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학살 일기 - 가자에서 보낸 85일
아테프 아부 사이프 지음, 백소하 옮김, 팔레스타인평화연대 감수 / 두번째테제 / 202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학교 1학년 때 팔레스타인 서안 지구에 속한 성지들(동예루살렘, 베들레헴)에 다녀오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해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개와 사람에 관하여>라는 이스라엘 영화를 보고 분노했다. 2023년 하마스의 공격으로 어머니와 반려견을 잃은 이스라엘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인데, 마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공격을 주고받은 것처럼 그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무차별적인 가자 지구 공습으로 수만 명의 민간인이 희생당했고 그중 상당수가 어린이였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병원 시설과 식량을 배급받으러 온 사람들에게까지 공격을 퍼붓고 있다. 유엔 산하의 특별위원회는 이러한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공격이 집단 학살과 그 특징이 일치한다고 보고했다. 그렇다. 이것은 전쟁이 아니다. 집단 학살이다. 『집단 학살 일기』는 지금도 계속되는 이 학살의 시간 중 첫 85일의 기록이다.

저자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문화부 장관이다. 지금은 아내, 자녀들과 함께 서안 지구에서 살고 있지만 고향은 가자 지구이고 부모, 형제, 친척들의 대다수는 거기서 살고 있다. 국제 문화유산의 날 행사 때문에 아들과 함께 가자 지구를 방문했다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발이 묶였다. 그날부터 이집트로 탈출하기까지 85일 동안, 그는 매일매일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는 위태로운 날들을 보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매일 일기를 쓰고 인터넷이 될 때마다 자신의 일기를 세상에 내보냈다. 그의 일기는 『워싱턴 포스트』, 『뉴욕 타임스』, 『가디언』, 『르몽드』 등의 세계 주요 언론에 게재되었고, 단행본으로 정리되어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출간되었다. 그래서 한국어로도 이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이다(아쉽게도 한국어판은 아랍어 원서를 직역한 것이 아니라 영어판을 중역한 것으로 보인다).

2023년 10월부터 가자 지구에서 새로운 아침을 맞았다면, 그것은 전날 밤을 무사히 넘기고 살아남았다는 뜻이었다. 매일 밤 쏟아지는 폭격을 맞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고, 그중 하나가 자신이 될 수 있으니까. 저자가 85일 동안 살아남아 탈출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운이었다. 오늘 밤 자고 가라는 친구의 초대를 거절했는데, 그날 밤 친구네 집에 폭격이 떨어져 친구네 가족이 몰살당하고, 방금 전에 만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다 자리를 떴는데 그 자리에 폭탄이 떨어진다. 자고 일어나면 내 가족이나 친척, 친구 중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보고 듣고 겪었던 것들을 차분히 기록한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폭격을 맞은 집의 잔해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치우고 산산조각 난 시신들을 수습하는 일도 집안 대청소를 했던 것처럼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바깥세상의 누구도 가자 지구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이스라엘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가자 지구 사람들을 몰아내면서 정작 남쪽으로 간 사람들에게까지 폭격을 퍼붓는 현실에 분노한다. 그러나 그 분노는 맹렬하게 타오르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 이 현실을 세상에 전하겠다는 사람의 굳은 심지를 불씨 삼아 조용히 타오르는 것이다.

저자는 그렇게 아무런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도 일상을 살아가는 가자 사람들의 모습도 잊지 않고 보여준다. 아이들은 난민촌의 천막 사이에서 뛰어놀고,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어도 숙제를 한다. 젊은 엄마는 학교에 갈 수 없게 된 아이에게 직접 글자를 가르쳐준다. 식량이든 물이든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고, 그것도 자기가 받기 전에 다 떨어질 수 있다. 게다가 식량이나 물을 받으러 갔다가 이스라엘의 공습이나 총격으로 죽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들은 묵묵히 일상을 살아간다. 이스라엘은 지금도 가자 지구에서도 서안 지구에서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다 비워내려는 기세로 그들을 죽이고 내쫓아 내고 있으니, 그렇게 가자 지구에 남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저항일 것이다.

