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의 집
사샤 나스피니 지음, 최정윤 옮김 / 민음사 / 2021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캐릭터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겹겹이 쌓아가며 전체 마을의 이야기를 구축하는 솜씨가 뛰어나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품고 있는 어두움과 추악함이 숨을 막히게 한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없는데도 유령이나 괴물이 나오는 고딕 소설보다 더 소름 끼치게 느껴지는 소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여성, 정치를 하다 - 우리의 몫을 찾기 위해
장영은 지음 / 민음사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초등학교 때 사회 교과서에서 정치의 정의를 처음 봤을 때 의아했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자원을 권위적으로 배분하는 활동이라니정치는 선거에서 뽑힌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 하는 일 아닌가뭔가를 나눠주는 게 어떻게 정치가 되는 거지어른이 되고 세상을 알아가면서 깨달았다파이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누구에게얼마만큼 나누느냐가 중요하다는 걸어떻게 파이를 나눌 것인가를 놓고 수많은 갈등이 일어나고 있고그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사회 구성원들의 입장을 조율해 가는 것이 바로 정치라는 걸그리고 파이가 공평하게 나눠지지 못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고제 몫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너무나 많으며 그 중 하나가 내가 될 수 있다는 것도.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정치는 몫 없는 이들의 몫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했다고 한다장영은 작가는 랑시에르가 말한 정치의 정의에 동의하며 정치하는 여성의 범위를 더 넓게 잡았다국회의원이나 장관총리대통령 등 정치 지도자가 되어 나라를 이끌어간 여성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에서 몫 없는 사람의 몫여성의 몫을 찾기 위해 사회적 실천을 했던 여성들로그런 기준으로 선정한 여성 정치인’ 21명의 이야기를 모은 책이 여성정치를 하다이다.

 

  물론 장관이나 총리 등 나라 전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에 올라몫 없는 사람을 위한 법과 정책을 만들어낸 여성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권력다툼의 한복판인 정계에서 몇 번이고 좌절했다 다시 일어나 권력을 쟁취하고 그 권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뜻을 펼치는 여성들의 모습은 존경스럽다하지만 높은 자리에 앉지 않고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영향을 미친 여성들더 넓은 의미에서의 여성 정치인들의 이야기는 정치가 나와는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나 자신도 실천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열한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여성 교육을 금지하는 탈레반의 만행을 고발하며 개발도상국의 여자아이들에게 교육받을 권리를 찾아주기 위해 싸운 말랄라 유수프자이그림을 통해 노동자들이 겪는 불평등한 현실을 폭로하고 전쟁을 반대한 독일의 화가 케테 콜비츠자신의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강의와 저술을 통해 여성과 노동자흑인 등 미국 사회에서 소외되고 차별당하는 사람들을 대변한 헬렌 켈러 등낮은 곳의 여성 정치인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한다그녀들은 여성이라는 것이 핸디캡이 되고 루머나 신체적인 위협비협조적인 사회 분위기 등 온갖 어려움이 따라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다이들의 용기와 결단행동력은 힘없는 나 하나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절망하고 무기력해진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

 

