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나라 정벌 -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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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만큼이나 두꺼운 책을 '벽돌책'이라고들 한다. 내 기준으로 6, 700페이지대인 책은 페이지가 좀 많은 정도이고 900페이지는 되어야 벽돌책이다. 벽돌책은 완독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데, 정말 오랜만에 도전해 보고 싶은 벽돌책을 발견했다. 그 책이 『상나라 정벌』이었다. 제목처럼 역사적으로 증명된 중국 최초의 국가인 상나라가 주나라의 역성 혁명으로 정벌되는 역사를 다룬 책이다. 역사를 좋아하는 데다 역사 중에서도 근현대사보다는 고대사에 더 끌리는데, 고대사를 9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니. 탐스러운 읽을거리였다.

그런데 나 말고도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분량부터 압도적인 이 책의 판매량과 화제성이 높은 것은, 고어물에 가까울 정도로 잔혹한 상나라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상나라는 인신 공양을 하던 나라였다. 왕이 하늘에 바치는 제사부터 새 집을 짓고 나서 집이 튼튼하길 기원하는 제사까지, 상나라 사람들은 크고 작은 제사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상나라 유적에서 사지가 동강 나고 이리저리 뒤틀린 해골들만 보아도 제물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나라 사람들이 쓰던 청동 찜솥에서는 귀족 소녀의 머리뼈가 발견되었다. 치아의 상태로 보아서는 고기를 자주 먹던 상류층 사람인데도 인간 제물이 되고 같은 인간에게 잡아먹히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 모든 잔혹한 일들을 덤덤하게 설명한다. 인간 제물이나 동물 제물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는 듯이. 그럼에도 저자의 이야기와 그 증거로 제시된 사진들은 독자에게 충격을 주고 때로는 마음을 아프게 한다. 특히 아이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결국 같이 난도질되어 죽임당한 인간 제물의 이야기와 사진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아이를 지키려 했지만 결국 함께 제물로 바쳐진 아버지의 유골. 상나라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저자는 '상나라 정벌'이 상나라의 제후였던 주나라 일족이 이런 참혹한 역사를 끝내기 위해 내린 결단으로 보고 있다. 상나라는 작은 이웃 나라들을 정벌해 그곳 사람들을 인간 제물로 바쳐왔고, 주나라는 인간 제물들을 잡는 데 앞장선 인간 사냥꾼들이었다. 그러나 상나라의 군주 주왕이 주나라의 세자 백읍고를 인간 제물로 바치고 그 고기를 아버지인 희창(훗날 문왕으로 추존됨)에게 먹이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그의 만행에 분노한 주나라 일족은 오랜 인고의 시간 끝에 상나라를 정벌하고 인간 제물을 바치는 풍습을 없앴으며, 상나라의 인간 공양도 인간 사냥꾼인 자신들의 과거도 역사에서 지워버렸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수십 년 동안 선배 학자들이 진행해 온 상나라 관련 고고학 연구, 요순시대와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고대 역사서 『서경』, 『역경』의 점괘 해석들을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문제는 그의 주 연구 분야가 상나라-주나라가 아니고, 자신이 구축한 역사적 서사에 자료를 끼워 맞춰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근거를 주장에 끼워 맞춰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학자로서 지양해야 할 태도다. 그런데 고고학도 중국 고대사도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이것만 가지고 단정할 수 있나 싶은 부분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저자는 확실한 고고학적 근거가 없는데도 주나라 일족의 근거지에서 발굴된 저택 유적을 문왕의 저택이라고 단정한다. 또한 『서경』에서 실제로는 주공이 내린 명령들의 주어가 '왕'으로 되어 있는 것을, 저자는 주공이 당시에 실제 군주로 군림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반면 을유문화사판 『서경』 의 번역자 이세동 교수는 실제로 명을 내린 것은 주공이지만 군주인 성왕의 이름으로 명을 내렸기 때문에 주어를 '왕'으로 했다고 보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세동 교수의 분석이 더 합리적이다. 한편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이라는 부제대로 저자의 『역경』 속 점괘 해석들이 이 책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저자는 이 점괘들이 인간 제물들의 다양한 모습이나 문왕이 처한 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원문 자체가 너무 단순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식인 데다, 글을 이룬 글자들이 지금의 한자와는 다른 형태의 한자라 어떤 게 어느 글자인지를 두고도 학자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그러니 저자가 『역경』의 점괘를 바탕으로 그려낸 상나라의 참상이 아무리 생생하다 하더라도, 저자의 해석이 객관적인 근거를 갖추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중국 학계에서도 이 책을 상당히 많이 비판했다고 한다. 방대한 양의 고고학 보고서와 논문 속 역사의 파편들을 모아 수천 년 전 상나라의 모습을 재구축하는 것도, 그것을 (한국어 번역판 기준) 900페이지에 걸쳐 밀도 있게 그려내는 것도 분명 굉장한 역량이다. 저자가 디테일하게 상상해 낸 상나라의 모습 덕분에 독자들이 상나라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중국 고대사 연구자인 심재훈 교수는 이 책을 '재미있는 역사 소설'로 평하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을 통해 중국 고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괜찮지만, 저자의 주장이 객관적으로 입증된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 쪽이 좋을 것이다.

