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라고 하면 수백 년, 수천 년의 역사를 품은 유적지가 떠오른다. 30여 년 동안 스테디셀러로 굳건히 자리 잡고 있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시리즈 때문에 이런 인식이 더 강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 한국 답사기'라는 제목대로, 이 책의 저자가 찾아간 곳은 근대 이전에 조성된 유적이 아니다. 나라에서 문화재로 지정한 곳이 아니라,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평범한 거리 구석구석이다. 저자는 왜 이름난 유적이 아닌 일상적인 장소를 답사하는 걸까?

그곳에 우리, 현대 한국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궁궐이나 석탑, 산성 같은 유적지들은 훌륭한 문화유산이지만, 머나먼 과거의 모습을 전하는 존재다. 또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힘과 영광을 자랑하거나 지키기 위해 만든 경우가 많다. 반면 예전의 행정구역명으로 적혀 있는 표지판이나 문패, '(구 ㅁㅁㅁ)' 같은 식으로 과거의 지명을 또 다른 이름으로 달고 있는 버스 정류장 등 '도시의 화석'은 아주 가까운 과거,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낸 과거를 보여준다. 예를 들면 '수용소'라는 단어가 들어간 지명이 전국 곳곳에 남아 있는데, 이들 지명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 수용소가 있던 곳의 흔적이다. 나라에서 문화재로 공인한 전자와 그렇지 못한 후자 모두 우리에게 소중한 유산이지만, 정부에서나 평범한 국민들이나 전자만을 기억하고 기린다. 게다가 재개발과 재건축이 끊임없이 진행되는 이 땅에서 불과 2, 30년 전의 건물들도 헐려서 사라진다. 문화재로 인정받지 못했으니 보존될 길도 없다. 그래서 저자는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현대의 유적과 유물을 우선 답사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저자는 몇 년째 이 현대 한국 답사를 계속해 오고 있고, 거기서 직접 확인하거나 새롭게 발견한 것들을 꾸준히 칼럼과 책으로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 답사가 자신 혼자만의 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현대 도시를 답사하는 방법'을 1권의 1부로, 전체의 4분의 1에 달하는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국가와 지배 집단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국민을 이끌어 가기 위해, 거기에 유리한 것만 널리 알리고 그렇지 않은 것은 감추거나 없앤다. 그렇기 때문에 답사를 통해 내가 살아가는 나라와 지역을 바라보는 주체적인 관점을 기르는 것이 시민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것이다. 독자들이 자신의 활동을 응원하고 동참할 것을 믿기에, 그는 독자들을 '동료 시민'이라 부른다.

'답사 방법'이라고 해서 전문적이거나 거창한 것은 아니다. 간판부터 화분, 장독대 같은 일상 풍경의 일부부터 문화주택, 공동주택, 개량 기와집, 아파트 등 우리 주변의 다양한 주택들,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상업 시설과 공공시설까지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을 꼼꼼히 살펴보는 것이다. 맞춤법과 글씨체를 통해 그 간판이 만들어진 시대와 지역의 개성을 발견할 수 있고, 자투리 공간에까지 독특한 무늬를 넣은 계단이나 대문, 창틀을 통해 평범한 시민의 예술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재개발로 인해 수년, 수십 년 동안 운영해 온 가게 문을 닫은 사람들이 남긴 폐업 인사에서 그들이 겪은 경제난과 한숨을 읽어낸다. 저자는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흔적, 역사를 사진과 글로 우리에게 전한다. 이들을 이야기할 때의 저자의 시선과 어조는 더없이 따뜻하다.

하지만 우리가 외면했던 역사, 기억하지 않으려는 역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는 누구보다 단호하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자기보다 더 취약한 처지에 있는 소수자들에게 가혹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이 그렇게 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성 노동으로 외화 벌이에 일조했지만 '양공주'로 손가락질당했던 미군 위안부 여성들, 한센병 환자 수용 시설 직원들의 손에, 새로 정착해서 살아가려고 한 땅의 주민들에게 살해당한 한센병 환자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경제 특수를 누린 한국인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베트남 난민들. 동료라 믿었던 남성 노동자들과 남성 지식인들에게도 외면당하고 국가의 폭력을 겪어야 했던 여성 노동자들. 국가가 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거나 그들을 외면하고 기억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평범한 시민들도 그들을 핍박하고 차별하고 잊어버렸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그런 우리 안의 치부를 잊지 말고 직시하길 요구한다. 가장 약한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권리를 누릴 때 이 나라가 진정한 민주공화국이 되기 때문이다. 저자가 전국을 답사하고 독자들도 현대 한국 곳곳을 답사하길 바라는 근본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저자는 자신이 남성이고 지식인이며 자신의 생각을 전할 통로가 있다는 점에서, 자신이 과거의 남성 지식인들이 빠졌던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경계한다. 남에게만 엄격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도 엄격하기에, 잊혀가는 역사, 평범한 사람의 역사, 약한 사람의 역사를 향한 그의 진정성을 믿을 수 있다.

때때로 이런 역사들은 너무 참혹하고 비극적이어서 장엄한 유적, 영광스러운 역사로 눈을 돌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 역사는 우리 자신의 역사고,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 기억해 주지 않는다. 현대 한국 답사는 거창한 일이 아니다. 그저 무심코 지나친 것들에 다시 한번 주의를 기울이고 거기에 어떤 역사가 숨어 있는지 좀 더 찾아보고, 생각해 보고 기억하면 된다. 그 작은 발걸음에 『문헌학자의 현대 한국 답사기』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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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27 0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자의 발걸음이 진정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네요.

바스티안 2024-03-27 08:33   좋아요 0 | URL
평범한 사람들의 역사, 약한 사람들의 역사야말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라는 저자의 주장에 머리를 맞은 듯했고, 전국을 직접 발로 밟으면서 작은 흔적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저자의 수고에 숙연해지더라고요. 제가 했던 답사들도 유명한 문화유산들을 방문하는 거여서 이런 관점으로는 생각 못 했었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주변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무심히 지나치지 말고 더 주의 깊게 바라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거기에 어떤 역사가 남겨져 있을지 모르니까요.

호시우행 2024-03-27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시덕 저자를 기억하려합니다.

바스티안 2024-03-27 18:10   좋아요 0 | URL
따뜻한 문체에서나 독자들을 ‘동료 시민‘으로 부르는 데서나 단체나 국가 이름은 꼭 공식 명칭으로 불러주는 데서나 세심하고 따뜻한 분이라는 게 느껴졌어요. 저도 이분을 기억하려고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