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 - 식민지 조선을 위로한 8가지 디저트
박현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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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마음을 끈다. 우리에게 아픈 역사인 일제 강점기를 흥밋거리로 소비하지 않을까 스스로 경계하지만, 일제 강점기의 일상생활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어두운 시기에도 사람들은 우리와 비슷한 일상을 살았다는 것이 신기해서이다.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처럼 지금 사용하는 현대식 문물을 그때도 사용했고, 맛집을 찾고 디저트도 즐겼다는 것이. 어두운 시기에 빛을 찾기 위해 싸우면서도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을 충실히 살아갔다. 작가는 전작 『경성 맛집 산책』에서 일제 강점기 당시 경성에 있었던 열 곳의 맛집을 다루었는데, 이 책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사람들이 즐겼던 디저트 여덟 가지를 다룬다. 그중 라무네와 관련된 이야기를 청량음료 전반에 대한 이야기로 본다면 여덟 가지 디저트 모두 지금의 우리도 즐기는 것들이다. 그 디저트들을 통해 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사람들과 이어진다.

저자는 일제 강점기의 소설과 신문, 잡지 기사 들에서 각 디저트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찾아내어 그와 관련된 당시의 생활상을 재구성한다. 디저트 자체의 기원과 변천 과정도 짤막하게 소개하면서 그것이 우리나라에 어떻게 들어왔고 일제 강점기에는 어떻게 소비되었고 어떤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였는지, 그것이 사회적, 경제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고찰해 본다. 이렇게 디저트를 통해서도 일제 강점기는 더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우리 앞에 떠오른다.

많은 한국인들이 매일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긴다. 이 책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때 사람들은 커피의 맛보다는 커피를 마시면서 누리는 여유를 더 즐겼던 것 같다. 1926년 중앙일보에 실린 '커피 맛있게 끓이는 법'에서는 커피를 30분이나 달이라고 하니, 커피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도무지 맛있게 끓여지지 않을 것 같은 레시피다. 다방 커피에서는 밍숭맹숭해서 맹물 같은 맛이 난다는 기록도 있고. 그러나 다방은 자기 꿈을 자유롭게 펼칠 수 없는 시대에 '고독한 꿈이 다른 꿈들과 위로를 나누었던' 공간이 되어주었으니, 커피 그 자체보다는 커피가 만들어주는 만남의 기회가 당시 사람들에게 더 따뜻하고 부드러웠을 것 같다.