  이들 모두가 생전에 자신이 한 정치의 성과를 본 것은 아니다여성의 참정권을 찾기 위해 평생을 싸워온 영국의 사회운동가 에멀린 팽크허스트는 결국 21세 이상의 모든 여성이 참정권을 가질 수 있다는 법안이 통과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독일의 정치인 페트라 켈리는 사회의 약자들을 대변하고 생태 친화적인 정치를 추구하는 녹색당을 주요 정치 세력으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지만녹색당이 내분에 휩싸이고 자신도 녹색당에서 퇴출된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다하지만 저자는 이들을 실패자로 낙인찍지 않고이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실천했고그들이 뿌린 씨앗이 이후에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돌아본다여기에서 이 책에 실린 여성 정치인들에 대한 저자의 애정과 사려 깊음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각 인물을 그렇게 깊이 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한 명 한 명의 분량이 열 페이지 남짓인데 책의 판형도 작아 각 인물의 삶과 업적영향은 간략하게 설명된다특히 마거릿 대처의 경우에는 정책적인 면에서 과오도 많은데 그녀의 독선적인 면만 조금 언급된다책에서 소개하는 인물의 단점을 너무 자세히 이야기하면 독자들의 동기 부여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오히려 그 인물의 한계까지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이 그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이 책에 실린 글들이 원래 한정된 신문 지면에 싣는 칼럼이어서 그런지 문장과 문장 사이 몇 문장이 편집된 것처럼 연결이 매끄럽지 않게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다이렇게 책의 완성도에서는 아쉬운 점이 있지만책에 실린 21명의 여성 정치인의 삶과 정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독자들의 가슴을 뛰게 한다또한 책의 맨 뒤에는 각 인물의 이야기를 쓰는 데 참고한 책들의 목록이 실려 있어각각의 인물을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독자들을 또 다른 책들로 이끌어 준다여기에 이 책의 의미와 가치가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외로운 도시 - 뉴욕의 예술가들에게서 찾은 혼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
올리비아 랭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목차가 나오기 전 "지금 외롭다면 이건 당신을 위한 책이다"라는 제사題辭가 나를 맞는다. 내가 지금 외로운 건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서문 대신 실린 첫 번째 글 「외로운 도시」에서 "사람은 어디서든 고독할 수 있지만, 도시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면서 느끼는 고독에는 특별한 향취가 있다"(p. 13.)고 작가는 말했다. 인구 수백만의 대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교외 지역이라 대도시라기보다는 지방 소도시 같은 느낌이고, 거의 평생을 지낸 곳이라 내겐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혼자 산 적은 한 번도 없고 늘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또 다른 조건으로 봤을 때는 어떨까. "…물리적으로만 고립되어야만 고독해지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오히려 서로 연결되고 가깝고 연대한다는 감각의 부재와 결핍, 즉 어떤 이유에서건 원하는 만큼의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고독의 여건일 수 있다."(p. 14.) 가족과 함께 살고 사이도 좋은 편이니 친밀감을 전혀 느낄 순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별일이 없으면 내가 가족들보다 수십 년은 더 살 테니 나는 혼자 남겨질 것이고,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공동체는 없으며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관심이 없다. 무엇보다 내가 일하고 싶은 분야에는 다시 발도 들여놓지 못한 채 가난 속에서 고립된 채 나이만 먹어갈 것이라는 불안감이 크다. 뼈저리게 외로운 건 아니지만 문득 외로움을 느끼거나, 앞으로 견딜 수 없이 외로워질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 점에서는 나를 위한 책까지는 아닐지라도 내가 읽어도 괜찮을 책일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이 내게 맞는지 미리 생각해 봤다. 


  이 책은 영국의 비평가 올리비아 랭이 뉴욕과 그곳의 예술가들, 그들을 둘러싼 고독에 관해 쓴 여덟 편의 에세이를 모은 것이다. 이 에세이들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겹은 작가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대도시 뉴욕에서 느끼는 고독을 털어놓는 에세이다. 작가는 남자친구와 함께 살기 위해 무작정 뉴욕으로 왔지만, 남자친구는 이미 변심했다. 영국에서 살던 집은 이미 세를 줬으니 한동안은 뉴욕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뉴욕에 친구나 지인이 한 명도 없지는 않았지만, 사람들과 교류하기보다는 집에 혼자 멍하니 있거나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 서핑을 하고, 혼자 이리저리 시내를 거니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허름하고 주변의 소음과 네온사인에 그대로 노출된 집. 불안정한 경제 상황. 사소한 언어 차이에서 느끼는 이질감. 누군가 자신을 따뜻하게 봐주길 바라지만 관음적인 시선에 노출되는 것은 두려운 마음. 이런 것들이 대도시에서 혼자 살아간다는 감각을 더욱 생생하게 했다. 


