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로 산다는 것
김학원.정은숙.강주헌 외 지음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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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편집자가 되고 싶은데 어느 쪽으로도 길이 막혀 있는 것 같다. 주변에 조언을 구할 지인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들에게도 각자의 삶이 있으니 마냥 붙잡고 물어볼 수만은 없다. 코로나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사정도 있어 편집과 관련된 강의를 듣는 것도 쉽지 않다. 혼자 이것저것 찾아보긴 하는데 뭔가 부족한 것 같다. 이런 내게 좋은 나침반이 되어준 책이 있다. 그 책이 여섯 명의 출판계 사람들이 한 꼭지씩 맡아 쓴 책 『편집자로 산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편집자를 꿈꿔왔지만, 편집자가 되면 어떤 책을 만들고 싶냐는 질문을 받으면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런 내게 휴머니스트 김학원 대표의 이 말이 지침이 되었다. "앞으로의 출판에서는 우선 자신의 운동장을 명확히 해야 합니다." 편집자로 일하다 보면 자리를 잡을 때까지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때가 오면 자신의 분야와 방향을 정해야 한다고 김학원 대표는 말한다. 그런데 어느 출판사나 인문서를 만든다고 하면서 인문서 안에서도 어떤 분야를 전문으로 할 것인지, 그 분야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지 전문성도 없고 차별성도 없고 비전도 없다고 한다. 


  나는 역사와 미술사를 공부했고 역사와 미술사를 전문으로 하는 편집자가 되고 싶다. 역사책, 미술사 책 편집의 전문가가 되려면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김학원 대표는 역사 전문 출판사를 만들 때 역사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단행본을 냈던 저자 수십 명을 만났다고 한다. 『역사비평』, 『역사산책』  같은 역사학 학술지에 발표된 글들을 참고해서 역사 분야의 주요 저자들, 핵심 학자들과 몇 개월 동안 계속 회의를 했다고 한다. 한 사람의 편집자가 10년 넘게 학계나 주변의 다양한 필자들을 만나고 소통하면서 역사책의 방향, 역사 대중화의 방향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쌓아간다면, 그 자체로 역사 분야의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내가 그런 편집자가 된다는 것은 지금 당장 너무 어려운 일로 보이지만, 지금부터라도 최근 나온 학술지 한 권씩이라도 읽어보고 나를 가르쳐 주셨던 교수님들이 쓰신 논문과 책들을 찾아보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조금씩 보였다. 


  미술사 책을 만들려면 어떤 것들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어떤 것들을 유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정민영 아트북스 대표의 글에서 배웠다. 나를 가르쳐 주셨던 미술사 교수님들 중 한 분이 "요새는 사람들이 작품 자체보다 작품의 배경지식에 더 관심을 가진다"고 한탄하셨고, 나도 교양 미술사 책이나 국내 유명 전시들의 도슨트 해설이 작품 자체보다는 배경지식에 더 치중해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미술 작품 자체에 집중하는 미술사 책을 만들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민영 대표는 독자들에게는 화가들의 에피소드, 저자 자신의 에피소드가 미술에 관심을 갖게 하는 통로가 되며, 교양 미술사 책에는 독자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예능감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앞에서 김학원 대표가 말했듯이 대중서, 교양서에서도 깊이가 있고 기본이 탄탄해야 하지만 독자들을 끌어당기는 양념 또한 필요하다. 이 둘의 균형을 잘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에 들어가는 작품 도판 이미지의 저작권 문제와 화질 문제, 도판의 배치 등에 대한 실용적인 팁들도 많았다. 딱 내가 알고 싶었던 분야에 대한 특강을 들은 느낌이라 반갑고 기뻤다. 


