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들, 바우하우스로부터 - 축소되고 가려진 또 하나의 이야기
안영주 지음 / 안그라픽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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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우하우스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독일에서 미술과 공예의 융합을 목표로 세워진 종합 예술학교다. 응용 미술인 공예보다는 순수 미술인 미술이 위에 있다는 당시의 고정 관념을 깨고 모든 미술 분야를 통합하려 했고, 건축과 디자인에 기하학적인 조형미를 더했다. 바우하우스 특유의 단순하고 기하학적이면서도 실용적인 디자인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건축물과 사용하는 물건의 디자인에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바우하우스에 대해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런데 이것만이 우리가 100년이 넘도록 곱씹어야 할 바우하우스의 의미일까? 저자는 흔히 알려져 있는 바우하우스 설립의 의의와 바우하우스가 현대 조형 예술에 남긴 영향에서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린다. 저자가 눈을 돌려 바라본 것은 바우하우스의 여성들이다. 여성들도 분명 바우하우스의 일원으로서 자기 분야에서 활약했지만, 바우하우스의 역사에서 조명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한 축은 바우하우스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차별받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겉으로는 미술과 공예, 남성과 여성은 평등하다고 주장했고, 여성의 입학을 허용했다. 당시 여성들은 바우하우스가 한 사람과 전문가, 예술가로 인정받을 발판이라고 생각하고 바우하우스의 문을 두드렸다. 학교를 설립한 해에는 지원자 중 여성의 비율이 더 높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여학생들의 입학금은 남학생들의 입학금보다 더 비싸게 책정되었다(바로 다음 해에 남학생들과 같은 금액으로 조정되었지만, 왜 처음에는 남학생들보다 입학금을 많이 받았는지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다). 바로 이듬해에는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가 예외적인 재능을 가진 여성들만 받아들여야 한다며 여학생 모집 정원을 전체 정원의 3분의 1로 축소했다. 그런 데다 회화나 건축 같은 순수 미술 분야는 물론이고, 공예 분야에서도 '여성은 무거운 공예 분야에서 일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목공, 금속 공방에 여학생이 들어가는 것을 제한했다. 미술과 공예, 남성과 여성의 평등을 주장하면서 둘 사이의 이분법과 위계를 누구보다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고, 구조 자체로 여성을 차별하고 있던 곳이 바우하우스였다.


  이야기의 또 다른 축은 그러한 차별을 뚫고 자기 분야에서 자신의 예술을 개척해 간 여성들의 이야기다. 바우하우스의 여학생들은 '여성에게 적합하지 않은 분야'라는 이유로 전공 선택에도 제약을 받았고, 바우하우스의 조형 원칙을 열심히 공부하고 그에 따라 공예 작품을 만들어도 '열등감의 발로'라는 평가를 받았다. 직조 공방의 남성 교수가 자신은 직조공이 아니라 미술가라는 자부심에 갇혀 직조에 대한 실무 지식은 익히지도 않고 학생들 스스로 직조를 익히도록 방치하는 일까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 공예 기술을 익히고 공방의 커리큘럼을 다시 짜고 훌륭한 제품 디자인을 만들어낸 여성들이 있었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수용소에 갇혔지만, 바우하우스에서 배운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며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었던 프리들 디커 브란다이스, 미국으로 건너가 직조를 산업의 측면에서나 예술의 측면에서나 한 단계 끌어올리려 했던 아니 알베르스, 처음 금속 공방에 들어갔을 때 남학생들이 시키는 허드렛일을 도맡아 해야 했지만, 결국 오늘날까지도 사용되는 여러 일상용품 디자인의 원형을 만들어낸 마리안네 브란트 등 바우하우스의 일곱 여성 예술가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담겨 있다. 자신을 제약하는 것들을 뚫고 자기 예술을 펼쳐낸 그녀들을 조명하면서, 그녀들이 그러한 한계에 부딪히게 만든 바우하우스의 시스템과 차별이 얼마나 부당하고 불합리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작은 판형에 200페이지가 조금 넘는 얇은 책이지만, 우리가 보지 못했던 바우하우스의 이면을 우리 눈앞에 들여다 놓는 책이다. 검은색과 하얀색, 주황색으로만 이루어진 간결한 디자인이 바우하우스의 제품 디자인을 연상시켜먼서도 텍스트에 온전히 집중하게 한다. 저자가 서문에서 말한 것처럼 이 책에 소개되지 않은 바우하우스의 여성들을 다른 책이나 글에서도 만나게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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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금성의 그림들 - 나의 생명이 그림으로 연결되어 어느 날 당신과 만날 것이다 주용의 고궁 시리즈 2
주용 지음, 신정현 옮김, 정병모 감수 / 나무발전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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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이 가는 신간들은 인터넷 서점의 미리보기로 조금씩 읽어보곤 한다. 이 책도 그렇게 앞의 몇십 페이지를 읽어본 책이었다. 미리 읽어본 부분 중에서 한 옛 화가의 시점에서 쓴 서문에 사로잡혔다. 과거인이 화자인데도 '부가가치'라는 현대의 용어를 쓰면서 천연덕스럽게 '이 말은 여러분 시대의 말'이라고 인정한다. 그런데도 정말로 옛 화가 중 누군가가 우리에게 건네는 말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그린 그림인데도 그 그림의 미래는 통제할 수 없고, 자신이 죽고 나서 수백 년 뒤에 그 그림을 볼 사람들을 상상해 볼 수밖에 없는 화가의 고독, 그럼에도 그림을 통해 아주 먼 미래에 자신의 그림을 보아줄 사람들과 만날 것이라는 희망. 이 두 가지 감정이 4페이지밖에 안 되는 짧은 서문으로 충분히 전달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젠가는 이 책 전체를 읽어봐야겠다고 기억해 두고 있다가 드디어 다 읽었다.