  작가가 뉴욕에서 느끼는 고독은 뉴욕의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그리는 비평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에워싼 고독에 저항했고, 작가는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과 작품 세계로 고독에 대응했는지 들여다 본다. 에드워드 호퍼는 훤히 들여다 보이는 유리창 안에 혼자 있거나 함께 있어도 대화하지 않는 그림 속 인물들을 통해, 고립되어 있으면서 수많은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고독과 불안을 표현했다. 앤디 워홀은 이주민인 데다 성소수자였고 남들보다 튀는 옷차림과 언행을 하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에게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상처 입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고 같다는 것은 무시당하거나 거부당할 위험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똑같은 이미지들을 무수히 만들어냈고, 그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살아갔다. 사진작가 데이비드 워나로위츠는 부모에게 학대당하고 방치된 채로 자랐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성소수자이자 에이즈 환자로서 편견과 억압과 부딪혀야 했다. 워나로위츠는 자신이 먹고살기 위해 몸을 팔거나 성관계를 가질 사람을 찾아 나서던 뉴욕의 거리들에 랭보(19세기 프랑스의 시인) 가면을 쓴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뉴욕의 아르튀르 랭보 Arthur Rimbaud in New York> 연작을 통해, 뉴욕이라는 화려한 도시 이면에 숨겨진 장소들, 배제된 사람들을 드러냈다. 예술 창작뿐만 아니라 정부의 에이즈 환자 처우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하는 등의 사회 활동을 통해, 자신과 같은 소수자들을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사회에 맞섰다. 헨리 다거는 가족과 유일한 친구가 죽은 뒤로는 이웃과도 거의 교류하지 않으면서 50여 년을 골방에서 살았지만, 그가 요양원으로 떠난 뒤 그가 남긴 300점의 그림과 수천 페이지의 회고록, 15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의 원고가 골방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평생 고립된 삶을 살면서 거대한 또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냈고, 현실과 자신이 만들어낸 우주를 완전히 구분하지 못했다.


  그들이 힘겹게, 치열하게 고독과 맞서는 모습은 연민과 감동을 자아내지만, 작가는 연민하거나 감동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그들의 고독이 그들 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지 않고, 더 큰 사회적 상황이 그들을 더욱 고독으로 몰아갔다고 본다. 이런 성찰이 에세이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또 다른 한 겹이다. 1950년대에 아동이 양육자와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형성해야 이후에 감정적, 사회적으로 발달할 수 있다는 애착 이론이 개발되기 이전, 애정 표현은 아이를 망칠 수 있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헨리 다거의 유년기도 그런 믿음이 지배적인 시대에 속했다. 그는 가정에서도, 보호소에서도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한 채 자라났고, 성인이 되어서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갔다. 에이즈의 원인과 치료법이 밝혀지기 전까지 에이즈 환자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족에게 거부당했으며, 의료진조차 치료를 거부했고 장의사들은 시신을 매장해 주지 않았다. 보수적인 정치인들은 에이즈의 원인을 성소수자들의 '부도덕한' 성행위 탓으로 돌리고 정책 결정권자들은 에이즈 환자들에게 필요한 교육과 자금원을 고의로 차단했다. 많은 성소수자 예술가들이 걸어 다니는 병균 덩어리인 양 취급받고 쓸쓸히 죽어갔다. 데이비드 워나로위츠는 병든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분개했고, 사회 운동 단체 '액트 업Act Up'에 가입해 에이즈 환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데 힘썼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고독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서의 낙인과 배제가 낳은 결과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이런 낙인과 배제에 저항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세 겹의 층은 지층처럼 뚜렷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섞이며 글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만든다. 그 모든 층에 녹아 있는 것이 뉴욕이라는 도시 자체다. 뉴욕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나는 구글 지도 중 뉴욕 시의 지도를 모니터에 띄워 놓고 책을 읽었다. 구체적인 지명이 나올 때마다 검색을 했고, 그곳을 클릭하면 화면 왼쪽에 그 장소의 사진과 그 장소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나왔다. 그 사진과 설명으로 그곳이 어떤 곳인지 짐작했다. 책 속에서 작가와 뉴욕의 예술가들이 머물거나 방문했거나 활동했던 장소들은 생각보다 서로 가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을 따라 뉴욕 시내 곳곳을 걸어 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작가는 고독에 관한 이 책을 쓰면서 오히려 놀랄 만큼 많은 관계를 맺었다고 했는데, 나는 고립을 이야기하는 이 책을 통해 오히려 저 멀리 있는 뉴욕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됐다. 