P. S. '세력'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는데 '실력'으로 번역한 것이 몇 군데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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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 치즈가 좋아서 떠난 영국 치즈 여행기 유유자적 1
이민희 지음 / 크루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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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부터 표지의 선명한 노란색에 눈길이 갔다. '치즈'라는 책 제목처럼 애니메이션 속 생쥐가 좋아하는 치즈 같은 노란색이다. 게다가 나도 치즈를 좋아하니 언젠가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하고 잊고 있던 와중에, 얼마 전에 읽은 『베트남 간식』과 이 책이 같은 시리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부제는 '치즈가 좋아서 떠난 영국 치즈 여행기'다. 하지만 다양한 치즈를 맛보며 느긋하게 즐기는 식도락 여행기는 아니다. 저자가 직접 영국에 어떤 치즈 농가들이 있는지 찾아보고 하나하나 방문 허락을 받고, 한 곳 한 곳 방문해 치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기록했으니 '나의 영국 치즈 답사기'라고 할 수 있다. 책의 대부분은 각 치즈의 역사와 현황, 저자가 보고 듣고 경험한 제조 공정과 거기서 알게 된 것들이다. 책 속 사진들도 대부분은 완성된 치즈가 놓여 있는 선반이나 치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찍은 것이다. 그러니 화려한 치즈의 향연을 기대한 사람들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견학이잖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즐기러 간 것이 아니라 배우러 간 것이고, 치즈의 소비보다는 생산에 더 관심이 많으니 견학이 맞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치즈의 소비가 아닌 생산이다. 생산 공정과 그 공정 하나하나에 공을 들이는 사람들이다.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치즈들은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우유를 준비하고, 거기에 산을 넣어 단백질을 응고시키고, 응고된 덩어리를 건져내 수분을 빼내고 모양을 잡고, 저장고에서 숙성시키면 완성. 그러나 치즈에 넣는 산의 양이나 소금의 비율부터 수분을 빼는 방법, 제조 작업에 사용하는 도구까지 각각 조금씩 다른데, 그 작은 차이가 치즈의 개성을 만들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각 치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하고, 각각의 과정이 치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한다. 그저 촬영하고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치즈 제조자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치즈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려야 하는지 실감한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치즈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잠든 이른 새벽에 일어나 온몸의 힘을 써야 하는 중노동을 하고, 좋은 우유를 만들 수 있도록 소들까지 돌본다. 이런 고된 일이지만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즐겁게 일한다. 저자가 찍은 이들의 모습에는 자기 일을 사랑하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위엄과 품위가 있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줄 안다. 자신들이 만드는 치즈에 관심을 갖고 배우고 싶어 한다는 이유만으로 일면식도 없는 이방인인 저자를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처럼 따뜻하게 환대한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은 어떤 차이나 경계도 뛰어넘는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책날개에서 저자는 이 책을 '느리고 깊게 만난 그동안의 나의 치즈 이야기'라고 요약한다. 그 말대로 이 책은 이곳저곳 바쁘게 움직이며 최대한 많은 치즈를 맛보고 그 맛을 현란하게 묘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라'는 말처럼, 저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치즈의 근원을 찬찬히 파헤쳐 나가고, 그 뒤에서 묵묵히, 성실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명을 비춘다. 저자는 10년 전의 여행을 책으로 내기 위해 분투하다 결국은 출간해 냈으니, 좋은 치즈를 만들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매일 성실히 노동하는 치즈 제조자들만큼이나 인내심이 강하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우직한 이 기록은 천천히 씹으면 그 풍미를 느낄 수 있다는 데서 치즈와 닮았다.