명, 청 시대의 황궁이었던 자금성은 청이 멸망하고 공산주의 정권이 세워진 뒤 '고궁박물원'이라는 이름의 박물관이 되었다. 이 책은 자금성 고궁박물원의 연구소장인 저자가 그곳에 소장된 그림들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가는 책이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그림들 중에는 타이베이의 고궁박물원(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 시기에 국민당의 수장인 장제스가 자금성의 고궁박물원에서 대만으로 가져온 유물들로 만든 것이다), 상하이 박물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등 자금성 고궁박물원의 소장품이 아닌 그림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그림들은 자금성 고궁박물원 소장품이고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의 소장품도 원래는 자금성 고궁박물원의 소장품이었다. 그리고 이 책에 나온 어떤 작품도 옛 중국의 그림을 이야기하려는 저자의 의도에서는 벗어나지 않으니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인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저자가 단순히 각 그림의 조형적 특징이나 미술사에서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각 그림에 얽힌 사람들과 그들의 이야기를 한 편의 드라마처럼 써 내려간다는 것이다. 그 그림을 그린 화가뿐 아니라 그 그림에 그려진 사람, 그 그림을 그리라고 명령한 사람, 그 그림이 그려진 시대를 만들어간 사람들까지 그 그림과 연이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망라하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모두 비극이다. 이 책에 실린 모든 이야기에는 '덧없음'이라는 정서가 깔려 있다. 세상의 어떤 아름다움이나 부귀영화, 권세도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쇠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름답고 총명했던 여인은 세상의 비정함을 결국 이기지 못했고, 천재 문장가는 뛰어난 글재주로 부와 높은 관직을 얻었지만 돈을 물 쓰듯 쓰다 탕진하고 가난 속에서 죽었다. 예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던 군주는 구중궁궐에서 시서화에만 탐닉하고 전란과 기근으로 죽어가는 궁 밖 백성들은 돌보지 않다, 결국 나라를 빼앗기고 먼 북방으로 끌려가 고향을 그리워하다 세상을 떠났다. 성군으로 칭송받으며 부러울 것 하나 없는 삶을 살았던 황제들도 군주로서의 고독을 이기지 못해, 자유롭게 살아가는 평범한 백성의 모습을 한 자신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러나 그조차 헛된 몸부림일 뿐이었다.

그런 격정적인 드라마를 이면에 숨겨두었는데도 책에 실린 그림들은 한결같이 고요하고 담담하다. 화려한 연회를 그린 그림이나 황제의 행적을 칭송하는 선전용 그림,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가 돋보이거나 수백 명의 사람들로 북적이는 그림들조차 그렇다. 세월의 무게 때문일까. 저자는 어느 그림에서나 시간의 흐름 앞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깊은 고독을 읽는다. 하지만 그 적막함이 오히려 보는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혀 준다. 저자가 일부러 잔혹하고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골라 왔나 싶을 정도로 참혹한 역사 속에서도 화가들은 그림 속에서 고요하고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계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마음이 어지러울 때는 책에 실린 그림들만 찬찬히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그림에 얽힌 흥미로운 일화들이나 그림 자체의 아름다움에만 의지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 미술사와 중국사, 중국 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본문 전체를 굳건히 받쳐주고 있다. 특히 서양 미술사의 도상학적 분석처럼 그림의 각 요소에 담긴 의미들을 하나하나 밝혀낸 뒤 그 의미들을 연결해 그림을 그린 의도를 파악해 낸 <중병회기도> 챕터는 한 편의 추리 소설 같다. 중국사와 중국 미술사를 알아가는 즐거움, 그림을 읽어내는 재미가 쏠쏠하다.

