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 다니는 어원 사전 - 모든 영어 단어에는 이야기가 있다
마크 포사이스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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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연히 이 책의 서문을 읽게 된 이후부터 이 책을 읽고 싶었다. 서문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일화에서부터 저자의 범상치 않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단어의 기원, 어원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투 머치 토커가 되는 저자에게, 어느 날 한 친구가 '비스킷biscuit'의 어원이 뭐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그는 프랑스어로 '두 번 구웠다'라는 뜻의 'bi-cuit'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설명해 줬다. 문제는 그가 거기서 설명을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bisquit의 'bi'는 'bicycle(자전거)'이나 'bisexual(양성애의, 양성애자)'에 들어 있는 'bi'와 똑같은 것인데, bisexual은 1890년대에 정신과 의사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이 만든 말이며, 크라프트에빙은 'masochism(성적 피학증)'이라는 단어도 만들었는데, masochism은 자허마조흐Sacher-Masoch라는 소설가의 이름을 따서 만든 말이고... 봇물이 터지듯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어원 이야기에 친구는 도망가려 했지만 저자는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몇 시간 뒤에야 친구는 저자가 단어를 설명하려고 그림을 그리는 사이에 도망쳤다. 이런 일이 거듭되자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은 정신병원 대신 책을 해결책으로 제안했고, 그렇게 쓰게 된 책이 이 책이라고 한다. 이 세 페이지짜리 서문에서부터 예감했다. 이 사람은 자기 자신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입담과 언어 지식과 유머 감각이 넘쳐 나는구나.


  본문을 읽으면서 그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서문 마지막에서 저자는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했습니다."라고 말하는데, 그 말처럼 이 책의 모든 꼭지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pool the money'는 돈을 한데 모은다는 뜻인데 여기서 'pool'은 닭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다음 꼭지에서 'pool'은 닭을 갖고 했던, 중세 프랑스의 한 도박 게임 이야기로 이어진다. 중세 프랑스 사람들은 판돈을 단지에 모은 뒤, 닭 한 마리를 놓고 가장 먼저 닭을 돌로 맞히는 사람이 단지 안에 든 돈을 다 가져가는 도박을 했다. 이 도박이 '죄 드 풀jeu de poule', 즉 '닭 게임'이었다. '닭'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풀poule'은 영국에 수입되면서 철자가 'pool'로 바뀌었다. 도박꾼들이 돈을 pool하는(모으는) 이미지에 착안해 무언가 모인 것을 'pool'이라고 부르게 됐는데, 20세기에 들어서 'gene pool(유전자 풀)'이라는 말이 생겼다. 'gene pool'의 'gene(유전자)'에서 또 다른 꼭지,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놀랍게도 이 책에 실린 111개의 꼭지는 하나도 빠짐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어진다. 게다가 마지막 111번째 꼭지는 자연스럽게 첫 번째 꼭지와 이어진다. 자기 꼬리를 물어 동그라미를 이룬 뱀처럼. 무슨 이야기를 해도 새로운 단어의 어원 이야기로 이어갈 수 있다는 데서 저자의 언어 지식이 얼마나 풍부한지 실감할 수 있다.


  세상의 어떤 사물도 사건도 언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각 단어가 생겨나고 다른 곳으로 퍼져 나가고 그곳에서 변형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세상 곳곳에 숨어 있던 다채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발견하게 된다. 히틀러, 하면 떠오르는 것이 나치인데, 정작 히틀러는 자신의 당을 '나치'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상한 소시지에 들어 있던 독성 물질이 지금은 미용 시술에 쓰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영어의 'black'은 원래 '검다'는 뜻으로도, '하얗다'는 뜻으로도 쓰이는 말이었다. 검은색과 하얀색은 정반대 색인데 왜 둘을 같은 단어로 말했던 것일까? 책에서 이 질문의 답들을 찾아보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이 이야기들 말고도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거나 우리가 몰랐던 세상의 옛 이야기들을 알려주는 이야기들이 4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을 꽉꽉 채우고 있다.