P. S. 『베트남 간식』처럼 큰 판형에 사진들도 큼직하게 넣고 잡지 같은 감각적인 느낌으로 디자인했다. 속표지까지 선반에 놓인 치즈 사진으로 채우고, 치즈 외의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치즈 더하기' 코너와 에필로그는 잘 익은 치즈 같은 레몬색을 바탕색으로 한 데서 치즈 이야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외형을 만들어내려 고심한 것이 느껴진다.


다만 치즈 전문점 닐스 야드 데어리의 매장 구조도(53페이지)는 영어판 그대로 넣지 말고 텍스트들을 한국어로 번역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책들에서 원어 표기하는 데 흔히 쓰이는 위첨자를 덧붙이는 말에도 쓰는 것은 『베트남 간식』에서와 마찬가지인데, 문장이 길 때는 가독성이 떨어진다. 독특한 시도이긴 하지만 독자에게는 가독성이 먼저이니, 그냥 문장 바로 뒤에 다른 본문들처럼 처리하거나 괄호 안에 넣는 게 더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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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로 읽는 심리 수업
김동훈 지음, 빈센트 반 고흐 그림 / 민음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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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를 워낙 좋아해서 고흐에 대한 책은 열 권이 넘게 읽었다. 그래서 그가 몇 년에 어디에서 태어나서 몇 살에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자기 화풍을 만들었는지, 각 시기별로 어떤 그림을 그렸고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머릿속에 대략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그래서 이제 고흐에 대해 더 새롭게 알게 될 것이 없다 싶으면 그에 대한 새로운 책이 또 나와서 내 관심을 끈다. 이 책도 그런 책이었다.