다만 애초에 중국 독자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다 보니 번역자가 주석을 충실히 달았지만 중국사, 중국 문화, 중국 고전 문학에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여러 군데 있다. 그리고 실제로는 요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악역인 요 성종 야율융서는 이 사람의 고조부다)가 죽은 지 수십 년 뒤에 북송의 마지막 황제 흠종이 죽었는데(천조제는 1128년 사망, 흠종은 1161년 사망) 두 황제가 금나라 황제가 연 연회에서 함께 처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 금나라에 포로로 끌려갔던 북송의 황녀 유복공주가 탈출해서 송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정사가 아닌 야사다. 유복공주와 함께 금나라로 끌려갔다 돌아온 위태후가 자신의 치욕스러운 과거를 모두 보았을 유복공주의 입을 막기 위해, 탈출한 유복공주를 가짜로 몰아 죽였다는 이야기는 저자의 상상이다. 일단 내가 찾아낸 것은 이 두 가지지만, 나처럼 중국사를 잘 모르는 외국 독자의 입장에서는 어떤 부분이 야사거나 저자의 상상일지 구분하기 어렵다. 이 점은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글과 그림, 만듦새 모두 우아하고 유려한 책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전체 분량이 640페이지에 이르고 무게가 1킬로그램이 넘는 이 책은 내용의 무게로나 실제 무게로나 만만치 않다. 하지만 그만큼 풍성한 이야기와 그림들이 담겨 있다. 한 번 정독한 뒤에 이따금씩 마음에 와닿는 그림이 있는 페이지를 펼쳐놓고 책에서 풀어놓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감상해도, 그저 그림 자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어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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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필요한 시간 - 전시 디자이너 에세이
이세영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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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보니 대학원 선후배, 동기들 중 대부분은 박물관이나 미술관, 사설 갤러리의 큐레이터가 되었다. 하지만 나는 다른 길로 갔다. 대학원 공부를 할 때도 전시 관련 수업은 딱 한 개밖에 듣지 않았으니 내게 전시는 가지 않은 길, 그래서 호기심을 자아내는 것이다. 여러모로 본받고 싶었던 옛 동료도 전직이 갤러리 큐레이터였다고 하니 전시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커졌다. 그래서 '전시 디자이너의 에세이'라는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전시는 어떻게 준비되고 디자인되는지 궁금해서.

이 책은 전시 디자인이라는 일에 대한 본격적인 직업 탐구가 아니라 에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시란 무엇인가'로 시작해 전시의 A부터 Z까지 짚어가지는 않는다. 저자가 방문했거나 함께 일했거나 몸을 담았던 스물한 곳의 미술관을 주제로 삼아, 각 미술관의 건축 특징과 전시 시스템, 전시 디자인에 대한 생각과 그곳에 얽힌 저자 자신의 경험, 추억을 엮어서 쓴 책이다. 장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미술관에 대한 이야기 4페이지, 미술관 풍경을 담은 사진 7페이지, 해당 미술관을 관람할 때 필요한 정보 1페이지로 한 장이 구성되어 있다. 시간의 흐름이나 미술관이 위치한 문화권 같은 특정한 기준으로 장들을 배열한 것은 아니니, 자신이 읽고 싶은 부분부터 읽으면 된다. 각 장의 본문은 짧고 사진은 많아 틈 날 때마다 한 꼭지씩 가볍게 읽을 수 있다.

글 하나하나는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거기에 담긴 저자의 고민들은 가볍지만은 않다. 현장에서 직접 전시를 만들어가는 사람이기에 지금 우리 미술관들의 문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시장에서 예쁘고 멋진 장면들을 사진으로 찍어 공유하는 과정에서, 전시의 이미지만 남고 전달하려 했던 의미는 사라지지 않을까. 전시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작품인데, 작품 외의 지나치게 화려하고 강렬한 디자인 요소들이 작품을 가려버리지는 않을까. 관장이나 담당자가 바뀔 때마다 미술관 전시나 운영의 가이드라인도 바뀌는 일이 많은데, 무조건 과거를 폐기하기보다는 거시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야 하지 않을까. 자기 일과 자기 일을 통해 미술을 접하게 되는 사람들을 마음 깊이 사랑하기에 이런 고민들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4페이지 안에 짤막짤막하게 자기 생각을 담아야 하니 아주 깊이 담론을 심화시키지는 못하지만 읽다 잠시 멈춰 생각하게 만든다.

