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크메르 문자 기행 - 사람을 닮은 캄보디아 문자 덕질기
노성일 지음 / 소장각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크메르 문자'라고 했을 때 어느 나라의 문자인지 바로 알아챌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바로 캄보디아의 고유 문자이다. 캄보디아라고 하면 앙코르와트, 킬링필드, 범죄 단지 밖의 다른 것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어떻게 크메르 문자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캄보디아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아는 앙코르와트에 직접 가면서부터다. 그는 그래픽 디자이너였기에 앙코르와트의 웅장한 건물과 정교한 조각보다는 거기 새겨진 독특한 글씨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크메르 문자였다.

크메르 문자에 대한 관심은 캄보디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한 문자를 이해하려면 그 문자가 탄생한 배경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크메르 문자와 그에 얽힌 캄보디아의 역사를 한 사람의 삶에 비유해 탄생-성장-죽음-부활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인도 브라흐미 문자에서 파생된 문자로 시작해 기록 문화를 꽃피우다 크메르 루주로 소멸 직전까지 몰렸다 캄보디아 사람들의 노력으로 조금씩 소생하고 있는 과정을. 크메르 루주가 일으킨 대재난으로 국립도서관조차 서가가 휑하고 크메르 문자로 된 책들의 품질도 아직은 조잡하다. '유료 폰트'라는 개념도 캄보디아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리 잡지 않았다. 크메르 문자 자체가 수많은 모음과 자음을 갖고 있는 데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에 따라 형태가 바뀌고, 모음이 자음의 상하좌우 사방에 붙으니 사용하기에 복잡하다. 그래서 캄보디아인들은 크메르 문자로 메시지를 보내기보다는 음성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을 더 편하게 여긴다. 저자도 크메르 문자의 미래가 밝다고 확언하지는 못하지만, 크메르 문자를 지키고 발전시키려는 사람들을 응원한다.

크메르 문자라는 낯선 소재를 저자는 새로운 디자인에 담았다. 저자 자신이 그래픽 디자이너이기에 자신의 이야기에 가장 잘 맞도록 이 책을 직접 디자인한 것이다. 우선 제목, 부제, 저자 이름, 출판사 로고를 넣지 않고 크메르 문자의 첫 글자 하나만으로 화면 전체를 꽉 채운 표지가 눈에 띈다. 그것도 붉은색 하나로 채워진 바탕에 검고 굵은 글씨로 박아놔서 눈에 더 잘 띈다. 뒤표지도 크메르 문자 중 한 글자만 넣었고, 앞표지와 뒤표지의 글씨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ISBN은 책등에, 바코드는 책날개에 넣었다. 챕터 페이지에는 캄보디아의 전통 무용 '압사라'에서 싹을 틔우고 자라나 꽃과 열매를 맺고 땅으로 돌아가는 식물 생의 각 단계를 표현하는 동작을 하나씩 넣었다. 크메르 문자의 글자를 하나하나씩 소개하는 부록을 114페이지나 넣었다. 하얀 본문 종이와는 다른 레몬색의 얇은 종이를 쓰고, 크메르 문자의 틀이 되는 선들을 넣어 마치 글자 연습을 하는 노트 같다.

이렇게 한 문자를 깊이 파고드는 책이 시리즈로 나오면 좋겠다. 우리에게 익숙한 한글과 알파벳뿐 아니라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지만 나름의 문자 문화를 오랫동안 꽃피워 왔던 문자들을 더 깊이 알고 싶다. 그것들을 더 깊이 탐구한다면 우리와 지리적, 문화적으로 가까운 나라나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친 강대국에 국한되어 있던 시야를 넓혀 더 많은 나라를 깊이 알게 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떡과 초콜릿, 경성에 오다 - 식민지 조선을 위로한 8가지 디저트
박현수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성'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마음을 끈다. 우리에게 아픈 역사인 일제 강점기를 흥밋거리로 소비하지 않을까 스스로 경계하지만, 일제 강점기의 일상생활은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그 어두운 시기에도 사람들은 우리와 비슷한 일상을 살았다는 것이 신기해서이다.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처럼 지금 사용하는 현대식 문물을 그때도 사용했고, 맛집을 찾고 디저트도 즐겼다는 것이. 어두운 시기에 빛을 찾기 위해 싸우면서도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을 충실히 살아갔다. 작가는 전작 『경성 맛집 산책』에서 일제 강점기 당시 경성에 있었던 열 곳의 맛집을 다루었는데, 이 책에서는 일제 강점기에 사람들이 즐겼던 디저트 여덟 가지를 다룬다. 그중 라무네와 관련된 이야기를 청량음료 전반에 대한 이야기로 본다면 여덟 가지 디저트 모두 지금의 우리도 즐기는 것들이다. 그 디저트들을 통해 우리는 일제 강점기의 사람들과 이어진다.