제목만 보고는 고흐 그림에 대한 감상에 심리학을 빙자한 힐링 문구를 약간 덧붙인 책인 줄 알았다. 그리고 고흐의 삶은 워낙 드라마틱해 그의 삶을 이야기하는 책은 지나치게 감상적이 되기 쉽다. 더구나 저자가 심리학자가 아니라 철학자였기에 내 불신은 더 커졌다. 그래도 고흐에 대한 책이라니 궁금해서 펼쳐봤는데, 고흐의 삶과 예술 세계, 심리와 그와 관련된 심리학 개념을 충실히 설명하고 있었다. 고흐는 이미 죽었으니 그에게 특정 시기, 특정 행동을 했을 때에는 무슨 심정이었냐고 물어볼 수도 없다. 그러니 이 책에서 말하는 고흐의 심리가 100퍼센트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 자신도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납득한 것은 아니었고. 그러나 고흐와 주변 사람들이 주고받은 편지, 그에 대한 기록, 그가 그린 그림을 통해 여러 학자들이 연구하고 저자 자신도 추론한 결과를 이야기하고 있으니, 나름대로는 근거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의 연구 결과도 반영해서인지 나름 고흐 마니아라고 자부하는 나도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많았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고흐를 다룬 다른 책들에서보다 고흐와 테오의 인격적 결함을 많이 드러낸다는 것이다. 고흐는 많은 콘텐츠들에서 누가 뭐래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갔던 외로운 천재로 그려지지만, 저자는 사실 고흐가 누구보다 남들을 의식했고 자기 내실을 다지기보다는 남들에게 그럴듯해 보이려고 애쓰기도 했다고 이야기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행동할 때도 종종 있었고. 몇 달 만났던 여자의 자매들이 그녀를 괴롭힌다고 생각해 그 자매들에게 폭력까지 썼다고 할 때는 고흐에 대한 애정을 놓을 뻔했다. 테오는 남들이 몰라주는 형을 혼자 믿고 지원해 지금까지도 고흐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저자는 테오와 고흐가 서로에게 '알테르 에고(alter ego)', 즉 또 다른 자아로서 서로를 보완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테오와 고흐의 관계가 늘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밝힌다. 고흐는 테오의 안정된 삶을, 테오는 고흐의 재능과 안목을 시기했고, 테오는 고흐가 탐탁지 않아 하는 고갱(고흐가 고갱을 사실 그렇게 탐탁지않아 했다는 것도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을 칭찬하고 그를 적극적으로 후원해 고흐에게서 불안감과 열등감을 유발했다. 둘 다 인간이니 단점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좋아하고 존경하는 인물들의 단점을 새롭게 알게 되는 것은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테오보다는 고흐에 가까운 상황인 나로서는 고흐의 이런 인격적 결함과 건강하지 못한 심리에서 내가 보여 괴로웠다. 나와 고흐는 전혀 다른 사람이니 무작정 그와 나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그래도 내 안의 약하고 병든 부분이 그라는 거울에 비쳐 보이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고흐의 심리를 진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고흐가 어떻게 그런 병든 심리를 이겨냈는지, 또는 어떻게 이겨냈으면 좋았을지 이야기하면서 그것을 우리의 삶에도 적용해 보자고 이야기한다. 고흐의 삶 속 여정과 그 과정에서 그린 그림들, 거기서 드러나는 심리를 이야기하는 부분에 비해 이 솔루션 부분은 짧고 단순하다. 하지만 그것이 고흐뿐만 아니라 내게도 처방전이 되어주었다. 지금 내가 처한 현실 자체를 바꾸진 못할지라도, 그 현실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더 나은 단계로 가기 위해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지 힌트를 주었다. 그래서 온갖 힐링 문구에 회의를 느끼는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었다.

이 책이 좋았던 또 하나의 이유는, 고흐와 관련된 다른 책들에서는 보지 못했던 작품들이 많이 실려 있다는 것이다. 웬만큼 유명한 작품들은 다 봤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본 작품들이 많았다. 그것도 개인 소장 작품들이 많아 이 작품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최근의 고흐 관련 논문들에서 새롭게 주목하고 연구한 작품들일까. 고흐가 만든 연작들을 같은 소재끼리 모으고 나란히 놓아 디테일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저자는 심리학자도 미술사학자도 아니고, 이 책에서 분석의 틀로 삼는 심리학도 '이런 개념이 있고 고흐의 심리에는 이렇게 적용해 볼 수 있다'고 설명하는 정도다. 그래도 고흐의 삶과 예술 세계를 충실히 설명하고 있고, 다른 책에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던 고흐와 주변 사람들에 관한 사실들도 알 수 있으며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도 많이 실려 있다. 그리고 고흐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고 저자가 고흐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주는 솔루션을 귀담아 듣는 것은 나쁘지 않은 경험이다. 고흐가 생각보다 연약하고 결함이 많은 인간이었다 해도 그는 결국 위대한 것을 이루어냈는데, 우리는 고흐가 듣지 못했던 솔루션도 얻었으니 지금보다 더 나은 길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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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간식, 시간과 시간 사이에서 만난 작고 다정한 것들 유유자적 2
진유정 지음 / 크루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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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답답할 때는 먼 나라의 이야기나 예쁜 사진들이 가득 실린 책을 읽으며 기분 전환을 한다. 그런 책을 찾으러 도서관의 실용 분야나 여행 서적 코너 앞에 서서 책등이나 표지, 제목만 봐도 끌리는 책을 펼친다. 이 책도 그렇게 발견한 책이었다. 앞으로 가보려는 나라 중 베트남은 1순위가 아니었지만 베트남 음식 전체도 아니고 '간식'만 다루고 있다는 데 호기심이 갔다. 베트남의 간식거리 중 내가 아는 건 하나도 없으니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 게 설렜고, 책을 훑어보니 예쁜 음식과 풍경 사진들이 많아 보면서 마음을 달래고 싶었다. 그러니 실제로 베트남 여행에 도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분 전환을 위해 이 책을 선택했다.

