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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한국의 첫개항지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항구입니다. 중국 산동(山東), 요동(遼東)지방과 배편으로 지척인 곳입니다. 중국 산동성 출신 화교(華僑)들이 인천에 정착한 건 그래서 우연으로 볼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천과 인연이 있는데다 중국음식 , 특히 짬뽕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인천에 정착한 화교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해외에서는 휘황찬란한 차이나타운을 많이 보았는데 상대적으로 인천역 앞에 자리한 현재의 인천 차이나타운은 그리 큰 곳은 아닙니다.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나 미국 뉴욕만해도 엄청난 차이나타운이 있는데 인천은 정말 소소합니다.
이는 제가 알기로 1960-70년대 이땅에 사는 중국인들에게 가해진 차별과 멸시때문에 이렇게 적은 수의 중국인들만이 이땅에 살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별도이니 더이상 언급은 하지 않습니다.


중국인들이 한국땅에 본격적으로 정착해 살기 시작한 건 사실상 1876년 강화도 조약이후 인천항을 개항(開港)한 이후부터입니다.

개항이후 청국조계지(淸國租界地)가 인천에 들어섰고 그 이후 인천에 뿌리내린 화교들은 이후 150년이 넘는 오랜 시간을 인천을 터전으로 살고 있습니다.

구한말 고종때 체결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1882)이후 중국인들의 본격적인 경제활동이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청조의 멸망이후 중국 대륙이 국공내전과 군벌(軍閥)들 사이의 권력투쟁과 내전의 양상을 띄는 혼란이 일어나는 무정부상태가 계속되는데다 이후 일본의 중국침략까지 더해져 혼란이 가중되면서 한국땅에 정착한 화교들도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게 됩니다.

처음 중국산 면포와 비단등을 거의 독점적으로 거래하던 화상(華商)들은 조선 땅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조선총독부와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사업을 그들 손에 맡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산 면포 등에 대해 일본산 직물들이 싼값에 거래되기 시작하고 총독부에서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올리자 갑자기 사업에 큰 타격을 받게됩니다.

이렇게 총독부의 규제를 받아오다 최악의 상황은 중국과 일본간의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적국의 나라에서 버틸 수 없던 많은 중국인들이 조선을 떠나 귀국했고 화상들의 사업은 쇠락하기 시작합니다.

해방후 미군정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한국과 중국과의 교역을 확대합니다. 패전국 일본과의 교역은 군정 당국이 막아서 일시적으로 인천화상들은 호황을 잠시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내전이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쫓겨가게 되자 이후 동아시아 지역을 둘러싼 냉전(Cold War)의 영향으로 공산국 중국과 민주주의 국가 한국간의 교역은 중단되고 인천 화상들의 대 중국 교역도 타격이 불가피하게 됩니다.

이후 들어선 한국의 군사정부는 중국과의 거래를 불허하기 시작하는 것을 시작으로 중국인들을 차별하는 정책을 취하게 됩니다. 한국인에 비해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은 한국정부의 차별과 함께 경제적 불이익을 보게 되고 이동과 작업선택의 자유마저 박탈당하게 되자 많은 중국인들은 중국집을 하게 됩니다.

초기 화교들은 포목상이나 잡화점 등 장사를 주로 많이 했지만 이들 업종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기점으로 쇠퇴하게 되자 음식점 등 다른 업종에 대한 비중이 많이 커진 것으로 압니다.


근대이후 한국땅에는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살았고 그들만의 기억과 흔적을 남겼습니다.

본의 아니게 외국인들과 같이 섞여 살게 된 역사가 벌써 100년이 넘어간다는 말이지요.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경험과 기억을 되살려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삶을 연구한 책도 이전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 (선인,2016)

심층 인터뷰를 통한 인류학적 접근을 했던 위의 책과 달리 이 책은 인천화교들의 경제적 활동과 그들의 사회조직에 대한 연구입니다.
인천화교협회의 사료를 통한 경제사회사 연구죠. 인천대학교에서 지역의 역사에 대해 이런 연구를 진행하는 건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생각합니다.
인천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화교들의 과거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인천의 중국음식을 이야기한다면 짜장면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 보았던 책 한권을 소개합니다.

