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박완서의 부엌 :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 띵 시리즈 7
호원숙 지음 / 세미콜론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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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완서 작가의 큰딸이 썼다는 것, ‘엄마 박완서의 부엌이라는 제목박완서 작가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한 편집자 서문으로 볼 때 엄마 박완서에 대한 기억이 중심이 되는 책일 줄 알았다하지만 막상 본문을 읽으니 이 책이 엄마 박완서의 부엌’ 이야기라기보다 엄마 박완서와 할머니로부터 이어받은 나 호원숙의 부엌’ 이야기로 느껴졌다이 책의 중심은 어디까지나 엄마 박완서가 아니라 나 호원숙이다. ‘박완서 문학의 코멘터리도 종종 등장하지만 박완서 작가가 없는 나 호원숙만의 이야기도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박완서 작가의 이야기를 좀 더 많이 듣고 싶었던 독자라면 아쉬워할 수 있겠지만, ‘나 호원숙의 부엌’ 이야기에도 박완서 작가와 그 윗세대가 남겨준 유산이 스며들어 있다그들의 유산과 작가 자신이 꾸려온 것들로 이루어진 음식 세계는 정갈하면서도 따뜻하다매일 정성을 들여 음식을 준비하고 만들어 나 자신과 가족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것늘 반복되는 고된 일이지만그 일을 매일 쉬지 않고 하기에 더 품위 있고 풍성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매일의 밥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의 근면함과 정성사랑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까지 더 풍성하고 따뜻하게 만든다그 근면함과 정성사랑은 엄마와 할머니그 윗대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작가는 내 부모님과 같은 세대이니작가의 어머니 박완서 작가는 조부모님 세대작가의 할머니는 증조부모님 세대인 셈이다내가 태어나기 전이라 접해 보지 못한 옛 세대들의 일상지금은 사라져 가거나 이미 사라져 작가의 기억과 기록에만 남아 있는 사람들과 삶의 모습을 이 책으로 만날 수 있었다음력 10월에는 하얀 쌀가루를 체에 걸러 카스텔라처럼 부드러운 고사떡을 만들고시골에 가서 첫 손주에게 첫 미역국을 지어줄 해산 바가지를 구해 왔다는 할머니만두 꺼풀을 얇게 밀어 직접 만두피를 빚고만두소도 직접 만들어 식구들과 함께 만두를 빚었던 어머니어머니가 만들던 방식대로 만두를 빚는 작가이런 정겨운 풍경들을 책으로나마 만난다앞서 외국 음식에 관한 에세이들을 읽다 이 책을 읽으니 여행을 하다 우리나라친척들이 모여 사는 시골 마을로 돌아온 기분이다. '해걸이', '엽엽하다', '꾸리살', '수굿하다', '배틀하다' 등 지금은 잘 쓰이지 않는 단어들이 그 시절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더해준다.


  ‘엄마 박완서의 부엌이라기보다 나 호원숙의 부엌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지도 모르지만부제는 책 내용과 딱 맞아떨어진다할머니에게서 엄마로엄마에게서 작가 자신으로 이어져 온 사랑의 기억이 있다늘 정확한 시간에 퇴근해 도넛이나 고로케를 안겨주던 아버지의 사랑과 그런 아버지의 퇴근 시간에 맞춰 음식을 준비하던 엄마의 사랑에 대한 기억도 있다그들 가족의 사랑 이야기이지만험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따뜻하고 정성 가득한 음식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이어진 사랑이 있기에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P. S. 이 책의 부제가 된 정확하고 완전한 사랑의 기억은 작가의 아버지가 늘 정확한 시간에 퇴근해 가족들에게 돌아오던 시기에 느꼈던 사랑과 행복감을 말한다작가는 어머니의 단편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에서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를 맞이하는 장면을 인용한다. “늙은 얼굴에 걸맞지 않은 갓난아기 같은 민둥머리를 하고 있을망정 그는 매일매일 멋있어졌다너무 멋있어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황홀할 적도 있었다일찍이 연애할 때도 신혼 시절에도 느껴보지 못한 느낌이었다그건 순전히 살아 있음에 대한 매혹이었다.” 이 장면이 마음에 남아 여덟 개의 모자로 남은 당신을 찾아보니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작품이었다박완서 작가의 남편은 항암 치료 때문에 머리카락이 다 빠져 모자를 쓰고 다닌 것이었다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병들고 노쇠해져도 그 사람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설레어하고 감사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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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 :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띵 시리즈 5
김민철 지음 / 세미콜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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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도 나름대로 치즈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다어린 시절 밥과 국에 슬라이스 치즈를 반찬으로 곁들여 먹었고지금도 밤에 배가 고프면 슬라이스 치즈 한 장으로 허기를 채운다모차렐라 치즈가 듬뿍 든 피자크림치즈를 가득 바른 베이글뻑뻑할 정도로 밀도가 높은 치즈케이크 등 치즈가 들어간 음식은 웬만하면 다 좋아한다그런데 외국산 치즈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직접 사본 적도 없다그래서치즈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를 읽으면서 치즈를 좋아하는 마음에 공감하고 낯선 치즈 이야기를 만나고 싶었다.


