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나라 정벌 -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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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만큼이나 두꺼운 책을 '벽돌책'이라고들 한다. 내 기준으로 6, 700페이지대인 책은 페이지가 좀 많은 정도이고 900페이지는 되어야 벽돌책이다. 벽돌책은 완독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데, 정말 오랜만에 도전해 보고 싶은 벽돌책을 발견했다. 그 책이 『상나라 정벌』이었다. 제목처럼 역사적으로 증명된 중국 최초의 국가인 상나라가 주나라의 역성 혁명으로 정벌되는 역사를 다룬 책이다. 역사를 좋아하는 데다 역사 중에서도 근현대사보다는 고대사에 더 끌리는데, 고대사를 9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니. 탐스러운 읽을거리였다.

그런데 나 말고도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분량부터 압도적인 이 책의 판매량과 화제성이 높은 것은, 고어물에 가까울 정도로 잔혹한 상나라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상나라는 인신 공양을 하던 나라였다. 왕이 하늘에 바치는 제사부터 새 집을 짓고 나서 집이 튼튼하길 기원하는 제사까지, 상나라 사람들은 크고 작은 제사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상나라 유적에서 사지가 동강 나고 이리저리 뒤틀린 해골들만 보아도 제물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나라 사람들이 쓰던 청동 찜솥에서는 귀족 소녀의 머리뼈가 발견되었다. 치아의 상태로 보아서는 고기를 자주 먹던 상류층 사람인데도 인간 제물이 되고 같은 인간에게 잡아먹히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 모든 잔혹한 일들을 덤덤하게 설명한다. 인간 제물이나 동물 제물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는 듯이. 그럼에도 저자의 이야기와 그 증거로 제시된 사진들은 독자에게 충격을 주고 때로는 마음을 아프게 한다. 특히 아이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결국 같이 난도질되어 죽임당한 인간 제물의 이야기와 사진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아이를 지키려 했지만 결국 함께 제물로 바쳐진 아버지의 유골. 상나라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저자는 '상나라 정벌'이 상나라의 제후였던 주나라 일족이 이런 참혹한 역사를 끝내기 위해 내린 결단으로 보고 있다. 상나라는 작은 이웃 나라들을 정벌해 그곳 사람들을 인간 제물로 바쳐왔고, 주나라는 인간 제물들을 잡는 데 앞장선 인간 사냥꾼들이었다. 그러나 상나라의 군주 주왕이 주나라의 세자 백읍고를 인간 제물로 바치고 그 고기를 아버지인 희창(훗날 문왕으로 추존됨)에게 먹이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그의 만행에 분노한 주나라 일족은 오랜 인고의 시간 끝에 상나라를 정벌하고 인간 제물을 바치는 풍습을 없앴으며, 상나라의 인간 공양도 인간 사냥꾼인 자신들의 과거도 역사에서 지워버렸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수십 년 동안 선배 학자들이 진행해 온 상나라 관련 고고학 연구, 요순시대와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고대 역사서 『서경』, 『역경』의 점괘 해석들을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문제는 그의 주 연구 분야가 상나라-주나라가 아니고, 자신이 구축한 역사적 서사에 자료를 끼워 맞춰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근거를 주장에 끼워 맞춰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학자로서 지양해야 할 태도다. 그런데 고고학도 중국 고대사도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이것만 가지고 단정할 수 있나 싶은 부분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저자는 확실한 고고학적 근거가 없는데도 주나라 일족의 근거지에서 발굴된 저택 유적을 문왕의 저택이라고 단정한다. 또한 『서경』에서 실제로는 주공이 내린 명령들의 주어가 '왕'으로 되어 있는 것을, 저자는 주공이 당시에 실제 군주로 군림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반면 을유문화사판 『서경』 의 번역자 이세동 교수는 실제로 명을 내린 것은 주공이지만 군주인 성왕의 이름으로 명을 내렸기 때문에 주어를 '왕'으로 했다고 보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세동 교수의 분석이 더 합리적이다. 한편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이라는 부제대로 저자의 『역경』 속 점괘 해석들이 이 책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저자는 이 점괘들이 인간 제물들의 다양한 모습이나 문왕이 처한 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원문 자체가 너무 단순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식인 데다, 글을 이룬 글자들이 지금의 한자와는 다른 형태의 한자라 어떤 게 어느 글자인지를 두고도 학자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그러니 저자가 『역경』의 점괘를 바탕으로 그려낸 상나라의 참상이 아무리 생생하다 하더라도, 저자의 해석이 객관적인 근거를 갖추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중국 학계에서도 이 책을 상당히 많이 비판했다고 한다. 방대한 양의 고고학 보고서와 논문 속 역사의 파편들을 모아 수천 년 전 상나라의 모습을 재구축하는 것도, 그것을 (한국어 번역판 기준) 900페이지에 걸쳐 밀도 있게 그려내는 것도 분명 굉장한 역량이다. 저자가 디테일하게 상상해 낸 상나라의 모습 덕분에 독자들이 상나라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중국 고대사 연구자인 심재훈 교수는 이 책을 '재미있는 역사 소설'로 평하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을 통해 중국 고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괜찮지만, 저자의 주장이 객관적으로 입증된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 쪽이 좋을 것이다.

