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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도시 - 뉴욕의 예술가들에게서 찾은 혼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
올리비아 랭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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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가 나오기 전 "지금 외롭다면 이건 당신을 위한 책이다"라는 제사題辭가 나를 맞는다. 내가 지금 외로운 건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서문 대신 실린 첫 번째 글 「외로운 도시」에서 "사람은 어디서든 고독할 수 있지만, 도시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면서 느끼는 고독에는 특별한 향취가 있다"(p. 13.)고 작가는 말했다. 인구 수백만의 대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교외 지역이라 대도시라기보다는 지방 소도시 같은 느낌이고, 거의 평생을 지낸 곳이라 내겐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혼자 산 적은 한 번도 없고 늘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또 다른 조건으로 봤을 때는 어떨까. "…물리적으로만 고립되어야만 고독해지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오히려 서로 연결되고 가깝고 연대한다는 감각의 부재와 결핍, 즉 어떤 이유에서건 원하는 만큼의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고독의 여건일 수 있다."(p. 14.) 가족과 함께 살고 사이도 좋은 편이니 친밀감을 전혀 느낄 순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별일이 없으면 내가 가족들보다 수십 년은 더 살 테니 나는 혼자 남겨질 것이고,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공동체는 없으며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관심이 없다. 무엇보다 내가 일하고 싶은 분야에는 다시 발도 들여놓지 못한 채 가난 속에서 고립된 채 나이만 먹어갈 것이라는 불안감이 크다. 뼈저리게 외로운 건 아니지만 문득 외로움을 느끼거나, 앞으로 견딜 수 없이 외로워질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 점에서는 나를 위한 책까지는 아닐지라도 내가 읽어도 괜찮을 책일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이 내게 맞는지 미리 생각해 봤다. 


  이 책은 영국의 비평가 올리비아 랭이 뉴욕과 그곳의 예술가들, 그들을 둘러싼 고독에 관해 쓴 여덟 편의 에세이를 모은 것이다. 이 에세이들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겹은 작가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대도시 뉴욕에서 느끼는 고독을 털어놓는 에세이다. 작가는 남자친구와 함께 살기 위해 무작정 뉴욕으로 왔지만, 남자친구는 이미 변심했다. 영국에서 살던 집은 이미 세를 줬으니 한동안은 뉴욕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뉴욕에 친구나 지인이 한 명도 없지는 않았지만, 사람들과 교류하기보다는 집에 혼자 멍하니 있거나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 서핑을 하고, 혼자 이리저리 시내를 거니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허름하고 주변의 소음과 네온사인에 그대로 노출된 집. 불안정한 경제 상황. 사소한 언어 차이에서 느끼는 이질감. 누군가 자신을 따뜻하게 봐주길 바라지만 관음적인 시선에 노출되는 것은 두려운 마음. 이런 것들이 대도시에서 혼자 살아간다는 감각을 더욱 생생하게 했다. 


  작가가 뉴욕에서 느끼는 고독은 뉴욕의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그리는 비평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에워싼 고독에 저항했고, 작가는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과 작품 세계로 고독에 대응했는지 들여다 본다. 에드워드 호퍼는 훤히 들여다 보이는 유리창 안에 혼자 있거나 함께 있어도 대화하지 않는 그림 속 인물들을 통해, 고립되어 있으면서 수많은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고독과 불안을 표현했다. 앤디 워홀은 이주민인 데다 성소수자였고 남들보다 튀는 옷차림과 언행을 하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에게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상처 입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고 같다는 것은 무시당하거나 거부당할 위험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똑같은 이미지들을 무수히 만들어냈고, 그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살아갔다. 사진작가 데이비드 워나로위츠는 부모에게 학대당하고 방치된 채로 자랐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성소수자이자 에이즈 환자로서 편견과 억압과 부딪혀야 했다. 워나로위츠는 자신이 먹고살기 위해 몸을 팔거나 성관계를 가질 사람을 찾아 나서던 뉴욕의 거리들에 랭보(19세기 프랑스의 시인) 가면을 쓴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뉴욕의 아르튀르 랭보 Arthur Rimbaud in New York> 연작을 통해, 뉴욕이라는 화려한 도시 이면에 숨겨진 장소들, 배제된 사람들을 드러냈다. 예술 창작뿐만 아니라 정부의 에이즈 환자 처우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하는 등의 사회 활동을 통해, 자신과 같은 소수자들을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사회에 맞섰다. 헨리 다거는 가족과 유일한 친구가 죽은 뒤로는 이웃과도 거의 교류하지 않으면서 50여 년을 골방에서 살았지만, 그가 요양원으로 떠난 뒤 그가 남긴 300점의 그림과 수천 페이지의 회고록, 15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의 원고가 골방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평생 고립된 삶을 살면서 거대한 또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냈고, 현실과 자신이 만들어낸 우주를 완전히 구분하지 못했다.