  읽어 보니 비중이 더 컸던 것은 낯선 치즈 이야기였다냉장고에서 엄마 몰래 슬라이스 치즈 한 장씩 꺼내 먹는 것은 나도 했던 일이지만작가의 치즈 사랑은 그저 내 주변에서 먹을 수 있는 치즈를 챙겨 먹는 나의 치즈 사랑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치즈가 주식인 나라에 여행을 가면 마트의 치즈 코너에서 김장하듯 각종 치즈를 챙겨 오고삶의 어느 순간에 어떤 치즈가 있었는지를 기억하며잘 익은 된장에서도 치즈 맛을 느끼는(그래서 이 책의 부제가 치즈 맛이 나니까 치즈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사람 앞에서 감히 치즈 좋아한다는 말을 꺼낼 수 있을까그저 작가가 신나게 풀어놓는 치즈 이야기를 가만히 들었다자기가 정한 주제로 책 한 권을 온전히 채워 넣지 못하고 잡다한 이야기들을 끌어 모아 책 한 권을 겨우겨우 채우는 에세이집들을 보다진심으로 자신이 정한 주제를 좋아하고 그 주제 하나만으로 책 한 권을 온전히 채워 넣는 에세이집을 보니 반가웠다.


  책에서 묘사된 고소하고 짭쪼름하고 찐득하고 부드러운 온갖 치즈의 맛들과그 치즈들을 만나면서 마주친 풍경과 분위기를 상상해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마지막 글인 지극히 개인적인 치즈 리스트에서 작가가 추천한 치즈들을경제적으로 좀 더 안정된다면 찾아 먹어 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도 생겼고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건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이해받은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작가는 좋아하는 마음이 귀한 것이고대단하거나 깊은 의미가 있지는 않아도 그저 좋아하는 세계가 있어서 스스로를 부자라고 느낀다고 말한다남들이 좋아하지 않는 것들만 골라서 좋아하는 것 같은 나는 좋아하는 마음을 공유할 사람이 많지 않아 쓸쓸하기도 하다때로는 왜 그런 걸 좋아해?’나 왜 그렇게까지 좋아해?’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이 책에서 작가가 좋아하는 치즈를 찾아 열심히 발품을 팔고 솔직하게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을 보며좋아하는 것을 향해 마음껏 달려가도 되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그래서 이 책은 내게 단순히 치즈를 이야기하는 책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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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 자취 요리 : 모쪼록 최선이었으면 하는 마음 띵 시리즈 4
이재호 지음 / 세미콜론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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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나를 위해 정성껏 요리한 게 언제였더라두 달 전 유튜브에서 쉽게 만드는 맛있는 두부조림’ 영상을 따라 두부조림을 만들었다간도 제대로 못 맞추고 태워버려 싱겁고 들척지근하고 탄 맛이 나는 실패작을 남겼다다음 날에는 유튜브에서 본 영상대로 우유 푸딩을 만들다뜨겁게 달궈진 유리 냄비 뚜껑을 찬 물이 담긴 설거지통에 넣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다결국 냄비 뚜껑은 산산조각이 났고바닥에 떨어진 미세한 유리 조각에 엄마가 발을 찔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엄마의 집밥에 의존해 살면서 가끔씩 새로운 요리에 마구잡이로 도전하니 열에 일고여덟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이렇게 자취와도 요리와도 동떨어진 채로 사는 내게 프랑스식 자취 요리의 저자는 대단하고 신기한 사람이다프렌치 레스토랑에 갔다 낯설고 어려운 프랑스 요리에 주눅이 든 뒤프랑스 요리를 정복하고 싶어 프랑스 요리학교까지 졸업했다니그것도 의대를 다니다가 갑자기다시 의대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도 여유가 있을 때는 레스토랑 셰프로 일한다고 하니한번 마음을 먹으면 끝장을 보는 사람이구나 싶다의대 공부에 집안일까지 하는 게 쉽지 않을 텐데이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장을 봐서 재료를 다듬고근사한 프랑스 요리를 만들어 잘 차려 먹는다보통 성실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 성실함이 글에서도 드러난다유려하거나 작가만의 개성이나 참신한 표현이 돋보이는 글은 아니지만하루하루 자신이 하는 일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쓴 성실한 글자신이 왜 손수 정성스럽게 밥을 지어 먹는지어떻게 식재료를 구하고 다듬어 요리 준비를 하는지어떻게 요리를 하고 그 