  뉴욕이라는 공간 자체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고독과 마주하며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과 예술 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 보고 나왔다. 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고독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고독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는 대신, 고독을 자신의 삶과 예술 세계의 일부이자 원동력으로 끌어안았다. 작가는 고독이 고쳐야 할 문제점이나 누구를 만나서 치유되어야 할 병이라기보다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 낙인과 배제라는 더 큰 힘이 낳은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 속의 예술가들은 고독 속에서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 보고 고독에 대응하는 예술 세계를 만들어내거나, 자신을 더 고독하게 만드는 사회의 낙인과 배제에 맞서고 서로 유대했다. 누구나 고독을 훌륭한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독을 끌어안거나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고독과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이다. 외로운 사람들을 더 외롭게 만드는 세상에 저항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독에 대한 이런 성찰과 행동이 세상을 더 다정하게 만들 것이다. 세상이 더 다정해진다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언젠가 떠난다 해도 나는 덜 외롭고 더 따뜻한 마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P. S. 1. 원문을 읽어 보지 못했지만 번역본만 봤을 때도 세밀한 감정의 결까지 살아 있는 훌륭한 번역이었다. 번역자 후기는 단순한 번역 후기가 아니라 이 책을 온전히, 깊이 이해하고 쓴 좋은 서평이다. 


P. S. 2. 텍스트 자체는 뛰어나지만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작품들 중 책에 실린 도판은 몇 점밖에 안 되는 것이 아쉽다. 작가가 작품 각각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창의적으로 해석하지만, 독자 자신이 작품을 직접 보고 각자의 감상과 해석을 내놓는 것도 중요하다. 저작권이 아직 안 풀린 현대 미술 작품들이라 저작권료 부담이 있었을 것이고 원서 자체에 도판이 많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욕심을 내서 도판을 더 찾아 넣었다면 좋았을 텐데.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딩 2021-07-07 23: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바스티안 2021-07-08 00:18   좋아요 1 | URL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숫자가 만만해지는 책 - 한 번 배우고 평생 써먹는 숫자 감각 기르기
브라이언 W. 커니핸 지음, 양병찬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능 볼 때까지는 수학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지만, 수능 수리영역에서 기대에 못 미치는 점수를 받고 나서는 수학에서 손을 뗐다. 그 이후로는 간단한 계산도 PC나 핸드폰의 계산기로 해왔고, 근의 공식, 인수분해 공식은 물론이고 소금물의 농도 구하는 법까지 잊어버렸다. 살면서 정산 정도는 해야 되는데 이렇게까지 숫자와 담을 쌓고 살아도 괜찮은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숫자가 만만해지는’이라는 제목과 ‘한 번 배우고 평생 써먹는 숫자 감각 기르기’라는 부제에 끌렸다.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초등학교 수학 실력 정도면 충분하다”는 서문 속 저자의 말에 반신반의하면서 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수학만 알아도 이 책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 책의 주목적은 어려운 수학 공식들의 원리를 쉽게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팩트 체크’이기 때문이다. 이 책이 팩트인지 체크하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보는 수많은 숫자들과 그 숫자들을 근거로 한 주장들이다. 인터넷 기사, 블로그 포스트, 광고 등 우리 주변의 다양한 매체들에 등장하는 숫자들은 얼핏 보면 정확해 보인다. 하지만 이 숫자들에는 우리 생각보다 오류가 많다. 이 책은 사칙연산, 올림과 반올림, 단위 환산만 할 수 있어도 이 숫자들이 정확한지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네 가지는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만 되어도 할 수 있는 계산이다.