저자는 일제 강점기의 소설과 신문, 잡지 기사 들에서 각 디저트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찾아내어 그와 관련된 당시의 생활상을 재구성한다. 디저트 자체의 기원과 변천 과정도 짤막하게 소개하면서 그것이 우리나라에 어떻게 들어왔고 일제 강점기에는 어떻게 소비되었고 어떤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였는지, 그것이 사회적, 경제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고찰해 본다. 이렇게 디저트를 통해서도 일제 강점기는 더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우리 앞에 떠오른다.

많은 한국인들이 매일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긴다. 이 책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때 사람들은 커피의 맛보다는 커피를 마시면서 누리는 여유를 더 즐겼던 것 같다. 1926년 중앙일보에 실린 '커피 맛있게 끓이는 법'에서는 커피를 30분이나 달이라고 하니, 커피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도무지 맛있게 끓여지지 않을 것 같은 레시피다. 다방 커피에서는 밍숭맹숭해서 맹물 같은 맛이 난다는 기록도 있고. 그러나 다방은 자기 꿈을 자유롭게 펼칠 수 없는 시대에 '고독한 꿈이 다른 꿈들과 위로를 나누었던' 공간이 되어주었으니, 커피 그 자체보다는 커피가 만들어주는 만남의 기회가 당시 사람들에게 더 따뜻하고 부드러웠을 것 같다.

지금도 전철역에 갈 때마다 고소하고 달콤한 델리만쥬 냄새가 풍겨 온다. 사실 부드러운 밀가루 반죽에 커스터드를 넣은 델리만쥬보다는, 버석버석한 빵 안에 밤소를 넣은 밤만쥬나 팥 앙금을 넣은 각 지역별 특산품 'ㅇㅇ빵'이 일본에서 전해진 디저트 만주의 원형에 가깝다. 일제 강점기에 사람들이 먹었던 만주도 그쪽에 더 가까운 형태였다. 안 그래도 발음이 비슷한 만주와 만두의 관계가 궁금했는데, 한중일 만두의 역사를 통해 그 궁금증을 풀 수 있었다. 한편 추운 겨울밤에 만주를 팔아 학비를 마련하다, 굶주림에 지쳐 만주를 훔치려던 사람에게 살해당한 고학생의 이야기는 당시 사람들의 신산한 삶을 보여주어 독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멜론은 지금은 그렇게 귀한 과일이 아니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과일의 왕 대접을 받던 과일이었다. 작가 안석영은 1934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 「남양에서 굴러온 사생아」에서 이국의 과일을 먹고 즐기는 것이 조선 사람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못마땅해했지만, 오히려 그의 글에서 당시 사람들이 멜론으로 상징되는 열대 지방에 품은 동경을 읽어낼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사람들이 참외보다 더 달고 부드럽고 이국적인 멜론에 끌리고, 참외도 더 달고 맛있는 품종으로 개량되고 획일화되어 가는 모습에서 사람들의 욕망을 채우고 이윤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수십 년 전 과일 하나를 소비하는 양상에서도 자본주의가 일제 강점기에 어떻게 작동했는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호떡은 중국을 나타내는 '호(胡)'가 이름에 붙어 있는 것부터 중국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중국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이 책에서 확인했다. 그런데 호떡의 전신으로 보이는 '후빙胡餠'은 대만의 야시장들에서 파는 후추빵이나 그것을 벤치마킹한 인천 차이나타운의 화덕만두처럼 화덕 안쪽에 붙여서 구워내는 빵이었는데, 한국에서는 왜, 어떻게 기름을 두르고 지져내는 빵으로 변형되었는지 궁금하다. 아쉽지만 저자가 그에 대해서는 연구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호떡집이 성황을 이루었으면서도 중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중국인들은 불결하고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물건도 불결하고 부실해 품질이 좋지 않다는 인식) 때문에 사람들이 호떡집에 가서 호떡 사 먹는 것을 부끄러워했다는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저자는 여기서 원래 아시아의 중심이었던 중국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씌워 아시아에 대한 침탈을 정당화하는 일본의 의도가 작용한다고 본다. 그때도 지금도 흔히 먹는 호떡에도 제국주의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라무네는 일제 강점기 당시에도 지금도 일본에서 생산되는 레몬맛 청량음료다. 나는 라무네를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지만 라무네는 유리구슬이 마개 역할을 하는 특이한 병 때문에 지금도 인기가 많은가 보다. 사실 이 유리구슬 병마개는 영국에서 고안된 것이라 일본 고유의 것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도 라무네를 대표하는 이미지인 것은 분명하다. 이효석이 소설 『들』에서 푸른 하늘을 우러르다 푸르게 물든 두 눈을 라무네 병의 유리구슬에 비유한 것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생각했던 라무네의 이미지를 알 수 있다. 또한 라무네를 비롯한 청량음료가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물보다 위생적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니, 당시 사람들의 근대 문명에 대한 동경을 엿볼 수 있다.