짜장면뎐( 프로네시스,2009)

오래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어릴 적 부모님이 사주시던 짜장면을 먹은 기억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회상에 잠길만한 내용을 처음으로 문화사적으로 풀어낸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천 구도심에 가게되면 저는 근처의 유명한 화상 중국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습니다. 기본 50년 이상된 곳들도 많고 짜장면의 경우 발상지가 인천이라 가면 먹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에 대해 잘 모르지만 우려스러운 요새의 중국관련 뉴스와 담론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좋던 싫던 중국인들이이땅에 들어와 산지 150년이 넘어가고 있고 특히 인천의 경우 작지만 아직도 중국화교와 화교들이 제공하는 특유의 중식에 대한 역사가 있습니다. 화상 중국집을 이야기하면 인천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미 인천 문화의 일부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중국의 경제력과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다 보니 이 상황에 긴장한 일본과 미국 등 해양세력들과 서구 유럽에서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치 서구의 자유주의(liberalism)와 민주주의(democracy)만이 유일한 정의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두 길어봐야 18세기 이후 나온 개념과 체제입니다. 그것도 유럽의 백인 남성들애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민주주의 종주국이라는 미국에서도 여성이 참정권을 가진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1860년대까지도 미국은 백인과 흑인들이 다른 화장실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수많은 흑인들이 백인 경찰들이 쏜 총에 맞아 죽습니다. 조강하다가 죽은 사례도 있고 황당한 사례가 많습니다.

소위 유럽의 근대 이전 동서양은 모두 절대주의 전제왕정 체제였습니다.

그 기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민주주의체제도 변질되어 정말 국민의 의사가 정치에 반영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인데 덮어놓고 민주주의만이 옳은 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한국만 봐도 20대 국회의 약 40%의 의원들이 법조인 출신이라고 한 글을 보았습니다.
한국인들의 40%가 법조인인가요? 법조인이 국회를 과다점 유(over represented)하고 있고 목소리를 내야할 여성과 청년 그리고 농민들은 국회에 목소리를 전혀 내지 못합니다. 즉, 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다양성이 사라지고 50-60대 남자 국회의원이며 법조인출신 일색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체제보다 우위에 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이상황은 차라리 대의제 만주주의를 악용하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

소수의 고위 공산당원들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중국과 차이가 뭐죠? 두 국가 모두 소위 엘리트 집단들이 정치과정을 이끌어갑니다.

따라서 그 정치체제를 부르는 명칭보다 중요한 건 정말 정치과정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는가를 보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요새 서구의 지식인 층에서 나오는 중국 혐오 발언은 과한 면이 많습니다. 다분히. 인종적이기까지 합니다.

여기 따라하기 좋아하는 한국의 여론주도층도 본인이 미국과 유럽에 사는 것마냥 중국에 대한 혐오발언을 쏟아냅니다.

역사적으로 미국보다 중국과의 역사가 훨씬 길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공이던 전쟁이던 외교 등 무엇이던간에 한국은 중국과 더 오해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관계가 끊어진 건 냉전으로 인한 몇십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고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한국은 그 지정학적 위치 상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합니다. 숙명입니다. 방법이 없어요.

미국이 중국에 적대한다고 덩달아 적대하는 실수를 범하면 안됩니다. 자살골이죠.

오히려 미국과 일본을 분리해서 대응하고 일본과의 마찰은 미국과 해결해야 합니다.

인천의 화상들은 100년 이상 한국에 살아온 이웃이란 생각도 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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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기(征虎記)라는 책제목은 그대로 ‘호랑이를 정복한 기록’, 내지는 ‘호랑이를 잡은 기록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책은 1917년 11월부터 12월까지 일본의 기업가인 야마모토 다다사부로 (山本唯三郞,1878-1927)가 조선의 함경도와 전라도에서 한국 호랑이와 표범, 노루, 멧돼지, 기러기 등을 사냥한 기록입니다.

일제는 1917년 당시 해수구제(害獸驅除), 즉 ‘사람의 인명과 재산에 피해를 입히는 맹수를 퇴치한다’는 명목으로 행한 정책으로 이책의 저자들은 일제의 과도한 맹수사냥이 결국 한국 호랑이와 표범 등의 멸절을 가져왔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함경도의 북청 (北靑)지역과 같은 오지 산골마늘애는 밤에 호랑이와 표범이 자주 나타났다고 하나 일제의 과도한 남획으로 이미 1917년 사냥을 한 기록에도 백두산 등지에서 호랑이를 더이상 보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일제는 한국 호랑이와 표범 등 맹수들을 멸절시켰을 뿐 아니라 독도의 강치도 남획으로 멸절시켰습니다. 이는 해수구제의 명분보다 모피와 기름을 얻으려는 경제적 목적이 더 강했습니다.

