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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러브 디스 파트
틸리 월든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디어창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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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평이나 영화평을 읽을 때 글쓴이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책(영화) 이야기를 읽고 싶은 건데 왜 내가 알고 싶지도 않은 글쓴이의 사생활 이야기를 읽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한 작품이어도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감상이 나오는 것은, 그 작품이 각자의 삶과 맞닿는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간결해서 그만큼 각자의 삶과 맞닿을 여백이 많은 작품들이 있다. 미국의 만화가 틸리 월든의 만화 『아이 러브 디스 파트』도 그런 작품이다. 


 

 이 만화는 두 10대 소녀 레이와 엘리자베스의 사랑을 그리고 있지만, 독자들은 둘의 사랑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7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분량인데다 기승전결이나 시간 순서에 따라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이 서로 어긋나는 모습 뒤에, 엘리자베스가 레이에게 "네 연주 좋았어."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둘이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인지 둘이 화해하는 모습인지 모호하다. 대사보다 이미지들이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대사들도 대부분 짤막하다.  "너 나 좋아하니?""엄청.""다행이다, 나만 그런 거면 어쩌나 했는데." "널 어떻게 미워해." 일상적이고 단순한 대사지만 우리도 언젠가 누군가와 나눠봤을 대화들이다. 그 누군가 때문에 이 단순한 대사들이 마음에 파장을 남긴다. 간결하면서 서정적인 그림체와, 흑백과 보라색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색 구성이 둘의 한 순간 한 순간을 담백하면서도 감각적으로 전한다. 흑백 사이에 간간이 들어간 보라색이 달콤쌉싸름한 느낌을 더한다.


  독특하게도 이 만화에는 배경 건물에 비해 레이와 엘리자베스가 더 큰 모습으로 등장하는 컷이 많다. 배경의 건물이 미니어처이거나 둘이 킹콩이라도 되는 것처럼. 왜 이런 특이한 연출을 했을까? 둘의 세상에서 가장 큰 부분이 서로였기 때문이 아닐까. 서로가 있는데 등 뒤에 있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300미터가 넘는다는 것이 뭐가 중요할까. 제목인 '아이 러브 디스 파트',  엘리자베스가 레이와 이어폰을 한 쪽씩 끼고 음악을 듣다가 말한 한 마디 "이 부분이 제일 좋아"에서 '이 부분'은 음악의 한 부분일 뿐만 아니라 서로였을 것이다. 내 세상에서 제일 큰 부분도, 제일 좋은 부분도 바로 너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나에게도 이어폰을 한 쪽씩 끼고 노래를 같이 들은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함께 들은 노래보다 함께 부른 노래와 서로에게 불러준 노래가 더 기억에 남는다.  미술관으로 함께 걸어가는 길에 그애가 나지막하게 성시경의 <내게 오는 길>을 불렀다. 둘이 등산을 하면서 김동률의 <출발>을 같이 신나게 불렀다. 나는 등산을 싫어하지만 그애와 함께 있는 게 좋았다. 그애가 잠 못 드는 밤에는 스탠딩에그의 <Little Star>를 그애에게 불러줬다. 그애는 우울해하는 나를 위해 메신저로 자기가 직접 기타를 치며 부른 노래를 보내주었다. 그애가 사는 집 앞 골목을 팔짱 끼고 함께 걸으면서, 가로등불 켜진 저녁 골목길을 함께 걷고 있는 이 순간을 그리워할 날이 분명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을 못 견디게 그리워한 날들도 있었지만 지금의 나는 그 순간을 아주 조금 그리워한다. 이 만화를 읽을 때는 아주 조금 더 많이 그 순간이 그리웠다.


참고기사: 「세계의 한 부분, 바로 너를」, 2018.10.25, 한겨레.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6745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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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로자 - 만화로 보는 로자 룩셈부르크
케이트 에번스 지음, 폴 불 엮음, 박경선 옮김, 장석준 해제 / 산처럼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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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화는 1871년 파리 코뮌과 로자의 탄생으로 시작된다.


