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도시 - 뉴욕의 예술가들에게서 찾은 혼자가 된다는 것의 의미
올리비아 랭 지음, 김병화 옮김 / 어크로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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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가 나오기 전 "지금 외롭다면 이건 당신을 위한 책이다"라는 제사題辭가 나를 맞는다. 내가 지금 외로운 건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서문 대신 실린 첫 번째 글 「외로운 도시」에서 "사람은 어디서든 고독할 수 있지만, 도시에서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면서 느끼는 고독에는 특별한 향취가 있다"(p. 13.)고 작가는 말했다. 인구 수백만의 대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교외 지역이라 대도시라기보다는 지방 소도시 같은 느낌이고, 거의 평생을 지낸 곳이라 내겐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혼자 산 적은 한 번도 없고 늘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또 다른 조건으로 봤을 때는 어떨까. "…물리적으로만 고립되어야만 고독해지는 것은 아님을 알게 된다. 오히려 서로 연결되고 가깝고 연대한다는 감각의 부재와 결핍, 즉 어떤 이유에서건 원하는 만큼의 친밀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고독의 여건일 수 있다."(p. 14.) 가족과 함께 살고 사이도 좋은 편이니 친밀감을 전혀 느낄 순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별일이 없으면 내가 가족들보다 수십 년은 더 살 테니 나는 혼자 남겨질 것이고, 내가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공동체는 없으며 사랑하는 사람은 내게 관심이 없다. 무엇보다 내가 일하고 싶은 분야에는 다시 발도 들여놓지 못한 채 가난 속에서 고립된 채 나이만 먹어갈 것이라는 불안감이 크다. 뼈저리게 외로운 건 아니지만 문득 외로움을 느끼거나, 앞으로 견딜 수 없이 외로워질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 점에서는 나를 위한 책까지는 아닐지라도 내가 읽어도 괜찮을 책일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이 내게 맞는지 미리 생각해 봤다. 


  이 책은 영국의 비평가 올리비아 랭이 뉴욕과 그곳의 예술가들, 그들을 둘러싼 고독에 관해 쓴 여덟 편의 에세이를 모은 것이다. 이 에세이들은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겹은 작가 자신이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대도시 뉴욕에서 느끼는 고독을 털어놓는 에세이다. 작가는 남자친구와 함께 살기 위해 무작정 뉴욕으로 왔지만, 남자친구는 이미 변심했다. 영국에서 살던 집은 이미 세를 줬으니 한동안은 뉴욕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뉴욕에 친구나 지인이 한 명도 없지는 않았지만, 사람들과 교류하기보다는 집에 혼자 멍하니 있거나 아무 생각 없이 인터넷 서핑을 하고, 혼자 이리저리 시내를 거니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 같다. 허름하고 주변의 소음과 네온사인에 그대로 노출된 집. 불안정한 경제 상황. 사소한 언어 차이에서 느끼는 이질감. 누군가 자신을 따뜻하게 봐주길 바라지만 관음적인 시선에 노출되는 것은 두려운 마음. 이런 것들이 대도시에서 혼자 살아간다는 감각을 더욱 생생하게 했다. 


  작가가 뉴욕에서 느끼는 고독은 뉴욕의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을 그리는 비평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에워싼 고독에 저항했고, 작가는 그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과 작품 세계로 고독에 대응했는지 들여다 본다. 에드워드 호퍼는 훤히 들여다 보이는 유리창 안에 혼자 있거나 함께 있어도 대화하지 않는 그림 속 인물들을 통해, 고립되어 있으면서 수많은 타인의 시선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고독과 불안을 표현했다. 앤디 워홀은 이주민인 데다 성소수자였고 남들보다 튀는 옷차림과 언행을 하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에게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상처 입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었고 같다는 것은 무시당하거나 거부당할 위험을 방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똑같은 이미지들을 무수히 만들어냈고, 그 이미지들에 둘러싸여 살아갔다. 사진작가 데이비드 워나로위츠는 부모에게 학대당하고 방치된 채로 자랐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성소수자이자 에이즈 환자로서 편견과 억압과 부딪혀야 했다. 워나로위츠는 자신이 먹고살기 위해 몸을 팔거나 성관계를 가질 사람을 찾아 나서던 뉴욕의 거리들에 랭보(19세기 프랑스의 시인) 가면을 쓴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뉴욕의 아르튀르 랭보 Arthur Rimbaud in New York> 연작을 통해, 뉴욕이라는 화려한 도시 이면에 숨겨진 장소들, 배제된 사람들을 드러냈다. 예술 창작뿐만 아니라 정부의 에이즈 환자 처우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하는 등의 사회 활동을 통해, 자신과 같은 소수자들을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사회에 맞섰다. 헨리 다거는 가족과 유일한 친구가 죽은 뒤로는 이웃과도 거의 교류하지 않으면서 50여 년을 골방에서 살았지만, 그가 요양원으로 떠난 뒤 그가 남긴 300점의 그림과 수천 페이지의 회고록, 15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소설의 원고가 골방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평생 고립된 삶을 살면서 거대한 또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냈고, 현실과 자신이 만들어낸 우주를 완전히 구분하지 못했다.