  그들이 힘겹게, 치열하게 고독과 맞서는 모습은 연민과 감동을 자아내지만, 작가는 연민하거나 감동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그들의 고독이 그들 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지 않고, 더 큰 사회적 상황이 그들을 더욱 고독으로 몰아갔다고 본다. 이런 성찰이 에세이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또 다른 한 겹이다. 1950년대에 아동이 양육자와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형성해야 이후에 감정적, 사회적으로 발달할 수 있다는 애착 이론이 개발되기 이전, 애정 표현은 아이를 망칠 수 있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헨리 다거의 유년기도 그런 믿음이 지배적인 시대에 속했다. 그는 가정에서도, 보호소에서도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한 채 자라났고, 성인이 되어서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갔다. 에이즈의 원인과 치료법이 밝혀지기 전까지 에이즈 환자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족에게 거부당했으며, 의료진조차 치료를 거부했고 장의사들은 시신을 매장해 주지 않았다. 보수적인 정치인들은 에이즈의 원인을 성소수자들의 '부도덕한' 성행위 탓으로 돌리고 정책 결정권자들은 에이즈 환자들에게 필요한 교육과 자금원을 고의로 차단했다. 많은 성소수자 예술가들이 걸어 다니는 병균 덩어리인 양 취급받고 쓸쓸히 죽어갔다. 데이비드 워나로위츠는 병든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분개했고, 사회 운동 단체 '액트 업Act Up'에 가입해 에이즈 환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데 힘썼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고독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서의 낙인과 배제가 낳은 결과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이런 낙인과 배제에 저항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세 겹의 층은 지층처럼 뚜렷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섞이며 글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만든다. 그 모든 층에 녹아 있는 것이 뉴욕이라는 도시 자체다. 뉴욕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나는 구글 지도 중 뉴욕 시의 지도를 모니터에 띄워 놓고 책을 읽었다. 구체적인 지명이 나올 때마다 검색을 했고, 그곳을 클릭하면 화면 왼쪽에 그 장소의 사진과 그 장소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나왔다. 그 사진과 설명으로 그곳이 어떤 곳인지 짐작했다. 책 속에서 작가와 뉴욕의 예술가들이 머물거나 방문했거나 활동했던 장소들은 생각보다 서로 가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을 따라 뉴욕 시내 곳곳을 걸어 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작가는 고독에 관한 이 책을 쓰면서 오히려 놀랄 만큼 많은 관계를 맺었다고 했는데, 나는 고립을 이야기하는 이 책을 통해 오히려 저 멀리 있는 뉴욕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됐다. 


  뉴욕이라는 공간 자체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고독과 마주하며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과 예술 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 보고 나왔다. 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고독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고독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는 대신, 고독을 자신의 삶과 예술 세계의 일부이자 원동력으로 끌어안았다. 작가는 고독이 고쳐야 할 문제점이나 누구를 만나서 치유되어야 할 병이라기보다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 낙인과 배제라는 더 큰 힘이 낳은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 속의 예술가들은 고독 속에서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 보고 고독에 대응하는 예술 세계를 만들어내거나, 자신을 더 고독하게 만드는 사회의 낙인과 배제에 맞서고 서로 유대했다. 누구나 고독을 훌륭한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독을 끌어안거나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고독과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이다. 외로운 사람들을 더 외롭게 만드는 세상에 저항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독에 대한 이런 성찰과 행동이 세상을 더 다정하게 만들 것이다. 세상이 더 다정해진다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언젠가 떠난다 해도 나는 덜 외롭고 더 따뜻한 마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P. S. 1. 원문을 읽어 보지 못했지만 번역본만 봤을 때도 세밀한 감정의 결까지 살아 있는 훌륭한 번역이었다. 번역자 후기는 단순한 번역 후기가 아니라 이 책을 온전히, 깊이 이해하고 쓴 좋은 서평이다. 


P. S. 2. 텍스트 자체는 뛰어나지만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작품들 중 책에 실린 도판은 몇 점밖에 안 되는 것이 아쉽다. 작가가 작품 각각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창의적으로 해석하지만, 독자 자신이 작품을 직접 보고 각자의 감상과 해석을 내놓는 것도 중요하다. 저작권이 아직 안 풀린 현대 미술 작품들이라 저작권료 부담이 있었을 것이고 원서 자체에 도판이 많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욕심을 내서 도판을 더 찾아 넣었다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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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일 밤의 미술관 - 하루 1작품 내 방에서 즐기는 유럽 미술관 투어 Collect 5
이용규 외 지음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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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출판사 면접에서 ‘요새 미술 분야 베스트셀러 1위가 뭔지 아느냐’, ‘그 책을 읽어 봤느냐’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한 이후로, 지금 미술 분야에서 인기가 있는 책들을 살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사 책을 만들고 싶다고 하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책에만 관심이 있었지 독자들이 좋아하는 책에는 너무 관심이 없었다. 여러 인터넷 서점 홈페이지들을 훑어보면서 공통적으로 미술 분야 베스트셀러로 꼽힌 책이 『90일 밤의 미술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평소에는 읽지 않는 ‘하루 1페이지 OO’ 유의 책이지만, 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좋아하는지 직접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읽게 되었다. 