  전문성 못지않게 편집자에게 중요한 것은 '팔리는 책'을 만드는 것, 즉 책의 상품성이다. 내게는 베스트셀러여도 내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팔리는 책을 만들어야 하는 편집자로서는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다. 그런 내게 "책 또한 돈을 벌기 위해 만드는 상품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강주헌 번역가의 말은 따끔한 일침이었다. 좋은 책을 쓰는 저자에게 출판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도 독자들의 욕구에 부응하는 책을 찾아내는 것이 기획자의 책임이고 의무라는 그의 말을 듣고, 막연히 '좋은 원고면 좋은 책이 되고 독자들도 알아주겠지'라고만 생각한 건 아닌가 반성했다. 팔리는 책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공급자(편집자)가 생각하는 좋은 책과 수요자(독자)가 생각하는 좋은 책의 간극을 좁히고, 수요자에게 책의 존재를 잘 전달해야 한다, 내가 가진 비교우위가 무엇인지 판단하는 것이 경쟁력 확보의 시작이라는 이홍 리더스북 대표의 이야기가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물론 큰 방향을 제시해 준 것이고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선택하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는 내 몫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편집자로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길이라고 느껴졌다. 편집자로 살기 위해 갖추어야 하고 노력해야 할 것은 너무 많다. 평소에도 나 자신을 계속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게 숨이 막히기도 하다. 그런데 이렇게 노력한다 해도 출판계의 현실은 너무 가혹하다. 노는 거 좋아하고 어려운 걸 견뎌내지 못하는 내가 잘 해낼 수 있을까? 그저 내게 스승이 되어준 이 책 속의 가르침들을 하나씩 내 것으로 만들며 실천해 갈 수밖에 없다. 좋은 편집자라는 길고도 막막한 길에서 이 책은 좋은 나침반이 되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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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고생합니다
임수희 지음 / 수이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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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서가 아니고 사서가 될 계획도 없는 나는 왜 이 책을 읽었을까. 어린 시절 일주일에 한 번 이동 도서관이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고, 대학교 시절에는 학교 도서관 3층 인문학 코너를 주요 서식지로 삼았으며, 지금도 우리 동네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는 것이 인생의 낙인 열성 도서관 이용자여서? 책 만드는 사람으로서 책을 입수하고 보관하고 관리하는 사람들은 나와 입장이 어떻게 다를까 궁금해져서? 사실 좋아하는 사람을 좀 더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사서다. 그 사람이 평소에 어떻게 일하는지, 일하면서 어떤 것에 보람을 느끼는지, 어떤 것이 힘든지 알고 싶었다. 


  도서관마다 책을 입수하는 기준, 책을 버리는 기준, 이용자를 응대하는 매뉴얼은 각각 다를 것이다. 근무하는 곳이 공공도서관이냐 사설도서관이냐, 자신이 정사서냐 계약직 사서냐에 따라서도 할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사서로서 공통된 업무들이 있을 것이고, 거기에서 공통적으로 느끼는 보람과 애로사항이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사람이 일할 때 이런 보람을 느끼겠구나, 이런 게 힘들겠구나 조금이라도 더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힘든 점을 이해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힘든 점을 가볍게 생각하고, 그런 생각을 당사자 앞에서 쉽게 내뱉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 사람 앞에서, 그 사람과 같은 직업을 가진 사서 분들 앞에서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을 더 이해하고 싶다는 처음의 목적을 넘어서, 읽으면서 사서 분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게 됐다. 편집자인 나도 사서 분들도 책을 독자들과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 책 속에서 한 사서 분이 "내가 건넨 책이 그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고 했는데, 나는 "내가 만든 책이 그 책을 읽는 사람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 가능성이 너무 희미하게 느껴질 때 힘들다는 것조차 공감했다. 사서 분들이 도서관에 어떤 책을 입수할지 치열하게 수서 회의를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고, 그 수서 회의에서 내 책이 선택되도록 더 좋은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 번이라도 수서 회의를 지켜보면서 사서 분들이 파악하는 도서관 이용자들의 독서 경향은 어떤지 듣고 싶었다. 그 회의에서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내 입장은 이렇다고 이야기하고 싶기도 하다.


