었다.


  홉스는 왕이 모든 권력을 쥐는 전제 군주정을 옹호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근대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된 사회계약설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회 구성원인 개인들의 계약을 통해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각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어떤 수단이든 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자연 상태의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된다. 언제든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재산과 생명을 빼앗아갈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약을 맺어 모든 권리를 주권자에게 양도하고 그의 보호를 받는다. 이렇게 계약을 맺어 주권자, 즉 정부를 세움으로써 사람들은 자연 상태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다.


  홉스는 이러한 사회계약설 외에도 정치철학, 광학, 수학, 물리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자신만의 이론들을 정립해 갔는데, 당대의 사회적, 종교적 통념과 어긋나는 부분이 있어 많은 논란을 낳았다. 저자는 사회계약설을 비롯한 홉스의 사상과 이론의 주요 내용을 설명하면서, 그의 사상 속 모순들을 논리적으로 짚어본다. 홉스는 주권자가 시민들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독재의 위험성을 간과했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시민들이 모든 권리를 주권자에게 양도했더라도 여전히 자기 보존의 권리는 갖고 있기에,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을 경우 독재자에게 저항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는데 홉스는 그의 지적에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또한 모든 물체는 서로 맞닿아서 힘을 주고받으며 운동하게 된다며 물체와 물체 사이에 힘과 그 밖의 것을 전달해 줄 공기가 없는 진공 상태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당대의 명망 있는 화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로버트 보일이 공기 펌프로 진공 상태를 만들자, 홉스는 미세한 공기가 유리를 뚫고 들어갈 수 있다며 그것은 진공 상태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진공 상태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었고, 보일은 이 연구를 통해 기체의 부피와 압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보일의 법칙'을 발견했다. 데카르트 등의 동시대 과학자들이 홉스는 과학자로서는 재능이 부족하다고 평가했지만, 홉스는 자신이 그들보다 뛰어난 과학자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학자로서의 자부심이 강해 때로는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학술 논쟁에서 감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저자는 이렇게 홉스의 사상 속 모순이나 인간적인 결점까지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그의 업적과 한계 모두를 짚어본다.


  저자는 홉스의 사상뿐만 아니라 홉스의 사상을 비판한 사람들의 주장과 그들의 주장에서 타당한 점, 타당하지 않은 점도 하나하나 살펴본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라이프니츠의 지적은 홉스의 사회계약론의 맹점을 제대로 짚은 예다. 홉스가 가부장 정부도 인정한 만큼, 태어났을 때부터 아이들이 가부장에게 종속되어 있다면 모두가 평등하고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자연 상태는 있을 수 없다는 비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홉스의 저서를 꼼꼼히 읽어보지 않고 그가 이야기하는 '자연 상태'가 힘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힘을 정의와 법으로 삼는 것이라고 오해했다.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들은 반성문에서 자신이 '홉스주의'에 빠져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종교의 수장도 국가의 주권자가 맡아야 하며 종교 제도도 주권자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주장에 성공회 주교들은 반발했다. 저자는 이러한 오해와 편견들이 당대 사람들의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입장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홉스의 생애 전반과 정치철학, 신학, 물리학, 기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구축한 사상과 이론들, 그를 둘러싼 시대상과 논쟁들까지 꾹꾹 눌러담았다. 페이지마다 넘쳐나는 정보량이 버거울 수도 있고 홉스의 논리와 비판자들의 논리, 이 둘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벅찰 수도 있다. 하지만 홉스와 그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이 책만큼 도움이 되는 책이 많지 않다. 원서가 1999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홉스에 대한 최신 학설들이 반영되지는 못했겠지만, 꼼꼼하고 성실하게 홉스의 삶과 사상을 정리하고 평가하고 있다. 홉스를 무조건 찬양하지만 않고 그의 학문적, 인간적 결점까지 직시하는 객관적인 태도가 이 책의 신뢰도를 높인다. 또한 비문학 연구서인데도 곳곳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유머 감각이 이 긴 책을 읽는 독자들의 발걸음을 좀 더 가볍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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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재판의 나라에서 - 우리 사법의 우울한 풍경
정인진 지음 / 교양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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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와 법적인 다툼을 하게 돼 재판을 치른 적은 한 번도 없다하지만 을로서 갑에게 권리를 침해당할 위기를 종종 겪었기 때문에 온라인으로 법률 상담을 한 적은 여러 번 있다그때마다 내 권리를 침해하는 사람들을 처벌하고 내 권리를 지키기에는 법이 너무 성기다고 느꼈다그들을 고발할 확실한 증거를 갖추는 것은 어려운데 그 사람들이 빠져나갈 구석은 너무 많았다그저 법률 상담만 잠깐 해봐도 이렇게 막막한데 본격적으로 재판에 뛰어드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난관에 부딪혀야 할까전직 판사현직 변호사로서 저자 자신이 보아온 수많은 재판과 그 문제점을 돌아본 책이 이상한 재판의 나라에서이다.