  코로나 때문에 외국은커녕 다른 지역으로 가는 것도 망설여지는 이 때, ‘하루에 한 작품 내 방에서 즐기는 유럽 미술관 투어’라는 이 책의 콘셉트는 더 매력적으로 느껴진다. 이 책은 유럽 곳곳의 유명 미술관에서 가이드 투어를 진행해 온 현직 도슨트docent(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서 관람객들에게 전시물을 설명하는 사람)들이 엄선한 작품 90점을 90일 동안 한 점씩 감상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각 나라별로 챕터가 나누어져 있고, 각 나라별 챕터 안에는 각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한다고 추천하는 작품들이 연대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런 구성이 각 나라, 각 미술관을 차례대로 방문하면서 미술 작품들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챕터 앞에는 그 나라에 있는 주요 미술관들이 어떤 곳인지 간단하게 설명되어 있고, 챕터 마지막에는 미술관 전경을 담은 사진이 들어가 가이드북을 들고 여행하는 느낌을 더한다. 외국 여행이 그리운 독자들은 간접적으로나마 유럽 미술관 기행을 하는 셈이다. 


  유럽 미술관들에서 직접 가이드 투어를 진행해 온 도슨트들이 각 작품을 해설한다는 데서 독자들은 신뢰감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을 쓴 다섯 명의 도슨트들은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이상 동안 유럽 각지의 유명 미술관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여행자들에게 미술 작품을 설명해 왔다. 특별히 독창적인 시선으로 각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지는 않지만, 그 작품을 볼 때 알아두면 좋은 배경 지식과 그 작품 자체의 특징 모두를 충실하게 설명한다. 해설이 존댓말로 쓰여 있어 도슨트들의 해설을 옆에서 바로 듣는 듯한 느낌이 든다. 도슨트들이 각 작품의 해설 끝마다 붙여 놓은 감상 팁들도 그림을 감상하는 데 좋은 힌트가 된다. 


  한 작품에 대한 해설은 4, 5페이지 정도이다. 4, 5페이지면 출퇴근 시간이나 점심시간, 자기 전에 잠깐 짬을 내어 읽을 수 있을 정도의 분량이다. 하루에 그림 하나와 4, 5페이지의 글. 그만큼의 위로와 교양이 지친 하루의 끝에 마음을 달래줄 수 있다. 많은 그림을 보려고 애쓰기보다는 그림 하나에 집중하며 그 그림이 전해주는 아름다움과 감정에 위안을 얻는다. 아주 적은 양이어도 지식을 쌓았다는 것 자체가 작은 성취감을 준다. 하루치씩 작품 해설을 읽을 때마다 목차와 찾아보기의 체크박스에 체크를 할 수 있게 해, 이 작은 성취가 눈으로 보이게 한다. ‘사는 게 쉽지 않을 때 이 노래를 꺼내 먹어요’라는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지치고 힘들 때 이 책을 꺼내 교양 한 스푼, 위안 한 스푼씩 떠먹게 하는 게 이 책의 의도가 아닐까. 그 의도가 독자들에게 와 닿기에 호응을 얻고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이 요즘 서점에 넘쳐나는 ‘하루 1페이지 OO’, ‘365일 OO’ 유의 책 중에서 군계일학이라고 할 만큼 특출나지는 않다. 도판의 화질도 도슨트들이 설명하는 디테일을 볼 수 있을 만큼 좋지는 않다. 직접 그 미술관에 가서 작품 실물을 보고 확인하라는 의도라 해도 코로나든 재정 상황이든 미술관에 직접 가기 어려운 독자들을 위해서, 본문에 설명된 디테일을 포착한 세부 도판을 넣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좀 더 깊이 있게 미술사 지식을 쌓고 싶은 독자들에게는 이 책이 가볍고 얕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하루에 필요한 만큼의 위로와 지식을 주는 것도 책이 할 수 있는 소중한 역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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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우리를 꿈꾼다 - 예술적 인문학 그리고 통찰 : 심화 편
임상빈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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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은 우리를 꿈꾼다』라는 알쏭달쏭한 제목과 '예술적 인문학 그리고 통찰'이라는 거창한 부제, 그 뒤에 붙은 '심화 편'이라는 말, 꽤 두꺼운 책의 두께까지 이 책이 어렵고 심오할 것이라는 인상을 굳힌다. 하지만 작가의 의도는 정반대다. 예술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어렵고 멀게만 느꼈던 예술을 더 가깝게 느끼게 되는 것, 일상에서도 예술을 누리게 되는 것. 그러기 위해 저자는 '예술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줄까', '어떻게 예술 작품이 만들어질까', '우리는 예술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차근차근 풀어간다.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지 않고 상호 간의 생산적인 자극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설명과 대화 형식을 모두 사용했다고 하니, 나도 내 친구 H와의 대화를 통해 이 책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나: 미술 작품을 보존하기 위해 수장고 안에만 넣어두고 전시는 하지 않는다면, 그 작품에는 의미가 있을까?