하루라도 조용하고 평온하게 보내고 싶어 휴전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저자는 '우리는 늘 휴전 속에 살고 있었다'고 말한다. 팔레스타인은 늘 전쟁 속에서, 또는 전쟁과 전쟁 사이에서 살아 왔으니까. 그러다 문득 우리도 늘 휴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지금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고 바라는 휴전이 우리 땅에서는 72년이나 계속되었다. 사실상 종전이라고 할 만큼 긴 시간이었고, 우리는 그동안 전쟁으로 파괴된 것들을 복구하고 전쟁 이전보다도 더 잘사는 선진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도 다시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 몇 년 전의 전쟁으로 파괴된 집을 다시 지었는데 이번 전쟁으로 다시 파괴되어 버려, 사람들은 천막에서 살아간다. 집부터 상하수도, 도로, 가게까지 일상을 지탱해 주는 것들은 복구될 사이도 없이 파괴되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작권 수익은 모두 팔레스타인 지원 단체 세 곳에 기부된다니, 이 책을 읽는 것이 그들이 다시 삶을 회복할 기회를 하루라도 더 빨리 얻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P. S. 1. 이 책이 '편향된 책'이라며 별점 테러를 하는 사람을 봤는데 이해하기 어렵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스라엘은 그 공격의 수백, 수천, 수만 배의 강도로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고 있다. 아무 무기도 없는 민간인들, 미래 세대의 어린이들을 수만 명 죽이고 병원이나 피난 시설까지 공습하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지원 물자들까지 차단하고 있으니,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말살할 기세다. 국제 사회가 아무리 비난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가자 지구의 상황을 보도하려는 언론인들까지 죽이고 있다. 유대인들은 지금까지도 예수를 메시아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약속의 민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편을 들 필요가 있나?

P. S. 2. 한국어판이 나와 한국인들에게도 가자 지구의 현실을 알린다는 취지가 좋고, 책의 수익을 팔레스타인 지원 단체에 기부하는 것도 좋다.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각주로 꼼꼼하게 보충 설명해 주어 지금 팔레스타인의 현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아쉬운 것은 괄호 안의 설명은 어떤 것이 저자의 설명이고 어떤 것이 번역자나 편집자의 설명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 문장들이 중간중간에 있지 않고, 특히 친족 관계에 있어서 제대로 교열되지 않은 부분들이 보인다. 그런 부분들을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후다'는 장인어른이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큰딸에게 붙여준 이름이라고 했으니(96페이지), 후다는 첫째 딸이고 그러므로 아내의 동생이 아니라 언니다. 그런데도 책에서는 후다를 계속 저자의 '처제'라고 한다. 아내의 언니니 '처형'이 맞다.

-127페이지에서 처형 후다의 남편 하템을 '매부'라고 하는데, 하템은 처형의 남편이므로 '(손윗)동서'가 맞다.

-142페이지에서 여동생 에이샤의 남편 마헤르를 '제부'라고 하는데, 제부는 언니가 동생의 남편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 이후로는 '매부'라고 맞게 표기하고 있다.

-아버지의 이모 누르를 '고모할머니'라고 하는데 아버지의 이모는 '진이모'나 '이모할머니'로 부르는 게 맞다.

-바로 다음 페이지(470페이지)에서 친구 아흐마드가 4형제 중 막내라고 하는데, 앞 페이지에서 그의 형제 모함메드를 '동생'으로 번역했다.

-470페이지에서 샤우키라는 사람이 '여'동생 에이샤의 '장인'이라고 하는데 '시아버지'가 맞다. 그 이후로는 '시아버지'라고 맞게 표기하지만.

-470페이지에서 작가가 친구인 아흐마드에게 존댓말을 하는 것으로 번역되었다. 바로 앞 페이지에서 저자와 아흐마드가 또래의 소꿉친구였다고 나오는데. 아흐마드의 형인 샤우키와의 대화로 봤을 수도 있지만, 형제 중 유일하게 고향을 떠나려 하지 않는 사람은 아흐마드라고 바로 그 페이지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 이곳(가자 지구)을 떠나고 싶지 않느냐고 묻는 저자에게 여기는 아직 안전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저자 또래의 친구인 막내 아흐마드다.

