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지아 쿠피 - 폭력의 역사를 뚫고 스스로 태양이 된 여인
파지아 쿠피 지음, 나선숙 옮김 / 애플북스 / 2012년 3월
평점 :
절판


  아프가니스탄에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수십 년 동안은 갈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의 소설들(『연을 쫓는 아이』, 『천 개의 찬란한 태양』, 『그리고 산이 울렸다』)과 애니메이션 <브레드위너>, 수많은 뉴스와 르포들을 통해서. 이 책도 그렇게 수많은 아프가니스탄 이야기 중 하나다. 하지만 탈레반의 횡포를 주로 다루었던 다른 이야기들과 달리, 탈레반이 물러간 이후 아프가니스탄을 새롭게 만들려는 모습을 다루었다는 점, 그런 혁신의 주체가 되는 사람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이 책이 신선하게 느껴졌다. 

  이 책은 아프가니스탄의 여성 정치인 파우지아 코피(Fawzia Koofi, 책에서는 '파지아 코피'로 표기되지만 실제 발음은 파우지아 코피다.)가 저널리스트 나딘 구리 Nadene Ghouri의 도움을 받아 쓴 자서전이다. 탈레반의 여성 억압, 부르카를 쓰고 다니는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을 생각하면 아프가니스탄에 여성 정치인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탈레반이 물러난 이후 세워진 정부에서 여성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도록 상원과 하원에 여성 의원 할당제를 도입했다. 파우지아는 여성 의원 할당제의 혜택이 아니라 압도적인 득표 결과로 하원의원이 되었다. 

  파우지아는 어떻게 아프가니스탄 여성으로서 정치의 길을 걷게 되었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압도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파우지아의 삶과 아프가니스탄의 근현대사가 어떻게 얽혀 있는지 보아야 한다. 파우지아의 할아버지는 지역 사회의 지도자로서, 아버지는 지역 사회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으로서 지역 주민들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파우지아네 가문은 대대로 정치인 가문이었고 공익을 위해 힘쓰는 것이 가문의 전통이자 명예였다. 그러나 파우지아가 세 살이었던 1978년, 그녀의 아버지는 친소련 성향의 중앙 정부와 그에 대항하던 무장조직 무자헤딘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려다 무자헤딘 세력에게 살해당했다. 이 때부터 파우지아의 삶은 아프가니스탄의 파란만장한 근현대사와 얽히며 험난해진다.

 파우지아의 오빠들 또한 행정관료나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파우지아와 남편까지 오빠의 정적들에게서 위협을 받았다. 남편은 매형과 내통했다는 이유로 여러 번 감옥에 끌려가는 바람에 건강을 해쳤다. 파우지아는 의사가 되기 위해 의대에 입학했지만, 입학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공부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탈레반이 집권하고 나서 여성 교육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파우지아는 주변의 여성들이 부르카를 입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고, 강간을 당해도 간통죄로 공개처형을 당하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이런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해 파우지아와 남편은 탈레반의 손이 아직 미치지 못하는 북부 지역으로 떠났다.

 탈레반에 저항하는 무자헤딘 세력이 지배하는 북부 지역에서 파우지아는 다시 자유를 찾았다. 그곳에서 파우지아는 학교를 세우고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한 사람으로서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구호기관을 위해 의료 조사를 하고, 유니세프의 아동 보호국에 취업하면서 전쟁으로 집과 재산, 가족을 잃은 주민들과 아이들을 돕게 된다. 이때부터 파우지아는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게 된다. 탈레반이 몰락한 이후 민주정부가 들어서게 되면서, 파우지아는 여성단체와 유니세프에서 일하면서 얻은 인맥과 경험, 정치인 가문의 전통에 힘입어 하원의원에 당선되고,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여성 정치인 중 한 명이 된다.

 파우지아의 삶에서 우리는 역사가 한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한 개인이 그러한 역사의 영향 속에서도 어떻게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가는지를 볼 수 있다. 계속되는 내전과 탈레반의 억압으로 파우지아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의사의 길을 포기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정치인의 길을 가게 되었다. 그녀는 한 사람으로서 독립하고 자신의 뜻을 펼치는 데서 더 나아가,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는데도 어디에도 호소할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그렇게 파우지아는 일방적으로 역사에게서 영향을 받았던 삶에서 벗어나 역사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 그녀조차도 아프가니스탄과 이슬람의 전통과 인식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파우지아는 자신에게는 따뜻한 말 한 마디 한 적 없고 그저 시집 가면 끝인 딸들 중 하나로만 여겼던 아버지, 지역 주민들의 안녕을 위해 국왕에게 목숨 걸고 간언하면서 집에서는 밥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아내를 때리던 아버지를 여전히 존경하고 롤모델로 여긴다. 아버지는 하루도 쉴 새 없이 가문과 지역을 위해 일해야 했으니 중압감이 컸을 것이고, 아내를 때리는 것이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게 여겨졌으며 집안 대소사를 맡길 정도로 어머니를 신뢰하고 사랑했다고 파우지아는 아버지를 옹호한다. 그러나 아무리 중압감이 크더라도 아내를 스트레스 해소용 샌드백으로 삼은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아내를 진정으로 한 인격체로 존중했다면 밥이 잘 안 됐다고 남들이 보는 앞에서 심하게 폭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부르카를 쓰든지 말든지 개인의 선택이고, 부르카도 전통의 하나이므로 쓰는 것 또한 존중 받아야 한다는 그녀의 말은 이해할 수 있지만, 그녀가 한 번은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왜 여성만 히잡이나 부르카로 자신의 모습을 가려야 하는지, 성폭력 문제의 원인이 과연 여성이 단정한 옷차림을 하지 않아서인지. 히잡이나 부르카 자체가 근본적으로 품고 있는 모순에 대해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그녀 또한 정치인이고 자신의 이야기를 썼기 때문에 자신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했다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도 있다. 파우지아는 이 책에서 족벌정치를 비판하지만 그녀 자신도 아버지와 가문의 후광을 입었고, 정치 가문의 후예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물론 파우지아가 족벌정치를 펼치는 정치인들과 달리 자신과 자기 가문의 이익을 사사로이 챙기지 않았다면 그녀는 그러한 족벌 정치와 차별화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책에서 또 다른 여성 하원의원 말랄라이 조야가 지나치게 과격한 언행으로 의원직을 박탈당한 것을 보고 정치적으로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었다고 평했는데, 조야야말로 진정한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대표라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여성이 정치를 하는 것 자체를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이 그녀를 위협하는 데도 아프가니스탄과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계속해서 일하는 그녀의 용기 자체는 의심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에 평화와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없다고 보지만 그녀는 아프가니스탄이 평화롭고 부강한 국가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지금도 뛰고 있다. 
죽음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던 그녀는 지금도 살아 있고, 2014년에 다시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활발히 정치 활동과 인권 활동을 하고 있다. 그녀와 아프가니스탄이 어떠한 길을 걸을지 계속 지켜보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걷기no책읽기yes 2021-10-06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몰랐는데 바스티안님의 글을 보니 관심이 생기네요.

바스티안 2021-10-16 12:30   좋아요 0 | URL
제 글 때문에 이 책을 알게 되셨다니 기쁘네요. 이 서평을 다시 읽어보니 지금 상황에 읽기 좋은 책일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