맛은 어떤지 차근차근 이야기해 나간다이 책을 읽으면서 식재료를 효율적으로 보관하는 방법과 좋은 사육 환경에서 생산된 계란을 고르는 방법스테이크를 맛있게 굽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정도로 작가의 설명은 자세하고 친절하다음식 이야기뿐 아니라 그에 얽힌 삶의 이야기도 펜으로 또박또박 적어 내려가듯 솔직하고 차분하게 풀어나간다의대생에서 요리학교 학생으로다시 의대생으로 삶의 방향을 바꿔 오면서 배우고 경험하고 느낀 것들지금도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요리하면서 느끼는 것들을 듣다 보면 그가 늘 모쪼록 최선이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하다가 어느 샌가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 이제 좀 대충 해도 되겠지하고 풀어져 버리는 내게이 책은 자극이 된다처음에 열정을 모두 쏟아놓기보다는 꾸준히 최선을 다하겠다고프랑스 요리는커녕 간단한 반찬도 망쳐버리는 나지만나를 잘 먹이기 위해 계속 도전하겠다고 다짐하게 된다내가 어쩔 수 없는 것들이 내 삶을 종종 뒤흔들지만내가 어쩔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최선을 다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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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존속 살해범의 편지 - 그리고 그 밖의 짧은 글들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유예진 옮김 / 현암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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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차에 적신 마들렌. 그 마들렌을 입 안에 넣는 순간 살아나는 기억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과거로의 여정을 시작하는 이 장면에 대해 수없이 들어왔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커녕 프루스트의 글 한 줄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보고 싶긴 한데 그 전에 프루스트의 짧은 산문들을 모은 이 책으로 가볍게 몸을 풀어보는 게 좋겠다 싶었다. 프루스트는 이 책에서 "한 작가의 책을 한 권만 읽는 것은 그를 단 한 번 만나는 것과 같다."(p. 66.)고 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이 책으로 그를 처음 만나는 셈이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을 계속 만날지 말지 결정하게 되는 것처럼, 나와 프루스트의 만남이 계속 이어질지는 이 책이 결정할 터였다.


  내가 이 책에서 만난 프루스트는 엉뚱하지만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당대 최고의 평론가였던 생트뵈브의 문학 이론을 반박하는 비평서 『생트뵈브에 반박하여』서문에서는 뜬금없이 어린 시절 여름을 보냈던 할아버지 댁에서의 기억들을 풀어놓고, 친구 자크에밀 블랑슈의 저서 『화가의 이야기』서문에서는 외종조부 댁에서의 추억과 친구들 앞에서 자신이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것을 숨겼던 옛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생트뵈브의 문학 이론이 왜 비판을 받아야 하는지, 블랑슈의 문학과 미술 세계는 어떤지 알고 싶었던 독자들로서는 당황스럽겠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기억의 단편들이 얼마나 생동감 있게 반짝이는지 그의 기억 속에 함께 잠기게 된다. 할아버지 댁 요리사가 가져다 준 빵을 차에 적셔 한 입 베어 문 순간, "입 안에 퍼지던 차의 향과 한결 더 부드러워진 빵의 감촉, 제라늄과 오렌지나무 향"(p. 128.)이 읽고 있는 내 입 안에서도 퍼져 나가는 것 같고, 외종조부 댁 부엌에 놓인 크리스털 식칼 받침대에서 반사된 무지갯빛과 그뤼에르 치즈, 살구가 내뿜은 향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신비로운 분위기가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늘 자신의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그 감각에 새겨진 것들을 언제라도 바로 지금 겪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되살려 낼 수 있으며, 글을 통해 그것을 다른 사람들까지 느낄 수 있게 하는 사람이다. 귀족 부인의 무도회에 초대받아 잘 차려입고 가다가 자신이 부잣집 자제인 것을 모르는 친구와 마주쳐 진땀을 뺐던 일은 유쾌한 필치로 그려지고 있다. 그의 유머 감각은 이 부분뿐만 아니라 책 곳곳에서 튀어나와 읽는 사람을 슬며시 미소 짓게 만든다.


