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메르 문자 기행 - 사람을 닮은 캄보디아 문자 덕질기
노성일 지음 / 소장각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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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문자'라고 했을 때 어느 나라의 문자인지 바로 알아챌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바로 캄보디아의 고유 문자이다. 캄보디아라고 하면 앙코르와트, 킬링필드, 범죄 단지 밖의 다른 것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어떻게 크메르 문자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캄보디아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아는 앙코르와트에 직접 가면서부터다. 그는 그래픽 디자이너였기에 앙코르와트의 웅장한 건물과 정교한 조각보다는 거기 새겨진 독특한 글씨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크메르 문자였다.

크메르 문자에 대한 관심은 캄보디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한 문자를 이해하려면 그 문자가 탄생한 배경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크메르 문자와 그에 얽힌 캄보디아의 역사를 한 사람의 삶에 비유해 탄생-성장-죽음-부활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인도 브라흐미 문자에서 파생된 문자로 시작해 기록 문화를 꽃피우다 크메르 루주로 소멸 직전까지 몰렸다 캄보디아 사람들의 노력으로 조금씩 소생하고 있는 과정을. 크메르 루주가 일으킨 대재난으로 국립도서관조차 서가가 휑하고 크메르 문자로 된 책들의 품질도 아직은 조잡하다. '유료 폰트'라는 개념도 캄보디아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리 잡지 않았다. 크메르 문자 자체가 수많은 모음과 자음을 갖고 있는 데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에 따라 형태가 바뀌고, 모음이 자음의 상하좌우 사방에 붙으니 사용하기에 복잡하다. 그래서 캄보디아인들은 크메르 문자로 메시지를 보내기보다는 음성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을 더 편하게 여긴다. 저자도 크메르 문자의 미래가 밝다고 확언하지는 못하지만, 크메르 문자를 지키고 발전시키려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크메르 문자라는 낯선 소재를 저자는 새로운 디자인에 담았다. 저자 자신이 그래픽 디자이너이기에 자신의 이야기에 가장 잘 맞도록 이 책을 직접 디자인한 것이다. 우선 제목, 부제, 저자 이름, 출판사 로고를 넣지 않고 크메르 문자의 첫 글자 하나만으로 화면 전체를 꽉 채운 표지가 눈에 띈다. 그것도 붉은색 하나로 채워진 바탕에 검고 굵은 글씨로 박아놔서 눈에 더 잘 띈다. 뒤표지도 크메르 문자 중 한 글자만 넣었고, 앞표지와 뒤표지의 글씨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ISBN은 책등에, 바코드는 책날개에 넣었다. 챕터 페이지에는 캄보디아의 전통 무용 '압사라'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나 꽃과 열매를 맺고 땅으로 돌아가는 식물 생의 각 단계를 표현하는 동작을 하나씩 넣었다. 크메르 문자의 글자를 하나하나씩 소개하는 부록을 114페이지나 넣었다. 하얀 본문 종이와는 다른 레몬색의 얇은 종이를 쓰고, 크메르 문자의 틀이 되는 선들을 넣어 마치 글자 연습을 하는 노트 같다.

이렇게 한 문자를 깊이 파고드는 책이 시리즈로 나오면 좋겠다. 우리에게 익숙한 한글과 알파벳뿐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나름의 문자 문화를 오랫동안 꽃피워 왔던 문자들을 더 깊이 알고 싶다. 그것들을 더 깊이 탐구한다면 우리와 지리적, 문화적으로 가까운 나라나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강대국에 국한되어 있던 시야를 넓혀 더 많은 나라를 깊이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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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학살 일기 - 가자에서 보낸 85일
아테프 아부 사이프 지음, 백소하 옮김, 팔레스타인평화연대 감수 / 두번째테제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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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1학년 때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에 속한 성지들(동예루살렘, 베들레헴)에 다녀오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개와 사람에 관하여>라는 이스라엘 영화를 보고 분노했다. 2023년 하마스의 공격으로 어머니와 반려견을 잃은 이스라엘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인데, 마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공격을 주고받은 것처럼 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무차별적인 가자 지구 공습으로 수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했고 그중 상당수가 어린이였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병원 시설과 식량을 배급받으러 온 사람들에게까지 공격을 퍼붓고 있다. 유엔 산하의 특별위원회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이 집단 학살과 그 특징이 일치한다고 보고했다. 그렇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다. 집단 학살이다. 『집단 학살 일기』는 지금도 계속되는 이 학살의 시간 중 첫 85일의 기록이다.