초콜릿이 연애의 상징이 된 것은 일본 회사들의 상술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19세기 말 영국의 제과회사에서 이미 밸런타인데이 선물 용도로 초콜릿을 판매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한국에서 초콜릿이 연인의 마음을 전달하는 선물이 된 것은 1960년대 일본 제과 회사들의 영향이라고는 하지만, 일제 강점기에 쓰인 소설들에서도 초콜릿은 연애 감정을 품은 상대를 유혹하는 수단으로 등장하고, '연애사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까지 한다. 1929년 『동아일보』에 실린 메이지제과의 초콜릿 광고에도 초콜릿은 연인들이 함께 먹는 디저트로 나온다. 일제 강점기 사람들도 초콜릿의 달콤한 맛과 부드러운 감촉에서 연애의 달콤함을 떠올렸다는 데서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한편 당을 건강의 적으로 보는 지금과 달리 당시에는 몸을 건강하게 하는 영양소로, 부와 문명의 상징으로 보았기 때문에 더 달콤한 초콜릿이 한과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어린 시절에 드럼통에 고구마를 구워 파는 고구마 장수들을 보았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은 편의점에서 군고구마를 판다. 일제 강점기에도 군고구마는 흔히 먹는 간식이기에 어디에나 군고구마 장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 장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김동인의 소설 제목 「감자」가 사실은 감자가 아니라 고구마였다는 것이다. 김동인은 1941년에 쓴 문학 평론에서 자신의 고향인 평양에서는 고구마를 감자라고 부른다며 자신이 집필할 때 주인공 복녀가 훔친 것은 감자가 아니라 고구마였다고 밝혔다. 자신이 생각한 것은 고구마였다고 밝힌 것은 그만큼 소설의 '감자'를 고구마가 아닌 감자로 받아들인 독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자신의 소설 속 감자를 '고구마'로 고치지 않았다. 저자는 김동인이 주인공 복녀가 몰락한 이유를 빈곤이 아니라 그릇된 성적 욕망으로 보았기에 구황작물인 감자가 아니라, 당시에도 간식으로 여겼던 고구마로 소재를 설정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반면 나는 김동인 자신도 복녀 자신의 절박한 처지를 보여주기에는 고구마보다는 감자가 더 어울린다고 느꼈기에 '감자'로 놔둔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복녀 개인의 성적 타락이라고 보기에는 그녀가 처한 경제적, 사회적 상황이 너무나 열악했다.

일제 강점기 사람들도 여름에는 빙수를 즐겼다. 일본의 가키고리처럼 얼음에 시럽만 끼얹는 단순한 형태였는데도 사람들은 빙수를 즐기며 어느 집에서 빙수를 잘 만드는지도 이야기했다. 맛있는 빙수의 조건은 얼음이 얼마나 곱게 갈렸는지, 얼음 위에 시럽을 얼마나 많이 뿌렸는지였다. 눈처럼 곱게 갈린 우유 얼음 위에 각종 토핑을 산더미처럼 쌓아 올린 지금의 빙수 전문점 빙수들을 보면 일제 강점기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지 궁금하다. '빙수' 챕터 뒤의 '더 읽을거리' 코너에서는 잡지 『별건곤』의 「20전(지금의 한화로는 약 만 원)으로 피서하는 법」이라는 1928년 특집 기사를 소개한다. 편집국장이 그해 여름에 갑자기 기자들에게 20전씩 주면서 20전으로 피서하는 방법을 알아내라고 지시해서 나온 기사라는 데서, 당시 직장인들의 고충을 알 수 있다. 빙수를 사 먹는 것뿐만 아니라 계곡에 들어가 앉아 과일을 먹는 것, 냉방이 잘되는 공공도서관에 가는 것은 지금에도 할 수 있는 피서법이라 과거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껴진다.

같은 이야기가 되풀이되는 부분도 있기는 하지만, 일제 강점기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디저트를 즐기고 남겼던 기록을 통해 그들을 만나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얼마 전에 본 뮤지컬은 1980년대의 대학생인 남주인공이 어느 오래된 책방의 낡은 책 한 권을 통해 1940년대의 책방 주인인 여주인공과 소통하는 이야기였는데, 그 뮤지컬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그들이 즐겼던 디저트가 지금은 어떤 모습이고 어떤 맛인지 보여주고 맛보이고 싶기도 하다. 또 이 시대는 이 시대 나름대로의 어려움이 있지만 그때보다는 더 편안하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디저트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상나라 정벌 -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벽돌만큼이나 두꺼운 책을 '벽돌책'이라고들 한다. 내 기준으로 6, 700페이지대인 책은 페이지가 좀 많은 정도이고 900페이지는 되어야 벽돌책이다. 벽돌책은 완독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데, 정말 오랜만에 도전해 보고 싶은 벽돌책을 발견했다. 그 책이 『상나라 정벌』이었다. 제목처럼 역사적으로 증명된 중국 최초의 국가인 상나라가 주나라의 역성 혁명으로 정벌되는 역사를 다룬 책이다. 역사를 좋아하는 데다 역사 중에서도 근현대사보다는 고대사에 더 끌리는데, 고대사를 9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니. 탐스러운 읽을거리였다.