-478페이지에서 누르 '고모할머니(이것도 '이모할머니'가 맞다)의 아들 아흐메드 '삼촌'이라고 하는데, 아버지의 이모의 아들이면 아버지의 이종사촌, 그러니 오촌이므로 아흐메드 '당숙'이나 '아저씨'가 맞다. 요즘 한국 사람들은 일상에서 당숙도 그냥 '삼촌'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다고 하지만 정확히 하자면.

좋은 취지로 만들어진 책이니 교열을 좀 더 꼼꼼히 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은 제게 그 질문을 한 2만 번째 사람입니다 - 지치지 않는 페미의 대답
오혜민 지음 / 날(도서출판) / 2025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이야기했을 때 흔히 받게 되는 열여덟 가지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들을 모은 책이다. 오죽 이런 질문들을 많이 들었으면 제목부터 '당신은 제게 그 질문을 한 2만 번째 사람입니다'일까. 이 책에 실린 질문 중 '성차별은 다 과거의 일이지 않나요?'는 나도 실제로 회사의 남성 동료에게서 받은 질문이고, 목차의 다른 질문들도 온라인에서나 오프라인에서나 자주 보아온 것들이다. 그 질문들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고 싶어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저자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6년 동안 페미니즘을 가르쳐온 사람인데, 페미니즘 관련 수업이 필수 과목이었기에 페미니즘에 적대적인 학생들도 많이 만났다. 그렇다 보니 책 전반에서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 폭력적인 시선에 대한 피로감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독자에게 '그동안 애써온 당신은 잠깐 쉬어도 괜찮다'며 '이제 제가 조금 답해 보겠다'고 말하는 서문에서부터, 모든 편견과 계속해서 싸우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페미니즘이라면 무조건 적대감과 거부감을 보이는 학생들이나 학교 밖의 사람들도 증오하지 않고, 그들을 설득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려고 한다. 페미니스트들이 자신과 반대 되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조건 적대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편견을 깨는 모습이다.

페미니즘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미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여성에 대한 편견과 혐오 자체에는 단호하게 맞서고, 질문 속에 숨은 뒤틀린 의도는 날카롭게 간파한다. '성평등을 이야기하면서 군대 얘기는 왜 안 하냐'는 질문 뒤에는 여성의 열등함을 증명하고 군대 얘기를 꺼내는 것일 뿐, 여성 징병과 여군, 군대 내 위계 폭력과 그에 대한 방지법에 관해서는 진지하게 이야기할 열의가 없어 보인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여성과 함께 논의하고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가려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아쉬운 것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생각보다 너무 간략하다는 것이다. 한 질문에 대한 답에 주어진 분량은 8페이지 정도인 데다 책 크기는 손바닥 두 개를 합친 것만 하다. 앞에서 이야기한 '성평등과 군대' 관련 질문에는 그 질문에 깔려 있는 의도를 이야기하면서, '정말 군대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지는 않다'며 '당신이 군대에 대해 얘기할 준비가 되었다면 그때 말해봅시다'라며 마무리한다. 그러나 그런 저열한 의도가 깔려 있더라도, 여성과 군대 문제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청소년들을 위한 인권 교육 도서 『잠깐! 이게 다 인권 문제라고요?』에서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남성만 징집하는 것이 특정 연령대의 남성만으로도 필요한 군인 수를 채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국방의 의무에는 병역뿐만 아니라 군 작전에 협조하거나 전시 근로 동원에 응하는 의무도 있기에, 군대를 가지 않는다고 해서 국방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징병제가 있는 국가들 중 여성에게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국가는 극히 일부이며, 남성 중심의 현 군 조직에서 병역 의무를 부과했을 때 위계를 이용한 성범죄가 일어날 수 있기에, 여성에게도 군 복무를 부과하기 이전에는 여성이 평등하고 안전하게 군 복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네가 지금 그 질문을 하는 의도를 안다. 네가 제대로 대화할 마음이 나면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고 말하는 대신, 이렇게 납득할 수 있는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래야 서문 마지막에서 저자가 바란 것처럼 '그동안 애써온 독자'가 마음 놓고 잠깐이라도 쉴 수 있지 않겠는가('페미는 ㅇㅇ병'이라는 챕터에서는 두 페이지가 텅 비어 있고 마지막이자 세 번째 페이지에 '모든 질문에 대답할 이유는 없습니다'라는 한 문장만 적혀 있어 당황스러웠다).