H: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나: 그렇지. 예술 작품은 보여주기 위한 거니까. 이 책에서는 예술을 보여주는 방법으로 전시, 재현, 표현이 있다고 해.


H: 그 셋은 어떻게 다른 거야? 


에드 루샤, <스탠더드 주유소 연작>, 1960년대.


나: 우선 전시는 '이건 내 작품이다, 봐' 하는 거지. 겉으로 보이는 걸 그대로 전달하는 거. A는 A다. 이 그림들은 미국의 팝아트 화가 에드 루샤 Ed Ruscha 가 그린 <스탠더드 주유소> 연작인데, 서로 비슷비슷한 미국의 주유소들을 비슷한 구도로 특색 없이 그려놨어. 


H: 의미라고는 딱히 없다, 그냥 미국에 널리고 널린 주유소일 뿐이다, 이 얘기네. 관람객들이 괜히 의미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그럼 재현은?


필립 드 샹파뉴, <바니타스 정물화>, 1671.


나: A는 B다. 이 작품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다.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 해골은 죽음의 상징, 이런 식으로 널리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약속된 상징들을 가지고 의미들을 나타내는 거지. 17세기 서양에서는 '바니타스vanitas'라는 정물화가 유행했는데, '바니타스'는 라틴어로 '공허함'이라는 뜻이야. 이 세상의 무상함을 시들어 버리는 꽃,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 시간의 유한함을 뜻하는 모래시계 같은 정물들을 모아 재현한 거지. 


H: 꽃이든 나무든 사람이든 그리려는 대상을 똑같이 그려내는 게 재현인 줄 알았는데.


나: 물론 그것도 재현이지만 이 책에서 정의하는 예술의 재현은 그래. 


H: 그럼 표현은?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1889)의 세부


나: 이 사진을 봐.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의 일부를 클로즈업한 건데, 물감 덩어리를 짓이겨 놓은 것처럼 강렬한 붓질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을 자기가 그리고 싶은 대로, 자신만의 방식으로 나타내는 게 표현이야. 


H: 그럼 표현은 재현보다는 개인적인 거네. 화가 A와 B가 재현은 비슷하게 할 수 있어도 표현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나: 그렇지. 이 책에서는 예술가가 그 표현을 어떻게 해 볼 수 있느냐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우선 다양한 도구로 표현해 볼 수 있다고.


H: 유화 물감을 붓에 묻혀서 캔버스에 그리는 거 말고 다양하게? 수채화도 있고 아크릴 물감도 있고.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도 있더라.


임상빈, <가정용 랩 1>, 2001.


: 그것뿐만 아니라 기술이 발전되고 현대 미술에서 '예술'로 규정하는 것의 폭이 넓어지면서, 별에 별 재료들이 다 미술 재료로 사용될 수 있대. 이 책을 쓴 작가는 2D 스캐너로 자기 몸이나 여러 가지 물건을 스캔한 이미지로도 작품을 만들었다고 해. 이 작품은 집안에서 쓰는 랩을 스캐너로 스캔해서 만든 거래.


H: 캔버스에 검은 칠을 하고 하얀색 물감으로 물결이나 외계 행성을 그린 거 같은데. 추상화 같기도 하고. 현대 미술에서는 이런 재료로도 예술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구나. 


: 응, 그래서 작가는 요즘 미대에서 전통적인 도구만 고집하는 경우가 많다고 안타까워해. 


H: 입시 미술에 길들여진 애들한테 갑자기 자유를 주니까 그렇지. 정해진 공식에 맞춰 그림을 그리다 이제 와서 마음대로 해 보라면 당황스럽지. 그리고 취업을 하려면 요즘 트렌드에 맞춰서 그림을 그려야 되지 않을까?


: 응, 그건 작가도 인정하지. 전통적인 도구로 전통적인 재현 방법을 익히는 건 일종의 보험이라고. 하지만 관습은 깨라고 있는 거고 모든 게 예술이 될 수 있다고 얘기해. 


H: 그 부분은 미술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위한 부분이네. 일반 독자들보다는. 


: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긴 했는데, 전공자만 미술을 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취미로 미술을 하는 사람도 관습을 떠나서 자기 마음대로 작품을 만들 수 있지. 미술 하는 사람들은 이런 고민을 하는구나, 엿볼 수도 있고. 


'우리는 어떻게 예술 작품을 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도 이 책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해. 우선 도상 해석. 