  숫자로 된 정보의 오류를 잡아내려면 먼저 어떤 이유로 오류가 생기는지 알아야 한다. 저자는 각종 매체가 숫자로 된 정보를 제시할 때 오류를 내는 경우를 유형별로 정리하고, 어디에서 무엇을 잘못 계산해서 오류가 생긴 건지 차근차근 살펴본다. 우선 영어에서는 발음도 철자도 비슷한 ‘100만(밀리언million)’과 ‘10억(빌리언billion)’, ‘1조(트릴리언trillion)’를 혼동하는 경우가 있다. 알파벳 한두 개를 혼동했을 뿐인데 1000배 이상의 오차가 날 수 있다. 단위 환산을 잘못하거나 더 작은 단위와 더 큰 단위를 혼동하는 경우도 있고, 길이와 넓이, 부피를 혼동해 오류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책을 읽으면서『뉴욕 타임스』,『뉴스위크』같은 공신력 있는 매체에서도 의외로 이런 오류를 많이 저지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가 더 주의해야 할 것은 실수로 인한 이런 오류보다 의도적으로 숫자에 속임수를 쓰는 경우라고 저자는 경고한다. 숫자로 된 자료인 그래프와 통계는 객관적인 자료로 보이지만, 그래프는 눈속임을 하기 쉬운 수단이며 통계는 진실을 호도하는 수단으로 오용될 수 있다. 미국의 뉴스 채널 <폭스 뉴스>에서는 2007년 12월부터 2010년 6월까지의 실업률 그래프를 제시했는데 이 그래프만 보면 실업률이 계속 치솟고 있다. 하지만 이 그래프의 X축을 자세히 보면 각 항목 사이의 간격이 일정하지 않다. 각 항목 사이의 간격을 일정하게 하면 실업률은 수정하기 전의 그래프에서만큼 가파르게 치솟고 있지 않다. 시각적으로 보기 좋게 만들려고 했든 당시 대통령 임기 동안의 실업률을 강조하려고 했든 시청자들을 기만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개인 블로그도 아닌 『뉴욕 타임스』, 『뉴스위크』, <폭스 뉴스>, 같은 유력 언론 매체에서도 이렇게 실수로든 고의로든 숫자 관련 정보에서 많은 오류를 저지른다.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이나 권익을 주장하는 각종 단체들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숫자들만을 내세우거나 교묘하게 통계, 그래프를 조작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숫자의 오류가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할까?