지금도 전철역에 갈 때마다 고소하고 달콤한 델리만쥬 냄새가 풍겨 온다. 사실 부드러운 밀가루 반죽에 커스터드를 넣은 델리만쥬보다는, 버석버석한 빵 안에 밤소를 넣은 밤만쥬나 팥 앙금을 넣은 각 지역별 특산품 'ㅇㅇ빵'이 일본에서 전해진 디저트 만주의 원형에 가깝다. 일제 강점기에 사람들이 먹었던 만주도 그쪽에 더 가까운 형태였다. 안 그래도 발음이 비슷한 만주와 만두의 관계가 궁금했는데, 한중일 만두의 역사를 통해 그 궁금중을 풀 수 있었다. 한편 추운 겨울밤에 만주를 팔아 학비를 마련하다, 굶주림에 지쳐 만주를 훔치려던 사람에게 살해당한 고학생의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의 신산한 삶을 보여주어 독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멜론은 지금은 그렇게 귀한 과일이 아니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과일의 왕 대접을 받던 과일이었다. 작가 안석영은 1934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 「남양에서 굴러온 사생아」에서 이국의 과일을 먹고 즐기는 것이 조선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못마땅해했지만, 오히려 그의 글에서 당시 사람들이 멜론으로 상징되는 열대 지방에 품은 동경을 읽어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사람들이 참외보다 더 달고 부드럽고 이국적인 멜론에 끌리고, 참외도 더 달고 맛있는 품종으로 개량되고 획일화되어 가는 모습에서 사람들의 욕망을 채우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수십 년 전 과일 하나를 소비하는 양상에서도 자본주의가 일제 강점기에 어떻게 작동했는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호떡은 중국을 나타내는 '호(胡)'가 이름에 붙어 있는 것부터 중국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이 책에서 확인했다. 그런데 호떡의 전신으로 보이는 '후빙胡餠'은 대만의 야시장들에서 파는 후추빵이나 그것을 벤치마킹한 인천 차이나타운의 화덕만두처럼 화덕 안쪽에 붙여서 구워내는 빵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왜, 어떻게 기름을 두르고 지져내는 빵으로 변형되었는지 궁금하다. 아쉽지만 저자가 그에 대해서는 연구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호떡집이 성황을 이루었으면서도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중국인들은 불결하고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물건도 불결하고 부실해 품질이 좋지 않다는 인식) 때문에 사람들이 호떡집에 가서 호떡 사 먹는 것을 부끄러워했다는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저자는 여기서 원래 아시아의 중심이었던 중국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씌워 아시아에 대한 침탈을 정당화하는 일본의 의도가 작용한다고 본다. 그때도 지금도 흔히 먹는 호떡에도 제국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라무네는 일제 강점기 당시에도 지금도 일본에서 생산되는 레몬맛 청량음료다. 나는 라무네를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지만 라무네는 유리구슬이 마개 역할을 하는 특이한 병 때문에 지금도 인기가 많은가 보다. 사실 이 유리구슬 병마개는 영국에서 고안된 것이라 일본 고유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도 라무네를 대표하는 이미지인 것은 분명하다. 이효석이 소설 『들』에서 푸른 하늘을 우러르다 푸르게 물든 두 눈을 라무네 병의 유리구슬에 비유한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라무네의 이미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라무네를 비롯한 청량음료가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물보다 위생적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의 근대 문명에 대한 동경을 엿볼 수 있다.

초콜릿이 연애의 상징이 된 것은 일본 회사들의 상술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19세기 말 영국의 제과회사에서 이미 밸런타인데이 선물 용도로 초콜릿을 판매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한국에서 초콜릿이 연인의 마음을 전달하는 선물이 된 것은 1960년대 일본 제과 회사들의 영향이라고는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쓰인 소설들에서도 초콜릿은 연애 감정을 품은 상대를 유혹하는 수단으로 등장하고, '연애사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까지 한다. 1929년 『동아일보』에 실린 메이지제과의 초콜릿 광고에도 초콜릿은 연인들이 함께 먹는 디저트로 나온다. 일제 강점기 사람들도 초콜릿의 달콤한 맛과 부드러운 감촉에서 연애의 달콤함을 떠올렸다는 데서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한편 당을 건강의 적으로 보는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몸을 건강하게 하는 영양소로, 부와 문명의 상징으로 보았기 때문에 더 달콤한 초콜릿이 한과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어린 시절에 드럼통에 고구마를 구워 파는 고구마 장수들을 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편의점에서 군고구마를 판다. 일제 강점기에도 군고구마는 흔히 먹는 간식이기에 어디에나 군고구마 장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 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김동인의 소설 제목 「감자」가 사실은 감자가 아니라 고구마였다는 것이다. 김동인은 1941년에 쓴 문학 평론에서 자신의 고향인 평양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고 부른다며 자신이 집필할 때 주인공 복녀가 훔친 것은 감자가 아니라 고구마였다고 밝혔다. 자신이 생각한 것은 고구마였다고 밝힌 것은 그만큼 소설의 '감자'를 고구마가 아닌 감자로 받아들인 독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소설 속 감자를 '고구마'로 고치지 않았다. 저자는 김동인이 주인공 복녀가 몰락한 이유를 빈곤이 아니라 그릇된 성적 욕망으로 보았기에 구황작물인 감자가 아니라, 당시에도 간식으로 여겼던 고구마로 소재를 설정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반면 나는 김동인 자신도 복녀 자신의 절박한 처지를 보여주기에는 고구마보다는 감자가 더 어울린다고 느꼈기에 '감자'로 놔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복녀 개인의 성적 타락이라고 보기에는 그녀가 처한 경제적, 사회적 상황이 너무나 열악했다.