  그리고 도서관에 십진분류법이 아닌 특정한 주제로 책들을 배치하는 '컬렉션'이 있다는 것이 특히 흥미로웠다. 이런 컬렉션은 한 사서의 고민이나 '이건 꼭 만들어야 해'라는 여러 사서들의 공감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사서들은 자신의 컬렉션 주제가 너무 좁거나 넓은 건 아닌지, 시의성이 떨어지는 건 아닌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조사하면서 컬렉션의 주제를 다듬어간다고 한다. 편집자가 책을 기획할 때 어떤 책을 만들지 생각을 다듬어가는 과정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컬렉션들이 편집자가 책을 기획할 때 방향을 제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책을 만드는 사람이자 열성 독자, 도서관 이용자로서 도서관 컬렉션으로 이런 주제는 어떻냐고 의견을 내놓고도 싶었다. 


  이렇게 주제 자체로도 공감할 여지가 차고 넘치는데, 재기발랄한 문체여서 더 즐겁게 읽었다. 같은 것을 이야기해도 재미있게 말하는 사람이 있고 재미없게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책의 작가는 전자다. 상황에 따라 뜻하지 않게 쏟아지는 업무와 공공 장소이다 보니 수없이 만나는 각종 민폐들마저 유쾌하게 이야기한다. 겪을 때마다 여전히 힘들긴 하지만 그런 힘든 일을 좀 더 쉽게 넘길 수 있게 된 내공이 느껴진다. 작가가 그런 힘든 일들을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소소한 행복들을 이야기할 때 미소가 지어졌다. 


  작가가 동료 사서들 네 명과 나눈 인터뷰가 부록으로 실려 있는데, 이 인터뷰가 사서라는 직업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나보다도 어린 사람들이 자기 직업에 대해 이렇게 깊이 생각하고 뚜렷한 직업관을 가진 것에 부끄러워졌다. 지금은 사서 일을 그만두었다는 작가나 인터뷰에 응한 이들 동료 사서 분들이나 '그림책에 나오는 할머니 안경을 쓰고 숄을 걸친 머리 하얀' 노인이 될 때까지 사서로 일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내가 편집자로서나 이용자로서나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에세이와 직업 탐구의 중간에 있는 책이다 보니, 더 깊이 들어갔으면 하는 이야기도 스케치 정도로 가볍게 다룬다. 인터뷰가 직업 탐구로서의 깊이를 더해주긴 하지만, 워낙 작은 책인데다 페이지도 많지 않아 아쉽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더 많은데. 책에서나 도서관에서나 사서 분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고,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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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 룩셈부르크의 옥중서신
로자 룩셈부르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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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H

 

잘 지내고 있어올해도 벌써 3분의 2는 지나갔네올해는 코로나뿐만 아니라 일과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참 힘들었어그래도 나쁜 일은 다 지나갔고 조용히 내 시간을 보내고 있어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다 보니 예전보다 책을 더 많이 읽게 돼요즘은 폴란드 출신의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감옥에서 보낸 편지들을 묶은 책 로자 룩셈부르크의 옥중서신을 읽었어예전에 레드 로자라는 그래픽노블을 읽으면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삶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됐는데그 책에서 읽었던 내용들을 떠올리면서 책을 읽었어.

 

로자 룩셈부르크는 폴란드인이지만 28세에 독일 사회민주당에 가입한 이후로독일에서 정치 활동을 해 왔어전쟁(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자는 주장이 대세였던 당시 독일에서 로자와 동료 의원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켰고이 일 때문에 로자와 리프크네히트는 수감되었어그 때 로자가 리프크네히트의 아내 소피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게 이 책이야.


사적인 편지이다 보니 로자의 사상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많지 않아. “매일 조금씩 낡은 세계가 무너져 내리고 위대하고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될 거라고” 이야기하지만로자의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 더 깊이 알려면 다른 책들을 더 읽어봐야겠지이 책은 로자의 개인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들을 다루고 있어.

