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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쇄 찍는 법 - 잃은 독자에서 읽는 독자로 ㅣ 땅콩문고
박지혜 지음 / 유유 / 2023년 4월
평점 :
'중쇄를 찍는다'는 표현은 일본 드라마 <중쇄를 찍자> 덕분에 많이 알려졌을 것이다. 중쇄란 처음 출간한 책이 시장에서 모두 팔려 나가 같은 책을 더 인쇄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알기로 내가 만들어낸 책 중에서 중쇄를 찍은 책은 아직까지 단 한 권도 없다. 심지어 출간된 지 3년밖에 안 됐는데 절판돼서 더 이상 판매되지 않는 책도 여러 권 있다. 아마 가장 많이 팔린 책도 판매 부수가 천 부는 못 넘었을 것이다. 그런 나로서는 출판사를 차리고 나서 낸 책들의 70퍼센트는 중쇄를 찍었고, 독립하기 전엔 몇 만 부씩은 팔리는 책을 만들었다는 저자가 다른 세상 사람 같다. 나도 그 다른 세상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사실 아직도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었다.
편집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이후 출판 시장의 형편이 더 좋아졌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매년 더 나빠진다는 이야기만 들었고 '출판 시장 최대의 위기'는 과연 어디까지 커질지 짐작도 안 된다. 넷플릭스와 유튜브 보느라 책 읽을 시간이 없는 사람들에게 책을 팔아야 하는데, 나조차도 유튜브에 한 번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럼에도 저자처럼 희망을 찾고 싶다. 그래서 1장 첫 페이지부터 '마치 책 사줄 독자가 모두 사라져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열패감에 사로잡혀' 있는 태도와는 거리를 두겠다고 선언하는 저자의 모습이 반가웠다.
우선 출판업도 제조업이라는 것을 잊지 말고 기술력을 갖춰야 한다는 이야기에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특히 종이책은 한 번 찍히면 다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에 인쇄될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다(정정한 부분을 스티커로 만들어 붙일 수 있지만 임시방편일 뿐이고 추가로 들여야 할 비용과 수고가 만만치 않다). 인쇄하기 전까지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편집 작업을 하다 막상 인쇄 직전에 힘이 풀려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액화천연가스 수송선은 9천 개에 달하는 패널을 깔고, 이 수송선을 만드는 용접 기술자들은 매일 아침 용접 테스트를 거치고 매달 자격증을 갱신한다고 한다. 책 만드는 사람도 그렇게 자기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의 완성도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매번 반복되는 고된 사이클 때문에 해이해질 때 이것을 기억해야겠다고 다시 마음먹게 되었다. 예전에 한 웹소설 출판사 PD가 자신들은 책의 외형까지 만들어내야 하는 종이책 출판사 편집자들과 달리 콘텐츠 자체에 더 집중하고 개발하는 데 힘쓸 수 있다고 자랑했었는데, 나는 오히려 종이책 출판사 편집자들이 책의 겉모습을 더 완전하게 만들어내는 제조업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천 년 동안 그 책에 가장 잘 어울리고 그 책의 내용을 더 온전하게 전달하고 표현할 수 있는 겉모습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민하고 땀 흘렸고, 그래서 지금까지 책의 역사가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책의 내용은 어때야 할까. 저자는 2할의 전복성과 7할의 충분성, 1할의 미래 지향성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전의 책과 같은 내용을 반복한다면 그 책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내용, 새로운 것을 담고 있어야 독자들은 유튜브 동영상을 보는 대신 그 책을 읽기로 선택한다. 그런데 참신한 주장만 있을 뿐 그를 뒷받침할 내용이 없다면 함량 미달인 책이 된다. 그러니 그 책의 함량을 꽉 채워줄 7할의 충실한 내용물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제시하는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어야 출판사의 특성이 뚜렷해진다. 지금 쏟아져 나오는 수많은 비슷비슷한 책들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기존의 책들과 다른 책을 만들 수 있을까, 그러면서 책의 내실은 어떻게 다져야 할까 고민하는 내게 이 비율은 하나의 지침이 되었다.
내 또 다른 고민은 내가 만든 도서 기획안들이 늘 '시장성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그래서 만들고 싶은 책을 만든다는 뚝심을 지켜오고 있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전복성이 구현된다는 저자에게서 희망을 보았다. 실패해도 좋으니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마음을 따라 시도하다 보면 시장이 요구하는 것과 정반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전복성은 시장에 끌려 다니기를 거부할 때 이뤄진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제까지 찾아볼 수 없었던 주제 중에서, 남들은 뭐래도 나는 꼭 해보고 싶었던 이야기를, 우리의 핵심 타깃이 좋아하는 형태로, 해당 주제를 더 깊이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드는 책을 만들어보자고. 저자가 이 책에서 제시한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성공 사례처럼 이것을 실현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다 가닥이 손에 잡혀가는 느낌이 들었다.
중쇄를 찍는 것은커녕 책을 만들 기회가 다시 올지조차 모르는 상황이다. 그래도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중쇄를 찍을 날을 꿈꾼다. 더 많은 독자들이 내가 만든 책을 읽고, 지식을 얻고 위로를 받고 더 깊이 생각하고 책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쇄율 0퍼센트의 편집자인 내게 이 책은 그 꿈을 잃지 않게 해주는 작은 버팀목이 되어준다.이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