그런데 나 말고도 이 책에 관심을 가지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분량부터 압도적인 이 책의 판매량과 화제성이 높은 것은, 고어물에 가까울 정도로 잔혹한 상나라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상나라는 인신 공양을 하던 나라였다. 왕이 하늘에 바치는 제사부터 새 집을 짓고 나서 집이 튼튼하길 기원하는 제사까지, 상나라 사람들은 크고 작은 제사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 상나라 유적에서 사지가 동강 나고 이리저리 뒤틀린 해골들만 보아도 제물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나라 사람들이 쓰던 청동 찜솥에서는 귀족 소녀의 머리뼈가 발견되었다. 치아의 상태로 보아서는 고기를 자주 먹던 상류층 사람인데도 인간 제물이 되고 같은 인간에게 잡아먹히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이 모든 잔혹한 일들을 덤덤하게 설명한다. 인간 제물이나 동물 제물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는 듯이. 그럼에도 저자의 이야기와 그 증거로 제시된 사진들은 독자에게 충격을 주고 때로는 마음을 아프게 한다. 특히 아이를 끝까지 지키려 했지만 결국 같이 난도질되어 죽임당한 인간 제물의 이야기와 사진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아이를 지키려 했지만 결국 함께 제물로 바쳐진 아버지의 유골. 상나라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저자는 '상나라 정벌'이 상나라의 제후였던 주나라 일족이 이런 참혹한 역사를 끝내기 위해 내린 결단으로 보고 있다. 상나라는 작은 이웃 나라들을 정벌해 그곳 사람들을 인간 제물로 바쳐왔고, 주나라는 인간 제물들을 잡는 데 앞장선 인간 사냥꾼들이었다. 그러나 상나라의 군주 주왕이 주나라의 세자 백읍고를 인간 제물로 바치고 그 고기를 아버지인 희창(훗날 문왕으로 추존됨)에게 먹이는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 그의 만행에 분노한 주나라 일족은 오랜 인고의 시간 끝에 상나라를 정벌하고 인간 제물을 바치는 풍습을 없앴으며, 상나라의 인간 공양도 인간 사냥꾼인 자신들의 과거도 역사에서 지워버렸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수십 년 동안 선배 학자들이 진행해 온 상나라 관련 고고학 연구, 요순시대와 하나라, 상나라, 주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고대 역사서 『서경』, 『역경』의 점괘 해석들을 자기 주장의 근거로 삼고 있다. 문제는 그의 주 연구 분야가 상나라-주나라가 아니고, 자신이 구축한 역사적 서사에 자료를 끼워 맞춰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근거를 주장에 끼워 맞춰서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학자로서 지양해야 할 태도다. 그런데 고고학도 중국 고대사도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이것만 가지고 단정할 수 있나 싶은 부분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저자는 확실한 고고학적 근거가 없는데도 주나라 일족의 근거지에서 발굴된 저택 유적을 문왕의 저택이라고 단정한다. 또한 『서경』에서 실제로는 주공이 내린 명령들의 주어가 '왕'으로 되어 있는 것을, 저자는 주공이 당시에 실제 군주로 군림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반면 을유문화사판 『서경』 의 번역자 이세동 교수는 실제로 명을 내린 것은 주공이지만 군주인 성왕의 이름으로 명을 내렸기 때문에 주어를 '왕'으로 했다고 보고 있다. 내가 보기에는 이세동 교수의 분석이 더 합리적이다. 한편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이라는 부제대로 저자의 『역경』 속 점괘 해석들이 이 책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데, 저자는 이 점괘들이 인간 제물들의 다양한 모습이나 문왕이 처한 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원문 자체가 너무 단순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식인 데다, 글을 이룬 글자들이 지금의 한자와는 다른 형태의 한자라 어떤 게 어느 글자인지를 두고도 학자마다 의견이 엇갈린다. 그러니 저자가 『역경』의 점괘를 바탕으로 그려낸 상나라의 참상이 아무리 생생하다 하더라도, 저자의 해석이 객관적인 근거를 갖추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중국 학계에서도 이 책을 상당히 많이 비판했다고 한다. 방대한 양의 고고학 보고서와 논문 속 역사의 파편들을 모아 수천 년 전 상나라의 모습을 재구축하는 것도, 그것을 (한국어 번역판 기준) 900페이지에 걸쳐 밀도 있게 그려내는 것도 분명 굉장한 역량이다. 저자가 디테일하게 상상해 낸 상나라의 모습 덕분에 독자들이 상나라 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중국 고대사 연구자인 심재훈 교수는 이 책을 '재미있는 역사 소설'로 평하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을 통해 중국 고대사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괜찮지만, 저자의 주장이 객관적으로 입증된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 쪽이 좋을 것이다.