  저자는 판사로서 재판들을 맡았을 때 자신의 한계와 무력감을 느꼈다재판정에 선 사람들은 자신의 밥그릇이 걸린 일이라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데자신은 아무리 많은 재판을 겪었어도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다고 느꼈다자신의 판결이 옳은 판단이었다는 확신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판사 자리에서 물러나 변호사가 되고 나서는 같은 헌법과 법률을 따라 재판하면서도 판사들마다 판결이 제각각인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정성 들여 증거 자료를 준비해도 판사들이 그 자료를 제대로 검토해 보지도 않고 대충 판결을 내려버리는 모습에 허탈해하기도 했다이런 현실의 원인을 살펴보고 그 해결책을 생각해서 법이 진정으로 일반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기에 저자는 이 책을 썼다.


  저자가 생각하는 이상한 재판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빨리빨리대충대충 사건을 심리하는 것은 판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배당되는 사건 수가 너무나 많기 때문에 일어나는 구조적 문제다하지만 편향되거나 보통 사람들의 상식에 어긋나는 판결을 내리는 것은 판사들 자신의 문제다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판사 자신들이 오만과 아집을 버려야 한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사법권은 독립을 보장받아야 하고 판결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법과 판사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려버리고결국 판사는 오만과 아집에 빠져버리게 된다우리나라의 형사 소송 규칙 제147조에는 재판장은 판결을 선고함에 있어 피고인에게 적절한 훈계를 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 있는데반면 미국의 법관 윤리에서는 판사가 법정에서 훈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설이다재판 당사자는 판사에 비해 약자의 입장에 서 있고판사로 대표되는 국가 권력이 재판 당사자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재판 당사자에게 전체주의의 폭력을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실제로 판사들은 피고에게 훈계를 늘어놓기도 하고 때로는 재판 당사자들에게 막말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저자가 법관들에게 바라는 것은 다음과 같다자신을 과신하고 법정에서 제왕적 권한을 행사하면서 자의적 판단을 내리지 않고법의 원칙을 지키는 것하지만 법리와 판례를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사실 관계와 그를 둘러싼 다양한 견해들을 꼼꼼히 살펴볼 것내가 내리는 판결이 사회적으로 어떤 결과영향을 미치는지 진지하게 검토해 볼 것원론적인 해결책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저자가 수십 년 동안 법조계에서 재판을 겪고 오랜 시간 고찰하면서 내린 결론이다간단한 결론인 것 같지만 법조계가 그동안의 관성에서 벗어나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스스로를 개혁하려면 꼭 필요한 태도이다.


  이 책에 실린 글 중 대부분이 같은 법조인더 나아가 법조계 전체를 향한 비판과 조언이지만변호사 고르기변호사 사용법은 법적 분쟁을 준비해야 하는 평범한 국민들을 위한 글이다변호사 고르기에서 저자는 무조건 이길 수 있다며 당장 기분을 좋게 해주는 변호사보다는당신의 피눈물이 묻은 권리와 이익을 무겁게 알고 지켜주는 변호사를 선택하라고 조언한다변호사 사용법에서는 어떻게 하면 변호사와 연락이 닿을 수 있는지본격적으로 재판을 준비하기 전 법률 상담은 어떻게 할 수 있는지변호사에게 사건을 맡기는 데 비용은 얼마나 드는지변호사와는 어떻게 계약하고 어떻게 함께 송사를 진행해 가야 하는지 단계별로 차근차근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평범한 사람들이 험한 세상에서 생각지 못한 위기를 맞았을 때 법적인 도움을 제대로 받을 수 있길 바라는 저자의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은 인권 문제에 대한 저자의 단호한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그는 내 몸을 통제할 자유는 기본적 인권이고 출산을 강제하기에는 여성들이 처해 있는 사회경제적 여건이 어렵기에여성에게만 형사 책임을 지우는 낙태죄는 전면적으로 비범죄화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동성애가 자신들의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차별금지법 제정을 강력하게 반대하는 개신교도들에게, ‘기독교도가 아닌 이에게 기독교의 참된 가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존중이라며교회는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도 멀리해야 옳다고 말한다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2021년 1월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 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들의 손을 들어준 것을한일 분쟁이라는 틀 안에서만 보려 하지 말고 국가적 차원의 성폭력에 내린 사법적 판단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법 앞에 선 인간의 권리와 존엄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단호한 태도를 취하기에 저자를 더욱더 신뢰할 수 있다.