질문이 좋아야 답도 좋겠지만 우문현답도 있지 않나. 질문에 담긴 의도를 간파하는 날카로운 감각, 질문의 허점을 찌르는 간결하고 명쾌한 논리, 차별과 편견에 맞서는 사람들과 아직 그것들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 모두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이 책의 장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더 예리하고 구체적인 답이 필요하다. 우문현답이 되기에, 저런 질문을 2만 번도 넘게 들어야 하는 독자들의 무기가 되어주기에 이 책의 답은 얕고 뭉툭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탄핵, 헌법으로 체크하다 - FACT CHECK
JTBC 팩트체커 오대영 기자 외 지음 / 반비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년 전 오늘 대한민국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잘못된 선택을 바로잡은 것은 다행이지만, 국민들 중 누구도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작년 12월 3일부터 우리는 또 다른 탄핵 정국으로 들어섰고, 이제 며칠 뒤면 중대한 결정이 내려진다. 우리가 어떤 길로 가게 될지 아직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역사라는 거울이자 나침반이다.

사회과학 책들은 몇 년만 지나도 새로운 사례와 데이터들이 쌓이면서 시의성을 잃게 되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일종의 역사책이 될 수 있다. 8년 전에 발간된 이 책이 그렇다. 한국이 박근혜 탄핵 정국 속에 있던 당시 대통령 탄핵 심판을 놓고 온갖 거짓 주장들이 난무했고, JTBC 팩트 체크 팀은 헌법이라는 기준으로 그런 주장들이 참인지 거짓인지 검증했다. 그들이 검증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 이 책이다.

대통령은 탄핵 심판 중 사임할 수 있을까? 대통령은 불소추 특권이 있으므로 탄핵 심판의 대상이 될 수 없을까? 청와대도 압수 수색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들을 풀어나갈 열쇠는 헌법이다. 그것이 민주주의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조인이 아닌 일반 국민들에게는 헌법이 어렵고 멀게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팩트 체크 팀도 법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일반 국민들과 같은 눈높이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팩트 체크 팀은 직접 헌법책을 찾아 읽고 수십 명의 헌법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며 탄핵을 둘러싼 온갖 의문들을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그러면서 깨닫게 된다. 헌법은 법조인이나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 누구라도 스스로 공부하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헌법을 자신도, 진실도, 민주주의도 지킬 수 있는 방패로 삼을 수 있다.