전시에 대한 고민들은 꽤 깊지만, 전시를 실제로 진행하는 과정에 대한 내용은 그렇게 많지 않다. 얼마 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에드워드 호퍼 전을 저자가 디자인했다는데, 호퍼 전에 대한 이야기는 서울시립미술관을 다룬 장과 휘트니 미술관을 다룬 장에서 하고 있다. 두 장에 걸친 이야기들을 그러모아도 호퍼 전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그리 많지 않다. 서울시립미술관 호퍼 전의 전시장을 찍은 사진 한 장과 그에 대한 설명 세 줄, 호퍼의 작품이 전시된 모습을 담은 휘트니 미술관 사진 다섯 장과 휘트니 미술관 이야기를 담은 다섯 페이지 중 일부. 이게 독자에게 주어진 모든 단서다. 두 전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과 디자인을 통해 휘트니 미술관을 전시 공간에 풀어내려고 했다는 이야기, 서울시립미술관 호퍼 전에 갔던 내 기억을 겹쳐 보니, 휘트니 미술관의 호퍼 전과 서울시립미술관의 호퍼 전이 참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 기억 한 조각과 저자가 던진 작은 퍼즐 조각들을 맞춰서 얻은 결과였다. 그것만으로는 감질나서 더 자세한 이야기가 듣고 싶어졌다. 호퍼 전뿐만 아니라 다른 전시에 대해서도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했으면 했지만, 이 책에서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그저 저자가 들려주는 스물한 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저자가 직접 찍었다는 사진들을 통해 스물한 곳의 미술관을 만났다. 사진을 공부한 사람답게 사진의 톤들이 통일되어 있고 강렬한 원색의 피사체를 찍은 사진들도 혼자 튀지 않아 보기 편안하다. 그러면서도 각 장소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어 스물한 곳이나 되는 미술관을 한 곳 한 곳 방문하는 느낌이 든다. 하얀색 표지와 하얀색 본문 페이지들 사이에 올해의 팬톤 컬러라는(이 책은 작년에 나왔지만) 피치 퍼즈로 물든 페이지들을 넣어 포인트를 준 디자인은 정갈하고 따뜻한 느낌이다. 그래서 저자의 글과 사진이 만들어내는 차분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한층 더 살린다. 사진 설명은 모두 책 맨 뒤로 옮겨서 모아놨는데, 그 덕분에 사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지만 사진 설명이 있는 페이지와 사진과 본문이 있는 페이지를 왔다 갔다 해야 하니 일장일단이 있다. 전시는 어떻게 기획하고 준비하고 홍보하고 진행하는지, 그 과정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어떤 보람을 느끼는지 듣고 싶다는 처음의 기대는 충족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 책 덕분에 예술이 있는 곳들에 잠시 머물러 일상의 먼지들을 털어낼 수 있었다. 피카소가 말한 예술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우리 영혼에 묻은 일상의 먼지를 털어내는 것이라니, 그 목적은 이룬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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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천문학 - 미술학자가 올려다본 우주, 천문학자가 들여다본 그림 그림 속 시리즈
김선지 지음, 김현구 도움글 / 아날로그(글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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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문과인 내가 과학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천문학이다. 빛의 속도로 수백억 년을 가도 끝에 도달하지 못할 정도로 드넓은 우주, 하루가 1년의 두 배인 행성, 시간과 공간조차 왜곡시켜 버리는 블랙홀. 내 상상을 뛰어넘는 이런 우주 이야기들이 더없이 신비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기에 업으로는 삼고 있지 않지만 여전히 사랑하는 미술사 이야기가 더해졌으니, 이 책에 관심이 생긴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책의 구성은 두 파트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태양계 주요 천체들과 그 이름의 기원이 된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 후반부는 명화 속에 숨겨진 우주 이야기다.

