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작, 드라마 스포일러 포함
드라마는 5년 전에 끝났고, 이 대본집도 5년 전에 샀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시간은 이 드라마의 시간적 배경일 뿐만 아니라 서사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오랜 겨울 속을 살아가다 봄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니까. 그래서 매년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무렵에 읽겠다고 해놓고서, 5년 만에야 이 책을 다 읽었다. 1권은 2월에, 2권은 바로 며칠 전에. 달력으로는 봄이 된 지 이미 한 달이 넘어서야 다 읽었지만 봄은 이제야 온 것 같으니 적절한 때에 다 읽은 것 같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다. 4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단행본 한 권을 16부로 만들기 쉽지 않았다고 드라마 작가는 서문에서 하소연한다. 그런데 드라마 작가가 고심해서 만든 결과는 꽤 괜찮았다. 남주인공 은섭의 양부모와 양여동생, 은섭의 친구 장우의 첫사랑, 여주인공 해원의 이모 명여의 오랜 연인까지 드라마 작가가 새롭게 만들어낸 캐릭터들은 원작 속 캐릭터들과 이질감 없이 어울린다. 실제로 북현리(드라마의 주요 배경)에서 살고 있는 인물들처럼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캐릭터들과 부딪히고 함께 울고 웃으며 더 풍성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16부작이니 원작에 있던 등장인물들에게도 새로운 이야기와 새로운 대사들, 행동들이 많이 덧붙여졌는데, 원작에서도 당연히 그렇게 행동하고 말했을 것처럼 원작의 결을 그대로 가져왔다.
지문마저 원작처럼 결이 곱다. 수채화 물감을 묻힌 붓으로 한 터치 한 터치 그려나가듯, 매일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눈이 내리고 서서히 봄이 오는 북현리의 풍경을 한 문장 한 문장 그려나간다. 엄마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부터 까르르 웃으며 걸어가는 학생들, 시장에서 각자 열심히 일하는 상인들까지 배경 속의 엑스트라로 나오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모습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동안은 북현리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다'는 작가의 말이 허언은 아니다.
책의 만듦새도 드라마의 내용에 맞게 곱고 해사하다. 원작 소설을 출간했던 시공사에서 드라마의 대본집도 만들었는데, 원작 소설처럼 표지와 속표지, 본문도 파스텔 톤의 색들로 꾸몄다. 본문은 그냥 흑백으로만 인쇄해도 될 텐데, 등장인물 소개와 차례, 본문의 장면 번호, 대사, 지문을 모두 다른 색으로 인쇄했다. 본문의 글씨 색깔들도 모두 파스텔 톤이라 어느 것 하나 튀지 않는다. 드라마 전체의 톤에 맞춰 세심하게 만든 것이 보인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새롭게 만들어낸 캐릭터 중 명여를 질투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심영춘은 자신의 성적 매력만 내세우는 납작한 캐릭터가 되었고, 주인공들의 친구 민지연은 워낙 등장인물들이 많아 본방에서는 사실상 이름도 없는 친구 1이 되었다. 게다가 은섭과 친삼촌의 관계를 마무리하기 위해 정작 책방 주인인 은섭이 책방의 첫 이벤트에 참여도 못 한 것으로 각색한 것은 아쉽다. 은섭의 책방이 원작과 드라마에서 갖는 의미를 생각하면, 은섭이 빠져서는 안 됐다. 무엇보다 가정폭력범인 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을 알고 나서 해원이 외친 대사 '그래도 아빠잖아!'는 지금 봐도 어이가 없다. 아무리 자신에게는 다정했다 하더라도 엄마와 이모에게 어떤 폭력을 가했는지 다 들었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평소에는 원작을 그다지 따르지 않지만 이번에는 원작에 충실하려 했다고 드라마 작가는 말했는데, 각색을 하다 삐끗한 지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원작 소설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 또한 사랑하는 이유는, 드라마 전반에 인간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진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떤 상처를 입었어도 그 사람이 행복을 찾길 바라는 애정, 겨울이 아무리 춥고 길었어도 언젠가는 봄이 올 거라는 믿음. 행복은 애쓰고 애써야 겨우 얻을 수 있으며 쉬이 곁에 있어주지도 않지만, 살아간다면, 노력해 간다면 행복한 날이 올 수 있을 거야. 해원과 은섭의 이 마지막 내레이션과 '당신은 묵묵히 오늘을 살아가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제작진의 마지막 인사는 5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 드라마 작가는 '이 드라마가 이 모든 겨울에 떠오르는 드라마이길, 겨울이 오면 이 드라마가 떠오르고 저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를 보시는 모든 분들이 그러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나는 겨울마다 이 드라마를 떠올린다. 그리고 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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