P. S. '세력'으로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는데 '실력'으로 번역한 것이 몇 군데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텔 바비즌 - 여성의 독립와 야망, 연대와 해방의 불꽃이 되다
폴리나 브렌 지음, 홍한별 옮김 / 니케북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영국의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1929년 출간된 수필집 『자기만의 방(A Room of One’s Own)』에서 여성이 사회적 역량을 발휘하려면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하며 자기만의 독립적 공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자기만의 방』이 출간되기 1년 전부터 1981년까지 53년 동안 오직 여성들에게만 자기만의 방을 제공한 여성 전용 호텔이 있었다. 『호텔 바비즌』은 뉴욕에서 여성 전용 숙박 시설로 명성이 높았던 ‘호텔 바비즌’과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 그들을 둘러싼 시대를 망라하는 역사책이다.

호텔 바비즌이 문을 열었던 1920년대는 미국이 1차 세계대전의 전쟁 특수로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 호황기였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많은 여성들이 일하기 위해 대도시로 몰려왔다. 도시로 나간 딸이 여성 전용 호텔에서 묵는다고 하면 부모들은 안심했고, 도시로 온 여성 본인도 여성 전용 호텔에서는 안전한 자기만의 방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 수요 때문에 대도시에는 여성 전용 호텔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호텔 바비즌도 그중 하나였다. 시대적 상황이 변화하면서 다른 여성 전용 호텔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지만, 호텔 바비즌은 50여 년 동안이나 여성 전용 호텔로 건재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여성 전용 숙박 시설로 존재할 수 있었을까? 호텔 바비즌은 젊고 매력적인 여성들이 머무는 공간이라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젊은 여성들은 독립을 향한 열망과 더 빛나는 존재가 되겠다는 야망을 품고 뉴욕으로 올라와 바비즌에 머물렀다. 배우 그레이스 켈리부터 타이태닉호 사고 생존자이자 여성 참정권 운동가인 몰리 브라운, 작가 실비아 플라스까지 한 시대를 빛낸 유명 여성 인사들이 한때 바비즌에서 살았다. 결국 이름을 널리 알리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각자의 꿈을 품고 뉴욕으로 왔던 수많은 여성들도 바비즌에 머물렀다. 저자는 투숙객 한 명 한 명의 일상부터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친 시대적 상황까지, 미시사와 거시사를 넘나들며 20세기 미국 여성들의 역사를 재구성한다.

이 책은 바비즌에 도착해서 프런트 데스크를 통과해 자기 방에 들어가는 젊은 여성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그 뒤로 각자 다른 야망을 품었지만 같은 희망을 품은 여성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누군가의 딸이나 아내, 어머니로 머무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이 이곳에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다. 비서학교의 학생들부터 모델, 배우, 여성 잡지의 객원 편집자들까지 호텔 바비즌에 머물렀던 여성들은 각자의 분야에 자리 잡는 것을 넘어서 더 큰 명성과 성공을 얻기 위해 분투한다. 각자 분투하는 것을 넘어서, 고민을 들어주고, 성공을 축하하고, 실패를 위로하며 연대한다. 감정적인 연대를 넘어서서 일자리를 찾아주거나 함께 사업체를 세우며 실질적으로 힘을 더해준다. 부제 그대로 호텔 바비즌에서 일어났던 ‘여성의 독립과 야망, 연대와 해방’의 드라마가 독자들의 눈앞에 다시 펼쳐진다.

그러나 저자는 호텔 바비즌에 머물렀던 여성들의 희망만을 그리지 않는다. 희망만을 이야기하기에는 그녀들을 둘러싼 현실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경제 대공황 시기(1929년~1939년)에는 여성들이 남성 가장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며 눈총을 받았고, 1950년대에는 전쟁터에서 돌아온 백인 남성들이 권력을 휘두르면서 결국 여성의 종착지는 가정이라고 압박했다. 여성들의 평균 혼인 연령은 낮아졌고, 여성들 자신도 결혼이 안정적인 삶을 보장하는 길이라 믿었다. 바비즌의 투숙객 중에도 바비즌에 머물면서 자기 일을 하는 시기를 단지 결혼생활 전의 과도기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자신의 삶에서 가장 빛나던 시기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결혼하고 나서 다시 가정에 얽매이고 야망이 꺾인 투숙객들의 후일담은 독자들을 슬프게 한다. 저자는 그렇게 시대의 구속과 한계에 부딪히고 좌절해야 했던 여성들을 기리는 데 한 챕터를 할애한다. 이 챕터에서 그녀들을 향한 저자의 깊은 애정과 슬픔이 느껴진다.