  2018년 우리나라의 고소 건수는 약 55만 건에 달했다. ‘소송 사회라고 해도 될 정도로 형사 소송이 빈번한 나라인데사람들은 소송이라는 비생산적인 절차에서 자신을 소모시키기만 하고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다저자는 토론과 타협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소송이 아닌 공론장에서 해결되고법이 공동체에서 정의와 연대를 이루는 데 올바르게 사용되기를 바란다단순히 이상한 재판이 일어나지 않고 좋은 재판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데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법 환경이 조성되고 법이 공동체 전체의 정의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수많은 재판 속에서 당사자들과 법조인들이 분투하고 있을 지금 너무 먼 이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이런 이상을 향해 조금씩이라도 나아가고 변화하려 노력할 때 우리의 사법 현실은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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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없는 건축 - 인문학으로 보는 건축의 여러 가지 표정들
남상문 지음 / 현암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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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사전에서 건축물을 찾아보면 땅 위에 지은 구조물 중에서 지붕기둥벽이 있는 건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라고 나온다그러니 지붕 없는 건축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저자는 왜 있을 수 없는 것을 제목으로 삼았을까그는 건축에서 지붕이 경계영역을 한정하는 최초의 조형 요소이므로, ‘지붕이 없다는 것은 건축이 시작되기 이전의 상태라고 책의 서문에서 설명한다그러므로 건축은 지붕 없는 들 위에서 서서 각자의 지붕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이 책은 세상 곳곳에서 사람들이 만든 각자의 지붕이 어떻게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그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 본 글들을 모은 책이다.


스위스의 건축가 페터 춤토르가 설계한 독일 바렌도르프의 클라우스 노지 경당. 통나무를 태운 독특한 냄새가 콘크리트 벽에 배게 해 방문객들에게 강렬한 후각적 심상을 남긴다.

 이미지 출처: https://afasiaarchzine.com/2016/06/peter-zumthor-26/peter-zumthor-bruder-klaus-chapel-mechernich-35/


긴 나뭇조각이 강물 위에 떠다니는 것처럼 박혀 있는 내리막길을 통해, 살아 있는 방문객을 죽음의 공간(납골당)으로 이끄는 스페인의 이구알라다 공동묘지

이미지 출처: https://arquitecturaviva.com/works/cementerio-igualada


장 누벨이 설계한 파리 아랍문화원의 외벽을 뒤덮은 기계 장치. 아라베스크 문양, 피어나는 꽃, 금속 장신구 등 다양한 연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미지 출처: https://www.researchgate.net/figure/Institut-du-Monde-Arabe-Paris-France-Jean-Nouvel-Courtesy-Terri-Boake-University-of_fig8_307671319


  저자가 말하는 건축물들 중에는 창의적인 시도로 삶과 죽음을 돌아보게 하거나 수많은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건축물들이 있다스위스의 건축가 페터 춤토르가 설계한 독일 바렌도르프의 클라우스 노지 경당은 통나무로 거푸집을 만든 뒤 그 안에 콘크리트를 부어 건물 몸체를 만들고, 3주 동안 거푸집이 된 통나무를 불에 태운 건물이다그 덕분에 콘크리트에는 독특한 냄새가 남아방문객들에게 강한 후각적 심상을 남기고 있다소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후각은 잊혔던 기억과 추억을 이끌어내는 삶의 원초적 감각이다클라우스 노지 경당이 삶의 감각을 일깨운다면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이구알라다 고동묘지는 방문객들이 죽음을 묵상하게 한다. ‘삶의 강을 형상화한 내리막길을 따라가다 보면 땅에 정박된 배 모습의 납골당이 나타나고그 옆에는 작은 계곡이 있다방문객들은 내리막길과 계곡을 따라가며 죽은 자의 영토로 인도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프랑스의 건축가 장 누벨이 설계된 파리의 아랍문화원 건물은 카메라 렌즈처럼 움직이는 금속 기계 장치로 뒤덮여 있는데보는 사람들마다 이 장치에서 아라베스크 문양피어나는 꽃차가운 기계문명반짝이는 장신구 등 다양한 것들을 연상한다단순히 비바람을 피하게 해주는 지붕이 아니라삶을 더 생생히 느끼게 하거나 더 깊이 돌아보게 하며마음속의 상상을 이끌어내는 이런 건축이 저자가 생각하는 좋은 건축일 것이다.