  1871년 3월 18일, 평범한 민중들이 봉기해 파리를 장악하고 자유, 평등, 박애의 정치를 펼치려 했다. 이렇게 시작된 파리 코뮌은 두 달간 계속되다가 프랑스 정부군에게 진압되면서 막을 내렸다. 봉기가 시작되기 13일 전인 3월 5일, 폴란드의 작은 도시 자모시치에서 한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에게 장미라는 뜻의 이름 '로잘리아 Rosalia'를 붙였을 때 부모는 아이가 정원의 장미처럼 아름답고 조용하게 살아가길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이 로자 룩셈부르크 Rosa Luxemburg, 1871-1919 는 자기가 태어난 직후에 일어난 파리 코뮌처럼 짧고 격렬한 삶을 살았고, 혁명의 붉은 장미로 남았다. 

  『레드 로자』 는 영국의 만화가 케이트 에번스 Kate Evans 가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의 삶을 그린 만화다. 거의 모든 대사가 로자와 그녀의 가족, 동료들이 남긴 글을 재구성한 것일 정도로 이 책은 그녀의 삶을 충실하게 전달한다. 그것도 모자라 각 페이지마다 그녀가 했던 말의 원문을 싣고, 작가가 어떤 것을 각색하고 축약했는지까지 알려준다. 똑같은 글을 두 번 읽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로자에 대한 것 중 어느 하나라도 잘못 전달되지 않게 하려는 작가의 성실함이 보인다.  

  로자는 어느 면에서나 소수자였다.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폴란드인이었고, 폴란드인들 중에서도 차별 받는 유대인이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보통선거권도 가질 수 없는 여성이었고, 평생 한 쪽 다리를 절었던 장애인이었다. 그러다 보니 어린 시절부터 약자와 억압 받는 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았다. 로자가 살던 바르샤바에서는 빈부격차가 극심했고, 교수형당한 사회주의자들의 시체가 성문에 매달렸다. "구름과 새와 사람의 눈물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내 집처럼 느낄 뿐이다." 이 말처럼 그녀는 고국을 떠나 살면서 세상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의 눈물도 외면하지 않았다.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따고 마르크스의 경제 분석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그녀는, 저서 『자본의 축적』 에서 자본주의의 야만성을 폭로한다. 자본주의는 제국주의 무력과 손을 잡고 자본주의가 아직 뿌리 내리지 않은 지역을 수탈하면서 부를 축적해 왔다.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들은 패권과 이권을 놓고 경쟁하다 1차 세계대전을 치르기까지 했으니, 전쟁은 자본주의가 인류에게 강요한 야만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본주의가 점점 발전하면서 자본주의 내부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로자는 자본주의가 내부 모순으로 스스로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작가는 로자의 이러한 자본주의 분석을 만화로 전달하고, 때로는 만화에 직접 개입해 보충설명을 하기도 한다. 

  로자는 혁명에 있어서 조금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녀가 몸을 담고 있었던 독일 사회민주당(로자는 폴란드 사회민주당원으로서 독일령 폴란드 지역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독일로 이주했다가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게 되었다.)은 궁극적인 목표가 자본주의를 폐지하는 사회주의 혁명이라고 선언했으면서도, 자본주의,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길을 걸어갔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독일 의회에서 전쟁 예산에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사람은 로자의 동료 카를 리프크네히트 의원이었다. 로자와 리프크네히트는 사민당에서 독립한 '독립사민당'을 창당하고 시대의 야만에 맞섰지만, 1919년 1월 15일 사회민주당 보수 세력의 명령으로 체포된 뒤 처형당했다. 


죽기 직전 로자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인생의 순간들이 흘러간다.