 

편지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자연에 대한 사랑이야사방이 막힌 감옥에서 로자가 잠시나마 자유로움과 생기를 느낄 수 있게 한 건 주변의 자연 풍경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식물들동물들이었으니까로자는 붓으로 그림을 그려나가듯이 해가 지고 노을이 물드는 하늘겨울이 지나가고 봄이 오는 모습을 묘사해식물학자처럼 주변의 식물들을 관찰하고밖에 있는 소피에게 식물원에 가서 어떤 식물들이 있었는지 보고 이야기해 달라고 부탁하지감옥 주변을 맴도는 새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어떤 새들이 우는 건지어떤 감정으로 우는 건지도 구별해나는 로자만큼 새와 식물들의 종류를 많이 알지 못하지만코로나 때문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자연이 더욱 싱그럽게 느껴진다는 걸 알게 됐어그러니 로자에게 더 공감할 수 있었지.

 

자연에 대한 로자의 사랑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으로 이어져로자는 욕실 창가에서 우연히 공작나비 한 마리를 발견하고 보살펴 주었지만나비는 며칠 만에 죽고 말았어로자는 나비의 죽음을 슬퍼했지그리고 수용소에 끌려온 루마니아 들소가 독일 군인에게 피가 날 정도로 심하게 매 맞는 것을 보면서 그 소와 동질감을 느껴자유를 빼앗기고 잔인한 폭력을 당한다는 점에서그리고 책 속에서 미국 원주민들이 유럽인들에게 억압당하고 말살당하는 이야기를 읽고 분노하지로자는 그저 이념과 투쟁에만 몰두해 있는 게 아니라세상의 약하고 억압당하고 고통 받는 존재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사랑했어.

 

로자는 평생 약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주기 위해 싸워 왔어그러면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탄압당할 수밖에 없었고평생 동안 수차례 감옥에 갇혔지이런 삶이 고통스럽지 않았을 리 없지만그래도 로자는 삶을 사랑했어삶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고자신이 작은 고통에도 흔들린다는 걸 인정했지만그런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려고 했어그러면서 소피나 카를 같은 친구동지들과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들을 추억하며 그런 시간을 다시 누릴 수 있을 거라고 말해. 1918년 봄에 로자는 소피에게 내년 봄은 함께 보낼 수 있을 거라고 편지를 보냈는데로자가 이듬해 봄이 되기도 전에 살해당했다는 걸 생각하면 슬퍼져삶은 로자의 기대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로자는 삶을 사랑했고그 덕분에 보람 있고 행복하게 살아갔다고 생각해.

 

번역이 딱딱해서 로자의 편지가 부드럽게 읽히지 않은 게 아쉬워합쇼체를 덜 쓰고 해요체를 더 많이 썼다면문장에서 주어를 적당히 삭제했다면 문장이 좀 더 자연스러워졌을 텐데(우리말 문장에서 주어를 일일이 넣으면 오히려 어색해지고 번역체처럼 느껴지지). 하지만 로자의 맑고 부드러운 감성은 딱딱한 번역문에서도 느껴져로자가 언급하는 작가학자정치인문학 작품을 미주와 각주로 꼼꼼히 설명해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고(그런데 어떤 걸 미주로 처리하고 어떤 걸 각주로 처리하는지 기준이 명확하지 않은 것 같아서 좀 아쉬워). 로자는 소피 말고도 남편연인동지 등 다양한 사람들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는데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은 편지들도 번역되면 좋겠어그만큼 로자의 다양한 면모를 볼 수 있을 테니까.


우리도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삶과 우리 주변의 사람들더 약한 존재들에 대한 사랑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편지 속 로자의 표현을 빌려서 인사할게네가 더 많은 온기와 햇살을 가질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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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로셀라 포스토리노 지음, 김지우 옮김 / 문예출판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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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일제 강점기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겁이 많아 독립운동은 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지금처럼 조용히 내 할 일을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총독부에서 나에게 매 끼니마다 총독의 음식을 시식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 않겠다고 하면 나뿐만 아니라 내 가족들까지 다 죽는다. 나는 총독부의 명령을 거부할 수 있었을까?