저자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문화부 장관이다. 지금은 아내, 자녀들과 함께 서안 지구에서 살고 있지만 고향은 가자 지구이고 부모, 형제, 친척들의 대다수는 거기서 살고 있다. 국제 문화유산의 날 행사 때문에 아들과 함께 가자 지구를 방문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발이 묶였다. 그날부터 이집트로 탈출하기까지 85일 동안, 그는 매일매일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는 위태로운 날들을 보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매일 일기를 쓰고 인터넷이 될 때마다 자신의 일기를 세상에 내보냈다. 그의 일기는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 『가디언』, 『르몽드』 등의 세계 주요 언론에 게재되었고, 단행본으로 정리되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출간되었다. 그래서 한국어로도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아쉽게도 한국어판은 아랍어 원서를 직역한 것이 아니라 영어판을 중역한 것으로 보인다).

2023년 10월부터 가자 지구에서 새로운 아침을 맞았다면, 그것은 전날 밤을 무사히 넘기고 살아남았다는 뜻이었다. 매일 밤 쏟아지는 폭격을 맞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그중 하나가 자신이 될 수 있으니까. 저자가 85일 동안 살아남아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운이었다. 오늘 밤 자고 가라는 친구의 초대를 거절했는데, 그날 밤 친구네 집에 폭격이 떨어져 친구네 가족이 몰살당하고, 방금 전에 만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자리를 떴는데 그 자리에 폭탄이 떨어진다. 자고 일어나면 내 가족이나 친척, 친구 중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보고 듣고 겪었던 것들을 차분히 기록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폭격을 맞은 집의 잔해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치우고 산산조각 난 시신들을 수습하는 일도 집안 대청소를 했던 것처럼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깥세상의 누구도 가자 지구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이스라엘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가자 지구 사람들을 몰아내면서 정작 남쪽으로 간 사람들에게까지 폭격을 퍼붓는 현실에 분노한다. 그러나 그 분노는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 이 현실을 세상에 전하겠다는 사람의 굳은 심지를 불씨 삼아 조용히 타오르는 것이다.

저자는 그렇게 아무런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도 일상을 살아가는 가자 사람들의 모습도 잊지 않고 보여준다. 아이들은 난민촌의 천막 사이에서 뛰어놀고,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어도 숙제를 한다. 젊은 엄마는 학교에 갈 수 없게 된 아이에게 직접 글자를 가르쳐준다. 식량이든 물이든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고, 그것도 자기가 받기 전에 다 떨어질 수 있다. 게다가 식량이나 물을 받으러 갔다가 이스라엘의 공습이나 총격으로 죽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묵묵히 일상을 살아간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가자 지구에서도 서안 지구에서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다 비워내려는 기세로 그들을 죽이고 내쫓아 내고 있으니, 그렇게 가자 지구에 남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일 것이다.

하루라도 조용하고 평온하게 보내고 싶어 휴전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자는 '우리는 늘 휴전 속에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 팔레스타인은 늘 전쟁 속에서, 또는 전쟁과 전쟁 사이에서 살아 왔으니까. 그러다 문득 우리도 늘 휴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고 바라는 휴전이 우리 땅에서는 72년이나 계속되었다. 사실상 종전이라고 할 만큼 긴 시간이었고, 우리는 그동안 전쟁으로 파괴된 것들을 복구하고 전쟁 이전보다도 더 잘사는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도 다시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 몇 년 전의 전쟁으로 파괴된 집을 다시 지었는데 이번 전쟁으로 다시 파괴되어 버려, 사람들은 천막에서 살아간다. 집부터 상하수도, 도로, 가게까지 일상을 지탱해 주는 것들은 복구될 사이도 없이 파괴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작권 수익은 모두 팔레스타인 지원 단체 세 곳에 기부된다니, 이 책을 읽는 것이 그들이 다시 삶을 회복할 기회를 하루라도 더 빨리 얻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P. S. 1. 이 책이 '편향된 책'이라며 별점 테러를 하는 사람을 봤는데 이해하기 어렵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은 그 공격의 수백, 수천, 수만 배의 강도로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고 있다. 아무 무기도 없는 민간인들, 미래 세대의 어린이들을 수만 명 죽이고 병원이나 피난 시설까지 공습하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지원 물자들까지 차단하고 있으니,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말살할 기세다. 국제 사회가 아무리 비난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가자 지구의 상황을 보도하려는 언론인들까지 죽이고 있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도 예수를 메시아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약속의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편을 들 필요가 있나?