P. S. '세력'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는데 '실력'으로 번역한 것이 몇 군데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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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 정벌 -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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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자신이 구축한 역사적 서사에 따라 자료를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 역사책으로서의 치명적인 결점이다. 저자 본인의 연구 분야는 상나라-주나라가 아니라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하고. 그래도 역사의 작은 파편들로 밀도 높은 글을 900페이지 넘게 쓸 수 있다는 것은 굉장한 역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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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4 - 5호16국과 남북조시대 미술 중원과 변방의 충돌, 새로운 중국이 태동하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동양미술 이야기 시리즈 4
강희정 지음 / 사회평론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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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에서만 실크로드 미술 이야기를 다루는 건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4권으로 한 권 더 실크로드 미술 이야기를 다루니 포만감이 든다. 5호 16국 시대의 역사와 미술사가 이렇게 다채롭고 역동적이었다니, 역시 문화를 더 풍성하고 다채롭게 만드는 것은 다양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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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 치즈가 좋아서 떠난 영국 치즈 여행기 유유자적 1
이민희 지음 / 크루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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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을 때부터 표지의 선명한 노란색에 눈길이 갔다. '치즈'라는 책 제목처럼 애니메이션 속 생쥐가 좋아하는 치즈 같은 노란색이다. 게다가 나도 치즈를 좋아하니 언젠가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생각만 하고 잊고 있던 와중에, 얼마 전에 읽은 『베트남 간식』과 이 책이 같은 시리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덕분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부제는 '치즈가 좋아서 떠난 영국 치즈 여행기'다. 하지만 다양한 치즈를 맛보며 느긋하게 즐기는 식도락 여행기는 아니다. 저자가 직접 영국에 어떤 치즈 농가들이 있는지 찾아보고 하나하나 방문 허락을 받고, 한 곳 한 곳 방문해 치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기록했으니 '나의 영국 치즈 답사기'라고 할 수 있다. 책의 대부분은 각 치즈의 역사와 현황, 저자가 보고 듣고 경험한 제조 공정과 거기서 알게 된 것들이다. 책 속 사진들도 대부분은 완성된 치즈가 놓여 있는 선반이나 치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찍은 것이다. 그러니 화려한 치즈의 향연을 기대한 사람들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이건 여행이 아니라 견학이잖아?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즐기러 간 것이 아니라 배우러 간 것이고, 치즈의 소비보다는 생산에 더 관심이 많으니 견학이 맞다.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것은 치즈의 소비가 아닌 생산이다. 생산 공정과 그 공정 하나하나에 공을 들이는 사람들이다.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치즈들은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우유를 준비하고, 거기에 산을 넣어 단백질을 응고시키고, 응고된 덩어리를 건져내 수분을 빼내고 모양을 잡고, 저장고에서 숙성시키면 완성. 그러나 치즈에 넣는 산의 양이나 소금의 비율부터 수분을 빼는 방법, 제조 작업에 사용하는 도구까지 각각 조금씩 다른데, 그 작은 차이가 치즈의 개성을 만들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각 치즈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록하고, 각각의 과정이 치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한다. 그저 촬영하고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치즈 제조자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치즈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려야 하는지 실감한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치즈를 만드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모두 잠든 이른 새벽에 일어나 온몸의 힘을 써야 하는 중노동을 하고, 좋은 우유를 만들 수 있도록 소들까지 돌본다. 이런 고된 일이지만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즐겁게 일한다. 저자가 찍은 이들의 모습에는 자기 일을 사랑하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의 위엄과 품위가 있다. 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줄 안다. 자신들이 만드는 치즈에 관심을 갖고 배우고 싶어 한다는 이유만으로 일면식도 없는 이방인인 저자를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처럼 따뜻하게 환대한다.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은 어떤 차이나 경계도 뛰어넘는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책날개에서 저자는 이 책을 '느리고 깊게 만난 그동안의 나의 치즈 이야기'라고 요약한다. 그 말대로 이 책은 이곳저곳 바쁘게 움직이며 최대한 많은 치즈를 맛보고 그 맛을 현란하게 묘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을 생각하라'는 말처럼, 저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치즈의 근원을 찬찬히 파헤쳐 나가고, 그 뒤에서 묵묵히, 성실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명을 비춘다. 저자는 10년 전의 여행을 책으로 내기 위해 분투하다 결국은 출간해 냈으니, 좋은 치즈를 만들기 위해 수십 년 동안 매일 성실히 노동하는 치즈 제조자들만큼이나 인내심이 강하다. 좋아하는 것에 대한 우직한 이 기록은 천천히 씹으면 그 풍미를 느낄 수 있다는 데서 치즈와 닮았다.


P. S. 『베트남 간식』처럼 큰 판형에 사진들도 큼직하게 넣고 잡지 같은 감각적인 느낌으로 디자인했다. 속표지까지 선반에 놓인 치즈 사진으로 채우고, 치즈 외의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치즈 더하기' 코너와 에필로그는 잘 익은 치즈 같은 레몬색을 바탕색으로 한 데서 치즈 이야기에 가장 잘 어울리는 외형을 만들어내려 고심한 것이 느껴진다.


다만 치즈 전문점 닐스 야드 데어리의 매장 구조도(53페이지)는 영어판 그대로 넣지 말고 텍스트들을 한국어로 번역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책들에서 원어 표기하는 데 흔히 쓰이는 위첨자를 덧붙이는 말에도 쓰는 것은 『베트남 간식』에서와 마찬가지인데, 문장이 길 때는 가독성이 떨어진다. 독특한 시도이긴 하지만 독자에게는 가독성이 먼저이니, 그냥 문장 바로 뒤에 다른 본문들처럼 처리하거나 괄호 안에 넣는 게 더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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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 치즈가 좋아서 떠난 영국 치즈 여행기 유유자적 1
이민희 지음 / 크루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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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치즈에 대한 가벼운 감상을 모은 말랑한 책이 아니다. 영국에서 직접 치즈 농가들을 알아보고 방문하고 치즈가 만들어지는 공정 하나하나를 관찰하니, 제대로 치즈를 공부하려는 사람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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