  그는 차창 밖으로 지나쳐 가는 시골집들과 그 집들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를 보고서도 이런 따뜻한 글을 쓴다. "배나무에 기대어 있는 어떤 집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 나무에 의지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예전처럼 자신들이 배나무를 보호해 주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 집들은 배나무의 가지들이 한없이 여리고 열정으로 가득했던 때를 떠올리며 먹먹해진 가슴에 그것을 꼭 안고 있었다."(p. 113.)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무생물인 낡은 시골집과 어떤 감정 표현도 할 수 없는 배나무에서 가슴 뭉클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그 뒤에 이어진 세 종탑 이야기도 정겹다. 길을 가면서 보였다 안 보였다, 커졌다 작아졌다, 서로 뒤서거니 앞서거니 하는 세 개의 종탑들은 그저 오래전에 세워진 낡은 건물이 아니라 먼 길을 여행해 온 프루스트에게 손짓을 하는 정겨운 존재들이다. 그는 보고 듣고 경험하는 어떤 것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를 느끼며, 그것을 맑은 서정으로 그려낸다.


  남들이 포착하지 못하는 것을 포착하는 예민한 성정 때문인지, 미술과 문학 평론에서는 그만의 독특한 안목과 뚜렷한 주관을 드러낸다. 영국의 저명한 예술평론가 존 러스킨 전문가로 이름났던 그는, 러스킨의 예술 평론을 사랑하지만 그가 겉으로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강조하면서도 사실은 미술 작품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본다. 러스킨은 프랑스 아미앵의 중세 성당들에 관해 쓴 책 『아미앵의 성서』에서 자신이 글로 묘사하는 성당의 부분들을 그대로 담은 사진이 아니라 보다 암시적이고 글로 묘사된 것과는 관계가 먼 사진을 선택했다는데, 나라면 그의 이런 불친절한 글과 그림의 배치를 비판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러스킨의 엉뚱한 도판 배치에서 그의 정신 세계 속 독창성과 유머 감각을 발견한다. 접속사 '그리고'를 남들이 쓸 법한 곳에 쓰지 않고 남들이 쓰지 않는 곳에 쓰는 플로베르의 문체의 특징에서는 그만의 문법적 독창성을 발견한다. 친구 블랑슈가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에는 살롱 여주인들이 고상한 말투로 그의 작품을 무시하다, 그의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은 이후로는 그 고상한 말투로 '예전부터 이 그림을 좋아했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신랄한 유머 감각이 드러난다. 그가 어찌나 가차 없고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풍자하는지, 내가 당대의 작가나 화가였다면 그와 친구나 지인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그 두 가지 경우가 아니라면 프루스트는 참 사랑스러운 친구나 지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앞으로도 프루스트를 계속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짧은 글과 장편소설은 호흡이 다르겠지만 그는 여전히 프루스트고 사랑스러움과 섬세함도 여전할 것이다. 좋은 만남이 되는 데는 분위기도 한몫하는데, 이 책의 편집과 디자인은 프루스트의 글 특유의 섬세한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 하늘색 바탕에 푸른색 줄무늬가 그려진 표지와 그 표지에 그려진, 회중시계 위에 앉아 차를 마시는 신사를 그린 일러스트(현대 한국인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것인데도 프루스트가 살던 당시 어느 소설이나 신문에 실렸을 법한 그림체다), 살구색 속표지와 그 위에 얹은 프루스트의 흑백 사진들까지. 마침표와 말줄임표에 쓰인 점들까지 다이아몬드 모양이다. 이 책의 내용 중 러스킨 관련 평론들이 조금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평론들도 곱씹어서 찬찬히 읽어 보면 프루스트만의 서정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프루스트와의 기분 좋은 첫 만남이다.


P.S. 이 책에 실린 글 「프루스트에 의한 프루스트」는 스무 살 무렵의 프루스트가 다양한 개인적인 질문들에 짤막하게 답변한 글이다. 프랑스의 TV 문학 대담 프로그램 <아포스트로피>에서는 진행자가 방송 끝에 초대 작가에게 이 글의 문항들로 질문하면서 이 '프루스트 설문지'가 더 유명해졌다. 이 질문은 각 작가의 취향과 개성, 고민, 가치관들을 즉흥적이면서 자유롭게 드러내는 방식이다. 나도 해보았는데 개인적인 글이라 숨은 글 기능으로 숨겨 놓았다. 질문들이 궁금하면 열어보시고, 그에 대한 프루스트의 답이 궁금하면 책을 읽어보시길.