토성은 공전 속도가 느리고 표면 온도가 매우 차가워, 이름의 기원이 된 사투르누스 신의 노쇠한 이미지와 겹쳐 보인다. 화성의 붉은색은 마치 피 같아서 이름의 유래가 된 마르스 신이 담당한 영역인 전쟁과 살육을 연상시킨다. 이런 식으로 행성과 그 이름의 기원이 된 그리스 로마 신의 이미지나 이야기를 연결시키는데, 결국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이야기들을 그린 명화 이야기에 그 행성의 주요 특징, 그 행성에 대한 최근의 연구, 탐사 근황을 덧붙인 것이다. 명화 속에 숨겨진 우주 이야기로 책 전체를 채웠으면 더 흥미로웠겠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와 우주를 연결시켜 보는 것도 나름대로 낭만적이다.


아담 엘스하이머, <이집트로의 피신>, 1609년.

후반부의 명화 속 우주 이야기는 미술사학자, 또는 천문학자들이 나름대로 미술 작품과 천문학을 연관시켜 밝혀낸 것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엘스하이머의 그림 <이집트로의 피신> 속 달과 별 이야기다. 가로 41센티미터, 세로 31센티미터밖에 안 되는 이 작은 그림 안에 1200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니 믿어지는가. 거기에 이전까지 서양에서는 달을 완벽한 천체로 여겨 티끌 하나 없이 매끈한 모습으로 그렸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달에 분화구가 그려져 있다. 그것도 갈릴레이가 처음으로 달에 분화구가 있다고 발표한 시점보다 9개월 전에. 엘스하이머는 과학에 관심이 많았고 천문학자들과 교류했다지만 어디까지나 화가였고, 천체를 신의 창조물이자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여기던 시대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달에 분화구를 그릴 생각을 했을까. 이 수수께끼가 이 그림을 더 신비하게 만든다.

그런데 책 속 도판의 화질이 좋지 않아 독자들로서는 달에 분화구가 그려져 있는지 확인하기도 어려운 것이 아쉽다. 그 뒤에서 이야기하는 루벤스의 그림 <달빛 풍경>처럼 각 그림의 디테일을 클로즈업해서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고흐와 관련된 이야기들도 흥미롭다. 고흐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에 남은 것과 조합하고 자신의 의도에 따라 각 요소들을 배치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 속 천체들의 위치가 100퍼센트 정확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천문학자들은 그의 그림 속 천체들의 위치를 통해 그림이 몇 월 며칠 몇 시에 그려진 것이라는 것까지 추정했다. 미술사학자들이 고흐의 그림을 연대순으로 정리하는 데도, 고흐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그림이 그려진 순서를 더 생생히 느끼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고흐와 관련된 우주 이야기 중 가장 이상한 것은 고흐의 그림 속 소용돌이 이야기다. 그가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웠을 때 그린 그림들에서만 그림에서 난류 패턴이 뚜렷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서 고흐가 우주의 본질을 꿰뚫어 봤다는 이야기까지 있는데, 진실은 아직까지도 알 수 없다.

전반부에서나 후반부에서나, 미술사 파트에서나 천문학 파트에서나 아주 어려운 이론은 없다. 초등학교 고학년 이상의 나이면 이해할 수 있게 쉽고 재미있게 설명하고 있다. 동사로 풀어 쓸 수 있는데 명사를 많이 써서 어색한 문장이 종종 보이지만(영어 등 서구권 언어로 된 문헌을 자주 접하며 공부한 사람들의 글이 종종 이렇다. 영어 등 서구권 언어는 명사 중심 언어이기 때문이다), 글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천문학 파트는 천문학자인 남편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는데, 아예 천문학자 남편과의 대화 형식으로 만들었으면 천문학 쪽 파트가 더 풍성하고 깊어져 더 흥미로운 책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무엇보다 미술사 책치고는 도판의 화질이 좋지 않아 그림의 디테일도 잘 보이지 않고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것이 아쉽고. 하지만 우주나 미술사 둘 중 하나나 둘 다에 관심이 있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종이책이어서 이 책에서는 업데이트되지 못한 행성 탐사 근황

+ 목성 탐사선 주노는 2021년 마지막 정보를 수집하고 파괴될 예정이었지만, 2025년 9월까지로 임무 수행 기간이 늘어나 2023년 현재도 활동하고 있다.