 

  반면 비바람을 막아주는 지붕 이상의 역할은 하지 못하는 건축물들이 있다미국의 건축가 로버트 벤투리는 이용하는 사람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건물을 오리와 장식된 헛간으로 분류했다. ‘죽은 오리는 기능에 맞게 모양새를 만들었지만그 형태만 보고는 사람들이 쉽게 그 건물의 의미와 쓰임새를 알 수 없는 건물을 말한다재봉이라는 기능에 최적화된 형태로 만들었지만정작 사람들은 그 집이 재봉사의 집인 것을 알 수 없는 집이 이에 해당된다반면 기능과는 무관하지만 관습적인 기호로 치장한 건물을 장식된 헛간이라고 한다객실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려고 빽빽하게 객실을 배치한 리조트가 겉모습은 낭만적인 지중해풍으로 꾸민 경우를 장식된 헛간의 예로 들 수 있다저자는 지금 우리 도시에 죽은 오리와 장식된 헛간이 넘쳐난다고 말한다그 지역과 장소의 역사적 맥락문화유산가치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자신이 사는 건물의 효율성과 경제적 이익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장소그 지역그 건물만의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린 건축물들로 가득한 도시와 사회저자는 그런 사회가 만들어진 원인을 돌아보며건축을 넘어 사회를 생각한다철근 콘크리트 기법엘리베이터의 개발 등 새로운 기술과 자본은 도시의 모습을 극적으로 바꾸어놓았다기술과 자본이 건축에 혁신을 불러와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믿었던 건축가들도 있었다그러나 경제성과 효율성만을 따지는 합리적인’ 가치관은 모든 공간과 건축물을 경제성과 효율성에 맞는 형태로 평준화획일화시켰다오늘날에는 공공기관과 대형 교회대형 쇼핑몰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다도시 구조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침체된 도시를 활성화시킨다는 의도였던 도시 재생도 부동산 개발 사업자들이 낙후된 지역을 싼값에 샀다 비싼 가격에 되파는 돈벌이 수단이 되어버렸다재건축을 담당하는 관공서의 건축 담당 공무원들은 정작 그 지역의 주민들이 예전부터 그 지역과 관련해 간직하고 있는 그 지역만의 장소성기억가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서 저자는 삶의 의미보편적인 가치가 드러나는 건축을 꿈꾼다온갖 이미지와 취향이 넘쳐나는 시대지만 사람들은 그런 이미지들 속에서 허우적거리며유행에 뒤떨어질까 두려워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저자는 오래자세히 보고 깊이 생각하면서 삶에서 본질적이지 않은 것을 가려내고나만의 개성과 가치삶의 의미를 찾아가라고 이야기한다우리가 건축으로 드러내고 싶은 우리만의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때각자의 지붕들이 각자의 가치와 의미를 되찾을 것이다이 책에 실린 스물다섯 편의 글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주관이 뚜렷하고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분별하는 능력이 뛰어난 저자답게문장도 글 전체도 정갈하다책의 만듦새도 글처럼 정갈해 군더더기가 없다표지와 목차챕터 페이지본문은 쓸데없는 장식 없이 검은 글씨와 선하얀 종이만으로 깔끔하게 구성되어 있다컬러로 된 사진 도판들은 각 챕터의 뒤에 모여 있어 독자들은 텍스트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전공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바꾸어 어렵지 않지만 그렇다고 글의 깊이가 얕은 것은 아니다건축을 넘어 건축이 삶과 세상을 어떻게 반영하고 있고삶과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든다현실을 날카롭게 파악하면서도 이상을 잃지 않는다감성과 이성대중성과 깊이 사이에서도 균형을 잘 잡은그 자체로 좋은 건축물 같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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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9-11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바스티안 2021-09-11 18:1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뷰티풀 젠더
아이리스 고틀립 지음, 노지양 옮김 / 까치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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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배우면서 변화할 수 있다교회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동성애는 옳지 않은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던 내가 변하게 된 계기는대학교 교양 수업에서 동성애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라는 교수님의 질문이었다내가 반대하는 쪽에 손을 들자교수님은 왜 반대하느냐고 물었다내 대답은 동성 친구 간의 감정이 우정인지 사랑인지 혼란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다였다내가 말해놓고도 스스로 너무 터무니없는 답이라고 느꼈다그때 나는 내가 교회에서 동성애와 성소수자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그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했을 뿐정작 동성애와 성소수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때부터 동성애와 성소수자에 대한 책들을 읽으며 공부하기 시작했다동성애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성소수자와 관련된 용어 하나도 좀 더 신중하게 사용하는 사람이 되었다.

