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 한가람 대본집 1~2 - 전2권
한가람 지음 / 시공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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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작, 드라마 스포일러 포함

드라마는 5년 전에 끝났고, 이 대본집도 5년 전에 샀다.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시간은 이 드라마의 시간적 배경일 뿐만 아니라 서사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오랜 겨울 속을 살아가다 봄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니까. 그래서 매년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갈 무렵에 읽겠다고 해놓고서, 5년 만에야 이 책을 다 읽었다. 1권은 2월에, 2권은 바로 며칠 전에. 달력으로는 봄이 된 지 이미 한 달이 넘어서야 다 읽었지만 봄은 이제야 온 것 같으니 적절한 때에 다 읽은 것 같다.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는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다. 4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단행본 한 권을 16부로 만들기 쉽지 않았다고 드라마 작가는 서문에서 하소연한다. 그런데 드라마 작가가 고심해서 만든 결과는 꽤 괜찮았다. 남주인공 은섭의 양부모와 양여동생, 은섭의 친구 장우의 첫사랑, 여주인공 해원의 이모 명여의 오랜 연인까지 드라마 작가가 새롭게 만들어낸 캐릭터들은 원작 속 캐릭터들과 이질감 없이 어울린다. 실제로 북현리(드라마의 주요 배경)에서 살고 있는 인물들처럼 각자의 이야기를 갖고 있으면서도 다른 캐릭터들과 부딪히고 함께 울고 웃으며 더 풍성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낸다. 16부작이니 원작에 있던 등장인물들에게도 새로운 이야기와 새로운 대사들, 행동들이 많이 덧붙여졌는데, 원작에서도 당연히 그렇게 행동하고 말했을 것처럼 원작의 결을 그대로 가져왔다.

지문마저 원작처럼 결이 곱다. 수채화 물감을 묻힌 붓으로 한 터치 한 터치 그려나가듯, 매일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눈이 내리고 서서히 봄이 오는 북현리의 풍경을 한 문장 한 문장 그려나간다. 엄마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부터 까르르 웃으며 걸어가는 학생들, 시장에서 각자 열심히 일하는 상인들까지 배경 속의 엑스트라로 나오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모습도 빠뜨리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동안은 북현리에서 살아 숨 쉬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했다'는 작가의 말이 허언은 아니다.

책의 만듦새도 드라마의 내용에 맞게 곱고 해사하다. 원작 소설을 출간했던 시공사에서 드라마의 대본집도 만들었는데, 원작 소설처럼 표지와 속표지, 본문도 파스텔 톤의 색들로 꾸몄다. 본문은 그냥 흑백으로만 인쇄해도 될 텐데, 등장인물 소개와 차례, 본문의 장면 번호, 대사, 지문을 모두 다른 색으로 인쇄했다. 본문의 글씨 색깔들도 모두 파스텔 톤이라 어느 것 하나 튀지 않는다. 드라마 전체의 톤에 맞춰 세심하게 만든 것이 보인다.

물론 아쉬운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새롭게 만들어낸 캐릭터 중 명여를 질투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심영춘은 자신의 성적 매력만 내세우는 납작한 캐릭터가 되었고, 주인공들의 친구 민지연은 워낙 등장인물들이 많아 본방에서는 사실상 이름도 없는 친구 1이 되었다. 게다가 은섭과 친삼촌의 관계를 마무리하기 위해 정작 책방 주인인 은섭이 책방의 첫 이벤트에 참여도 못 한 것으로 각색한 것은 아쉽다. 은섭의 책방이 원작과 드라마에서 갖는 의미를 생각하면, 은섭이 빠져서는 안 됐다. 무엇보다 가정폭력범인 아버지의 죽음의 진실을 알고 나서 해원이 외친 대사 '그래도 아빠잖아!'는 지금 봐도 어이가 없다. 아무리 자신에게는 다정했다 하더라도 엄마와 이모에게 어떤 폭력을 가했는지 다 들었는데 그런 말을 할 수 있나? 평소에는 원작을 그다지 따르지 않지만 이번에는 원작에 충실하려 했다고 드라마 작가는 말했는데, 각색을 하다 삐끗한 지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원작 소설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 또한 사랑하는 이유는, 드라마 전반에 인간에 대한 애정과 믿음이 진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떤 상처를 입었어도 그 사람이 행복을 찾길 바라는 애정, 겨울이 아무리 춥고 길었어도 언젠가는 봄이 올 거라는 믿음. 행복은 애쓰고 애써야 겨우 얻을 수 있으며 쉬이 곁에 있어주지도 않지만, 살아간다면, 노력해 간다면 행복한 날이 올 수 있을 거야. 해원과 은섭의 이 마지막 내레이션과 '당신은 묵묵히 오늘을 살아가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라는 제작진의 마지막 인사는 5년이 지난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 드라마 작가는 '이 드라마가 이 모든 겨울에 떠오르는 드라마이길, 겨울이 오면 이 드라마가 떠오르고 저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를 보시는 모든 분들이 그러하기를' 바란다고 했는데, 나는 겨울마다 이 드라마를 떠올린다. 그리고 봄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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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 한가람 대본집 2
한가람 지음 / 시공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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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이 가정 폭력 피해자인 엄마에게 "그래도(가정 폭력범이어도) 아빠잖아!"라고 외치는 장면, 윤택을 좋아하는 여자 작가의 캐릭터가 너무 납작한 것만 빼면 마지막 화까지도 좋은 퀄리티를 유지한다. 전반적으로 인간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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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 한가람 대본집 1
한가람 지음 / 시공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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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에서 책 한 권을 16부작의 대본으로 늘리느라 힘들었다고 하는데 꽤 잘 해냈다. 지문까지 원작 못지않게 서정적이다. 그냥 흑백으로 처리할 수 있었는데 등장인물 이름, 대사, 지문을 각각 다른 색으로 인쇄하고 원작 소설과 비슷한 느낌으로 만들어낸 책의 만듦새도 정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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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제게 그 질문을 한 2만 번째 사람입니다 - 지치지 않는 페미의 대답
오혜민 지음 / 날(도서출판)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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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흔히 받게 되는 열여덟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들을 모은 책이다. 오죽 이런 질문들을 많이 들었으면 제목부터 '당신은 제게 그 질문을 한 2만 번째 사람입니다'일까. 이 책에 실린 질문 중 '성차별은 다 과거의 일이지 않나요?'는 나도 실제로 회사의 남성 동료에게서 받은 질문이고, 목차의 다른 질문들도 온라인에서나 오프라인에서나 자주 보아온 것들이다. 그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고 싶어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6년 동안 페미니즘을 가르쳐온 사람인데, 페미니즘 관련 수업이 필수 과목이었기에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학생들도 많이 만났다. 그렇다 보니 책 전반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 폭력적인 시선에 대한 피로감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독자에게 '그동안 애써온 당신은 잠깐 쉬어도 괜찮다'며 '이제 제가 조금 답해 보겠다'고 말하는 서문에서부터, 모든 편견과 계속해서 싸우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페미니즘이라면 무조건 적대감과 거부감을 보이는 학생들이나 학교 밖의 사람들도 증오하지 않고, 그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려고 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자신과 반대 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적대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편견을 깨는 모습이다.