주강현 교수님의 ‘독도강치 멸종사(서해문집,2016)’을 보시면 일제가 얼마나 주도면밀하개 강치를 남획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의 시마네현(島根県)에서 독도를 자신들의 영토라고 우기는 주장을 하는 역사적 이유도 일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40대 일본인 기업가는 조선의 유명한 호랑이 사냥꾼인 백운학과 강용근을 고용하고 사냥에 나섰습니다.

사냥부대에 합류한 일본인 사냥꾼 기쿠타니 리키조(菊谷力藏)는 함경남도 영흥에 살고 있는 일본인으로 1917년의 이 사냥 이전에 이미 1년에 호랑이를 다섯 마리, 표범을 두 마리씩 잡았다고 언급(p174) 된 것으로 보아 일본인들의 맹수 남획이 극도로 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울대 수의과 대학 이항 교수팀애서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했는데, 이 책은 사실상 한국 호랑이에 대해 알 수 있는 근대적 사료라는 점에서 그 번역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사냥 기록의 번역과 기록 사진, 그리고 사료에 대한 해제(解題)가 앞부분에 붙어 있어 전반적인 자료 이해에 도움을 줍니다.

현재 이 때 잡은 한국 호랑이의 표본은 일본 쿄토의 도시샤( 同志社) 고등학교 표본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시인 윤동주가 수학한 곳으로 유명한 이곳에 한국 호랑이의 표본이 있다니!

19세기 영국이 새계각국을 조사하고 해도를 작성하면서 자연생태를 관찰하고 표본을 수집했듯이 일본도 새로 식민지가 된 조선땅과 연해주, 만주 지방을 샅샅이 조사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국의 찰스 다윈( Charles Darwin,1809-1882)이 1832년 비이글호 ( H.M.S. Beagle)를 타고 갈라파고스 섬을 탐험한 것이고, 미국도 비슷한 시기 남극 대륙 연안과 지금의 캘리포니아쪽 태평양 연안을 탐사하고 생물 표본을 만들고 해도를 만들었습니다. 스미소니언 박물관 (The Smithsonian Institution )이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죠 (Nathaniel Philbrick, Sea of Glory,Penguin,2004)

일제는 서양이 행한 모든 것을 식민지인 조선에서 행했다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책의 주인공인 기업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는 이 사냥이 끝나고 호기롭게 일본의 고관들을 초대해 경성의 조선호텔과 도쿄의 제국호텔에서 호랑이 고기 만찬회까지 열었습니다.

그리고 1918년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경기가 내리막을 걷다가 대공황을 맞이하게 되자 그가 조선에서 벌이던 탄광사업과 선박업이 직격탄을 맞았고 연회가 열린 후 10년만인 1927년 사망하게 됩니다.

오만해 보이기까지도 한 호랑이 고기 시식회나 그가 사냥에서 남긴 의기양양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다소 어이없는 몰락입니다.

끝으로 이책에 실린 귀한 사진 몇 장 같이 올립니다.
한반도에 호랑이 살았었다는 귀중한 기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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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확의 증언 - 아버지가 말하고 아들이 기록한 현대사의 결정적 순간들
신철식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7년 9월
평점 :
품절


1980년대까지 한국의 대표적인 경제관료였던 신현확 전 국무총리의 삶을 통해 바라본 한국현대경제사이자 평전입니다.

시각으로 보자면 지극히 보수적이며 우파적 시각을 대변하는 책입니다.

현재 야당 측에서 주장하는 극단적인 신자유주의 (neoliberalism)적 시각보다는 온건한 편의 자유주의적 시각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1970년대 박정희 정부 시절 보건사회부 장관으로 최초로 의료보험 재도를 도입한 ‘안정론자’라는 점은 이분을 단순한 개발시대의 경제관료로만 볼 수 없게 만듭니다. 다만 보편적 복지의 관점이 아닌 ‘시혜적 복지’라는 점이 한계입니다.

가부장적이고 전체주의적 계획경제를 실행하던 박정희 정부가 복지에 재원을 투입하지 않으려 했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일반적인 국가주도 경제와 다르게 자원을 기업가들에게 너무 편중적으로 몰아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신현확 전 총리는 기본적으로 이승만 대통령 밑에서 경제’부흥’계획을 입안했던 분이고 박정희 대통령 밑에서 경제기획원 장관 및 부총리를 지내고 10.26 이전까지 국무총리를 지내신 분이기 때문에 이승만, 박정희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보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5.16을 ‘군사쿠데타’가 아닌 ‘군사혁명’으로 바라보고 긍정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지점입니다.