이 책에서 팩트 체크한 거짓 주장들 중에는 지금의 탄핵 정국에서도 반복되는 것이 많아 기시감이 느껴진다. 반복되는 역사에 소름이 끼치기도 하고 한탄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선례가 우리에게는 거울이자 나침반이 되어준다. 물론 지금도 JTBC 팩트 체크 팀의 탄핵 관련 팩트 체크는 계속되고 있고 기사로 독자들에게 전달되고 있지만, 지금의 팩트 체크와 이때의 팩트 체크 모두 꼼꼼히 읽어나간다면 우리의 민주주의 역사를 좀 더 폭넓은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지금도 쏟아져 나오고 있는 지금의 탄핵 정국 관련 책들뿐만 아니라, 8년 전에 나온 이 책 또한 지금의 이 정국을 헤치고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 본문의 마지막 문장은 다음과 같다. "분명한 것은, 우리 국민 모두 다시는 '헌나'가 붙는 사건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는 점이다." '헌나'는 헌법재판소의 사건 분류 부호 중 탄핵 심판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저자들도 우리도 8년 뒤에 '헌나'가 붙는 사건이 다시 일어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이때나 지금이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는 사람들과, 헌법이라는 원칙에 의거해 진실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며칠 뒤 우리가 어떤 길에 서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다시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헌나' 사건이 다시는 생기지 않기를 기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안의 나쁜 여자
권오숙 외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다 자신이 당한 성폭력을 폭로한 여성에 관한 책을 발견했다. 그 여성이 세상의 온갖 비난을 견뎌내면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그린 책인 줄 알았는데, 그 여성의 주장이 이러이러한 점에서 논리에 맞지 않으니 거짓임이 분명하다고 단정하는 책이었다. 이 책뿐 아니라 익명의 대중들은 미투 운동에 참여하는 여성들이 먼저 유혹했으면서 남성을 성폭력 가해자로 몰아가는 나쁜 여자라며 2차 가해를 가한다. 이런 '나쁜 여자' 이미지의 역사는 최초의 여성 이브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세계 모든 지역에 뿌리내려 있다. 이 책은 고대의 신화부터 현대의 문화 콘텐츠까지 다양한 매체에 나타난 나쁜 여자들의 모습을 살펴보고, 그러한 나쁜 여자 이미지가 어떻게 탄생하게 됐는지, 어떻게 그 시대의 남성 중심 가치관을 반영하고 있는지 분석한다. 그런 다음 현대의 콘텐츠들 속 나쁜 여자들을 통해 현대의 나쁜 여자들이 어떻게 이런 낡은 여성관의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 책은 고대의 신화부터 현대의 영화, 웹툰까지 종적으로, 한 시대 안의 다양한 상황과 작품을 살펴보며 횡적으로 수천 년에 걸친 나쁜 여자 이미지를 살펴보고 있다. 열한 명의 학자들이 주제 하나씩을 맡아 소논문을 하나씩 썼다. 소논문의 형식이지만 일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청소년들이나 일반 성인 독자들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썼다. 2022년에 출간된 책이라 최근의 작품들도 분석하거나 예시로 들고 있고 최근의 상황도 이야기하고 있어 독자들에게 더 친숙하게 느껴질 것이다(이것은 시간에 따라 약해질 수밖에 없는 장점이지만, 출간된 시점의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고 기록한다고 달리 생각해 봐도 좋을 것이다).

책에 실린 열한 편의 논문을 관통하는 생각은 '나쁜 여자' 이미지에 남성들의 두려움이 투사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직접 낳았기에 자기 자식임이 확실한 여성과 달리, 남성은 여성을 성적으로 통제해야 여성이 낳은 자식이 자기 자신임을 확신할 수 있다. 그렇기에 강한 생식력을 지닌 고대 여신들은 남편을 배신하는 음탕한 악녀로 전락했다. 선한 신의 이름으로 싸워 이겨야 할 구체적인 대상이 있어야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던 기독교 성직자들은 힘없고 약한 여성들을 마녀로 몰아 고문하고 처형했다. 고전 소설에서 가부장제의 근본적인 모순은 해결되지 않은 채 <장화홍련전>의 계모 허씨, <사씨남정기>의 교채란, <심청전>의 뺑덕 어멈처럼 외부에서 들어온 여성들, 가부장제의 규범을 지키지 않은 여성들에게 모든 문제의 책임이 전가된다. 페미니즘 운동이 시작된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나쁜 여자'가 모든 문제의 원인이고 자신들이 누리던 것들을 빼앗아 갈 것이라는 두려움은 계속되고 있고, 그 실체 없는 두려움이 문화 콘텐츠들에도 반영되어 여성들을 억압하고 있다.

이런 두려움이 만들어낸 가부장제의 장벽은 여전히 허물 수 없는 것일까? 이 책의 저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들의 두려움과 욕망을 반영한 납작한 평면이었던 나쁜 여자 캐릭터들이, 자기 서사를 갖게 되고 점차 자기 목소리를 내며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돌파해 가는 데서 희망을 본다. 여전히 가부장제와 남성 중심적 가치관은 공고하고, 최근에 만들어져 더 진전된 여성관을 반영하거나 여성들이 직접 만든 나쁜 여자 캐릭터들도 이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하곤 한다. 가부장제를 일거에 허물 수는 없지만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저자들은 보여준다.