페미니즘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편견과 혐오 자체에는 단호하게 맞서고, 질문 속에 숨은 뒤틀린 의도는 날카롭게 간파한다. '성평등을 이야기하면서 군대 얘기는 왜 안 하냐'는 질문 뒤에는 여성의 열등함을 증명하고 군대 얘기를 꺼내는 것일 뿐, 여성 징병과 여군, 군대 내 위계 폭력과 그에 대한 방지법에 관해서는 진지하게 이야기할 열의가 없어 보인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여성과 함께 논의하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가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아쉬운 것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생각보다 너무 간략하다는 것이다. 한 질문에 대한 답에 주어진 분량은 8페이지 정도인 데다 책 크기는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만 하다. 앞에서 이야기한 '성평등과 군대' 관련 질문에는 그 질문에 깔려 있는 의도를 이야기하면서, '정말 군대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지는 않다'며 '당신이 군대에 대해 얘기할 준비가 되었다면 그때 말해봅시다'라며 마무리한다. 그러나 그런 저열한 의도가 깔려 있더라도, 여성과 군대 문제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청소년들을 위한 인권 교육 도서 『잠깐! 이게 다 인권 문제라고요?』에서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남성만 징집하는 것이 특정 연령대의 남성만으로도 필요한 군인 수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국방의 의무에는 병역뿐만 아니라 군 작전에 협조하거나 전시 근로 동원에 응하는 의무도 있기에, 군대를 가지 않는다고 해서 국방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징병제가 있는 국가들 중 여성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국가는 극히 일부이며, 남성 중심의 현 군 조직에서 병역 의무를 부과했을 때 위계를 이용한 성범죄가 일어날 수 있기에, 여성에게도 군 복무를 부과하기 이전에는 여성이 평등하고 안전하게 군 복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네가 지금 그 질문을 하는 의도를 안다. 네가 제대로 대화할 마음이 나면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고 말하는 대신, 이렇게 납득할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래야 서문 마지막에서 저자가 바란 것처럼 '그동안 애써온 독자'가 마음 놓고 잠깐이라도 쉴 수 있지 않겠는가('페미는 ㅇㅇ병'이라는 챕터에서는 두 페이지가 텅 비어 있고 마지막이자 세 번째 페이지에 '모든 질문에 대답할 이유는 없습니다'라는 한 문장만 적혀 있어 당황스러웠다).

질문이 좋아야 답도 좋겠지만 우문현답도 있지 않나. 질문에 담긴 의도를 간파하는 날카로운 감각, 질문의 허점을 찌르는 간결하고 명쾌한 논리, 차별과 편견에 맞서는 사람들과 아직 그것들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 모두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이 책의 장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 예리하고 구체적인 답이 필요하다. 우문현답이 되기에, 저런 질문을 2만 번도 넘게 들어야 하는 독자들의 무기가 되어주기에 이 책의 답은 얕고 뭉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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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제게 그 질문을 한 2만 번째 사람입니다 - 지치지 않는 페미의 대답
오혜민 지음 / 날(도서출판)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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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수많은 편견과 맞서야 하는 사람에게도, 편견에 사로잡혀 올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따뜻한 애정을 보내면서도 혐오와 편견에는 단호하게 맞서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좋았겠다 싶기도 하지만 날카로운 이성과 따뜻한 감성을 모두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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