일제 강점기 사람들도 여름에는 빙수를 즐겼다. 일본의 가키고리처럼 얼음에 시럽만 끼얹는 단순한 형태였는데도 사람들은 빙수를 즐기며 어느 집에서 빙수를 잘 만드는지도 이야기했다. 맛있는 빙수의 조건은 얼음이 얼마나 곱게 갈렸는지, 얼음 위에 시럽을 얼마나 많이 뿌렸는지였다. 눈처럼 곱게 갈린 우유 얼음 위에 각종 토핑을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지금의 빙수 전문점 빙수들을 보면 일제 강점기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하다. '빙수' 챕터 뒤의 '더 읽을거리' 코너에서는 잡지 『별건곤』의 「20전(지금의 한화로는 약 만 원)으로 피서하는 법」이라는 1928년 특집 기사를 소개한다. 편집국장이 그해 여름에 갑자기 기자들에게 20전씩 주면서 20전으로 피서하는 방법을 알아내라고 지시해서 나온 기사라는 데서, 당시 직장인들의 고충을 알 수 있다. 빙수를 사 먹는 것뿐만 아니라 계곡에 들어가 앉아 과일을 먹는 것, 냉방이 잘되는 공공도서관에 가는 것은 지금에도 할 수 있는 피서법이라 과거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되는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일제 강점기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디저트를 즐기고 남겼던 기록을 통해 그들을 만나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얼마 전에 본 뮤지컬은 1980년대의 대학생인 남주인공이 어느 오래된 책방의 낡은 책 한 권을 통해 1940년대의 책방 주인인 여주인공과 소통하는 이야기였는데, 그 뮤지컬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그들이 즐겼던 디저트가 지금은 어떤 모습이고 어떤 맛인지 보여주고 맛보이고 싶기도 하다. 또 이 시대는 이 시대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지만 그때보다는 더 편안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디저트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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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의 클래식 - 우리는 고전음악에서 무엇을 듣는가
이영록 지음 / 아트레이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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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을 특별히 좋아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클래식 음악을 소재로 한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는 재밌게 봤고 사회평론의 클래식 관련 교양서 『난생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좋아한다. 드라마를 본다고 클래식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지는 않고, 『난생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는 음악가 한 사람 한 사람을 중심으로 그의 음악 세계를 대략적으로 훑어본다. 그래서 음과 선율, 화성, 리듬 같은 클래식 음악의 기본 요소부터 클래식 곡의 구조와 형식까지 하나하나 분석해서 살펴본다는 이 책이 클래식 음악 자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문제는 '어느 정도 초보 단계는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가 이 책의 타깃인데, 그것을 간과한 것이다. 읽으면서 깨달았다. 나는 내가 뭐를 모르는지도 모르는 초보였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얻은 것은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책 전체의 대략적인 내용은 이해했다. 그러나 작가가 공대 출신답게 과학에 근거해서 설명한 배음의 원리는 이해하지 못했다. 화음은 초중고등학교 때 음악 시간에 배운 것과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배울 때 익힌 코드 개념을 더듬어보고, 직접 오선지에 음들을 그려가며 겨우 이해했다. 템포의 경우 ♩=120로 연주하는 것과 ♩=124로 연주하는 것, ♩=128로 연주하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 내 귀로는 구별이 안 된다. 그래도 같은 곡인데도 연주자나 지휘자에 따라 빠르기도 그에 따른 느낌도 다른 것은 QR 코드로 실린 연주들을 듣고 실감하게 되었다. 악보를 읽을 줄은 알고, 악보에 어디가 몇째 마디인지 군데군데 표시도 되어 있고 저자도 악보에서 유의해서 들어야 할 부분은 표시해 놨지만 두세 페이지에 걸친 긴 악보에서는 지금 어디를 연주하는지 헷갈린다. 클래식 음악을 기본 요소로 쪼개고 비유와 악보, QR 코드의 음원의 힘을 빌려 직관적으로 설명하기는 하지만, 이 책은 확실히 중급 클래식 애호가들을 위한 책이다. 클래식 동호회에서 수년 동안 활동해 어느 정도 연차가 쌓인 회원들. 나는 동호회원조차 아니고, 음악은 틀고 싶은데 가사가 없어 집중에 방해가 되지 않는 음악이 필요할 때만 클래식 음악을 찾으니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할 내공이 없다.