'도상 해석'은 특정한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이 그 문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지식을 바탕으로 그림을 읽어내는 거야. 우리는 기독교에 대한 지식이 있으니까 젊은 여자가 아기를 안고 있는 서양 명화를 보면 그게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린 거라는 걸 알잖아. 그런데 시대가 지날수록 아기 예수는 그냥 몸만 작은 어른처럼 권위 있어 보이는 모습에서 그냥 인간 아기처럼 연약하고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변화한대. 이렇게 여러 시대에 걸쳐서, 아니면 같은 시대의 여러 화가들이 그린 그림 속 한 도상의 변천사를 살펴보는 건 도상 해석이라고 할 수 있지. 


H: 그건 우리 같은 일반 관람객이 아니라 미술사학자들이 연구하는 방법인 거 같은데. 


나: 또 다른 방법인 '지표 찾기'는 미술사학자보다는 탐정이 추리하는 방식에 가까워. 다른 사람들이 놓친 단서를 미술 작품 속에서 찾는 거지?


H: 예를 들면?


산드로 보티첼리, <동방박사의 경배>, 1475-1476.


나: 이 그림은 산드로 보티첼리의 <동방박사의 경배>인데, 이 그림 속에 보티첼리 자신의 자화상을 숨겨뒀어.


H: <프리마베라>로 유명한 그 화가? 이 많은 사람 중 누가 보티첼리인지 어떻게 찾아내?


나: 이런 경우 화가는 보통 관객과 눈을 맞추는 모습으로 자기를 그려넣는 경향이 있대. 


H: 그럼 그림 왼쪽에 빨간 옷을 입은 갈색머리 남자?


나: 아니. 맨 오른쪽에 누런 옷을 입은 남자. 


H: 이런 단서를 모르는 보통 관람객한테는 불리한데. 


나: 그림들을 많이 보고 미술에 대한 책도 많이 읽다 보면 이런 단서들을 얻게 돼. 이렇게 작가들이 카메오마냥 자기를 그림에 끼워넣는 것 말고도 작가 특유의 필치로 누가 그렸는지 알아내는 것도 지표 찾기고. 이 그림은 반 고흐 그림이다. 이 그림은 모네 그림이다. 붓 터치만 봐도 알 수 있잖아?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표상. 표상은 누군가의 생각과 바람, 목적이 반영된 기호인데 그걸 읽어내는 거지. 표상에는 상징과 알레고리가 있어. 상징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A는 B다, 하고 딱 정해 놓는 거. 하트는 사랑이고 해골은 죽음이다 이런 식으로. 


H: 알레고리는 어떤 건데? 안 그래도 상징이랑 알레고리가 헷갈리더라고. 


나: 자기만의 맥락에 따라 여러 가지 도상들을 조합해서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거. 아까 봤던 바니타스 정물화도 알레고리야. 허무함을 상징하는 여러 도상들을 모아놔서 '인생의 허무함을 알고 인생의 유한함을 기억하라'는 메시지를 만들어내는 거지. 


H: 자신만의 의미라기에는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거 같은데?


나: 응. 사실 상징에 가깝기도 하고. 이런 걸 전통적인 알레고리라고 해. 


H: 그럼 화가가 독창적으로 자신만의 의미를 만들어낸 알레고리로는 어떤 게 있어?


왕광이, <샤넬 No.5>


나: 중국의 대표적인 현대 미술 화가 중 왕광이라는 사람이 있어. 위에서 보다시피 이 사람은 공산당을 선전하는 사람들과 서구 자본주의 거대 회사의 로고를 한 화면에 그려. 


H: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뒤섞여 있는 지금의 중국을 나타낸 건가?


나: 그렇지.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지만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적용되는 지금 중국 사회의 모습. 절대 공존할 수 없었던 두 가지가 섞여 있는 현실을 사회주의를 나타내는 단체 인물화와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거대 회사 로고를 합쳐서 나타낸 거야. 


H: 이렇게 예를 들면서 얘기하니 좀 이해가 된다. 얘기가 길어졌는데, 예술에 대한 얘기를 꽤 많이 담고 있는 책인가 보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너의 감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나: 개인사가 많이 섞이고 좀 더 가벼운 『미학 오디세이』?


H: 네 설명에서는 작가 개인사 얘기가 별로 없던데?


나: 작가 개인사는 걷어내고 책에서 설명하는 몇 가지 개념들만 얘기했으니까. 일상적인 개인사에 빗대서 얘기하니 이해에 도움이 되긴 하는데, 좀 더 정리됐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거지. 작가의 너무 개인적인 사생활까지 들여다보는 느낌? 


H: 난 굳이 듣고 싶지 않은데 상대방이 자기 애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오늘은 걸음마를 했어요, 오늘은 엄마라고 했어요 뭐 이런 얘기를 하는 느낌? 자기한테 제일 친숙한 거에 빗대서 설명하는 것도 이해되는데 읽는 네 입장도 이해되긴 해. 