*모바일, 앱에서는 숨은 글 기능이 적용되지 않으니 서평만 읽고 싶다면 여기까지만 읽으면 됩니다.


접힌 부분 펼치기 ▼ 블로거 B가 말하는 블로거 B

 내 성격의 주요 특징: 호불호가 심히 뚜렷함. 한 번 마음을 연 사람에게는 충실하지만 한 번 마음을 닫은 사람에게는 쉽게 다시 마음을 열지 않음.


남성에게 바라는 자질: 여성을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 지성과 이성, 감성


여성에게 바라는 자질: 남들이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뚝심


친구들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질 만큼 힘이 되어주는 것


주요 단점: 디테일에 너무 집착함, 좋아하는 일을 하다 꼭 해야 할 일을 못할 때가 있음


가장 좋아하는 활동: 책이나 영화에서 본 이야기를 갖고 또 다른 이야기 상상하기


행복이란: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


가장 큰 불행은 무엇일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사는 것


되고자 하는 것: 좋은 책을 만드는 편집자


살고 싶은 국가: 모두가 자기 성별이나 인종, 성적 지향 때문에 불안해하거나 차별당하지 않고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


좋아하는 색: 하얀색, 하늘색, 남색, 파란색, 하얀색과 파란색 계통 색의 조합


좋아하는 꽃: 벚꽃, 주황색 나리, 장미


좋아하는 새: 제비(프루스트와 같음)


좋아하는 산문 작가: 피천득, 레프 톨스토이, 스콧 피츠제럴드, 박상영


좋아하는 시인: 백석, 윤동주, 정호승


좋아하는 픽션 남주인공: 피에르 베주호프(레프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좋아하는 픽션 여주인공: 최서희(박경리,『토지』)


좋아하는 작곡가: 장범준, 브람스


좋아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앙리 마티스, 마르크 샤갈, 요하네스 판 페르메이르


실제 삶에서 존경하는 영웅: 위근우 기자


역사 속에서 존경하는 여자 영웅: 로자 파크스, 가네코 후미코


무엇보다 가장 싫어하는 것: 층간소음, 더러운 화장실(둘 중 어느 게 더 싫은지 고를 수 없음)


가장 혐오하는 역사적 사건: 난징 대학살


가장 좋아하는 군사적 사건: 말 안 듣는 교회 후배 놈들 입대함(아쉽게도 지금은 다 제대함)


내게 있었으면 하는 능력: 외국어 능력,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를 다 잘하고 싶고 가능하면 아랍어랑 힌디어도 하고 싶음,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


어떻게 죽었으면 하는가: 침대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현재 나의 정신 상태: 할 일이 너무 없어 무기력한 상태


가장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잘못: 몰라서 저지른 잘못


나의 모토: 내 페이스를 잃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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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11-07 11: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바스티안 2021-11-07 13:35   좋아요 1 | URL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홉스 - 리바이어던의 탄생 문제적 인간 14
엘로이시어스 마티니치 지음, 진석용 옮김 / 교양인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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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머스 홉스'라고 했을 때 생각나는 것은 그가『리바이어던』의 저자라는 것과 "만인은 만인에게 늑대"라는 말을 했다는 것뿐이었다. 중학생 때 사회 시간에 공부했던 것들, 고등학생 때 사회탐구 과목에서 공부했던 것들을 어쩌면 이렇게 남김없이 잊어버릴 수 있을까. 지금의 내 지식 상태가 너무 심각하다 싶어, 홉스의 전기인 이 책을 찾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토머스 홉스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사상을 펼쳤는지, 그의 삶과 사상에 어떤 역사적, 사회적, 종교적 상황이 영향을 미쳤는지를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홉스는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 말기(16세기 말)에 부유하지 않은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귀족 가문인 캐번디시 가의 가정교사이자 비서로 수십 년을 일하면서, 고용주들의 정치 활동을 옆에서 지켜보고 학문적 역량을 쌓아왔다. 왕이 모든 권력을 쥐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왕당파였기 때문에, 공화파와 왕당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을 때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10여 년 동안 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크롬웰의 공화정 시기가 끝나고 왕정이 복고된 시기에도, 자신의 사상에 대한 숱한 오해로 인해 다른 사상가들과 끊임없이 논쟁했을 뿐만 아니라 저서들이 출간 금지되기까지 했다. 이런 파란만장한 삶이 그의 사상을 만들었다.