그래도 나 같은 초보도 대략적인 내용만 이해해도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데 기초는 다질 수 있다. 한없이 어려워 보이는 클래식 음악은 사실 음과 리듬, 화성이라는 재료를 나름의 규칙과 작곡가의 상상력에 따라 조합하고 변형하며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마치 블록을 쌓는 것 같은데 어떻게 쌓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건물이 되는 것과 같다. 아주 단순한 주제가 반복과 변주를 거쳐 하나의 곡을 이루어가는 과정을 즐길 수 있다면 클래식 음악을 더 깊이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게 됐다는 점에서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나 같은 초보에게도 이 책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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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7 18: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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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8 21: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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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09 00: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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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5-17 19: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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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모크 & 피클스 - 이균 셰프가 그리는 음식과 인생 이야기
에드워드 리 지음, 정연주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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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요리사>는 보지 않았지만 준우승자인 에드워드 리는 여기저기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미담이었다. 그래서 호감이 가긴 했지만, 그에 대한 호감보다는 낯선 것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이 책을 읽었다. 한국 전통 요리와 미국 남부 요리를 결합했다는 그의 요리 세계에서 내가 궁금한 쪽은 미국 남부 요리였으니까. 풍성한 재료로 만들어낸 푸짐하고 기름지고 자극적인 음식들. 그것이 내 머릿속 미국 남부 요리의 이미지였다. 거기에 한국 전통 요리를 어떻게 접목시키고 재해석했을지도 궁금했다. 그래서 평소에는 요리책을 읽는 일이 거의 없는데도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에드워드 리는 <흑백요리> 준결승 경연 당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담은 요리로 참치비빔밥을 내놓으며, 스스로가 '비빔 인간'이라고 했다고 한다.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뒤섞여 있는 인간. 그는 이 책에서도 미국의 가장 멋진 점은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두 가지 정체성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어울리고 좋은 부분들을 조립해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그런 그의 선택은 이 책에 실린 요리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이 책에 실린 요리들은 냄비밥, 사계절별 김치, 갈비구이 같은 몇 가지 음식을 제외하면, 미국 남부를 베이스로 하고 동남아시아의 풍미와 한국의 향수를 섞은 요리다. 양고기 프로슈토 하나를 만들겠다고 냉장고 하나를 고기 염지하는 데만 쓰라니! 그것도 66일이나! 거기에 레드불(그러면 박카스나 비타 500도 요리 재료로 쓸 수 있나)도 담배(정확히는 담뱃잎)도 재료로 쓴다니 한국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방대한 스케일에 대담한 레시피다. 여기서 그의 정체성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미국인이라고 느꼈다. 당연하다. 핏줄은 한국인이라도 그는 한 살 이후로 쭉 미국에서 살아왔고, 아내도 미국 남부 출신이고 방황하던 시절에 그를 받아준 곳도 미국 남부였으니.