이 책은 그런 내 선택에 맞는 책이었다. 베트남의 어디에 어떤 맛집이 있고 거기에선 어떤 음식을 팔며, 어느 요일 몇 시에 문을 열고 문을 닫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저자가 간 곳 중 몇 곳은 이제 문을 닫아 갈 수 없다고 한다. 이 책은 베트남 간식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기보다는, 저자가 베트남에서 먹었던 간식들과 그에 얽힌 추억들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새벽과 아침 사이, 아침과 점심 사이, 점심과 저녁 사이, 저녁과 밤 사이 이렇게 간식을 먹는 시간대별로 챕터를 나누었지만, 꼭 특정 시간대에 먹어야 하는 음식도 없다(가게가 문을 여는 시간에는 맞춰서 가야겠지만). 저자가 마침 그 시간대에 먹었을 뿐. 하지만 그 순간에 그 음식을 먹었기에 그 순간도 그 음식도 저자의 기억 속에는 특별하게 남아 있다. 이른 새벽부터 할머니 바리스타가 내려줬던 달콤하고 따뜻한 연유 커피부터 밤비 내리는 밤에 동네 디저트 가게에서 만든 투박한 간 케이크(베트남어로는 '반간'인데 간을 넣어서가 아니라 생김새와 색이 간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까지. 베트남에 발 한 번 들여놓은 적이 없는 나도 글과 사진을 보면서 그 순간을 공유한다.

반미와 야채 절임, 달걀 프라이와 잠봉, 파테(간이나 자투리 고기를 간 것에 밀가루 반죽을 입혀 구워낸 프랑스 음식), 볶은 양파, 베트남식 소시지를 함께 먹는 음식 반미짜오

사실 이 책에 실린 베트남 간식 중 내가 알거나 먹어봤던 음식은 하나도 없다. 그나마 베트남식 바게트 반미와 다른 음식의 조합인 '반미씨우마이', '반미짜오', '반미팃씨엔느엉'은 반미를 먹어봤으니 반은 먹어봤다고 할 수 있을까. 연두부에 코코넛 밀크와 떡 같은 고명을 넣어 먹는다는 음식 '따오퍼'는 대만의 또우화와 비슷한 맛일 것 같은데, 나는 또우화를 한국에서 버블티에 얹힌 고명으로만 먹었으니 따오퍼와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이 책에 실린 모든 음식의 맛은 저자의 설명과 묘사, 사진으로 짐작하고 상상해 보았다. 새우, 돼지고기, 라이스페이퍼, 숙주나물 등 맛을 아는 재료들로 만들어졌고 저자의 묘사도 생생하니 왠지 아는 맛일 것 같다. 그래도 직접 맛보고 싶다. 이런 상상을 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그리고 그 음식을 먹었을 때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을 담백하면서도 감각적인 문장으로 풀어놓아, 내가 베트남 어느 작은 도시 어느 작은 가게의 플라스틱 목욕탕 의자에 앉아 일회용 접시에 담긴 간식을 먹는 기분이 들었다. 밖에서 밝아오는 하늘이나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을 간접적으로라도 여행하고 싶은 마음을 달랬다. 현실 도피지만 어느 드라마 제목처럼 때로는 도망치는 것도 도움이 된다. 그리고 언젠가는 정말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때는 책에 나온 베트남 간식들과 그것을 먹었을 때 나의 감상을 쌓아갈 수 있겠지.