  그들이 힘겹게, 치열하게 고독과 맞서는 모습은 연민과 감동을 자아내지만, 작가는 연민하거나 감동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그들의 고독이 그들 개인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지 않고, 더 큰 사회적 상황이 그들을 더욱 고독으로 몰아갔다고 본다. 이런 성찰이 에세이를 더욱 풍부하게 하는 또 다른 한 겹이다. 1950년대에 아동이 양육자와 안정적인 애착 관계를 형성해야 이후에 감정적, 사회적으로 발달할 수 있다는 애착 이론이 개발되기 이전, 애정 표현은 아이를 망칠 수 있다는 믿음이 지배적이었다. 헨리 다거의 유년기도 그런 믿음이 지배적인 시대에 속했다. 그는 가정에서도, 보호소에서도 충분한 애정을 받지 못한 채 자라났고, 성인이 되어서도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갔다. 에이즈의 원인과 치료법이 밝혀지기 전까지 에이즈 환자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가족에게 거부당했으며, 의료진조차 치료를 거부했고 장의사들은 시신을 매장해 주지 않았다. 보수적인 정치인들은 에이즈의 원인을 성소수자들의 '부도덕한' 성행위 탓으로 돌리고 정책 결정권자들은 에이즈 환자들에게 필요한 교육과 자금원을 고의로 차단했다. 많은 성소수자 예술가들이 걸어 다니는 병균 덩어리인 양 취급받고 쓸쓸히 죽어갔다. 데이비드 워나로위츠는 병든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사회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분개했고, 사회 운동 단체 '액트 업Act Up'에 가입해 에이즈 환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데 힘썼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고독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서의 낙인과 배제가 낳은 결과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이런 낙인과 배제에 저항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세 겹의 층은 지층처럼 뚜렷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섞이며 글을 더욱 깊고 풍부하게 만든다. 그 모든 층에 녹아 있는 것이 뉴욕이라는 도시 자체다. 뉴욕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나는 구글 지도 중 뉴욕 시의 지도를 모니터에 띄워 놓고 책을 읽었다. 구체적인 지명이 나올 때마다 검색을 했고, 그곳을 클릭하면 화면 왼쪽에 그 장소의 사진과 그 장소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나왔다. 그 사진과 설명으로 그곳이 어떤 곳인지 짐작했다. 책 속에서 작가와 뉴욕의 예술가들이 머물거나 방문했거나 활동했던 장소들은 생각보다 서로 가까이 모여 있었다. 그들을 따라 뉴욕 시내 곳곳을 걸어 다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작가는 고독에 관한 이 책을 쓰면서 오히려 놀랄 만큼 많은 관계를 맺었다고 했는데, 나는 고립을 이야기하는 이 책을 통해 오히려 저 멀리 있는 뉴욕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게 됐다. 


  뉴욕이라는 공간 자체뿐만 아니라 그 안에서 고독과 마주하며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과 예술 세계를 더 깊이 들여다 보고 나왔다. 이들은 자신의 삶에서 고독을 완전히 제거하거나 고독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는 대신, 고독을 자신의 삶과 예술 세계의 일부이자 원동력으로 끌어안았다. 작가는 고독이 고쳐야 할 문제점이나 누구를 만나서 치유되어야 할 병이라기보다 자신을 친구로 여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 낙인과 배제라는 더 큰 힘이 낳은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이 책 속의 예술가들은 고독 속에서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 보고 고독에 대응하는 예술 세계를 만들어내거나, 자신을 더 고독하게 만드는 사회의 낙인과 배제에 맞서고 서로 유대했다. 누구나 고독을 훌륭한 예술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고독을 끌어안거나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고독과 고통에 관심을 가지고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이다. 외로운 사람들을 더 외롭게 만드는 세상에 저항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독에 대한 이런 성찰과 행동이 세상을 더 다정하게 만들 것이다. 세상이 더 다정해진다면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언젠가 떠난다 해도 나는 덜 외롭고 더 따뜻한 마음으로 살 수 있지 않을까.


P. S. 1. 원문을 읽어 보지 못했지만 번역본만 봤을 때도 세밀한 감정의 결까지 살아 있는 훌륭한 번역이었다. 번역자 후기는 단순한 번역 후기가 아니라 이 책을 온전히, 깊이 이해하고 쓴 좋은 서평이다. 


P. S. 2. 텍스트 자체는 뛰어나지만 본문에서 이야기하는 작품들 중 책에 실린 도판은 몇 점밖에 안 되는 것이 아쉽다. 작가가 작품 각각을 섬세하게 묘사하고 창의적으로 해석하지만, 독자 자신이 작품을 직접 보고 각자의 감상과 해석을 내놓는 것도 중요하다. 저작권이 아직 안 풀린 현대 미술 작품들이라 저작권료 부담이 있었을 것이고 원서 자체에 도판이 많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욕심을 내서 도판을 더 찾아 넣었다면 좋았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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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07 23: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바스티안 2021-07-08 00:18   좋아요 1 | URL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