  저자가 독자들에게 쥐여 주고 싶어 하는 무기는 상식과 더 예민한 숫자 감각이다. 『뉴스위크』지에서는 2004년 미국 정부가 6600억 배럴의 석유를 비축하고 있다고 보고했는데, 이 정도면 미국 전 국민이 264년 동안 쓸 수 있는 양이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양의 석유를 갖고 있는데 왜 미국인들은 유가 파동에 신경을 곤두세울까? 알고 보니 ‘6억 6천만(660밀리언)’ 배럴을 ‘6600억 배럴(660빌리언)’ 배럴로 혼동한 것이었다. 이렇게 자신이 갖고 있는 상식과 자료 속 숫자가 말하는 주장이 어긋난다고 느껴진다면, 숫자의 자릿수를 바꿔보거나 단위를 바꿔보면서 그 숫자가 정확한지 체크해 보라고 저자는 제안한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시사 상식과 교양은 풍부해도 숫자 감각은 부족하고, 큰 수만 나오면 숫자 감각이 마비되어 버리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 사람들이 숫자 감각을 기를 수 있도록 그가 제안하는 수단은 어림 계산이다. 어림 계산은 자신이 알고 있는 적은 양의 정보만으로 정확한 값과 근접한 수치를 도출해내는 계산인데,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이 책에 나오는 어림 계산의 첫 번째 예는 미국에 있는 자동차의 수를 추정하는 것이다. 알고 있는 정보는 현재 미국 인구가 약 3억 3천만 명이라는 것뿐이다. 한 명당 자동차를 한 대씩 갖고 있다고 추정하면 3억 3천만 대이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만 18세 미만의 미성년자나 운전을 할 수 없는 노인들,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자동차를 갖고 있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들을 고려해 미국인의 3분의 2나 4분의 3이 차 한 대씩을 보유하고 있다고 계산하면 2억에서 2억 5천만 대의 자동차가 있다는 추정치가 나온다. 이 추정치는 놀랍도록 정확한 값에 가깝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2015년 미국에는 약 2억 6360만 대의 승용차가 등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와 상식을 바탕으로 어림 계산을 해도 얼토당토않은 수치에 속을 가능성은 훨씬 더 줄어든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어림 계산 실력을 늘리기 위한 몇 가지 팁도 소개하고 있다. 2의 10제곱은 1024, 10의 3제곱은 1000인데, 전자가 후자보다 약 2.5퍼센트 크다. 2의 20제곱은 10의 6제곱보다 5퍼센트 크다. 오차가 점점 커지긴 하지만, 2의 10×n 제곱이 10의 3×n 제곱의 근삿값이라는 것을 알면 큰 숫자를 계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복리(어떤 양이 동일한 시간 간격을 두고 일정한 백분율만큼 계속 증식하는 것)를 계산하는 데는 ‘72의 법칙’을 활용할 수 있다. 72의 법칙은 ‘어떤 금액이 단위 기간당 x퍼센트의 복리로 불어난다면, 원금의 두 배가 되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72를 x로 나눈 값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대학의 장학금이 1년에 8퍼센트씩 증가한다면, 9년 후에는 장학금이 두 배로 증가한다. 이 법칙은 우리가 투자한 원금이 몇 년 뒤에 어느 정도로 증가하는지 어림 계산 하는 데 유용하다.

  계산 실력을 늘리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연습 문제를 풀어보는 것. 저자가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학생들에게 출제했거나 외부에서 입수한 문제 몇 개를 소개하는데 하나같이 흥미롭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다고 했을 때 축구장 하나에는 사람들이 몇 명 들어갈 수 있을까? 우리 집 마당에 나무가 여섯 그루 있다면 마당에 떨어지는 나뭇잎은 몇 장이나 될까? 노트북의 디스크 형태로 데이터를 저장한다면, 내 방만한 공간에는 데이터가 얼마나 저장될까? 길거리 뷰에 나오는 사진들을 촬영하기 위해 구글의 자동차는 몇 마일을 운행했을까? 엉뚱한 질문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우리 자신의 상식과 숫자 감각, 창의적인 사고력을 총동원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기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저자의 학생들은 입사 면접에서 이런 문제를 접했을 때 저자와 함께 이런 문제들을 풀어보았던 것이 많이 도움이 됐다고 한다.

  계산에 약한 편이라 사실 더 많은 계산 팁이 나왔으면 했다. 수학을 잘하고 싶었지만 한 번도 수학을 잘한 적이 없었던 사람으로서 수학을 잘하게 되는 꿀팁을 기대하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 주변의 숫자들 속 수많은 오류들과 그것이 왜 잘못된 건지 체크해 보는 내용이 대부분인 것이 아쉬웠다. 비슷비슷한 ‘팩트 체크’가 책을 읽는 내내 이어져 지루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무엇이든 하루아침에 쉽게, 잘하게 되는 왕도는 없는 법. 이 책을 읽고 갑자기 수학 천재가 될 수는 없겠지만, 숫자가 생각보다 무섭고 어려운 것이 아니고 숫자의 바다에서 우리 자신을 지키는 무기는 이미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흑요석이 그리는 한복 이야기
우나영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관에서 책들을 고르다 서가 선반에서 툭 튀어나온 길쭉하고 판판한 책이 눈에 띄었다. 제목은 『흑요석이 그리는 한복 이야기』. 아름다운 한복 일러스트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흑요석(닉네임, 본명은 우나영)'이 몇 년 전 한복을 설명하는 일러스트집을 낸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게 생각났다. 홍보 글을 보고 참 예쁜 책일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사보지는 않았었는데, 그 책이 눈앞에 있었다. 표지와 몇 페이지만 들여다봐도 예쁘고 흥미로워 보여서 끝까지 정독하고 싶어졌다. 읽어야 할 책이 여러 권 있었지만 이 책을 제자리에 다시 놓지 못하고 빌려왔다.

