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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존속 살해범의 편지 - 그리고 그 밖의 짧은 글들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유예진 옮김 / 현암사 / 2021년 1월
평점 :
홍차에 적신 마들렌. 그 마들렌을 입 안에 넣는 순간 살아나는 기억들.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이 과거로의 여정을 시작하는 이 장면에 대해 수없이 들어왔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커녕 프루스트의 글 한 줄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어보고 싶긴 한데 그 전에 프루스트의 짧은 산문들을 모은 이 책으로 가볍게 몸을 풀어보는 게 좋겠다 싶었다. 프루스트는 이 책에서 "한 작가의 책을 한 권만 읽는 것은 그를 단 한 번 만나는 것과 같다."(p. 66.)고 했는데,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이 책으로 그를 처음 만나는 셈이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을 계속 만날지 말지 결정하게 되는 것처럼, 나와 프루스트의 만남이 계속 이어질지는 이 책이 결정할 터였다.
내가 이 책에서 만난 프루스트는 엉뚱하지만 섬세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이다. 당대 최고의 평론가였던 생트뵈브의 문학 이론을 반박하는 비평서 『생트뵈브에 반박하여』서문에서는 뜬금없이 어린 시절 여름을 보냈던 할아버지 댁에서의 기억들을 풀어놓고, 친구 자크에밀 블랑슈의 저서 『화가의 이야기』서문에서는 외종조부 댁에서의 추억과 친구들 앞에서 자신이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것을 숨겼던 옛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생트뵈브의 문학 이론이 왜 비판을 받아야 하는지, 블랑슈의 문학과 미술 세계는 어떤지 알고 싶었던 독자들로서는 당황스럽겠지만, 그가 이야기하는 기억의 단편들이 얼마나 생동감 있게 반짝이는지 그의 기억 속에 함께 잠기게 된다. 할아버지 댁 요리사가 가져다 준 빵을 차에 적셔 한 입 베어 문 순간, "입 안에 퍼지던 차의 향과 한결 더 부드러워진 빵의 감촉, 제라늄과 오렌지나무 향"(p. 128.)이 읽고 있는 내 입 안에서도 퍼져 나가는 것 같고, 외종조부 댁 부엌에 놓인 크리스털 식칼 받침대에서 반사된 무지갯빛과 그뤼에르 치즈, 살구가 내뿜은 향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신비로운 분위기가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것 같다. 그는 늘 자신의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그 감각에 새겨진 것들을 언제라도 바로 지금 겪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되살려 낼 수 있으며, 글을 통해 그것을 다른 사람들까지 느낄 수 있게 하는 사람이다. 귀족 부인의 무도회에 초대받아 잘 차려입고 가다가 자신이 부잣집 자제인 것을 모르는 친구와 마주쳐 진땀을 뺐던 일은 유쾌한 필치로 그려지고 있다. 그의 유머 감각은 이 부분뿐만 아니라 책 곳곳에서 튀어나와 읽는 사람을 슬며시 미소 짓게 만든다.
그는 차창 밖으로 지나쳐 가는 시골집들과 그 집들을 둘러싸고 있는 나무를 보고서도 이런 따뜻한 글을 쓴다. "배나무에 기대어 있는 어떤 집들은 이제 나이가 들어서 그 나무에 의지하고 있음에도 여전히 예전처럼 자신들이 배나무를 보호해 주고 있다고 믿고 있다. 그 집들은 배나무의 가지들이 한없이 여리고 열정으로 가득했던 때를 떠올리며 먹먹해진 가슴에 그것을 꼭 안고 있었다."(p. 113.)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는 무생물인 낡은 시골집과 어떤 감정 표현도 할 수 없는 배나무에서 가슴 뭉클한 감정을 이끌어낸다. 그 뒤에 이어진 세 종탑 이야기도 정겹다. 길을 가면서 보였다 안 보였다, 커졌다 작아졌다, 서로 뒤서거니 앞서거니 하는 세 개의 종탑들은 그저 오래전에 세워진 낡은 건물이 아니라 먼 길을 여행해 온 프루스트에게 손짓을 하는 정겨운 존재들이다. 그는 보고 듣고 경험하는 어떤 것도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무언가를 느끼며, 그것을 맑은 서정으로 그려낸다.