P. S. 1. 한국학술정보에서 낸 책이라 학술 서적 같은 투박한 느낌의 디자인일 줄 알았는데 표지도 본문도 잡지 같은 느낌의 감각적인 디자인이다. 다만 책 판형이 꽤 큰 데 반해 각주와 사진 설명, 쪽 번호의 글씨 크기는 너무 작아서 불편하다. 글씨가 작은 게 디자인의 측면에서는 더 예쁘다고 해도 6포인트는 너무 작다.

P. S. 2. 더운 나라의 음식을 소개하는 책인데 시원한 음료, 빙과보다는 고기, 채소, 탄수화물로 이루어져 가벼운 한 끼로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많다. 흔히 간식으로 생각하는 단것, 과자보다는 정말 '삼시 세끼 중간의 끼니'라고 할 수 있는 음식들의 비중이 크다. 저자가 그런 간식을 선호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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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순한 여인 / 우스운 사람의 꿈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정아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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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소설 「온순한 여인」과 영화 <당신과 함께, 당신 없이>의 스포일러 포함

지금 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스리랑카 영화전을 진행하고 있다. 스리랑카는 내 친구가 몇 년 동안 봉사 활동을 하다 온 나라라 나도 마음이 쓰이는 곳이다. 스리랑카 영화전에서 어떤 영화를 볼까 영화 시놉시스들을 살펴보다, <당신과 함께, 당신 없이>라는 영화의 줄거리에 끌렸다. 스리랑카는 정부군과 소수 민족인 타밀 족 반군이 1983년부터 2009년까지 26년 동안이나 내전을 벌였는데, 이 영화는 타밀 족인 아내가 남편이 내전 당시 정부군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생기는 일을 그렸다는 거다. 게다가 원작은 도스토옙스키의 단편 「온순한 여인」이라니 더 궁금해졌다. 백수십 년 러시아의 이야기를 21세기 스리랑카라는 배경에 어떻게 맞추어 각색했을까. 그래서 영화를 보러 가기 전 도서관에서 「온순한 여인」이 실린 책부터 읽어봤다.

살인자를 찾는 데 주력하는 전개의 영화 장르를 '후던잇(Who done it)'이라고 하는데, 이 단편은 아내가 왜 자살했는지 주인공이 그 이유를 찾아가는 소설이니 '와이던잇(Why done it)'이라고 할 수 있다. 남편이 자신과 아내가 겪어온 일들을 생각하며 아내가 자살한 이유를 추론하지만, 결국은 진실을 밝혀내지 못하니 추리 소설이라기보다는 심리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소설 속 아내가 왜 죽었는지 이해하려면 우선 소설 속 이야기를 파악해야 한다. 주인공은 퇴역한 마흔한 살 군인으로, 제대하고 나서는 전당포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전당포에 작은 패물들을 자주 맡기러 오는 젊은 여인에게 연민을 느끼고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그녀에 대해 뒷조사까지 하다, 그녀가 부모를 잃고 숙모들에게 얹혀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숙모들은 입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그녀를 부유한 홀아비 노인에게 시집보내려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그녀에게 청혼했고, 원하지 않은 결혼에서 벗어날 방법이 달리 없었던 그녀는 그와 결혼했다. 퇴역하고도 군인답게 엄격하고 절제된 생활을 하는 주인공은 아직 열여섯 살밖에 안 되는 아내에게도 검약하고 절제된 생활 방식을 강요했고, 아내에게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하지도 않았다. 남편의 사랑을 바랐던 아내는 남편의 냉담하고 엄격한 태도에 반항하게 되었다. 부부의 관계가 날로 악화되던 와중에, 남편의 옛 군인 동료가 찾아와 남편이 군에서 불명예스러운 일로 제대했다는 것을 이야기해 버렸다. 그러자 아내는 남편을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다 남편이 잠든 사이 권총을 남편의 관자놀이에 댔다. 이미 잠이 깬 남편은 아내의 그런 행동을 덤덤하게 넘겨버렸지만, 자신이 아내의 행동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키려 아내의 침상을 자신의 침상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아내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발견하고 그녀가 자신을 용서했다고 생각해 아내에 대한 사랑이 마음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남편은 아내에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며 화해하려 했지만, 아내는 남편이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 창문에서 몸을 던져 자살했다.