책 속의 여성들이 시대의 한계에 부딪혔다면, 저자는 호텔 바비즌 자체의 한계에 부딪힌다. 호텔 바비즌은 여성 운동 단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상업 시설이었기 때문에, ‘젊고 매력적인 백인 중산층 여성’을 주 고객으로 삼고 그중에서도 성공한 유명인사들로 호텔을 홍보했다. 그러니 이 책에서 다루는 여성 중 대부분이 젊은 백인 중산층 여성일 수밖에 없다. 그 한계를 넘기 위해 저자는 젊지 않거나 백인이 아니거나 가난한 투숙객들의 삶도 적은 분량으로나마 다루고 있다. 여성지 『마드무아젤』의 객원 편집자 공모전 지원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스펙을 지니고도 흑인이라는 이유로 선발되지 못할 뻔했고, 선발되고 나서도 미묘한 차별을 겪어야 했던 바버라 체이스의 사례를 통해 미국 역사 속에서 지워진 비백인 여성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호텔의 이름을 빛낸 유명 투숙객들과 달리 혼자 쓸쓸히 방 안에서 자살한 투숙객들과, 어떤 성취도 이루지 못하고 노년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구석의 작은 객실에 머무는 투숙객들은 호텔 바비즌의 그림자를 보여준다.

희망도 야망도 잃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간 투숙객들처럼 호텔 바비즌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쇠락했다. 새로운 여성 운동은 여성을 격리해야 한다는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했고, ‘여성 전용’은 낡은 개념이 되어 1981년부터 남성 투숙객을 받기 시작했다. 2000년대에 들어 바비즌은 콘도미니엄으로 재개장했지만 바비즌이 상징했던 한 시대는 분명히 끝났다. 호텔 바비즌은 지금 ‘여성 전용 숙박 시설’로서의 정체성을 잃었고, 가장 빛나던 시기에도 (주로) 백인 여성에게만 자기만의 방을 내어주었다는 한계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여성들이 자기만의 방을 갖고 그곳에서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주도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여전히 여성들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기에, 호텔 바비즌은 여성이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공간의 좋은 선례로 기억되고 후대의 여성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이로운 역사 콘서트 - 역사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 50
그레그 제너 지음, 서종민 옮김 / 상상스퀘어 / 2022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Q. 책의 제목이 왜 『경이로운 역사 콘서트』일까요?

A왜 이런 제목을 붙였는지 정확한 이유는 한국어판 편집자와 번역자와 출판사가 알겠지만, 저는 짐작이라도 해보겠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역사학자에게 물어보세요(Ask a Historian)』입니다. 부제는 '역사가에게 물어보고 싶은 질문 50'으로 영어 부제 '당신이 알고 싶었던 것에 대한 50개의 놀라운 답(50 Surprising Answers to Things You Always Wanted to Know)'과 비슷합니다. 부제로 이 책의 정체를 알 수 있죠. 영국의 대중 역사가인 저자가 사람들에게 받은 역사 관련 질문 중 50개를 가려서, 그에 대한 답변들을 모아 책으로 만든 겁니다. 사실 원제에도 '콘서트'라는 단어는 없고 딱히 '콘서트'라는 단어를 넣을 이유도 없는데 제목을 'ㅁㅁ 콘서트'로 짓는 책들이 너무 많다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전작의 북 콘서트를 열려다 코로나 팬데믹이 오는 바람에 취소하고, 온라인 설문으로 받은 질문들을 토대로 이 책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북 콘서트 대신 만든 책이니 '역사 콘서트'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Q. 이 책의 장점은 무엇인가요?

A무엇보다 재밌다는 겁니다. 내용이 흥미로운 거냐, 그 내용을 전달하는 저자의 입담이 좋은 거냐, 묻는다면 둘 다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후자가 가장 큰 매력이자 강점입니다. 저는 제가 영미권 유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걸어다니는 어원 사전』과 『이상한 나라의 여행기』에 이어 이 책에서도 저자가 웃으라고 쓴 문장마다 빵빵 터졌으니 사실은 제가 영미권 유머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면 머나먼 한국까지 번역 출간될 정도면 자국에서부터 책을 꽤 많이 판 저자일 테니, 저자의 글 솜씨와 유머 감각이 언어와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을 정도로 뛰어나다고 봐야겠죠. 다른 번역자가 번역한 전작 『소소한 일상의 대단한 역사』(와이즈베리, 2017)는 한국인 독자들로부터 '쓸데없는 농담'에 '영국인만 웃길 것 같은 유머'라는 평을 얻었는데, 저자의 유머 감각이 몇 년 사이에 일취월장했거나 이 책의 번역자의 센스가 좋은 것 같습니다. 전작과 달리 이 책은 이야기하는 듯한 경어체로 번역돼서 문화적 차이로 생기는 이질감을 완화해 준 것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말로 하면 불쾌할 이야기도 정중한 말투로 하면 좀 나으니까요. 사적인 얘기도 꽤 많이 하는 편인데(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어머님이 프랑스인이고 저자의 사춘기 시절 중2병 때문에 꽤 고생하셨다는 것과 저자의 어린 딸이 유인원처럼 음식을 바닥에 내리쳐 먹는 걸 좋아한다는 것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저자가 멜 깁슨을 무척이나 싫어한다는 것도요) 그게 꽤 웃긴 데다가 역사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이어져서 거슬리지 않습니다. 남의 애 얘기에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는 저에게도 거슬리지 않았지만,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 것 같긴 합니다. 일단 저는 호입니다.