그래서 한국 독자들로서는 치명적인 이 책의 약점은 이 책에 실린 요리들의 재료를 구하기도, 따라 만들기도 어렵다는 것이다. 한국인 독자로서 재료를 구하기도 만들기도 쉬운 것은 가장 처음 나온 요리인 냄비밥과 겨울 김치로 소개된 김장 김치, 그의 어머니에게서 전수받았다는 갈비구이뿐. 이 책에 실린 레시피들을 보고 나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제게는 버번 위스키로 가득 찬 부엌 찬장도, 육질 좋은 양고기와 신선한 버터밀크(우유에서 버터를 만들고 남은 액체)를 공급해 줄 이웃 농장도 없답니다, 셰프님. 다만 젓갈의 대안으로 제시하셨던 피시소스 말고 진짜 젓갈은 있어서 김장 김치에 넣을 수 있어요. 하지만 나는 이 책에 실린 요리들을 따라서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새롭고 독특한 음식들을 만나고 싶어서 이 책을 읽은 것이니 내게는 그것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직접 만들지는 못하더라도 레시피와 음식 사진을 보고 맛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이 책에 실린 모든 디저트에는 버터밀크가 들어가는데 버터밀크를 넣으면 도대체 어떤 맛이 나는 걸까. 그가 버터밀크 못지않게 사랑하는 버번 위스키를 넣은 음식들에서는 어떤 풍미가 나는 걸까. 이런 상상들.

낯선 음식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에드워드 리의 글을 읽는 것도 이 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이 책은 재료별로 각 챕터가 나누어져 있는데, 각 챕터는 각 재료에 대한 그의 에세이로 시작된다. 그는 영문과(우리로 치면 국문과) 출신답게 각 재료에 얽힌 자신의 인생 여정과 신념을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나간다. 그의 삶도, 요리, 가족, 한국과 미국 남부 두 곳에 대한 사랑도, 요리의 재료가 되어주는 동물들에 대한 존중도 그의 글들 속에 담겨 있다. 에세이뿐 아니라 레시피를 소개하는 짧은 글에서도, 때로는 레시피에서도 그의 요리를 향한 애정과 유머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잘 쓴 여행 안내서는 한 지역의 지리지가 될 수 있다고 했는데, 잘 쓴 요리책은 그 책을 쓴 요리사의 자서전이 될 수 있다(미국 남부의 농장과 사냥하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꽤 디테일하고 생생해 미국 남부의 지리지로 볼 수도 있다). 요리책으로서의 실용성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떨어질지 몰라도, 에드워드 리라는 사람과 그를 만들어낸 것들을 더 깊이 만나게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P. S. '전화를 바로 받는 여자는 섹시하지 않다'는 문장에서 나쁜 남자의 향기를 느꼈다. 그 문장을 읽고 생각했다. 짝남의 카톡에 실시간으로 대답하는 버릇을 고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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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3회 나오키상 수상작
히가시야마 아키라 지음, 민경욱 옮김 / 해피북스투유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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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책에서의 등장인물 이름 표기가 중국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와 다르다. 현행 중국어 표기법이 실제 중국어 발음과 차이가 있다는 의견도 있지만 우선은 중국어 표기법에 따른 등장인물들의 인명 표기도 정리해 놓는다. 서평에서의 등장인물 이름은 중국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했다.


한자 표기

책에서의 표기

중국어 표기법에

따른 표기

葉秋生

예치우성

예추성

趙戰雄

자오잔숑

자오잔슝

葉明泉

예밍첸

예밍취안

許宇文/葉宇文

슈위우원/예위우원

쉬위원/예위원

高應翔

가오잉썅

가오잉샹

曲宏彰

취홍장

취훙장

王文明

왕우원밍

왕원밍

余元介

위옌지에

위위안지에

夏美玲

시야메이링

샤메이링

馬大軍

마다준

마다쥔

許二虎

슈알후

쉬얼후

王覺

왕쥬에

왕쥐에


이 소설은 대만의 근현대사를 소재로 하고 있고 주요 인물들이 대만인이나 중국인이다. 하지만 대만 소설이 아니라 일본 소설이다. 대만인이었던 작가가 다섯 살까지는 대만에서 살다 그 이후로는 쭉 일본에서 살며 활동했기 때문이다. '히가시야마 아키라'라는 일본식 이름도 필명이다. 원래 대만인이었지만 현재는 일본인으로 사는 작가가 일본어로 이 작품을 썼다는 것이 이 소설만의 독특한 성격을 만들어냈다.