만화는 로자의 투쟁과 사상을 만화와 주석으로 꼼꼼하게 전달하면서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만화 고유의 장점도 놓치지 않는다. 설명들이 빼곡히 적힌 장면들과 로자의 삶을 가만히 묵상하게 만드는 서정적인 장면들이 공존한다. 로자가 감옥 안에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행복을 느끼는 장면, 로자가 죽기 직전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생의 수많은 순간들, 그녀가 영원히 떠난 후 애완 고양이 미미가 지키고 있는 빈 책상, 그 위에 있는 그녀의 마지막 글. "내일이면 혁명이 또 다시 일어나 치켜들 무기를 쟁강거릴 것이다. 그리고 찬란한 승리를 선포할 것이다. 나는 있었고, 으며, 있을 것이다." 그녀의 말처럼 그녀가 없는 빈 책상 앞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다소 투박하고 과장된 극화체 때문에 '못 그렸다', '추하다'라는 평도 듣는다. 그리고 노골적인 성애 묘사 장면들 때문에 호불호가 갈린다. 휘날리는 듯한 손글씨로 쓰인데다 컷을 빽빽하게 메운 대사들은 가독성이 떨어진다.(원서에서도 대사들은 손글씨로 쓰여 있다.)  하지만 그런 요소들조차 곱고 평탄하게 살기보다 평생 거칠고 험난한 길을 걸었던 로자에게 어울린다. 노골적인 성애 묘사는 그녀가 혁명뿐만 아니라 사랑에 있어서도 열정적이었고 자신의 뜻에 충실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호불호가 갈리기는 하지만, 이 책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삶과 사상, 투쟁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에게 좋은 입문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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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바바라 스톡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메시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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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군에게

  올해도 벌써 반이 지나가고 있어. 지난 번에는 네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게 돼서 반가웠어. 친구라면서 힘이 되어주지 못한 게 미안했고. 나 자신도 그렇게 굳건하지 못한 상태거든. 그래도 다른 누군가에게 힘이 되어주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어.

   불안하고 막막할 때 나는 반 고흐를 생각해. 늘 동생에게 신세만 지고 있고 그림은 팔리지 않아 불안해하면서도 "이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보여주겠다"고 말했던 반 고흐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렸던 그와, 한없이 게으른 나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 미안한 일이긴 하지만, 나 또한 보잘것없는 내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걸 펼쳐보고 싶어. 그래서 유독 반 고흐에 대한 책들에 끌려. 


 이 책도 반 고흐의 삶을 그린 만화라는 점에서 끌렸어. 화려하거나 과장된 그림체를 좋아하지 않는데, 이 만화의 그림체는 단순하고 아기자기하다는 점에 더 끌렸고. 사람들은 보통 반 고흐하면 소용돌이치는 듯한 강렬한 그림체를 생각하잖아. 그래서 이 만화의 단순한 그림체가 반 고흐의 강렬함을 전달하기에는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하지만 내게는 반 고흐의 강렬한 삶을 단순한 그림체로 그렸다는 것이 신선하게 느껴졌어. 단순해서 오히려 한눈에 살펴보기에 더 좋고.

  그림체는 단순하지만 색채는 반 고흐 그림 속의 색채만큼이나 밝고 화려해. 반 고흐 그림의 짧은 붓터치에서 따온 듯한 점과 짧은 선들로 반 고흐의 감정을 표현한 것도 인상적이야. 점들과 짧은 선들만으로도 반 고흐의 휘몰아치는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게 신기해.

  그리고 컷마다 숨어 있는 반 고흐의 작품들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어. 단순화되고 축소되어 만화 속에 숨은 반 고흐의 작품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실제 집을 모델로 한 인형의 집처럼 원본과 닮아 있으면서도 아기자기해. 실제 작품이 컷 옆에 있었다면 비교해 볼 수 있어서 더 좋았겠지만. 