많은 비평가들은 그녀가 남편의 엄격한 제도와 정신적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자살했다, 또는 남편의 냉대에 지쳐 자살했다고 해석한다. 남편이 진심을 다해 같이 새롭게 시작해 보자고 했지만, 그녀 자신은 그런 남편에게 깊은 동정심 외에는 다른 어떤 감정으로도 답할 수 없었다고. 반면 지만지판의 한국어 번역자는 그들의 해석이 모두 틀렸다고 한다. 그들은 남성이어서 여자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라고. 남편은 그녀를 용서했고 그녀는 남편을 용서했지만, 그녀는 남편을 비난하고 총구까지 겨누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고, 남편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남편의 진심 어린 사랑을 확인해 행복한 마음으로 자살했다고.

여성인 번역가는 도스토옙스키를 잘 알고, 한 번이라도 진정한 사랑을 해본 적이 있고, 아내의 심리를 잘 따라가다 보면 이 해석만이 그녀의 자살에 대한 유일한 해석임을 수긍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같은 여성인 나는 비평가들의 해석이 더 납득이 간다. 자신에게 용서를 비는 남편을 보는 아내의 모습은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해하고 두려워하고 있었다.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던 일이 이뤄져서 행복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나 당황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번역가는 아내가 창문에서 뛰어내리기 전 하녀에게 보인 미소가 진정으로 행복해하는 미소였다며 사랑받는 여인의 미소였다고 봤지만, 그녀의 마지막 미소를 죽음으로써 진정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기에 지을 수 있던 미소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살아 있는 한 그녀는 남편의 변덕에 운명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다. 지금은 열렬히 사랑 고백을 해도 나중에 또 언제 마음이 변할지 모른다. 소설 속에서 아내의 목소리는 남편이 기억하는 몇 마디의 대화밖에 나오지 않지만, 서술과 상황으로만 봐도 남편이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것이 보인다. 그런 남편을 아내가 믿고 의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남편과 헤어져도 친정에는 그녀를 애물단지 취급하는 숙모들밖에 없고, 결혼 전에도 스스로 직업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취업할 길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이혼한 여성이 살길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으니, 그녀가 죽음을 해방구로 여길 만했다. 그래서 나는 번역가와 같은 여성임에도 이전의 남성 비평가들처럼 「온순한 여인」 속 아내는 새롭게 시작할 의지도 힘도 방법도 없다고 느꼈기에 자살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당신과 함께, 당신 없이>의 감독은 아내가 자살한 원인을 무엇으로 보았을까? 영화를 보기 전 이 점이 가장 궁금했다. 영화는 20세기 말에서 21세기 초 스리랑카의 상황에 맞게 내용을 각색했기 때문에 아내의 자살 동기가 원작과는 어느 정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큰 틀 안에서는 한국어판 번역가보다는 비평가들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본다. 남편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도, 새롭게 시작할 수도 없었기에 자살했다는 것.

<당신과 함께, 당신 없이> 속 남편 사라트시리(샴 페르난도)와 아내 셀비(안잘리 파틸)가 찍은 결혼 사진

영화는 생각보다 원작의 세세한 설정과 상황까지 충실하게 따른다. 남편이 퇴역 군인 출신의 전당포업자라는 것, 아내는 결혼하기 전 남편의 전당포에 작은 패물들을 자주 맡겼다는 것, 부모를 잃고 남의 집에 얹혀살면서 취업하기 위해 애썼지만 잘되지 않았고, 결국 집주인들의 등쌀에 떠밀려 늙은 부자의 재혼 상대가 될 위기에 놓였다는 것. 그래서 남편과 결혼했지만 남편의 엄격하고 차가운 태도에 상처를 받았다는 것, 남편의 옛 군인 동료 때문에 과거의 진실이 밝혀져 이들의 관계에 더 큰 위기가 생겼다는 것까지.