남들이 포착하지 못하는 것을 포착하는 예민한 성정 때문인지, 미술과 문학 평론에서는 그만의 독특한 안목과 뚜렷한 주관을 드러낸다. 영국의 저명한 예술평론가 존 러스킨 전문가로 이름났던 그는, 러스킨의 예술 평론을 사랑하지만 그가 겉으로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강조하면서도 사실은 미술 작품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어 있다는 것을 꿰뚫어 본다. 러스킨은 프랑스 아미앵의 중세 성당들에 관해 쓴 책 『아미앵의 성서』에서 자신이 글로 묘사하는 성당의 부분들을 그대로 담은 사진이 아니라 보다 암시적이고 글로 묘사된 것과는 관계가 먼 사진을 선택했다는데, 나라면 그의 이런 불친절한 글과 그림의 배치를 비판했을 것이다. 하지만 프루스트는 러스킨의 엉뚱한 도판 배치에서 그의 정신 세계 속 독창성과 유머 감각을 발견한다. 접속사 '그리고'를 남들이 쓸 법한 곳에 쓰지 않고 남들이 쓰지 않는 곳에 쓰는 플로베르의 문체의 특징에서는 그만의 문법적 독창성을 발견한다. 친구 블랑슈가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에는 살롱 여주인들이 고상한 말투로 그의 작품을 무시하다, 그의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은 이후로는 그 고상한 말투로 '예전부터 이 그림을 좋아했어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는 신랄한 유머 감각이 드러난다. 그가 어찌나 가차 없고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풍자하는지, 내가 당대의 작가나 화가였다면 그와 친구나 지인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 같다.(그 두 가지 경우가 아니라면 프루스트는 참 사랑스러운 친구나 지인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앞으로도 프루스트를 계속 만나고 싶다는 것이다. 짧은 글과 장편소설은 호흡이 다르겠지만 그는 여전히 프루스트고 사랑스러움과 섬세함도 여전할 것이다. 좋은 만남이 되는 데는 분위기도 한몫하는데, 이 책의 편집과 디자인은 프루스트의 글 특유의 섬세한 분위기에 잘 어울린다. 하늘색 바탕에 푸른색 줄무늬가 그려진 표지와 그 표지에 그려진, 회중시계 위에 앉아 차를 마시는 신사를 그린 일러스트(현대 한국인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린 것인데도 프루스트가 살던 당시 어느 소설이나 신문에 실렸을 법한 그림체다), 살구색 속표지와 그 위에 얹은 프루스트의 흑백 사진들까지. 마침표와 말줄임표에 쓰인 점들까지 다이아몬드 모양이다. 이 책의 내용 중 러스킨 관련 평론들이 조금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평론들도 곱씹어서 찬찬히 읽어 보면 프루스트만의 서정을 느낄 수 있다. 이 책은 프루스트와의 기분 좋은 첫 만남이다.
P.S. 이 책에 실린 글 「프루스트에 의한 프루스트」는 스무 살 무렵의 프루스트가 다양한 개인적인 질문들에 짤막하게 답변한 글이다. 프랑스의 TV 문학 대담 프로그램 <아포스트로피>에서는 진행자가 방송 끝에 초대 작가에게 이 글의 문항들로 질문하면서 이 '프루스트 설문지'가 더 유명해졌다. 이 질문은 각 작가의 취향과 개성, 고민, 가치관들을 즉흥적이면서 자유롭게 드러내는 방식이다. 나도 해보았는데 개인적인 글이라 숨은 글 기능으로 숨겨 놓았다. 질문들이 궁금하면 열어보시고, 그에 대한 프루스트의 답이 궁금하면 책을 읽어보시길.
*모바일, 앱에서는 숨은 글 기능이 적용되지 않으니 서평만 읽고 싶다면 여기까지만 읽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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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성격의 주요 특징: 호불호가 심히 뚜렷함. 한 번 마음을 연 사람에게는 충실하지만 한 번 마음을 닫은 사람에게는 쉽게 다시 마음을 열지 않음.
남성에게 바라는 자질: 여성을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 지성과 이성, 감성
여성에게 바라는 자질: 남들이 뭐라 해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뚝심
친구들에게서 가장 좋아하는 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질 만큼 힘이 되어주는 것
주요 단점: 디테일에 너무 집착함, 좋아하는 일을 하다 꼭 해야 할 일을 못할 때가 있음
가장 좋아하는 활동: 책이나 영화에서 본 이야기를 갖고 또 다른 이야기 상상하기
행복이란: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는 것
가장 큰 불행은 무엇일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통 속에서 사는 것
되고자 하는 것: 좋은 책을 만드는 편집자
살고 싶은 국가: 모두가 자기 성별이나 인종, 성적 지향 때문에 불안해하거나 차별당하지 않고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나라
좋아하는 색: 하얀색, 하늘색, 남색, 파란색, 하얀색과 파란색 계통 색의 조합
좋아하는 꽃: 벚꽃, 주황색 나리, 장미
좋아하는 새: 제비(프루스트와 같음)
좋아하는 산문 작가: 피천득, 레프 톨스토이, 스콧 피츠제럴드, 박상영
좋아하는 시인: 백석, 윤동주, 정호승
좋아하는 픽션 남주인공: 피에르 베주호프(레프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좋아하는 픽션 여주인공: 최서희(박경리,『토지』)
좋아하는 작곡가: 장범준, 브람스
좋아하는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앙리 마티스, 마르크 샤갈, 요하네스 판 페르메이르
실제 삶에서 존경하는 영웅: 위근우 기자
역사 속에서 존경하는 여자 영웅: 로자 파크스, 가네코 후미코
무엇보다 가장 싫어하는 것: 층간소음, 더러운 화장실(둘 중 어느 게 더 싫은지 고를 수 없음)
가장 혐오하는 역사적 사건: 난징 대학살
가장 좋아하는 군사적 사건: 말 안 듣는 교회 후배 놈들 입대함(아쉽게도 지금은 다 제대함)
내게 있었으면 하는 능력: 외국어 능력,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를 다 잘하고 싶고 가능하면 아랍어랑 힌디어도 하고 싶음,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
어떻게 죽었으면 하는가: 침대에서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현재 나의 정신 상태: 할 일이 너무 없어 무기력한 상태
가장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잘못: 몰라서 저지른 잘못
나의 모토: 내 페이스를 잃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