한복에 대한 책들 중에는 너무 학술적이고 전문적이어서 일반 독자가 바로바로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많다. 책 속의 설명을 읽다 보면 한자로 된 어려운 용어가 툭툭 튀어나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일반 독자들을 위해 『흑요석이 그리는 한복 이야기』의 작가는 처음부터 용어를 하나하나 설명한다. '아청색', '청현색', '홍람색', '담자색' 같은 색깔 이름은 직접 그 색깔들을 보여주고, 앞으로 계속 언급될 한복의 각 구조의 명칭을 미리 설명한다. 한복의 배색과 기본 구조, 기본 의상을 미리 설명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한복이 어떤 옷인지 큰 줄기를 파악하게 하고, 각각의 한복이 어떤 옷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나간다. 이렇게 체계적이고 친절한 설명 덕분에 한복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독자라도 책을 읽고 나면 한복이 어떤 옷인지 대강을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간결한 선화로 그려 더 알아보기 쉬운 한복 저고리의 구조와 각 부분

각 시대의 여성 한복을 비교한 일러스트. 왼쪽은 19세기의 여성 한복, 오른쪽은 20세기의 여성 한복이다.


일러스트는 설명하고 싶은 부분만 더 눈에 띄게 표현하는 데 사진보다 유리하다. 『흑요석이 그리는 한복 이야기』는 이런 일러스트의 장점을 활용해서 한복의 구조와 각 부분의 명칭, 종류, 입는 법 등을 더 알기 쉽고 명쾌하게 설명한다. 간결한 선화 안에 설명하는 부분만 색채를 넣어 강조하는 방식 덕분에 사진을 볼 때보다 더 명쾌하게 설명을 이해할 수 있다. 각 시기에 따라 옷깃, 고름, 소매, 치마의 모양과 사이즈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나란히 배치해 두어서 시대가 지남에 따라 한복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시대뿐만 아니라 어느 붕당이냐에 따라서 여인들의 쪽머리와 깃 모양도 달랐다는 것이 흥미롭다.


화려하고 섬세한 한복 일러스트

이미지 출처: 우나영 그라폴리오


화려하고 섬세하고 유려한 일러스트는 알아가는 재미에 보는 재미를 더한다. 작가의 화려하고 섬세한 화풍의 장점은 한복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궁중 의상에서 특히 빛난다. 궁중 의복의 복잡한 구조를 정확하게 그려 기초를 단단하게 다진 뒤 선명하고 다채로운 색채와 화려한 무늬를 입혀 궁중 의상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곁에 두고 보고 싶을 때마다 펼쳐보고 싶게 만들 정도로 이 책은 아름답다.

한복을 알고 싶어도 관련 서적들이 너무 대략적이거나 너무 학술적이어서 만족스럽지 못했던 사람들이 한복을 알아가기에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여성 한복만 다루고 있다는 것과 책의 분량이 좀 더 많았으면 하는 것이다. 작가가 남자 한복을 다루는 후속편도 다루겠다고 했으니 후속편을 기다리고 있다. 도포, 중치막, 두루마기가 어떻게 다른 건지 구별할 수 없는 나이니. 여자 한복을 다룬 이 책과 남자 한복을 다루는 후속편을 합본으로 만들어서 한복 전반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