P. S. 2. 한국어판이 나와 한국인들에게도 가자 지구의 현실을 알린다는 취지가 좋고, 책의 수익을 팔레스타인 지원 단체에 기부하는 것도 좋다.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각주로 꼼꼼하게 보충 설명해 주어 지금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아쉬운 것은 괄호 안의 설명은 어떤 것이 저자의 설명이고 어떤 것이 번역자나 편집자의 설명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 문장들이 중간중간에 있지 않고, 특히 친족 관계에 있어서 제대로 교열되지 않은 부분들이 보인다. 그런 부분들을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후다'는 장인어른이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큰딸에게 붙여준 이름이라고 했으니(96페이지), 후다는 첫째 딸이고 그러므로 아내의 동생이 아니라 언니다. 그런데도 책에서는 후다를 계속 저자의 '처제'라고 한다. 아내의 언니니 '처형'이 맞다.

-127페이지에서 처형 후다의 남편 하템을 '매부'라고 하는데, 하템은 처형의 남편이므로 '(손윗)동서'가 맞다.

-142페이지에서 여동생 에이샤의 남편 마헤르를 '제부'라고 하는데, 제부는 언니가 동생의 남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이후로는 '매부'라고 맞게 표기하고 있다.

-아버지의 이모 누르를 '고모할머니'라고 하는데 아버지의 이모는 '진이모'나 '이모할머니'로 부르는 게 맞다.

-바로 다음 페이지(470페이지)에서 친구 아흐마드가 4형제 중 막내라고 하는데, 앞 페이지에서 그의 형제 모함메드를 '동생'으로 번역했다.

-470페이지에서 샤우키라는 사람이 '여'동생 에이샤의 '장인'이라고 하는데 '시아버지'가 맞다. 그 이후로는 '시아버지'라고 맞게 표기하지만.

-470페이지에서 작가가 친구인 아흐마드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으로 번역되었다. 바로 앞 페이지에서 저자와 아흐마드가 또래의 소꿉친구였다고 나오는데. 아흐마드의 형인 샤우키와의 대화로 봤을 수도 있지만, 형제 중 유일하게 고향을 떠나려 하지 않는 사람은 아흐마드라고 바로 그 페이지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이곳(가자 지구)을 떠나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 저자에게 여기는 아직 안전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저자 또래의 친구인 막내 아흐마드다.

-478페이지에서 누르 '고모할머니(이것도 '이모할머니'가 맞다)의 아들 아흐메드 '삼촌'이라고 하는데, 아버지의 이모의 아들이면 아버지의 이종사촌, 그러니 오촌이므로 아흐메드 '당숙'이나 '아저씨'가 맞다. 요즘 한국 사람들은 일상에서 당숙도 그냥 '삼촌'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정확히 하자면.

좋은 취지로 만들어진 책이니 교열을 좀 더 꼼꼼히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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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인도
한상호.강성용.김대식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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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동명의 EBS 다큐멘터리를 단행본으로 정리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1년 전, 이 책의 공저자 세 명, 그러니까 다큐멘터리 감독인 한상호 PD와 두 출연자 강성용 교수와 김대식 교수가 진행하는 북토크에 갔었다. 그런데 저자들이 "이 책을 다 읽고 오신 분?"이라고 물었을 때 손을 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사실 나도 새 회사에 적응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이 책의 도입부 몇십 페이지만 읽고 와서 미안했다. 그 뒤로 이런저런 일들에 치여 살다 거의 1년이 지나서야 이 책을 다 읽었다.

1년 전 북토크이지만 책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라기보다는 다큐를 만들면서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는지에 대한 수다에 가까웠다는 것은 기억난다(하긴 다 읽은 독자가 한 명도 안 왔는데 어떻게 책에 대해 깊이 얘기하겠는가). 그리고 한상호 PD가 두 가지를 자랑했던 것이 기억난다. 하나는 한국 최초로 생성형 AI 기술을 다큐멘터리에 활용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가 투입되어 새로운 시각으로 인도를 바라볼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가 단행본에서는 한상호 PD가 기대했던 효과를 이루었을까.