나: 뭐, 일상과 연관시켜 설명하니 이해는 잘 되긴 했어. 작가와 부인이 티격태격하면서 생각을 주고받는 것도 나름 여러 방향으로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됐고. 제목이나 부제만큼 엄청 심오한 책은 아니지만 예술이 무엇인지, 어떻게 만들어지고 감상되는지 알아두면 좋은 개념들은 깔끔하게 잘 정리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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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그림과 서양명화 - 같은 시대 다른 예술
윤철규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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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미술사가 전공이지만 한국미술사 과목들도 들었는데,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릴 때 우리나라에서는 누가 어떤 그림을 그렸을까’ 궁금해했던 적은 없다. 서양미술사도 한국미술사도 각각 공부할 내용이 많아 공부하기에 바빴을 뿐. 그런데 이 질문에서 시작해 우리 옛 그림과 서양 그림의 대조표를 만든 사람이 있다. 동양 미술 전공자인 그는 그림의 소재와 주제, 화가 자신의 개인사, 그려졌을 당시의 시대상, 미술사에서의 위상 등을 연결고리로 삼아 60쌍의 조선 그림과 서양 그림을 엮어냈다. 그렇게 엮은 조선과 서양의 명화들을 이야기한 책이 『조선 그림과 서양명화』다. 


  책을 읽기 전 가장 염려되었던 것이 ‘아무리 봐도 서로 연관성이 없는 조선 그림과 서양 그림을 짝지어서 억지로 비교하는 경우들이 있지 않을까’였다. 저자 자신도 조선 그림과 서양 그림을 어떻게 짝 지을지 고심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우선 현재 남아 있는 우리 그림이 서양 그림들에 비해 너무 적어 짝을 지을 그림을 찾기 쉽지 않고, 동서양의 미술관이 너무 달라 섣불리 연관시키고 비교할 수 없다.


 (위) 정선, <금강전도>, 18세기. (아래) 카날레토, <대운하 입구>, 1730년경.

정선과 카날레토는 18세기 조선과 유럽에서 일어난 여행 붐 속에서 실제 풍경을 토대로 자신들만의 기법을 활용한 풍경화를 그려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소재와 주제가 겹치는 조선과 서양의 그림들이 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림에는 화가와 주문자와 얽힌 인간사가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그 그림이 그려진 시대와 사회의 사상과 분위기가 반영되어 있다. 저자는 같은 소재를 그린 두 그림(불교의 지옥을 그린 작자 미상의 <지장시왕18지옥도>와 기독교의 지옥을 그린 히에로니무스 보스의 <최후의 심판>)을 엮기도 하고 같은 주제를 그린 두 그림(고통받는 이들을 향한 구원을 주제로 한 이자실의 <도갑사 관음32응신도>와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을 엮기도 한다. 둘 다 봄 풍경을 그렸지만 말년의 운은 서로 정반대였던 조선의 화가와 서양의 화가(<탐매도>를 그렸다고 전해지는 신잠과 <프리마베라>를 그린 산드로 보티첼리)를 비교하기도 하고, 여행 붐의 시대에 실제 경치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더한 풍경화를 그려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두 화가(<금강산도>를 그린 정선과 <대운하 입구>를 그린 카날레토)를 비교하기도 한다. 이렇게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그림들을 찾으려다 보니 다른 미술사 책에서는 많이 언급되지 않았던 작품들(조선 불화나 행사 기록화들)이 담기게 되어, 독자들에게 다소 낯선 작품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안겨준다.


  저자는 한 쌍의 조선 그림과 서양 그림을 깊이 있게 비교 분석하기보다는, 조선 그림을 먼저 설명한 뒤 그와 비교되는 서양 그림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한 주제당 4, 5페이지 정도의 분량이니 한 작품당 2, 3페이지 정도의 설명이 들어가는 셈이다. 조선에서 이런 그림을 그렸을 때 서양에서는 이런 그림을 그렸구나, 이런 면에서 두 그림이 한 쌍으로 엮였구나, 하고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이다. 하지만 각 작품의 조형적 특징과 그 작품이 그려진 시대상이 충실하게 설명되어 있어 미술사뿐만 아니라 역사도 함께 공부하는 느낌이다. 저자가 동양 미술 전공자이기 때문에 서양 미술사 쪽 설명이 상대적으로 부실할까 걱정했는데, 서양 쪽 작품들도 작품의 특징과 배경 모두를 꼼꼼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조선 미술 부분과 서양 미술 부분의 균형이 잘 잡혀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조선 미술과 서양 미술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도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저자는 조선 미술이 서양 미술보다 우월하다고도 자랑하지도 않고, 서양 미술보다 못하다고 열등감에 빠져 있지도 않다. 그저 조선의 화가들이 이 시기에 이런 그림을 그렸고, 동시기에 서양 미술가들은 이런 그림을 그렸다고 설명할 뿐이다. 독자들이 우리 것과 남의 것 모두를 잘 알기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균형 잡힌 시선이다.