  수많은 정보들을 그저 나열하기만 하면 국어사전만큼이나 지루할 텐데, 저자의 입담과 유머 감각이 모든 이야기들을 즐겁게 읽게 한다.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능구렁이 넘어가듯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데다, 영미권 유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도 읽으면서 많이 웃었을 정도로 유머 감각이 뛰어나다. "오늘날 스타벅섬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스타벅스 매장이 없지만, 무인도이니 당연합니다. 이따금 출몰하는 바다표범이 카푸치노를 살 돈이 있을 리 만무하니까요." "heckling은 한때 양털을 빗어 엉킨 부분을 풀어주는 과정을 뜻했습니다. 양이 평소 자기 털 관리를 알아서 하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으니 양털로 옷을 만들려면 우선 잘 빗어주어야 합니다." "카스토르와 폴룩스는 항상 붙어 다녔는데 어느 날 카스토르가 창에 찔려 죽고 말았습니다. ... 제우스는 두 사람을 별로 만들어 영원히 함께 있게 해주었습니다.(두 별은 사실 16광년 떨어져 있지만 너무 자세히 따지지는 맙시다.)" 어원을 진지하게 설명하는 듯하면서 이렇게 농담을 툭툭 내뱉어 공부하듯 열심히 읽던 나를 웃게 했다.


  어원을 설명하는 책이다 보니 수많은 영어 단어들뿐만 아니라, 그 단어들의 기원이 되거나 영향을 준 다양한 시대와 나라의 단어들이 등장하기에 그 모든 단어들을 정확히 번역해야 한다. 그리고 저자 특유의 능청스럽고 유머 감각이 넘치는 문체를 살려야 한다. 번역자는 이 두 가지 어려운 일을 모두 해낸다. 이야기하는 투의 경어체로 번역을 해 저자가 어원에 대해 늘어놓는 수다를 직접 듣는 듯한 느낌이 더 강해진다. 처음부터 한국어로 쓰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한국어 문장으로 번역되어 읽기에도 편하다. 덕분에 영어 원어민이 아닌 한국인 독자들도 쉽고 재미있게 이 책을 읽을 수 있다.


  한두 챕터씩 재미로 조금씩 읽든, 내친 김에 단숨에 쭉 읽어버리든, 영어 공부를 하듯 단어 하나하나를 필기하면서 읽든 어떤 방식으로 이 책을 읽어도 상관없다. 자신에게 맞는 속도와 방법으로 즐겁게 읽으면 된다. 저자도 "보고 싶으면 언제든 펼쳐서 보고, 질릴 때는 덮으면 그만이니까요."라고 말했으니까. '이것까지 굳이 알아야 되나' 싶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영어 단어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도움이 되지 않더라도 그런 사소한 지식을 쌓는 것도,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는 것도 즐겁다. 책 덕분에 바다 건너 사람들에게까지 어원을 가지고 수다를 떨 수 있으니 저자도 즐거울 거고. 그러니 저자에게나 저자가 사는 영국의 독자들에게나 바다 건너 독자들에게나 참 유익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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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 지금 물 올리러 갑니다 띵 시리즈 9
윤이나 지음 / 세미콜론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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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라면 1인분을 끓이는 과정의 기록이면서동시에 나에게 가장 맛있고 간편한 한 끼를 먹이는 일의 가치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 이렇게 선언한다라면을 제대로 된 한 끼로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만 작가는 라면이야말로 가장 저렴하고 간편한 한 끼이며제대로 끓이면 맛도 보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영양 균형은 다른 끼니에 좀 더 건강한 음식을 먹어서 맞추면 된다며라면을 어엿한 한 끼로 대우하는 작가의 패기가 엿보인다.