  이 만화는 그림체뿐만 아니라 내용도 간결해. 반 고흐가 가장 강렬하게 빛나는 그림들을 그렸던 아를 시기부터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 지내며 그림을 그리던 시기, 오베르에서 마지막 그림들을 그리던 시기, 이 세 시기만을 다루고 있거든. 반 고흐에 대한 지식을 쌓으려고 이 만화를 본다면 아쉬울 거야. 하지만 나는 이 만화가 반 고흐의 삶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반 고흐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했던 순간들을 포착한 만화라고 생각해. 반 고흐가 기뻐하고 슬퍼했던 순간들을 단순히 그림과 글로 옮겼다기보다는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재해석했다는 게 마음에 들어. 반 고흐의 팬으로서 옆에 두고 생각날 때마다 펼쳐보고 싶은, 사랑스러운 만화 평전이야. 

  그리고 반 고흐를 다룬 다른 책들이 그렇듯 이 만화 또한 내게 위안이 돼. 네가 뿌리 없는 나무를 그렸었던 걸 기억해. 의사는 그 나무 그림을 보고 네가 지금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처럼 불안한 상태라고 했었어. 나도 마찬가지야. 우리는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돌고 있어. 다른 사람들한테는 뿌리내리고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이 이토록 자연스러운데, 우리한테는 왜 그리 어려운 일일까. 빈센트도 우리 같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어. 그런 빈센트에게 만화 속 테오가 한 말이 기억에 남아.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우리는 쟁기를 끌 거야.
그리고 함께 경이에 찬 눈을 돌려 데이지꽃과 
새로이 갈아엎은 흙덩이와 
봄에 싹 틔우는 관목 가지를, 
청명한 하늘의 고요한 푸른빛을,
가을의 뭉게구름을, 겨울의 헐벗은 나무를, 
저 태양과 달과 별을 바라보자.

앞날은 예측 못할지언정, 
그것만큼은 온전히 우리 몫으로 남을 테니. p. 132.


오베르의 언덕에 함께 서 있는 테오(왼쪽)와 빈센트(오른쪽)


  쟁기를 끄는 건 아니지만, 우리도 숨이 다할 때까지 우리의 일을 하겠지. 그리고 때로는 눈을 들어 꽃과 나무, 뭉게구름과 태양, 달, 별을 바라보자. 우리 또한 우리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지만, 그것만큼은 온전히 우리의 몫으로 남을 거야. 그렇게 한 순간 한 순간을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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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 프로젝트 - 남자들만 모르는 성폭력과 새로운 페미니즘 푸른지식 그래픽로직 5
토마 마티외 지음, 맹슬기 옮김, 권김현영 외 / 푸른지식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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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 사회 전반에서 미투(#MeToo)’ 운동이 확산되고 있다. SNS에서 미투 해시태그(#MeToo)를 달고 성폭력 피해를 고발하는 미투 운동은흑인 여성 사회운동가 타라나 버크(Tarana Burke)가 2006년 시작한 캠페인이다처음에는 성범죄에 취약한 유색인종 여성과 청소년을 위해 시작된 운동이었지만, 2017년 10월 헐리우드의 유명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폭력 행각이 폭로되면서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었다우리나라에서도 지난 1월 서지현 검사가 검찰 내의 성폭력 실상을 고발하면서 미투 운동이 사회 전 영역으로 번져나갔다그만큼 사회 전반적으로 성폭력이 만연해 있다는 이야기다살아가면서 성폭력을 한 번도 당하지 않은 여성이 얼마나 있을까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성폭력을 당한 경험이 여러 번 있다프랑스의 만화가 토마 마티외가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성폭력과 성차별을 적나라하게 그린 만화 악어 프로젝트』 는 이런 시점에서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만화 속에서 악어로 그려지는 가해 남성들. 인간이 아닌 악어로 그려져 더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악어 프로젝트』 의 가장 특이한 점은 성폭력을 휘두르는 남성들이 모두 악어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여성들은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데다 흑백의 만화에서 악어 남성들만 초록색으로 그려져 더 두드러져 보인다작가는 왜 남성들을 악어로 그렸을까작가는 말한다그림으로 옮기고 싶었던 것은 바로 여성의 관점에서 본 현실이라고작가 자신은 남성이지만 여성 지인들과 여성 네티즌들에게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성차별과 성폭력에 관한 경험담을 들려달라고 부탁했고그 경험담을 그림으로 담았다악어는 남성 개인이 아닌 남성우월주의성차별남성의 어긋난 성적 욕망성폭력을 휘두르는 남성에게서 여성이 느끼는 두려움이다독자는 사람의 모습으로 그려진 여성에게 감정이입하며 여성이 악어들에게서 느끼는 두려움과 분노즉 성폭력으로 인해 느끼는 고통을 체험하게 된다. 