우선 생성형 AI 기술은 종이책에서 눈에 띄는 효과를 내기 어렵기에, 이 책에서도 생성형 AI는 그렇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책에서는 삽화가가 그린 삽화나 재연 배우들이 찍은 재연극 장면 스틸컷을 대체한 AI 이미지들로 나타나는데, 고증은 당연히 맞을 리 없고 미묘하게 기괴한 부분들이 보인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학생의 손가락들이 갈고리 모양이고, 기차에서 내동댕이쳐지는 간디의 옷자락과 두 다리는 나무 뿌리처럼 얽혀 있다. 전쟁터에 나온 말들의 얼굴에는 눈이 이상한 방향으로 붙어 있다. 삽화나 사진에 들일 비용은 절약하면서 얼핏 보기에는 그럴듯한 인도풍 이미지를 만들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불쾌한 골짜기 현상이 일어난다.

인도학자 강성용 교수와 뇌과학자 김대식 교수의 대담이 이 책의 바탕이 되었지만, 단행본에서는 두 사람의 대화는 화두를 던지는 장면 정도만 나오고 나머지 내용은 줄글로 정리되었다. 그런데 김대식 교수가 강성용 교수에게 던지는 질문들은 뇌과학자, 아니, 과학자만이 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니다. 세계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질문이다. 책만으로 보자면 과학자로서의 시선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 단행본으로만 보면 김대식 교수가 참여했다는 것이 그렇게 큰 메리트인 것 같지 않다.

그 두 가지를 특별히 신경 쓰지 않는다면 이 책은 꽤 괜찮은 인도사 입문서다. 고대 인더스 문명부터 현대까지 인도를 이뤄온 것들이 무엇이고 그것들이 어떤 역사를 만들어냈는지 명쾌하게 정리하고 있어, 인도라는 나라의 역사를 쭉 훑어보기에 좋다. 그 덕분에 인도라는 나라를 만들어온 정신과 본질이 어떤 것인지 감을 잡을 수 있다.


아름다운 북 디자인도 이 책의 장점이다. 인도에는 예전부터 관심이 있긴 했지만 나를 홀린 것은 은은한 황금빛의 가네샤 신상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묵직한 적갈색 하드커버 표지였다. 장중하면서도 인도다운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표지에, 본문도 잡지처럼 감각적인 디자인이고 사진 자료도 많아 소장욕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막상 정독해 보니, 같은 장소를 찍은 사진들이 너무 많고 지도는 너무 간략했다. 알고 보니 다큐멘터리에 나온 지도를 그대로 쓴 것인데, 지도에 당시의 주요 도시나 하천, 지형의 이름도 표시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지도나 도표를 좀 더 활용했다면 책의 내용을 좀 더 명확하게 전달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다큐멘터리 영상을 찾아보니 영상보다는 책이 낫다고 생각했다. 머리말에서 극장 안에 두 진행자 강성용 교수, 김대식 교수와 함께 인도사를 빛낸 위인들을 불러모아 대담을 진행한다는 야심찬 발상을 이야기했는데, 실제로 만들어진 결과물은 기대에 못 미쳤다. 인도 위인들의 사진이나 초상화를 객석에 합성했는데, 2차원 이미지의 입과 팔다리만 움직여 마치 종이인형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게다가 인도 위인들의 목소리를 맡은 성우들은 (아마 전문 성우가 아닐 것 같은데) 일반인 같은 발성과 연기를 보여주어 목소리가 위인의 이미지에 붙지 않고 겉돌았다.

게다가 두 진행자가 인도 영화 <RRR>의 주제가 <Naatu Naatu>에서 가져온 듯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데, 중년이고 춤과 연이 없는 두 사람이 추기에는 안무의 난이도가 높았는지 AI로 만든 두 사람의 캐릭터가 춤을 춘다. 그런데 가상 캐릭터에 두 사람의 얼굴만 씌워 놓은 형태인 데다 두 사람이 무한 증식되기까지 하니 기괴해 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BBC와 HBO가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괜히 비싼 돈 들여 실제 배우로 재연극을 찍는 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그 두 곳도 CG로 영상을 보강하겠지만).