  책의 주제에 대해 쓴 여러 글들을 아무렇게나 모아둔 같은 시리즈의 다른 책들과 달리논문처럼 라면의 A부터 Z까지 차근차근 정리한 목차 구성도 돋보인다라면을 끓이기 전 라면을 낱개로 구매할지 번들로 구매할지부터 고민하고라면을 고른 뒤라면을 끓이는 데 필요한 도구들을 점검한다라면 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 조절과 끓이는 시간그 두 가지를 잘 해내서 맛있게 먹고 나면앞으로도 계속 라면을 먹을 수 있도록 건강관리를 꾸준히 한다이런 체계적인 구성만 봐도 작가가 라면에 진심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책에 실린 열두 편의 글이 라면을 제대로 고르고 맛있게 끓여먹는 실질적인 팁으로 시작한다이 실용적인 도입부를 지나면 라면 이야기인 듯 라면 이야기가 아닌 듯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풀어놓는다하지만 결국에는 라면으로 돌아오니 기승전라면수미쌍라면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입맛이 없다고 누워 있다가도 라면을 끓인다고 하면 슬그머니 일어날 정도로 라면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작가와 닮은 아빠이제는 라면도 먹을 수 있다고 씩씩하게 대답하는 조카와의 추억이 있는가 하면매일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던 워킹홀리데이 시절의 기억이 있다한강공원 수영장의 라면 자판기에서 친구와 끓여 먹던 계란이 잠영하는 라면은 코로나로 수영장이 폐쇄되면서 다시 오지 않을 여름날의 추억이 되었다삶의 여러 순간에 라면을 먹었을 우리는 작가가 라면과 함께한 순간들에 깊이 공감할 수 있다.


  이 책의 편집자는 서문에서 누구의 간섭도 없이 오로지 나의 의지로 재미있고 맛있는 하루하루를 채워가는 인생은 마치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1인분의 라면과 닮아 있다고 말한다. 정찬이 아니라 라면 한 그릇에도 끓이는 사람만의 비법과 정성, 의지가 들어 있다. 나를 위해 1인분의 라면을 정성껏 끓여내고, 1인분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 그것의 가치를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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훠궈 : 내가 사랑하는 빨강 띵 시리즈 8
허윤선 지음 / 세미콜론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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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나서 훠궈를 먹어본 적은 딱 한 번이다아직까지는점심시간에 동료들과 함께 회사 근처의 훠궈 식당에 갔었는데동료들은 초심자인 나를 위해 제일 순한 맛으로 주문했다그래서인지 마른 두부가 많이 들어 있다는 것 외에는 순두부찌개와 다를 것이 없는 맛이었다처음 먹은 훠궈는 내게 별다른 인상을 남기지 못했고 그 이후로도 일부러 훠궈를 찾아 먹은 적은 없는데도 이 책을 읽었다책 소개 글에서부터 작가의 훠궈 사랑이 강렬하게 느껴졌고훠궈에 읽힌 중국어권 이야기도 듣고 싶어졌기 때문이다나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신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끌리고코로나 때문에 어느 나라로도 떠나기 어려운 지금이라 다른 나라의 이야기가 더 궁금하니까.


  이 책에 실린 첫 글은 훠궈 재료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조리 시간에 대한 글이다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주문한 훠궈 재료가 나오고 냄비의 육수가 끓기 시작하면 채소의 반을 쏟아 넣고그다음에 고기를 넣는데이렇게 하면 먼저 집어넣은 재료가 냄비 바닥에서 곤죽이 되어버린다고 한다이런 훠궈를 생각하면 슬퍼서 도무지 견딜 수 없다며작가는 어떤 재료를 먼저 넣어야 하는지오래 끓여도 되는 재료는 무엇이고 오래 끓이면 안 되는 재료는 무엇인지 설명해 나간다이 첫 글에서부터 자신이 사랑하는 훠궈를 다른 사람들도 맛있게 먹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그 뒤로도 맛있는 소스들을 찾고 내 입맛에 딱 맞게 배합하는 법작가가 좋아하는 훠궈 식당과 메뉴집에서 혼자 훠궈 만드는 법 등 훠궈를 즐기는 데 도움이 되는 팁들이 이어진다훠궈를 먹는 즐거움을 나누고 싶어 견딜 수 없어 하는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작가는 왜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고 싶어할 정도로 훠궈를 사랑하는 걸까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에도추위가 점점 깊어지는 겨울에도혼자 집에서 만들어 먹을 때도사람들과 여럿이 둘러앉아 먹을 때도 위장이온몸의 세포들이 훠궈의 얼큰하고 매운 맛을 요구하니까잡지 마감 날 새벽 모든 일을 마치고 새벽에 조용히 먹는 따뜻한 훠궈도 좋고각자의 개성과 입맛에 따라 다양한 소스와 재료를 넣어 먹는 훠궈도 좋으니까훠궈를 사랑하면서 쌓아간 작가의 추억들은 작가의 마음뿐만 아니라 독자의 마음속에서도 따뜻한 온도로 다가온다.