<악어 프로젝트>에서는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성폭력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독자들이 피해자의 수치심과 분노, 고통을 함께 느끼게 한다.


  이 만화에서는 여성들이 일상에서 겪는 성폭력이 적나라하게 묘사된다여성들은 길거리에서 남성들의 시선에 노출되고성적으로 수치심을 주는 말을 듣는다수영장 탈의실에는 몰래 훔쳐보는 남자들이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는 몰래카메라가 숨어 있다대중교통에 함께 타고 있는 승객에게 성추행당하고직장에서는 성관계를 가지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말을 듣는다가장 가까운 존재인 연인마저 데이트 강간을 한다그 모든 폭력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져 만화를 보는 나까지도 치가 떨릴 정도였다이렇게 실제 상황에서 오가는 욕설과 성적 행위들을 있는 그대로 그렸기 때문에 이 만화는 2014년 프랑스 툴루즈에서 개최된 세계 여성 폭력 추방의 날’ 기념 전시회에 초청되었다 취소되기도 했고프랑스의 한 정치인에게 저속하고 비도덕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그러나 저속하고 비도덕적인 것은 이 만화가 아니라 이 만화가 그려지게 만든 현실현실 속의 악어들이다. 


<악어 프로젝트>에서는 성폭력에 대응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만화로 설명한다.


 작가는 단순히 성폭력 피해 경험담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고성폭력에 대한 구체적인 대응 방법들을 만화로 친절하게 설명한다. 가해자에게 자신의 행동이 성폭력임을 빨리 인지시키는 것폭언과 위협을 할 때 경찰에 신고하는 것사소한 성폭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경험이 더 큰 위험이 닥쳤을 때 잘 극복할 수 있는 거름이 된다는 것무엇보다 이렇게 대응하지 못했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는 없다는 것모든 잘못은 가해자에게 있으니그리고 우리가 성폭력에 대해 어떻게 대항해야 하는지 이야기하는 페미니스트들의 글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단순한 고발에 그치지 않고어떻게 성폭력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독자들에게 고민할 단초를 던지는 것이다

악어 탈을 스스로 벗는 남성과, 남성이 악어 탈을 벗을 수 있도록 돕는 여성.


  이 만화의 마지막 장면은 남성이 스스로 악어 탈을 벗고여성이 악어 탈을 벗는 것을 도와주는 장면이다이 마지막 장면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우리가 바라는 것은 다른 성별을 적대시하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고악어들이 아닌 인간들과 함께 살아가려는 것이라고. 번역 후기에서 번역자가 말했듯이 이 만화는 적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통합에 대한 이야기이다. 


* 더 읽어볼 만한 글:  한국판 악어 프로젝트 시리즈 기사
(http://www.womennews.co.kr/news/97744)

  여성신문과 작가 토마 마티외가 2016년 8월 29일부터 함께 진행했던 ‘한국판 악어 프로젝트'로 모집된 사연들을 정리한 기사이다. 프랑스가 아닌 바로 이곳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겪는 성차별과 성폭력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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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진 1. 보온 - 세상 모든 것의 기원 오리진 시리즈 1
윤태호 지음, 이정모 교양 글, 김진화 교양 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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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생의 윤태호 작가가 4년 만에 신작을 내놓았다이번에는 교양 만화다그것도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모든 것의 기원(오리진)’을 100권의 만화로 그려내겠다는 거대한 시리즈다한 권에 한 주제씩을 다룰 예정이라는데첫 번째 권의 주제는 보온이다왜 수많은 주제 중에서 보온을 첫 번째 주제로 삼았을까?