각 주제의 첫 페이지에는 각 그림이 그려진 시기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졌던 그림들의 제작 연도가 정리된 연대표가 있어, 조선 미술사와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나란히 볼 수 있다. 

출처: 인터넷 서점 해당 도서 상세 이미지

 

  독자들이 우리 미술과 서양 미술 모두를 잘 알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은 각 주제 첫 페이지의 연대표이다. 이 연대표에는 그 주제 안에서 비교되는 한 쌍의 조선 그림과 서양 그림, 비슷한 시기의 그림들이 시각적으로 정리되어 있어, 두 그림뿐 아니라 두 미술사의 흐름까지 나란히 비교해 볼 수 있다. 다만 각 시기(고려 말과 조선 전기, 조선 중기, 조선 후기)별로 나눠진 각 챕터 앞에 각 시기의 조선 미술사와 서양 미술사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정리하는 글이 있었다면 두 미술사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독자들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또 한 가지는 풍부한 도판이다. 너무 어둡게 인쇄되어 디테일이 잘 보이지 않는 <수월관음도>, 해상도가 작은 도판을 확대해서인지 네모난 픽셀이 그대로 보이는 <독조도>를 제외하면 도판들의 화질도 좋은 편이다. 책 자체의 판형이 크고 도판도 큼직큼직하게 배치해 그림을 감상하기에도 좋다. 본문에서 설명하는 부분만 따로 클로즈업한 세부 도판도 함께 실어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조선 그림과 서양 그림의 심도 깊은 비교 분석을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아쉬울 수 있다. 하지만 서양  화가들이 이런 그림을 그릴 때 우리 화가들은 이런 그림을 그리며 한국 미술사를 이루어갔다는 것을 확인해 보는 것만으로 흥미롭다. 각 그림이 그려질 때의 시대상도 충실하게 설명되어 우리 역사의 흐름과 서양 역사의 흐름도 비교해 볼 수 있다. 책을 읽고 나서 독자 스스로 또 다른 주제나 연결고리로 조선 그림과 서양 그림을 짝지어 보고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P. S. 정작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된 <모나리자>는 본문에서 조선 그림과의 비교 분석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모나리자>가 1503년에서 1506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니 이 책에 실린 조선 그림들 중 이상좌의 <나한도>나 신잠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탐매도>가 비슷한 시기에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둘 다 <모나리자>와 짝을 짓기에는 성격이 너무 다른 작품들이다. 비슷한 시기에 <모나리자>와 짝지을 만한 조선 그림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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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김선지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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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학원에서 미술사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미술사에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있었던가?” 내가 프리다 칼로를 이야기하자 교수님이 말했다. “프리다 칼로프리다 칼로는 디에고 리베라 아류잖아또 다른 사람은 없어?” 나도 다른 학생들도 위대한 여성 미술가를 한 명도 더 말하지 못했다하지만 교수님은 틀렸다프리다 칼로는 결코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아류가 아니다그리고 이렇게 질문했어야 했다. “왜 미술사에는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없을까?”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는가이것은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klin이 던진 질문이다렘브란트루벤스마네모네반 고흐피카소까지 수많은 남성 거장들이 미술사에 이름을 남겼다그런데 이들에 필적하는 여성 거장은 미술사에서 찾아볼 수 없다노클린은 미술사에서 여성 거장이 나타나지 않은 원인으로 남성 중심 사회의 성차별을 지목했다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미술 교육을 받는 데도 작품 활동을 하는 데도 제약을 받았고어머니이자 아내로서 육아와 가사 노동을 떠맡았기 때문에 온전히 작품에 집중할 수 없었다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는 그렇게 자신을 옭아매는 가부장적 사회의 성차별과 싸우며 자신의 길을 개척했던 여성 미술가들의 이야기이다.


  이 책에 실린 21명의 여성 미술가들 중 대다수가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다여성 미술가의 작품은 남성 미술가의 작품보다 열등한 것아류로 여겨지거나심지어 동시대의 다른 남성 미술가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졌기 때문이다.


마리에타 로부스티, <자화상>, 1580년.

마리에타 로부스티는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 틴토레토의 딸로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지만, 수백 년 동안 아버지의 명성에 가려져 있었다.


  그렇게 지워진 여성 미술가 중 한 사람이 마리에타 로부스티Marietta Robusti우리는 마리에타 로부스티가 누군지 잘 모르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잘 알고 있다본명인 자코포 로부스티Jacopo Robusti보다 별명인 틴토레토Tintoretto’로 잘 알려진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의 화가마리에타는 틴토레토의 자녀들 중 예술적 재능이 가장 뛰어났고틴토레토는 평생 동안 딸과 공동 작업을 했다딸이 서른이 될 때까지 결혼조차 허락하지 않고자신이 죽을 때까지 한 집에서 같이 살아야 한다는 조건을 붙여 데릴사위를 들였을 정도로 틴토레토는 딸에게 집착했다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의 군주들이 마리에타를 궁정화가로 채용하려 했지만틴토레토는 마리에타를 자기 작업장에서만 일하도록 했다.