웃기는 책이어서 흥미 위주의 엽기적이고 선정적인 일화들만 모아놓은 책일까 걱정했는데, 의외로 알찹니다. '시대 이름은 누가 정하나요?'라는 질문에서는 역사학의 방법론에 대해 꽤 진지하게 고찰하고, '영화 속에서 역사적으로 잘못된 점이 보이면 짜증이 나시나요?'라는 질문에는 "정확성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대중 문화를 검열해서는 안 되지만, 백인 우월주의와 신나치주의 같은 해악을 낳을 수 있는 위험한 역사 왜곡은 경계해야 된다"는 균형 잡힌 답변을 제시합니다.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들 중 가장 부자였던 사람은 누구인가요?'라는 질문에는 당시의 재화 가치뿐 아니라 당시 개인의 평균 수입, 국가 전체 GDP에서 그 사람의 재산이 차지했던 비율 등 다양한 기준으로 재산을 추정해 보는 등, 신중하고 꼼꼼하게 답변을 도출해 내고요.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영국사와 서양사 위주로 답변하고, 잘 모르는 동양사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지 않는 자세도 좋다고 봅니다. 공자님도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앎"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과거에 사람들이 어떤 억양으로 말했는지 알 방법이 있나요?'에 대한 답변에서는 영어의 변천사를 꽤 훌륭하게 요약 정리했습니다. 제1세계의 백인 남성, 대영 제국의 후예치고는 자국과 유럽 국가들이 저지른 과실도 여과 없이 드러내고 비난하고, 정치적 올바름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맘 편히 읽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죠.

Q. 이 책의 아쉬운 점은 무엇인가요?

A많이 거슬린다기보다 '이건 좀'이라고 느낀 부분이 몇 군데 있습니다. 하나는 일본의 '오하구로(이를 검게 물들이는 풍습)'를 이야기하는 부분인데, "게이샤를 비롯한 특권층 여성이 하얗게 칠한 얼굴과 검게 물들인 눈썹, 붉게 칠한 뺨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였을 겁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게이샤를 비롯한 특권층 여성"이라뇨. "게이샤와 특권층 여성들"이겠지요. 일본의 게이샤나 한국의 기생이나 사회에서는 특권층은커녕 낮은 계층이었지만 남성들을 접대하는 직업이었기 때문에 특권층 여성들만큼이나 화려하게 치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관한 글을 쓸 때는 전치사 하나도 조심해서 써야 합니다.

그리고 봉화는 사실상 직접 불을 질러 울리는 화재 경보기나 다름없었고, 봉화로는 한 가지 소식밖에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중국 후한 시대에는 불의 개수에 따라 5단계로 적의 수와 현재 위치를 알렸고, 조선의 봉수 체계에서도 1개부터 5개까지 불의 개수로 평상시/적군 출현/적군 국경 접근/적군 국경 침입/적군과 교전 중이라는 다섯 가지 상황을 알렸습니다. 동양사여서 저자가 잘 몰랐다고 하기에는 서양에서도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플리비오스가 알파벳을 보낼 수 있는 봉화 체계를 만든 예가 있습니다. 저자나 이 책을 감수한 다른 역사학자들이나 이 점을 놓친 것 같은데, 신도 책의 모든 오류를 잡아낼 수는 없다니 이해는 합니다.

번역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로마 제국의 황후들이었던 아그리피나와 메살리나를 '황후'로 번역해야 하는데 '여제'로 번역한 부분, 무게 단위 '그레인'(1그레인=약 64.8mg)을 '밀알'로 번역한 것 같은 부분, 메리 1세가 다섯 명의 양어머니들을 거쳐야 했다는데 '계모'가 더 적절해 보이는 부분, '재산을 마 단위로 전시한다', '비밀 붉은 막대'처럼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저자의 유머 감각을 대체로 잘 살렸으니 이런 소소한 오류들은 넘어갈 만합니다.

Q.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질문은 무엇인가요?

A '가장 고증이 잘된 역사 영화는 무엇인가요? 영화 속에서 역사적으로 잘못된 점이 보이면 짜증이 나시나요?'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역사학자들에게 하는 흔한 질문이긴 한데, 좋아하는 역사 드라마들이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일 때마다 고민했던 지점들을 저자가 명확하게 짚어줬거든요. 과거를 가장 정확하게 표현한 영화가 <몬티 파이튼의 성배>라는 저자의 답변도 기가 막혔습니다. 중세 영국이 배경인데 살인마 토끼가 등장하고 평범한 농민이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논하는 황당한 영화인데, 저자는 일부러 틀린 이야기를 하려면 그에 앞서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영국인다운 유머 감각이 드러나는 선정이라고 느꼈습니다. 이런 멋진 답변을 이끌어 낸 질문이어서 마음에 듭니다.