 

뷰티풀 젠더는 그렇게 사람들이 배우고 변화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책이다이 책은 다양한 젠더(사회적 성별정신적 성별)에 속하는 사람들의 관점과 그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제그에 관한 쟁점그 밖의 다양한 젠더 관련 지식들을 최대한 많이 담으려고 노력한 책이다저자 자신이 여성에서 남성(본인의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소년’)으로 젠더를 전환한 트랜스젠더이기에한 사람의 트랜스젠더로서의 개인적인 경험도 기록하고 있다이렇게 젠더와 관련해 최대한 다양한 목소리다양한 이야기를 담으려고 한 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젠더를 아무 편견 없이 탐사하고타인의 젠더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고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정말 많다고 느꼈다나름대로 젠더에 대해서 공부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젠더 관련 용어들과 개념들이 생각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복잡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리고 한국인인 나로서는 체감하기 어려운 젠더 관련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한국도 점점 다인종 사회로 변화해 가고 있지만건국 초기부터 다양한 국적과 인종의 이민자들이 모여들었던 미국에서는 인종에서나 성적 지향에서나 소수자가 되는 사람들의 역사가 오래되었다이렇게 한 사람 안의 다양한 요소들이 교차하며 그 사람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을 교차성이라고 하는데미국에서 흑인라틴계 등 백인 이외의 인종들은 젠더와 성적 지향뿐만 아니라 인종이나 경제적 상황에 따른 지위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몇 겹의 차별을 겪게 된다우리는 아직 크게 체감하고 있지 못하지만 미국에서는 오랫동안 고민해 온 문제다대명사 문제도 한국에서 체감하기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이다영어를 비롯한 서구의 언어들과 달리 한국어는 대명사의 성 구분이 거의 없다여성을 지칭하는 대명사 그녀는 보통 글이나 노래 가사에서 주로 쓰이고 실생활에서는 그 애나 그 사람’, ‘그분’ 등 성 구분이 없는 호칭과 대명사를 사용한다대명사 문제에 있어 우리는 젠더 중립적이기 더 쉽지만젠더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언어에서의 이런 이점은 아무 소용이 없어진다이렇게 이 책은 지금 당장 우리가 체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에게도 언젠가 다가올 젠더 관련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그러니 배워야 할 것은 아직도 너무 많다.


『뷰티풀 젠더』 속 텍스트의 내용을 좀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돕는 저자의 일러스트들(한국어판의 이미지를 찾기 쉽지 않아 원서 이미지를 올렸는데, 텍스트가 한국어로 바뀐 것만 빼면 원서의 내지 디자인, 이미지와 같다.)


젠더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을 더 직관적으로 와 닿게 하는 것은 저자의 일러스트다저자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재능을 활용해 풍부하고 다채로운 일러스트들로 텍스트 설명을 뒷받침한다일러스트에서 좀 더 나아가 인포그래픽(정보데이터지식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것)을 활용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간결한 선과 선명한 색감의 일러스트들은 복잡하고 다양한 젠더 이야기를 더 쉽고 명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한다텍스트만 나열되었을 때의 딱딱함과 지루함도 덜어준다이런 일러스트가 이 책만의 개성을 만들어준다.


이 책의 마지막 장저자 자신이 유방 절제 수술을 받으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털어놓는 이야기는 성소수자 당사자의 목소리를 전해준다유방을 절제한 자신의 모습을 찍은 사진들과 그때 자신이 생각하고 느꼈던 것들을 드러낼 수 있는 그녀(저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소년으로 정의하지만 자신을 가리키는 대명사는 그녀로 쓰고 있다고 밝혔다)의 용기에자신의 젠더를 놓고 고민하고 쉽지 않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려보게 된다이런 당사자성 또한 젠더를 다루는 책으로서의 큰 장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책을 읽고 나서도 나는 저자와 나와 다른 젠더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젠더를 내가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는 개념이 머리로는 이해되는데 마음속으로 아직 완전히 납득되지는 않고성 중립적 화장실에 대해 여성들이 갖는 두려움도 간과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하지만 저자는 말한다젠더를 배우는 과정은 끝나지 않고틀려도 괜찮다고하지만 배우려는 의지가 없는 것은 괜찮지 않다고이 책은 이렇게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모르던 것을 알아가고 배워가도록 격려하고어떻게 배우고 행동하면 좋을지 조언하고 제안한다그럼으로써 이 세상의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를 100퍼센트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는 데 작은 도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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