남성뿐 아니라 여성 스스로도 자신과 다른 여성을 검열하고 억압하게 하는 나쁜 여자 이미지를 고찰하고, 그것을 떨쳐냄으로써 남성과 여성 모두의 건전한 판단과 여성 스스로의 긍정적 자아의식을 이끌어 낸다는 취지는 긍정적이다. 그리고 그 취지를 풍부한 예시와 명쾌한 설명, 거침없는 비판이 뒷받침해 준다. 하지만 눈에 잘 띄지 않는 표지 디자인과 화질이 떨어지는 흑백 도판이 아쉽다. 인터넷 서점의 판매 지수나 책 제목으로 검색한 결과를 봐도 일반 독자들에게 그렇게 많이 알려진 책은 아닌 것 같다. 표지 디자인을 좀 더 눈에 띄는 것으로, 흑백 도판을 컬러 도판으로 교체하고 더 홍보하면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이 연구자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에게도 읽히고 우리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으면 한다고 대표 저자가 말했는데, 그 바람대로 더 많은 독자들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잘 봐 놓고 딴소리 - 드라마, 예능, 웹툰으로 갈고닦는 미디어리터러시 생각하는 10대
이승한 지음 / 북트리거 / 202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청소년 도서의 장점은 교과서처럼 쉽고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기억해야 할 점은 딱딱 짚어준다는 것이다. 이 책도 그렇다. 211페이지밖에 안 되는 분량에 판형도 작아, 마음 먹으면 하루 만에 읽을 수 있다. 알록달록한 일러스트가 중간중간에 들어 있어 지루하지 않고, 중요한 단어나 개념은 본문 옆의 작은 글 상자에서 설명해 본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거기에 청소년들에게 이야기하듯이 경어체로 서술하는데, 친근하고 유머 감각이 있는 문체라 더 쉽게 읽힌다. 이 책에서 언급한 콘텐츠 중 본 것은 영화 <검은 사제들>(2015) 하나밖에 없는데도 재미있게 읽었다. 오히려 내가 몰랐던 프로그램이나 이슈들을 알게 돼서 흥미로웠다.


  코로나가 한창 퍼지고 있던 2021년에 출간된 책이라 그때의 상황과 관련된 내용들도 꽤 많다. 드라마처럼 출연자의 표정 연기가 잘 보여야 하는 것도 아닌데, 방역 수칙을 준수한다면서 마스크를 벗고 촬영하는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비판, 재난 주관 방송사인 KBS나 보도 전문 채널 YTN, 연합뉴스 TV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방송사가 음성 언어 발표자의 얼굴만 클로즈업해, 청각장애인의 알 권리를 침해했다는 이야기 등. 출간된 지 3년이 지나고 코로나의 영향력에서도 벗어나고 있는 지금으로서는 시의성이 떨어지지만, 오히려 코로나 유행 시기에 대한 기록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또 다른 팬데믹이 터진다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문제도 있고, 장애인의 알 권리는 언제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이 책에서 청소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들은 성인 독자들 또한 기억하고 명심하면 좋은 것들이다. 미디어에 둘러싸여 살면서 미디어에서 보고 듣는 것으로 세계관과 가치관이 형성되는 것은 성인 독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 강조하는 '미디어 리터러시(미디어 독해 능력)'은 성인 독자들에게도 필요하다. 2020년 개정된 KBS 방송 제작 가이드라인에는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인물의 외모를 평가하지 말아야 하며 이를 조롱, 혐오의 대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이주민의 어눌한 한국어 표현 및 행동을 구경거리로 묘사하지 말아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지만, 이 조항을 지키지 않는 프로그램들이 지금도 종종 보인다. '드라마는 드라마고, 예능은 예능일 뿐이니까 따지지 말고 그냥 재밌게 보자.'는 말을 하지 않고,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것이 미디어 리터러시를 기르는 길이다. 미디어 리터러시를 기르면 당장 미디어의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더라도, 미디어가 세상을 보여주고 표현하는 방식을 스스로 점검하고 반성하고 개선하게 할 수 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시각을 더 넓힐 수 있다. 그러니 저자가 잘 봐 놓고 하는 한소리를 성인 독자들도 귀 기울여 들으면 좋다. 허투루 보지 않고 잘 봤으니 한소리를 할 수 있는 거다. 우리도 대충 보지 않고 한층 더 나아진 미디어 리터러시로 보고 나면 우리만의 한소리를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