 

  작가가 진짜 로컬 훠궈 맛집을 찾아다녔던 홍콩의 뒷골목 이야기는 여행이 그리운 마음을 달래준다동네 칼국수집처럼 친숙한 홍콩의 가게들음식 사진 하나 없이 온통 한자로만 쓰여 있어 한자알못인 관광객들을 당황하게 하는 메뉴판낯선 식재료와 디저트들이 즐비한 골목, “왜 이렇게 뜸했어한국에 간 줄 알았잖아.”라고 인사하는 단골 식당 사장님(오죽 자주 갔으면 한국에서 오는 건데 한국에 갔다 온 거라고 생각했을까.)까지 낯선 풍경인데 친숙한 정이 느껴진다작가도 나도 마음 놓고 그 풍경들에 발을 다시 들여놓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훠궈는 내가 사랑하는 빨강이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 아닐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빨강’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좋았다내가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좋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사랑스러우니까혼자든 함께든 훠궈를 사랑하면서 즐거움을 누리는 날이 그녀에게 계속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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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박완서의 부엌 :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띵 시리즈 7
호원숙 지음 / 세미콜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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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완서 작가의 큰딸이 썼다는 것, ‘엄마 박완서의 부엌이라는 제목박완서 작가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한 편집자 서문으로 볼 때 엄마 박완서에 대한 기억이 중심이 되는 책일 줄 알았다하지만 막상 본문을 읽으니 이 책이 엄마 박완서의 부엌’ 이야기라기보다 엄마 박완서와 할머니로부터 이어받은 나 호원숙의 부엌’ 이야기로 느껴졌다이 책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엄마 박완서가 아니라 나 호원숙이다. ‘박완서 문학의 코멘터리도 종종 등장하지만 박완서 작가가 없는 나 호원숙만의 이야기도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박완서 작가의 이야기를 좀 더 많이 듣고 싶었던 독자라면 아쉬워할 수 있겠지만, ‘나 호원숙의 부엌’ 이야기에도 박완서 작가와 그 윗세대가 남겨준 유산이 스며들어 있다그들의 유산과 작가 자신이 꾸려온 것들로 이루어진 음식 세계는 정갈하면서도 따뜻하다매일 정성을 들여 음식을 준비하고 만들어 나 자신과 가족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늘 반복되는 고된 일이지만그 일을 매일 쉬지 않고 하기에 더 품위 있고 풍성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매일의 밥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의 근면함과 정성사랑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더 풍성하고 따뜻하게 만든다그 근면함과 정성사랑은 엄마와 할머니그 윗대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작가는 내 부모님과 같은 세대이니작가의 어머니 박완서 작가는 조부모님 세대작가의 할머니는 증조부모님 세대인 셈이다내가 태어나기 전이라 접해 보지 못한 옛 세대들의 일상지금은 사라져 가거나 이미 사라져 작가의 기억과 기록에만 남아 있는 사람들과 삶의 모습을 이 책으로 만날 수 있었다음력 10월에는 하얀 쌀가루를 체에 걸러 카스텔라처럼 부드러운 고사떡을 만들고시골에 가서 첫 손주에게 첫 미역국을 지어줄 해산 바가지를 구해 왔다는 할머니만두 꺼풀을 얇게 밀어 직접 만두피를 빚고만두소도 직접 만들어 식구들과 함께 만두를 빚었던 어머니어머니가 만들던 방식대로 만두를 빚는 작가이런 정겨운 풍경들을 책으로나마 만난다앞서 외국 음식에 관한 에세이들을 읽다 이 책을 읽으니 여행을 하다 우리나라친척들이 모여 사는 시골 마을로 돌아온 기분이다. '해걸이', '엽엽하다', '꾸리살', '수굿하다', '배틀하다' 등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단어들이 그 시절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더해준다.