  윤태호 작가와 함께 첫 번째 권을 맡은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은 보온이 세상 모든 것의 기원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인간을 비롯한 생명은 열이 있는 곳에서 기원했고일정한 온도 범위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다른 누군가가 보살피고 온도를 유지해 주었기 때문에인간을 비롯한 생명들이 지금까지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윤태호 작가와 이정모 관장에게 보온은 다른 누군가를 보살피는 마음, 즉 인간다움이다.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미래에서 보내진 로봇 '봉투'


  작가는 1권에서 보온을 통해  인간다움’을 이야기하려 한다. 먼 미래에 과학기술의 발달로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되면서 사람들은 오히려 삶의 의미를 잃게 된다삶의 의미를 다시 찾기 위해 미래에서 21세기로 파견된 로봇 봉투시공간의 경계를 넘을 때의 충격으로 연민이라는 인간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봉투가 처음 보여준 인간적인 행동은 추위에 떠는 길고양이들과 과학자들을 따뜻하게 해준 것이었다그리고 인간에 가까워지기 위해 자신이 버틸 수 있는 온도를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온도로 맞춘다.(“같은 따스함이면 너와 같아질 수 있을까.”(p. 198.)) 이렇게 인간 못지않게 인간적인 봉투는 사랑스럽고 따뜻한 캐릭터이다캐릭터 디자인 또한 독자들의 마음을 끌 만큼 귀엽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메시지와 봉투 캐릭터의 매력 외에다른 교양 만화와는 차별되는 장점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윤태호 작가는 이 책에서 지식과 정보는 수단일 뿐이라고 했지만 1권에서의 지식의 깊이는 너무 얕다. 봉투와 과학자들이정모 관장이 전달하는 지식은 초등학생 대상 교양서적 수준의 지식이다. 또한 윤태호 작가의 만화와 이정모 관장의 설명은 아예 분리되어 있어 만화 부분과 설명 부분은 서로 다른 책처럼 느껴진다. 이정모 관장의 설명이 만화 중간 중간에 들어가서 만화와 설명이 더 자연스럽게 섞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그리고 보온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도 다른 인간들뿐 아니라 지구의 온도를 지켜서 지구 위의 모든 생명과 함께 살아가자는 것인데수많은 환경 관련 서적들이 이야기하는 메시지와 다르지 않다한 권이라는 분량의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좀 더 신선하거나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하다.


 이야기의 신선도나 재미 측면도 아직은 뛰어나지 않다. 주인공이 자신의 후손이 보낸 로봇과 만나면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는 설정은 일본 만화 <도라에몽>을 연상시키고, 일종의 작동 오류로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된 로봇이라는 설정도 <A.I>, <바이센테니얼 맨등의 영화에서 쓰여 익숙한 설정이다. 그냥 지식, 정보만 나열하기보다 하나의 서사를 중심으로 말하고 하는 바를 풀어나가는 것은 좋은 전략이지만, 봉투와 인간들이 펼치는 이야기가 아직은 그렇게 흥미롭지 않다. 봉투 외의 다른 인간 캐릭터들의 매력이나 캐릭터들의 관계가 빚어내는 케미스트리와 드라마도 아직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거대한 시리즈의 시작이라기에 『오리진』 1권은 조금 아쉬운 시작이다. 하지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뚜렷이 정했으니,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더욱 더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제 시작이니 모든 것의 기원에 대한 더 깊이 있고 신선한 성찰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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