  강제로 히틀러가 먹는 음식을 시식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 마르고트 뵐크라는 독일인 여성으로, 남편이 2차 세계대전에 징집되고 나서 독일 동부에 있는 시댁에서 지내고 있었다. 시댁 근처에는 히틀러의 동부 전선(독일이 동유럽 지역에서 연합군과 싸운 전역) 지휘 본부가 있었다. 1943년 나치 친위대는 마르고트를 비롯한 10여 명의 젊은 여성들을 히틀러의 시식가로 뽑아, 히틀러가 지휘 본부에 머무르는 동안 매 끼니마다 독이 있는지 없는지 먼저 맛보게 했다. 이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이다. 


  실제 이야기를 먼저 찾아보면 소설의 주요 내용을 다 알게 될 정도로 이 책은 실화에 충실하다. 이탈리아인 작가가 독일인 화자를 내세워 독일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지만, 화자가 살았던 베를린과 독일 동부 지역의 자연, 풍습, 생활상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독일인 독자가 보기에는 고증이 맞지 않다 싶은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독일인 독자가 아닌 나로서는 거슬리는 부분이 없었다. 작가가 1978년생이니 전후 세대인데도 전쟁으로 인해 남루해지고 피폐해진 일상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덕분에 2차 세계대전 말이라는 불안한 시기의 독일에 와 있는 듯한 현장감을 느낄 수 있다.


  작가는 실제 인물인 마르고트 뵐크를 직접 만나보지 못했지만, 그녀가 겪었을 복잡한 심리를 생생하게 되살려낸다. 매 끼니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겪지만, 몇 년째 버터와 설탕을 구경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좋은 재료를 쓰고 솜씨 좋은 요리사가 만든 음식은 군침이 돌게 만든다. 친위대에서는 독살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 끼니마다 여러 가지 메뉴를 짜고 시식가들에게 두 명씩 짝을 지어서 한 메뉴씩 먹게 하니, 자신과 같은 메뉴를 먹는 동료에게 운명을 함께한다는 동지 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다. 히틀러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한 역할을 하면서 나치 장교와 사랑에 빠지기까지 했다는 점에서 죄의식을 느끼지만, 그러면서도 그 장교와의 관계는 끊지 못하고 그 관계 덕분에 얻는 이익은 다 누리고 있다. 마르고트 뵐크를 모델로 한 주인공 로자는 이렇게 피해자이면서 부역자라는 모순을 안고 있는 복합적인 캐릭터이다. 


  로자의 죄의식은 상상 속 아버지와의 대화를 통해 뚜렷이 나타난다. 이미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나치를 반대했던 아버지는, 상상 속에서도 자신의 잘못을 변명하는 로자를 호되게 꾸짖는다. 


“정치와는 상관없어요. 저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요. 게다가 1933년에는 저는 고작 열여섯 살이었어요. 히틀러를 뽑은 건 제가 아니라고요.” 그러면 아버지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일단 용인하면 그 정권에 대한 책임은 네게도 있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각자가 속한 국가 체제 덕분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은둔자조차 말이다. 알아들었니? 네게는 정치적 죄악에 대해 면죄부가 없다, 로자.”


  로자가 매일 죽음의 위험을 직면하면서 산다고 해도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학살당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그녀는 나치에 부역해서 매일 호의호식하고 있는 부역자다. 게다가 자신의 남편이 죽은 줄 알았다고 할지라도 나치 장교에게 처자식이 있는 걸 알면서도 그와 관계를 이어간 것은 잘못된 행동이다. 게다가 그 덕분에 유용한 정보를 얻었으면서도, 그와의 관계가 탄로 날까 봐 친정 부모처럼 자신을 돌봐줬던 시부모에게도 자매처럼 지내 왔던 동료들에게도 그 정보를 알리지 않고 혼자 살아남았다. 이러한 로자의 잘못들은 작품 속에서 정당화되지 않는다. 작가는 상상 속 아버지의 말, 즉 로자 자신의 죄의식을 통해 로자, 즉 평범한 사람들이 악을 뒷받침했던 것에 면죄부가 없다고 분명히 말한다. 