그런데 영화에는 스리랑카의 민족 갈등이라는 요소가 더해져, 오히려 원작보다 아내의 자살 원인은 더 뚜렷하게 읽힌다. 타밀 족인 아내는 정부군의 손에 부모님과 두 오빠를 잃었다. 그래서 스리랑카의 주류인 싱할라 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편을 경계했지만, 늙은 부자와 결혼하는 것은 더 싫었기 때문에 남편과 결혼했다. 원작처럼 나이가 훨씬 더 많긴 하지만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이었으니. 그래서 마음을 열고 남편과 다정하게 지내려 했지만, 남편의 옛 군인 동료가 나타나면서 남편이 정부군이었다는 것을 알고 큰 충격을 받는다. 남편 같은 정부군이 가족들의 원수였으니까. 그래서 남편이 서랍장에 숨겨둔 권총으로 남편을 죽이려고까지 했지만, 결국 죽이지는 못했다. 그런데 화해를 요청하는 남편은 자신이 정부군에 복무하던 시절 찾아온 친구를 포함한 전우들이 타밀 족 여인을 성폭행했는데도, 그것을 숨겨주려 위증했다고 고백한다. 그것이 남편이 차마 밝히지 못했던 과거였다.

원작에서 주인공이 불명예 제대한 원인은, 군대에서 하극상을 벌인 후임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 하극상이라는 것도 상사에게 불손했던 거지 군 내외의 인명을 살상하거나 군사 시설을 파괴하거나 적에게 중요한 군사 기밀을 빼돌리는 등의 중대한 과실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니 현대인 독자로서는 왜 그렇게 사소한 일로 제대당한 건지, 아내는 왜 그런 사소한 이유로 남편을 죽이려 한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영화 쪽에서 아내가 남편을 죽이려 한 이유가 더 이해하기 쉬웠다. 자기 부모형제를 죽인 자들과 전우였던 남편이 죽일 만큼 증오스러웠다는 것은 납득이 가니까.



영화에서 남편 사라트시리는 아내 셀비에게 먼저 다가가 새롭게 시작하자고 하지만, 셀비는 그의 마음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데 21세기 스리랑카는 전쟁의 충격으로 아직도 혼란스러운 상태지만, 19세기 러시아보다는 이혼한 여성이 살 길이 더 넓게 열려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왜 자살했을까? 영화에서도 남편이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었잖아. 그랬다면 나는 당신을 웃으면서 보내줬을 거야." 남편의 기억 외에는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원작 속 아내와 달리, 영화 속 아내는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은 내게 온전한 사랑을 바랐지만, 나는 그걸 줄 수 없었으니까." 마음에는 남편에 대한 사랑이 남아 있다 해도, 아내는 자신의 가족들을 죽인 자들의 전우이자, 자신의 동포가 강간당하는 것을 방치했던 방관자를 사랑한다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이 남아 있지 않더라도, 그런 자에게 의지하면서 살아가고 그를 사랑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웹툰 <낮에 뜨는 달>에서 자신의 부모를 죽인 적국의 장군을 사랑했지만 결국 그에 대한 양가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어 그를 죽였던 여주인공 한리타의 마음이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한리타는 자신이 아닌 상대를 죽였다는 것이 다르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영화 속 아내가 자살한 원인은 뚜렷하게 읽혔다.

「온순한 여인」은 <당신과 함께, 당신 없이>가 만들어지기 전에 1969년 프랑스, 2014년 베트남에서 이미 영화화된 적이 있다. 그 두 영화에서는 아내가 죽은 원인을 어떻게 해석했을까 궁금해진다. 어느 쪽이든 나는 한국어판 번역자가 단언하는 것과 달리, 단 하나의 진실로 명확하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성의 마음으로 생각해 봐도 나는 비평가들과 같은 방향으로 그녀의 죽음을 해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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