<소년과 함께 있는 노인의 초상>, 1585년.

틴토레토가 아닌 마리에타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지만, 아직까지 소장처인 빈 미술사박물관에서는 틴토레토의 작품으로 전시되고 있다.


  마리에타가 아이를 낳다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난 후틴토레토의 창작 능력은 급격히 떨어졌다페미니스트 미술가 그룹인 게릴라 걸스Guerilla Girls는 사실상 틴토레토 작업장의 핵심이 그녀였기 때문에 그녀가 죽은 뒤로는 틴토레토가 예전만큼의 창작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마리에타가 자신의 서명을 남긴 작품은 단 한 개였기에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작품 대부분은 아버지나 다른 남성 화가의 작품으로 전해져 왔다최근 르네상스 시기 여성 미술가들의 작업을 재조명하는 시도가 이루어지면서 아버지의 작품으로 알려진 그림들이 그녀의 그림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녀를 떠나지 않았던 아버지의 그늘이 이제야 조금씩 걷히고 있는 셈이다.


  마리에타가 겪었던 가부장제의 억압 외에 여성들이 미술사의 거장으로 자리 잡지 못하게 했던 원인이 또 있다회화와 조각은 미술 분야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분야로 여겨졌는데여성들은 정조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가족이 아닌 남성 미술가의 수업을 사적으로 들을 수 없었고회화 기술을 익히는 데 필요한 누드 데생 수업도 받을 수 없었다또한 여성은 육체적인 힘도 지적 능력도 부족해 조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편견이 계속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이 할 수 있었던 예술 작업은 공예와 자수였고이것들은 남성들에게만 허락된 회화조각건축보다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다.




(위)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골로 뒀던 패션 디자이너 로즈 베르탱이 디자인한 드레스

(가운데) 요아나 쿠르턴, <사냥 장면>, 1700. 종이 공예 작품이다. 

(아래) 영국의 정원 디자이너 거트루드 지킬이 디자인한 헤스터콤 하우스의 정원.


  그래서 저자가 선택한 전략은 미술사의 범주를 회화조각뿐만 아니라 패션공예디자인 분야까지 확장해 살펴보는 것이다그러면서 가난한 시골 소녀에서 세계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가 된 로즈 베르탱종이 오리기 공예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켰던 요아나 쿠르턴시력 손상 때문에 화가의 길을 포기했지만 캔버스 대신 정원 조경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구축한 거트루드 지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자신의 예술을 펼쳤던 여성들의 삶이 드러난다미술사의 주류에 속하지 않는 장르에서 활약했기 때문에 미술사의 거장으로 인정받지는 못했지만그녀들은 분명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많지 않은 분량 안에 21명이나 되는 미술가들을 다루다 보니 한 명당 내용이 그렇게 깊지 않다는 것이다요아나 쿠르턴의 경우 도판을 제외한 텍스트 설명이 4페이지밖에 되지 않는다이제 막 재조명되기 시작한 미술가들이 대부분이라 관련 연구 자료가 부족해서였겠지만좀 더 깊이 있게 여성 미술가들을 알고 싶었던 독자로서는 맛보기만 한 기분이다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는 21명의 여성 미술가 모두가 유럽 출신이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아메리카 지역의 여성 미술가들은 한 명도 다루어지지 않아서양미술사 책이라 하더라도 유럽 쪽에 치우쳐져 있다는 인상을 준다근현대에 들어선 이후로 서양 미술 분야에서 활약한 아시아아메리카 지역의 여성 미술가들도 많을 텐데화질이 낮은 도판들이 종종 눈에 띄고 크기를 너무 작게 해 놓은 도판들이 많은 것도 미술사 책으로서는 아쉬운 부분이다판면 구성을 수정해서라도 도판을 더 크게 보여주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이 아쉽지만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는 남성 중심의 미술사에 가려져 있던 여성 미술가 21명을 만날 수 있게 했다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는 책이다각자 처한 상황과 한계 속에서도 자신이 갈 길을 모색하고 개척해 갔던 그녀들의 삶이아직도 남아 있는 성차별이라는 벽을 허물려고 하는 우리에게 영감과 힘을 준다아직도 전 세계에서 남성 미술가 대 여성 미술가의 전시회 비율이 70 대 30일 정도로 미술계의 성차별은 심각하다그러나 나는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줄 것입니다라는 17세기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선언을 마음속에 품고 계속 정진하는 여성 미술가들이 있기에위대한 여성 미술가들의 이름을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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