Q. 이 책에서 가장 황당했던 질문은 무엇인가요?

A '앤 불린은 정말 유두가 세 개였나요?'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질문자의 역사 선생님이 이런 이유로 앤 불린이 재판에서 마녀 선고를 받았다고 했답니다. 아마 초중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이었을 텐데 아이들에게 이런 선정적이고 근거도 없는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건가요. 저자는 확실히 앤 불린의 유두는 세 개가 아니었고, 살아생전 마녀로 몰린 적이 없다며, 앤 불린에 대한 편견과 낭설들을 반박하고 더 공정한 시각으로 그녀를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칭기즈 칸은 정말 가는 데마다 나무를 심었나요?'라는 질문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듣고 한 질문인가 했는데, '칭기즈 칸은 친환경 군주'라는 농담을 듣고 오해한 것 같습니다. 칭기즈 칸은 나무를 심어서가 아니라 환경 파괴의 주범인 인간들을 수없이 죽여 '친환경 군주'라는 농담 반 진담 반의 호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칭기즈 칸이 죽인 사람 수는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칭기즈 칸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요소 하나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칭기즈 칸의 방식이 지구를 구하는 최선의 방법은 아닐 거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Q. 이 책에서 가장 유용했던 답변은 무엇인가요?

A'최초의 석기는 단순한 돌멩이와 어떻게 구분하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습니다. 저자는 석기가 돌멩이와 구분되는 특징을 여섯 가지로 정리해 주었습니다. 제가 고고학자는 아니지만 예전부터 저도 알고 싶었던 것이라 알게 되니 후련했습니다. 다음에 박물관에 갔을 때는 이 특징들이 석기에서 보이는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Q. 저자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A "가족들과 이야기하다 역사에 관해 논쟁이 일어날 때 어떻게 해결하시나요?"입니다. 본문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했고, 사춘기 시절 아쟁쿠르 전투(백년전쟁 당시의 유명한 전투)를 놓고 어머니와 신경전을 벌였다고 했습니다. 아마 심정적으로는 영국 쪽에 기울어져 있는 거 같은데, 지금은 역사에 대해 어머니와 이야기할 때 어떻게 논쟁을 해결하는지 궁금합니다. 원만한 해결법이 있다면 한국과 일본 혼혈 가정처럼 역사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다문화 가정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 독자들을 위한 Q & A

이 책에 실린 질문들을 한국 버전으로 수정했고, 답변은 제가 자료를 찾아서 작성했습니다.

Q.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월요일은 언제였나요?

A요일로서의 월요일이라면 갑오개혁으로 태양력과 요일제가 도입된 1896년 1월 7일(1896년 1월 1일 수요일로 태양력과 요일제를 시작했습니다)이지만, 한 주기의 출근 첫 날로 따지자면 관료제가 시작된 삼국시대의 어느 하루가 아닐까 합니다. 관리 외의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 쉬었는지 알 수 없지만, 관리들은 회사원처럼 정해진 주기 동안 일하고 정해진 휴일에 쉬었으니까요. 조선시대 관료들은 매달 1, 8, 15, 23일에 쉬었다니 일주일에 한 번은 쉬었던 셈입니다.

Q. 20세기 이전의 한국 여성들은 생리를 어떻게 처리했나요?

A 조선시대에는 '개짐'이라는 천 생리대를 착용했다고 합니다. 개짐은 달거리포, 월경포로도 불리며 주로 하얀 광목 천으로 만들었습니다. 딸이 초경을 시작하면 어머니가 개짐을 물려주며 어떻게 사용하고 빨고 관리하는지 설명해 줬습니다. 그 이전에도 비슷한 생리대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한국에서 지금과 같은 형태의 일회용 생리대가 보편화된 것은 1970년대가 되어서였습니다.

Q. 한국에서 거울이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인가요?

A청동기 시대에 청동 거울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유리 거울은 1883년 인천에 판유리 공장이 설립되면서부터 사용되었습니다.

Q. 한국에서 청각장애인들이 수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인가요?

A이전에도 몸짓으로 의사소통을 하긴 했지만 수어를 사용해 대화를 하기 시작한 건 1909년 최초의 농학교인 평양맹아학교가 설립되었을 때입니다. 미국의 선교사인 로제타 셔우드 홀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농아 교육을 시작했습니다. 홀은 한국인 이익민과 그의 조카를 중국 최초의 농학교인 체후농학교에서 연수하게 했고, 이익민과 조카는 농학교를 운영하며 수어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그 뒤 1913년 조선총독부가 세운 농학교 제생원에서는 일본 수어를 사용했지만 1935년에는 이창호 목사가 평양에 개교한 평양광명맹아학원에서 학생들에게 조선 수어를 가르쳤습니다. 독립 이후에는 1982년 국내 최초의 표준 수화 사전이 만들어졌고, 1991년에는 교육부에서 한글식 표준 수화를 발행했습니다.

참고 자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