  하지만 작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악에 동참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더 큰 악을 잊지 않는다. 히틀러와 나치가 아니었다면 로자를 비롯한 동료들은 히틀러의 목숨을 부지하는 데 동참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자는 남편과 헤어지지 않고 그렇게 바라던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갔을 것이고, 다른 동료들도 자신이 바라는 대로 살아갔을 것이다. 이들이 실험용 모르모트에 불과하다는 것은 이들이 어느 날 식사를 하고 모두 쓰러지는 대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나치 친위대는 시식가들을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면서 이들에게서 어떤 증상이 나타났는지 지켜보기만 한다. 다행히 상한 음식 때문에 일어난 식중독이어서 아무도 죽지 않았지만, 실제로 독이 들어 있었던 거라면 주인공을 비롯한 시식가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악에 동참하면서 죽음의 위험을 직면할지, 악을 거부하고 그 대가로 죽임 당할지 선택하게 하고, 악에 동참해서 죽게 되더라도 내버려두는 거대한 악.

 

  작가는 이 거대한 악의 손아귀 안에서도 서로 연대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그리지만, 그 연대와 사랑이 모두를 구원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로자는 동료들과의 연대와 우정 덕분에 하루하루를 버텼지만, 로자를 제외한 모든 동료들은 목숨을 잃는다. 독일이 패전하고 소련군이 오고 있다는 소설 속 서술이나 실화에서 동료들이 맞은 운명을 생각해 보면, 동료들은 나치 부역자라는 이유로 소련군에게 처형당했을 것이다. 로자를 나치 친위대에게서 숨겨주지는 못했지만 따뜻한 가족이 되어주었던 시부모님도 전쟁 중에 돌아가셨을 것이고, 귀족이면서도 허물없이 로자를 친구로 대했던 마리아 남작부인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로자 본인은 살아남았고 남편을 다시 만났지만, 시식가로 살아가면서 남은 상처와 죄의식 때문에 남편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헤어진다. 이들의 삶이 망가진 것은 전쟁과 그 전쟁을 일으킨 인간들 때문이었다. 이 모든 일은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이런 거대한 악이 생기지 못하도록 평범한 사람들이 깨어 있어 힘을 모으는 것이 우선일까, 평범한 사람들이 악을 행하도록 강요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 우선일까. 둘 중 하나라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으면 악은 평범한 사람들이 뒷받침해 지속되고 더 강해지면서 계속 악을 강요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악을 행하도록 강요당하다가 악에 무감각해져 악을 지속시킨다.『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은 이런 악순환이 평범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얼마나 뒤흔들고 망가뜨리는지 보여준다. 그리고 사랑과 연대로도 이렇게 망가진 삶을 완전히 회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 악순환을 막는 것 자체가 최선이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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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의학자 - 의학의 눈으로 명화를 해부하다 미술관에 간 지식인
박광혁 지음 / 어바웃어북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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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로 다른 두 분야를 접목한 책을 읽을 때 우려되는 것이 있다두 분야의 균형과 전문성이다두 분야의 전문가가 함께 만든 책이라면 두 분야가 균형을 이룰 수 있고 각 분야의 전문성도 갖출 수 있다하지만 한 분야의 전문가가 자신의 분야와 다른 분야를 접목해서 책을 쓰면다른 분야는 그냥 곁들이는 수준이 되거나 다른 분야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할 위험이 크다현직 의사가 자신의 전문 분야인 의학과 미술사를 접목한 책미술관에 간 의학자를 읽으려 할 때도 이런 우려가 들었었다.


  다행히 미술사와 의학의 비중은 적절하게 배분되어 있다페스트디프테리아수면장애도박 중독 같은 의학적 주제를 미술 작품과 엮어서 설명하는데하나하나가 그 주제에 대한 처방전과 같은 느낌이다의학에 있어서는 전문 지식을 일반 독자들도 이해하기 쉽도록 친절하게 설명하고미술사에 있어서는 교양 수준의 배경지식을 충실하게 전달한다미술 작품을 그저 의학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삽화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그 그림을 그린 화가의 삶과 이력그 그림이 그려지게 된 시대적 배경기법의 특징그 당시의 미술 사조까지 미술 작품 자체에 대한 이야기도 풍성하게 담고 있다.