AI 이미지들 속에서 불쾌한 골짜기가 불쑥 튀어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책은 정제된 글로 정리되고 아름다운 디자인이 뒷받침해 꽤 괜찮은 교양 역사서가 되었다. 나는 책에서나 다큐에서나 연출자의 의도와 결과 사이 괴리를 느꼈지만, 한상호 PD 본인은 나와 달리 대만족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시도를 참신하고 재미있다고 느끼는 시청자들도 있다. 지금은 좀 어설퍼 보일지 몰라도 의도와 결과를 좁혀가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AI를 점점 더 지혜롭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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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
세스지 지음, 전선영 옮김 / 반타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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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공포 영화는 잘 못 보면서 나폴리탄 괴담은 좋아한다. '나폴리탄 괴담'은 일본의 '공포의 나폴리탄'이라는 괴담에서 유래했는데, 주인공이 일본식 스파게티인 나폴리탄 스파게티를 먹으려고 했는데 그 나폴리탄 스파게티의 정체를 알아채고 공포에 휩싸였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정작 그 정체가 무엇인지는 끝까지 밝히지 않는다. 이렇게 나폴리탄 괴담은 무엇인가를 굉장히 미스터리하고 공포스러운 존재로 묘사하지만, 정작 그것의 정체는 확실히 밝히지 않는다. 누락된 정보 때문에 그 존재는 듣는 사람의 상상 속에서 더욱 불가사의하고 무시무시한 존재가 된다.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보다 더 큰 공포를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우리의 상상력일지도 모른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도 정보를 일부러 누락시킴으로써 더 큰 공포를 불러오는 전략을 사용한다. 한 사람의 시점으로 이야기를 쭉 이어나가는 보통의 소설들과 달리, 이 소설은 일본의 긴키 지역(수도였던 교토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옛 수도권 지역)에서 일어나는 괴이한 현상들에 대한 온갖 (가상의) 자료들을 모아놓은 모습이다. 공포 전문 잡지 기사와 인터뷰 녹취 기록, 인터넷 게시판에서 그대로 긁어 온 글과 댓글까지 자료의 출처나 형식도 다양하고 시점도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그렇기에 진상은 직선적인 스토리라인을 따라 밝혀지지 않는다. 각 자료에 담긴 단서들이 퍼즐 조각처럼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져 간다. 퍼즐이 완성되기 전에 어떤 진상이 숨겨져 있는지 알기 어렵기에 더 공포스럽다.

또 하나 공포감을 더하는 것은 긴키 지방이 우리에게 낯선 지역이라는 것이다. 작가는 긴키 지방이 자신이 사는 곳이라 이야기를 상상하기 쉬웠고, 이 지방 사람이 아닌 사람들도 수학여행으로 한 번은 와봤을 곳이기에 친숙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괴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곳도 주택가나 노래방, 회사처럼 일상적인 곳이기에 공포가 일상으로 파고드는 것을 노렸을 것이다. 번역가는 일본에 자주 여행을 간 한국인에게도 긴키 지방은 친숙할 것이기에 작가의 이러한 전략이 유효할 것이라고 본다. 반면 '긴키'라는 지역명을 이 책으로 처음 들을 정도로 일본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나에게 긴키 지방은 낯선 곳이다. 일본은 한국보다 더 덥고 습하고, 더 무성하고 깊은 숲과 산으로 가득하다. 게다가 원한이 풀리면 천도되는 한국의 귀신과 달리, 일본의 귀신은 아무나 자기 영역에 들어오면 해쳐서 희생자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이런 일본 괴담 특유의 밑도 끝도 없는 악의가 낯설고 무섭다. 『긴키 지방의 어느 장소에 대하여』의 귀신들도 이런 무차별적인 악의를 퍼뜨리는 존재들이기에 이해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 없어 더 두렵다.