광대한 영토에서 장대한 역사를 거쳐와서인지 중국어권 소설들에서는 특유의 호방한 기세가 느껴진다. 워낙 험한 역사를 겪어왔기 때문에 웬만한 일은 눈도 깜빡하지 않고 훌훌 털어버리는 대인의 풍모라고 할까. 그런데 이런 대륙적인 느낌이 가벼운 일본식 문체와 만나면서 무게감이 떨어진다. 번역 후기만 빼도 470여 페이지에 이르는 소설로 적지 않은 분량이다. 단순히 분량만 많은 것이 아니라 서사와 거기에 실린 메시지의 무게가 꽤나 묵직하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묘사도 탄탄한데, 이상하게 가볍고 밀도가 떨어진다. 주인공의 치기 어린 10대와 20대 시절을 주로 다루고 있는데, 그때의 감성을 일본 청춘물처럼 그려서일까.

'일본이라는 필터를 거쳤다'는 느낌은 일본식 문체 때문만이 아니다. 작가가 일본인 독자나 평단의 눈치를 본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대만의 근현대사는 백 년이 넘도록 대만을 식민 지배했던 일본과 떼어놓을 수 없는데, 이 책의 주요 독자는 일본인들이다. 그러니 역사 문제에 있어서 작가는 과거의 잘잘못을 분명히 가리기보다는 한 걸음 물러선다.

이 책의 중심 줄기는 주인공이 할아버지를 살해한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인데, 살해 동기는 대만과 중국의 근현대사와 밀접하게 얽혀 있었다. 수십 년 전 할아버지가 처단한 친일파 일가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들이 범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할아버지의 동지 쉬얼후의 아들이라고 정체를 속이고 할아버지의 양자가 되었다. 그런 뒤 수십 년 동안 원수를 갚을 기회를 노리다 결국 할아버지를 죽였다. 이 충격적인 진실이 드러나는 부분이 이 소설의 클라이막스다. 주인공은 친삼촌처럼 여겼던 사람이 할아버지를 죽인 진범이라는 것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배신감을 느끼고, 범인은 원수의 핏줄인 주인공을 죽여야 할지 말지 갈등한다. 결국 가족으로 수십 년을 함께 살면서 쌓아온 사랑 때문에 주인공과 범인은 과거를 덮어두고 서로를 용서한다.