피터르 브뤼헐, <맹인을 이끄는 맹인>, 1568. 저자는 이 그림 속 시각장애인들을 관찰해 누가 어떤 병으로 인해 시력을 잃었는지 분석한다.


  단순히 배경지식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의 눈으로 그림을 분석하고 있어 흥미롭다저자는 16세기 네덜란드의 화가 피터르 브뤼헐이 그린 <맹인을 이끄는 맹인속에서 묘사된 시각장애인들의 모습을 관찰하고그들이 각각 어떤 병으로 시각을 잃었는지 분석해낸다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 <디프테리아>에는 호흡 곤란을 겪는 아이를 돕기 위해 손가락으로 아이의 목구멍을 벌리려고 하는 남자가 그려져 있다이렇게 하면 목구멍의 기도 점막을 자극해 림프가 더욱 부어올라서 아이는 숨을 더 쉬기 힘들어질 수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그림이 그려진 19세기 초의 의료 기술을 생각해 보면 그림 속 아이는 죽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의학을 잘 알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는 이런 의학적 해석이 신선하게 느껴진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1889. 압생트 중독으로 인한 황시증으로 별 주위의 노란 별무리가 보였을 것이라는 통설이 있지만, 저자는 최근의 연구 결과를 토대로 그 통설을 반박한다. 


  인문 교양서 중에는 그저 대중 독자들이 흔히 알고 있는 통설만 정리하는 경우가 많은데그런 통설에만 기대지 않는 것도 장점이다. <별이 빛나는 밤>을 비롯한 반 고흐의 작품들에는 노란색별 주위에서 소용돌이치는 빛무리가 많이 나타나는데반 고흐가 즐겨 마셨던 술 압생트 때문에 사물이 노랗게 보이는 황시증을 겪었기 때문이라는 통설이 있다하지만 별 주위에서 빛무리가 보일 정도가 되려면 182리터 이상의 압생트를 한꺼번에 마셔야 한다는 1997년의 연구 결과를 이야기하면서그가 복용하던 간질약의 부작용일 수 있다는 설을 제기한다스탕달에게 스탕달 신드롬(미술 작품과 교감한 관람객이 흥분과 자아 상실을 경험하는 현상)’을 일으킨 작품이 <베아트리체 첸치의 초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클레오파트라가 독사가 자기 가슴을 물게 해 자살했다는 것도 동양에 대한 서양의 환상이 반영된 가설일 뿐이다라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이런 미술 작품과 의학에 관한 다양한 지식들을 경어체로 서술하고 있어 더욱 더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친절한 의사 선생님이 그림을 보며주면서 그림과 관련된 병이 어떤 것인지그 병은 어떻게 예방하면 되는지병에 걸렸다면 어떻게 치료하고 몸 관리를 하면 되는지 처방하는 것 같다그래서 독자들은 더욱 친근감을 느끼고 이야기를 듣듯 편안하게 책을 읽어나갈 수 있다.

 

  다만 고유명사 표기가 정확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프랑스인이기 때문에 귀스타브Gustave’로 표기해야 하는 이름을 자꾸 독일식 표기인 구스타프로 표기하고 알렉상드르Alexandre’를 알렉상드로로 표기하며 마네트 살로몽의 원어 표기를 ‘Manette Salomon’으로 제대로 적어놓고도 계속 마네트 랄르몽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는 스페인인인데 영어식으로 프랜시스 고야라고 표기한다동성애자라고 분명히 밝혀진 사람은 20세기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인데 17세기의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을 동성애자라고 적어 놓는 오류도 보인다모차르트의 사인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고 여러 가지 가설이 있는데모차르트가 매독 치료를 위해 수은을 치료제로 사용하다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아쉬운 점들이 있지만 즐겁게 읽고 나서 머릿속에 남는 것도 많은 인문 교양서이다미술 작품에서도 의학적인 사실들의학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흥미롭고 미술사 지식과 의학 지식들을 함께 쌓아가는 것이 즐겁다미술관과 병원의 행복한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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