  홉스는 왕이 모든 권력을 쥐는 전제 군주정을 옹호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근대 민주주의 발전의 토대가 된 사회계약설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회 구성원인 개인들의 계약을 통해 국가가 형성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각 사람의 권리와 자유를 제한하는 법이 없기 때문에 누구나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어떤 수단이든 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자연 상태의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된다. 언제든 다른 사람이 자기의 재산과 생명을 빼앗아갈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약을 맺어 모든 권리를 주권자에게 양도하고 그의 보호를 받는다. 이렇게 계약을 맺어 주권자, 즉 정부를 세움으로써 사람들은 자연 상태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다.


  홉스는 이러한 사회계약설 외에도 정치철학, 광학, 수학, 물리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자신만의 이론들을 정립해 갔는데, 당대의 사회적, 종교적 통념과 어긋나는 부분이 있어 많은 논란을 낳았다. 저자는 사회계약설을 비롯한 홉스의 사상과 이론의 주요 내용을 설명하면서, 그의 사상 속 모순들을 논리적으로 짚어본다. 홉스는 주권자가 시민들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해 독재의 위험성을 간과했다.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시민들이 모든 권리를 주권자에게 양도했더라도 여전히 자기 보존의 권리는 갖고 있기에, 자신의 생명이 위협받을 경우 독재자에게 저항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는데 홉스는 그의 지적에 아무 답도 하지 않았다. 또한 모든 물체는 서로 맞닿아서 힘을 주고받으며 운동하게 된다며 물체와 물체 사이에 힘과 그 밖의 것을 전달해 줄 공기가 없는 진공 상태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당대의 명망 있는 화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로버트 보일이 공기 펌프로 진공 상태를 만들자, 홉스는 미세한 공기가 유리를 뚫고 들어갈 수 있다며 그것은 진공 상태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진공 상태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었고, 보일은 이 연구를 통해 기체의 부피와 압력 사이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보일의 법칙'을 발견했다. 데카르트 등의 동시대 과학자들이 홉스는 과학자로서는 재능이 부족하다고 평가했지만, 홉스는 자신이 그들보다 뛰어난 과학자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학자로서의 자부심이 강해 때로는 유치하다 싶을 정도로 학술 논쟁에서 감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저자는 이렇게 홉스의 사상 속 모순이나 인간적인 결점까지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그의 업적과 한계 모두를 짚어본다.


  저자는 홉스의 사상뿐만 아니라 홉스의 사상을 비판한 사람들의 주장과 그들의 주장에서 타당한 점, 타당하지 않은 점도 하나하나 살펴본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라이프니츠의 지적은 홉스의 사회계약론의 맹점을 제대로 짚은 예다. 홉스가 가부장 정부도 인정한 만큼, 태어났을 때부터 아이들이 가부장에게 종속되어 있다면 모두가 평등하고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는 자연 상태는 있을 수 없다는 비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홉스의 저서를 꼼꼼히 읽어보지 않고 그가 이야기하는 '자연 상태'가 힘이 모든 것을 정당화하고 사회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힘을 정의와 법으로 삼는 것이라고 오해했다.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들은 반성문에서 자신이 '홉스주의'에 빠져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종교의 수장도 국가의 주권자가 맡아야 하며 종교 제도도 주권자가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주장에 성공회 주교들은 반발했다. 저자는 이러한 오해와 편견들이 당대 사람들의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입장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힌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에 홉스의 생애 전반과 정치철학, 신학, 물리학, 기하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구축한 사상과 이론들, 그를 둘러싼 시대상과 논쟁들까지 꾹꾹 눌러담았다. 페이지마다 넘쳐나는 정보량이 버거울 수도 있고 홉스의 논리와 비판자들의 논리, 이 둘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저자의 논리를 따라가는 것이 벅찰 수도 있다. 하지만 홉스와 그의 사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이 책만큼 도움이 되는 책이 많지 않다. 원서가 1999년에 출간되었기 때문에 홉스에 대한 최신 학설들이 반영되지는 못했겠지만, 꼼꼼하고 성실하게 홉스의 삶과 사상을 정리하고 평가하고 있다. 홉스를 무조건 찬양하지만 않고 그의 학문적, 인간적 결점까지 직시하는 객관적인 태도가 이 책의 신뢰도를 높인다. 또한 비문학 연구서인데도 곳곳에서 드러나는 저자의 유머 감각이 이 긴 책을 읽는 독자들의 발걸음을 좀 더 가볍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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