하지만 소설이기에 진상은 결국 밝혀질 수밖에 없다. 결말까지 오면서 커진 공포감은, 결말에서 진상을 알고 나면 그 모든 재앙의 원인이 너무 하찮아 식는다. 이 책을 다 읽은 날 밤 이상하게도 바람이 유난히 세게 불어 더 무서웠는데, 이 책 속 만악의 근원이 된 존재를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 무서운 마음이 가셨다. 세상에 결혼 못 한 게 자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안 만나주는 여자들을 죽인 놈 달래준다고 신사까지 세워줬는데. 몇십 년 동안 제물도 받아 먹고 죄 없는 여자들도 홀려서 신부로 데려와 놓고선, 이제 자기를 잊어버리고 제사를 안 지내준다고 저주를 퍼뜨린다. 그렇게 여자들을 많이 홀리고도 만족을 못 하는지 남녀가 결혼하고 뭘 하는지도 모르는 초등학생 여자애를 납치해 '신부'로 삼는다. 이런 치졸하고 추잡한 귀신을 봤나. 이 책을 읽고 밤에 무섭다면 책 속 귀신의 하찮음을 생각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그래도 결말까지 조각난 단서들이 서서히 맞춰지면서 그 사이의 공백을 독자 스스로 상상으로 메꿔 가면서 공포를 키워가게 유도하는 실력이 뛰어나다. 그리고 책을 읽고 나서도 끈적끈적한 악의가 읽는 나에게서도 떨어지지 않는 듯하다. 본문 뒤에 실린 (가상의) 문서, 사진들은 어떤 것은 현실감이 있어서, 어떤 것은 조악해서 오히려 더 불쾌감과 공포감을 일으킨다. 이 책이 곁에 있는 것 자체가 꺼림칙하게 느껴질 정도다. 여러모로 영리하게 공포를 만들어내는 책이다.

읽어주셔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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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현지 쇼핑 대백과
오가와 지에코 지음, 김정원 옮김 / 클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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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해외여행을 가지 못하고 있다가 작년 12월에 대만에 다녀왔다. 중국어도 영어도 잘 못하지만 혼자 여행을 다녀온 이후로는 다른 나라들에도 도전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여행 서적들을 예전보다 많이 찾게 되었다. 여행 서적들은 외국의 갖가지 풍경과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 예쁜 물건들의 사진과 그에 대한 이야기를 가득 싣고 있어 읽는 것만으로 기분 전환이 된다. 이 책은 기분 전환할 겸, 대만 여행을 곱씹어 볼 겸 도서관에서 빌렸다. 나중에 또 대만에 갈 때 뭘 사면 좋을지 참고할 수 있고.

이 책은 클의 'ㅁㅁ 대백과' 시리즈 중 한 권이고, 이 대백과 시리즈는 도감과 시각예술 관련 책들을 주로 내는 일본의 출판사 타츠미 사의 도감들을 번역 출간한 것이다. 대만에서 살며 대만 요리를 연구하는 일본의 요리 연구가가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요리 연구가이다 보니 간식, 음료, 식재료, 조미료, 주방에 쓰이는 각종 도구와 생활용품 125가지를 소개하고 있고, 대만 요리 몇 가지의 레시피도 함께 실었다.


『대만 현지 쇼핑 대백과』의 본문

'대백과'라고 하기에는 200페이지도 안 되는 얇은 책이지만 알면 좋은 정보들을 차곡차곡 압축해 알차다. 소개하는 상품 이름은 중국어 발음과 한자 표기를 함께 써놓았고, 현지에서 주문하기 좋게 성조도 붙여놓았다. 중국어 성조를 잘 모르는 독자를 위해 노래에서의 음의 변화에 비유해 네 가지 성조를 설명했다(외국어 액센트에 약한 나는 그렇게 설명해도 잘 안되긴 하지만). 가게 이름도 중국어 발음과 한자 표기를 함께 표시했고, 위치는 QR 코드로 연결해 놨는데, 지금까지는 다 잘 연결된다. 구글 지도에서 리뷰를 보니 한국인 리뷰가 없거나 적은 곳이 많다. 저자가 일본인이라 일본인들의 입맛과 취향에 맞는 곳들을 선정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한국인들이 잘 모르던 보석 같은 곳을 발견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가게와 상품에 대한 설명은 한 페이지(상품 사진이 페이지의 반을 차지하니 사실상 반 페이지)씩이지만 필요한 정보는 다 들어 있고 맛과 모양에 대한 묘사도 꽤 생생하다. 책 자체의 디자인은 잡지처럼 세련되고 감각적이고 음식과 물건 사진들도 예뻐서 책으로 아이쇼핑하는 기분이다. 내가 대만을 여행할 때 가보지 못한 곳들을 책으로 둘러보는 기분이었다.

원서에 적힌 정보들은 2024년 7월 기준인데, 한국어판 출판사 편집부에서 출간 시점(2025년 3월)에 맞춰 정보를 수정했다고 한다. 한국에 반입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면세 기준 등 한국에 올 때 주의할 점도 본문 앞에 부록으로 넣어놨다. 여러모로 세심하게 만든 책이다. 대만에 가기 전에 예습용으로, 대만을 여행할 때 쇼핑 가이드로, 대만에 갔다 와서 복습용으로 쓰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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