화해와 용서로 끝나는 결말에 감동을 받은 독자도, 평론가도 물론 있을 것이다.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친일파이든 반일파이든 서로 죽고 죽인 건 똑같다, 그럼에도 모든 원한을 끌어안는 사랑이 있었다는 것이 작가가 남기는 메시지일 것이고, 그 점이 일본 독자와 평단의 감동과 호평을 이끌어냈을지 모른다. 하지만 대만이나 중국처럼 일본의 제국주의적 폭력에 피해를 입은 나라 국민의 입장으로서는 찜찜하다. 사실 자신이 놓인 입장에서 선악을 판단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역사에서의 과오와 책임은 확실히 따져야 하지 않겠는가. 소설에서 범인도, 범인처럼 주인공 할아버지의 손에 친일파였던 가족을 잃은 사람들도 자기 가족의 친일 행적은 반성하지 않는다. 범인은 아버지가 일본인인 아내를 사랑해서 버릴 수 없었던 것뿐이라며, 자기 아버지가 친일파로서 동포들과 이웃들을 착취하고 해친 것은 조금도 반성하지 않는다. 자신이 원수를 갚는 과정에서 할아버지의 동지 쉬얼후 일가를 죽인 것에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가 죽인 사람 중에는 열두 살 어린 소년인 진짜 쉬위원(게다가 범인은 수십 년 동안 자신이 죽인 그의 이름으로 살아왔다)과 그보다 더 어린 여동생들도 았었는데도. 오히려 할아버지가 자기 가족을 죽인 것을 반성하고 후회했을 거라고 말하는 태도는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할아버지는 친일파를 처단한 것에는 한 점 후회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살생은 살생이니 자신이 그의 손에 죽는 것은 업보라고 생각했겠지). 온 가족을 잃은 원한이 깊겠지만, 자기가 죽인 쉬얼후 일가와 자기 아버지에게 핍박당한 사람들의 원한은 어떻겠는가. '왜 자기들끼리 흘려보내기로 결정하는지 모르겠다'는 어느 한국 독자의 평은 역사에 대한 반성 없이 사랑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결말에 대한 반감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소설이 수십 년의 세월과 대만, 중국 본토, 일본 세 나라에 걸친 장대한 서사를 펼치며, 파란만장한 대만 근현대사를 압축하며 평범한 대만 사람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과 열대 지역을 섞은 듯한 대만만의 독특한 분위기는 텍스트만으로도 느껴진다. 이러한 장점들 덕분에 이 상은 심사위원 전원의 만장일치로 나오키상 대상에 선정되고 "몇십 년 만에 한 번 나올 만한 위대한 걸작"이라는 찬사를 들었을 것이다. 일본의 과오는 묻지 않아 일본 독자와 평단은 껄끄럽지 않았겠지만 한국 독자로서는 껄끄럽다. 그리고 주인공이 진범을 알아채는 과정에서의 논리적 비약처럼 설익은 부분도 보인다. 대만에 관심이 많은 독자로서는 대만의 근현대사를 훑어보면서 그 속에서 살아갔던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보는 것은 흥미로웠지만, 나오키상 심사위원들이 보냈던 극찬을 보내기는 힘들다. 대만도 백 년이 넘게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았기에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친일 성향이 강하기는 하지만, 일본어, 일본 문학이라는 필터를 거치지 않은 대만 작가의 작품이었으면 어땠을까 한다.

P. S. 주인공의 친구 자오잔슝이 모시는 조폭 두목 가오잉샹은 대만 사투리(대만에서는 표준 중국어와 대만어를 모두 사용한다)를 쓰는 인물이다. 한국어판에서는 그의 대만 사투리가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사투리가 다 섞여 있는 지역 불명의 사투리로 번역됐다. 베이스는 전라도 사투리인 것 같은데, 번역자가 전라도 사투리로 번역하려 했지만 전라도 사투리에 익숙하지 않아 이렇게 된 것인지, 특정 지역에 대한 비하로 느껴지지 않게 하려고 일부러 여러 지역의 사투리를 뒤섞어 이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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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 정벌 -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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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만큼이나 두꺼운 책을 '벽돌책'이라고들 한다. 내 기준으로 6, 700페이지대인 책은 페이지가 좀 많은 정도이고 900페이지는 되어야 벽돌책이다. 벽돌책은 완독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데, 정말 오랜만에 도전해 보고 싶은 벽돌책을 발견했다. 그 책이 『상나라 정벌』이었다. 제목처럼 역사적으로 증명된 중국 최초의 국가인 상나라가 주나라의 역성 혁명으로 정벌되는 역사를 다룬 책이다. 역사를 좋아하는 데다 역사 중에서도 근현대사보다는 고대사에 더 끌리는데, 고대사를 9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니. 탐스러운 읽을거리였다.