++ 제임스웹 우주망원경은 2022년 12월 25일 발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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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아트 쿡북 - 고흐의 수프부터 피카소의 디저트까지
메리 앤 코즈 지음, 황근하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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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을 먹을 때 그 음식과 관련된 맛깔난 글을 읽으면 더 맛있게 느껴진다. 나는 따뜻한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한 블로거 분이 쓴 '우하'에 대한 글을 읽는다. 우하는 러시아식 생선 수프인데, 그 글에서 주인공이 추운 겨울날 새벽 친구 집에 찾아가자 친구는 냄비에 남아 있는 우하를 데워준다. 이건 크림이 든 우하라고, 크림 없는 맑은 우하를 달라고 툴툴대던 주인공은 한 번 맛보더니 열심히 우하를 먹는다. 나는 우하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지만 무심한 듯하면서도 따뜻한 그 글의 분위기가 따뜻한 국물이 있는 음식과 잘 어울린다고 느꼈다. 그 글을 처음 본 이후로 나는 수프뿐만 아니라 국, 라면, 라멘 등 따뜻한 국물이 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그 글을 읽곤 한다.


  이 책도 그런 방식으로 읽었다. 엄마가 끓여준 따끈한 수프를 읽을 때면 수프 챕터를, 도톰한 계란말이를 먹을 때면 달걀 챕터를,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산 케이크와 와인을 먹을 때는 디저트 챕터와 음료 챕터를. 이 책은 애피타이저, 수프, 달걀, 생선, 육류, 야채, 곁들임 요리, 빵과 치즈, 과일, 디저트, 음료, 이렇게 서양 식사의 순서대로 챕터를 나누고 각 챕터에 관련된 서양 문학 작품과 명화, 서양 작가들과 화가들이 사랑했던 음식의 레시피들을 모아놓았다. 레스트랑에서 코스의 순서를 따라 식사를 하는 것처럼 책의 순서에 따라 책을 읽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자기가 읽고 싶은 부분부터 읽어도 상관은 없다. 기승전결에 따른 구성도 아니고, 그 챕터에서 다루는 음식과 관련된 글과 그림, 요리법을 무작위로 모아놨기 때문이다. 성의 없고 엉성한 구성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구성이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다.


 따뜻한 감자 수프를 먹으면서 (책에서는 두 번째 챕터지만) 수프 챕터부터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미국의 시인 로버트 해스는 수프를 먹는 온전한 경험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고 한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야 한다.

따뜻한 곳에 옹송그리고 앉아

한 숟가락 듬뿍 뜬다. 먹는다. 


늦은 아침으로 나 혼자 수프를 먹으면서 이 구절을 읽었지만, 마지막 구절처럼 한 숟가락씩 듬뿍 뜨면서 맛있게 먹었다. 혼자 먹어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둘러싸인 것처럼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한편 그가 알려주는 양파 수프 조리법은 읽는 것만으로 맛과 냄새가 상상된다. 감자 수프를 먹고 있는데 치즈가 듬뿍 든 양파 수프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올리브 오일과 버터를 두른 두툼한 팬에 채 썬 양파를 넣고 볶다가 달콤한 포트와인과 소고기 육수를 넣고 뭉근한 불에 끓인 다음, 그뤼에르 치즈 다진 것을 뿌리고 그 위에 구운 빵과 잘게 채를 친 삼소 치즈를 수북하게 올리고, 다시 그 위에 녹인 버터를 뚝뚝 떨어뜨려 황금빛이 돌 때까지 오븐에 익힌다.


제프 쿤스, <케이크>, 1995-1997.


  달콤한 분홍색으로 가득 차 있고 케이크 시트의 결이 느껴지는 제프 쿤스의 그림을 바라보며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먹었고(내가 먹은 케이크는 갈색으로 덮여 있었지만) 피카소가 사랑했다는 '고양이 네 마리 식당'의 상그리아 레시피, 마티니(진에 베르무트를 섞고 올리브로 장식한 칵테일)와 압생트(향쑥을 주 재료로 해서 만든 초록색 술)를 찬양하는 시들을 읽으며 크리스마스 와인을 마셨다. 8월에 크리스마스 풍경들을 떠올리는 로버트 해스의 시 <8월의 크리스마스>(영화 제목은 이 시에서 따온 걸까.)에서 정성스럽게 크리스마스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만났다. 때로는 이미 읽은 부분이어도 그 부분과 관련된 음식을 먹고 있기에 다시 읽기도 했다. 빵을 구울 때 겉에 계란 물을 발라 더 반짝이게 하는 것처럼 건조한 일상이 글과 그림으로 윤기를 입는 것 같았다.


백석은 시 <선우사>에서 혼자 쓸쓸히 저녁밥을 먹을 때 흰밥과 가재미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반찬도 밥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데 책이 밥 친구가 못 될 이유가 없다. 음식 국물이나 소스가 책에 튀는 것만 조심한다면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밥 친구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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