  ‘엄마 박완서의 부엌이라기보다 나 호원숙의 부엌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지만부제는 책 내용과 딱 맞아떨어진다할머니에게서 엄마로엄마에게서 작가 자신으로 이어져 온 사랑의 기억이 있다늘 정확한 시간에 퇴근해 도넛이나 고로케를 안겨주던 아버지의 사랑과 그런 아버지의 퇴근 시간에 맞춰 음식을 준비하던 엄마의 사랑에 대한 기억도 있다그들 가족의 사랑 이야기이지만험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따뜻하고 정성 가득한 음식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이어진 사랑이 있기에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P. S. 이 책의 부제가 된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은 작가의 아버지가 늘 정확한 시간에 퇴근해 가족들에게 돌아오던 시기에 느꼈던 사랑과 행복감을 말한다작가는 어머니의 단편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에서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맞이하는 장면을 인용한다. “늙은 얼굴에 걸맞지 않은 갓난아기 같은 민둥머리를 하고 있을망정 그는 매일매일 멋있어졌다너무 멋있어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황홀할 적도 있었다일찍이 연애할 때도 신혼 시절에도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그건 순전히 살아 있음에 대한 매혹이었다.” 이 장면이 마음에 남아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을 찾아보니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작품이었다박완서 작가의 남편은 항암 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다 빠져 모자를 쓰고 다닌 것이었다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병들고 노쇠해져도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설레어하고 감사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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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띵 시리즈 5
김민철 지음 / 세미콜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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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나름대로 치즈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어린 시절 밥과 국에 슬라이스 치즈를 반찬으로 곁들여 먹었고지금도 밤에 배가 고프면 슬라이스 치즈 한 장으로 허기를 채운다모차렐라 치즈가 듬뿍 든 피자크림치즈를 가득 바른 베이글뻑뻑할 정도로 밀도가 높은 치즈케이크 등 치즈가 들어간 음식은 웬만하면 다 좋아한다그런데 외국산 치즈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직접 사본 적도 없다그래서치즈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를 읽으면서 치즈를 좋아하는 마음에 공감하고 낯선 치즈 이야기를 만나고 싶었다.


  읽어 보니 비중이 더 컸던 것은 낯선 치즈 이야기였다냉장고에서 엄마 몰래 슬라이스 치즈 한 장씩 꺼내 먹는 것은 나도 했던 일이지만작가의 치즈 사랑은 그저 내 주변에서 먹을 수 있는 치즈를 챙겨 먹는 나의 치즈 사랑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치즈가 주식인 나라에 여행을 가면 마트의 치즈 코너에서 김장하듯 각종 치즈를 챙겨 오고삶의 어느 순간에 어떤 치즈가 있었는지를 기억하며잘 익은 된장에서도 치즈 맛을 느끼는(그래서 이 책의 부제가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사람 앞에서 감히 치즈 좋아한다는 말을 꺼낼 수 있을까그저 작가가 신나게 풀어놓는 치즈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자기가 정한 주제로 책 한 권을 온전히 채워 넣지 못하고 잡다한 이야기들을 끌어 모아 책 한 권을 겨우겨우 채우는 에세이집들을 보다진심으로 자신이 정한 주제를 좋아하고 그 주제 하나만으로 책 한 권을 온전히 채워 넣는 에세이집을 보니 반가웠다.


  책에서 묘사된 고소하고 짭쪼름하고 찐득하고 부드러운 온갖 치즈의 맛들과그 치즈들을 만나면서 마주친 풍경과 분위기를 상상해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마지막 글인 지극히 개인적인 치즈 리스트에서 작가가 추천한 치즈들을경제적으로 좀 더 안정된다면 찾아 먹어 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도 생겼고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건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이해받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작가는 좋아하는 마음이 귀한 것이고대단하거나 깊은 의미가 있지는 않아도 그저 좋아하는 세계가 있어서 스스로를 부자라고 느낀다고 말한다남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들만 골라서 좋아하는 것 같은 나는 좋아하는 마음을 공유할 사람이 많지 않아 쓸쓸하기도 하다때로는 왜 그런 걸 좋아해?’나 왜 그렇게까지 좋아해?’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이 책에서 작가가 좋아하는 치즈를 찾아 열심히 발품을 팔고 솔직하게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좋아하는 것을 향해 마음껏 달려가도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그래서 이 책은 내게 단순히 치즈를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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