그런데 나 말고도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분량부터 압도적인 이 책의 판매량과 화제성이 높은 것은, 고어물에 가까울 정도로 잔혹한 상나라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상나라는 인신 공양을 하던 나라였다. 왕이 하늘에 바치는 제사부터 새 집을 짓고 나서 집이 튼튼하길 기원하는 제사까지, 상나라 사람들은 크고 작은 제사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상나라 유적에서 사지가 동강 나고 이리저리 뒤틀린 해골들만 보아도 제물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나라 사람들이 쓰던 청동 찜솥에서는 귀족 소녀의 머리뼈가 발견되었다. 치아의 상태로 보아서는 고기를 자주 먹던 상류층 사람인데도 인간 제물이 되고 같은 인간에게 잡아먹히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 모든 잔혹한 일들을 덤덤하게 설명한다. 인간 제물이나 동물 제물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는 듯이. 그럼에도 저자의 이야기와 그 증거로 제시된 사진들은 독자에게 충격을 주고 때로는 마음을 아프게 한다. 특히 아이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결국 같이 난도질되어 죽임당한 인간 제물의 이야기와 사진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아이를 지키려 했지만 결국 함께 제물로 바쳐진 아버지의 유골. 상나라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저자는 '상나라 정벌'이 상나라의 제후였던 주나라 일족이 이런 참혹한 역사를 끝내기 위해 내린 결단으로 보고 있다. 상나라는 작은 이웃 나라들을 정벌해 그곳 사람들을 인간 제물로 바쳐왔고, 주나라는 인간 제물들을 잡는 데 앞장선 인간 사냥꾼들이었다. 그러나 상나라의 군주 주왕이 주나라의 세자 백읍고를 인간 제물로 바치고 그 고기를 아버지인 희창(훗날 문왕으로 추존됨)에게 먹이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그의 만행에 분노한 주나라 일족은 오랜 인고의 시간 끝에 상나라를 정벌하고 인간 제물을 바치는 풍습을 없앴으며, 상나라의 인간 공양도 인간 사냥꾼인 자신들의 과거도 역사에서 지워버렸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수십 년 동안 선배 학자들이 진행해 온 상나라 관련 고고학 연구, 요순시대와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고대 역사서 『서경』, 『역경』의 점괘 해석들을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문제는 그의 주 연구 분야가 상나라-주나라가 아니고, 자신이 구축한 역사적 서사에 자료를 끼워 맞춰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근거를 주장에 끼워 맞춰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학자로서 지양해야 할 태도다. 그런데 고고학도 중국 고대사도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이것만 가지고 단정할 수 있나 싶은 부분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저자는 확실한 고고학적 근거가 없는데도 주나라 일족의 근거지에서 발굴된 저택 유적을 문왕의 저택이라고 단정한다. 또한 『서경』에서 실제로는 주공이 내린 명령들의 주어가 '왕'으로 되어 있는 것을, 저자는 주공이 당시에 실제 군주로 군림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반면 을유문화사판 『서경』 의 번역자 이세동 교수는 실제로 명을 내린 것은 주공이지만 군주인 성왕의 이름으로 명을 내렸기 때문에 주어를 '왕'으로 했다고 보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세동 교수의 분석이 더 합리적이다. 한편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이라는 부제대로 저자의 『역경』 속 점괘 해석들이 이 책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저자는 이 점괘들이 인간 제물들의 다양한 모습이나 문왕이 처한 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원문 자체가 너무 단순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식인 데다, 글을 이룬 글자들이 지금의 한자와는 다른 형태의 한자라 어떤 게 어느 글자인지를 두고도 학자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그러니 저자가 『역경』의 점괘를 바탕으로 그려낸 상나라의 참상이 아무리 생생하다 하더라도, 저자의 해석이 객관적인 근거를 갖추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중국 학계에서도 이 책을 상당히 많이 비판했다고 한다. 방대한 양의 고고학 보고서와 논문 속 역사의 파편들을 모아 수천 년 전 상나라의 모습을 재구축하는 것도, 그것을 (한국어 번역판 기준) 900페이지에 걸쳐 밀도 있게 그려내는 것도 분명 굉장한 역량이다. 저자가 디테일하게 상상해 낸 상나라의 모습 덕분에 독자들이 상나라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중국 고대사 연구자인 심재훈 교수는 이 책을 '재미있는 역사 소설'로 평하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을 통해 중국 고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괜찮지만, 저자의 주장이 객관적으로 입증된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 쪽이 좋을 것이다.

P. S. '세력'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는데 '실력'으로 번역한 것이 몇 군데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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