분명히 문민정권이 군부에 의해 유린된 쿠데타입니다.


경성제대 법학과 출신에 일제 말기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한 엘리트 출신으로서, 다분히 전근대적 가부장적 사고를 가지고 사신분이고 남존여비 의식이 뚜렷하신 분이었고 일중독자 (workaholic) 로 사신 분이기도 합니다.

2021년 기준으로 본다면 결코 민주적이고 가정적인 분이라고 볼 수 없는 분입니다.

이분이 남들과 다른 삶을 산 건 어무것도 없는 식민지의 벽촌에서 태어나 일제 패망과 한국전쟁이라는 미증유의 ‘비정상적’ 상황에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무것도 없으니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역설이 성립되는 시기를 사셔서 가능한 업적이기도 합니다.

불안정하고 아무런 사회적 기반시설이 없으니 무엇이든 열심히 만들고 세우고 개발하는 ‘경제성장’이 가능한 것이고 이런 상황이 연간 10%이상 고도성장과 40%에 육박하는 하이퍼인플레이션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박정희 정부시절의 경제성장이 꼭 그렇게 과격허게 성급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었는지 회의적인 입장입니다.

서구사회가 200년 가까이 진행시킨 경제발전을 담 한 세대만에 이룩한 건 그냥 봐도 피와 살을 갈아넣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경제가 성급할만큼 급속성장한 반면 대일관계나 대미관계를 한치의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사실상 종속에 가까운 관계를 만들어 온 것도 한국의 엘리트 관료들이 비판받을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전쟁으로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이양한 이후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시 작전권이라는 주권이 반환되지 못한 것은 국방부 고위 장성들과 관료들의 책임입니다.

대체 70년간 뭐 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도 이승만 정부 시절 경제부흥계획을 만들던 신현확씨도 집에도 못가고 일주일씩 밤샘해서 계획을 만들었다는 에피소드가 자랑스럽게 등장하고 책의 저자인 신철식 전 차관도 경제기획원에서 일하면서 월화수목금금금 일한 일화를 자연스럽게 꺼냅니다.

열심히 일한 건 알겠는데 별로 자랑스러운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미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활을 이렇게 ‘전투적’으로 보낸 분들이라 마찬가지로 전투적 삶을 살았던 박정희씨의 삶이 긍정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런 예외적인 상황을 계속 보통인 것처럼 생각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예외는 예외일 뿐입니다.

책 내용은 읽어보면 아실 내용이니 언급할 필요가 없고 책의 톤과 형식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첫째, 평전의 형식이 심각하게 결여되었습니다. 우선 어떤자료가 어떻게 인용되었는지 전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저자가 이책에 쓰인 글이 사실이라고 서문에서 ‘강변’하고 있지만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부흥부 장관, 보건사회부 장관, 경제기획원 장관, 국무총리를 지냈으면 정부 공문서나 각종 언론기사 자료가 차고 넘칠만큼 많을텐데 전혀 인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미스테리하기까지 합니다.

영미권애서 전기나 회고록 또는 역사서를 저술할 때 이런 식으로 인용을 누락하는 경우는 본 적이 없습니다.

경제개발기 한국 경제정책에 큰 기여를 했다고 자화자찬을 할 게 아니라 이분이 실제 이룩한 기록을 보여 주어야 납득이 갈 것입니다.

두번째, 이분의 친일전력에 관한 언급입니다. 친일인명사전에 포함되었다가 제외된 일화를 수록하셨는데, 1950년 당시부터 한국 최상위 계층에서 과외를 받고 자라 아버지처럼 엘리트 집단인 경제기획원에서 일을 했던 저자입장과 일반 국민들의 시각은 분명히 다를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일제시대를 살아오신 분들 중 일본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들이 상당히 적었다는 연구결과를 본 기억이 있는데 일본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었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일본 정치인과 교류를 수십년 간 해왔는데 이 일본 정치인들 중 기시 노부스케 (岸信介), 후쿠다 다케오 (福田赳夫 ) 등 전후 일본 정계의 거물이며 일본 제국주의를 지지해온 극우 정치인들과 교류했다는 사실을 일반 국민들이 선선히 납득할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엄연히 2차 세계대전 전범 출신들인데도 이들과 교류하고 일본어로 1980년대까지도 나라일을 의논 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박근혜 정부당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합의하기 위해 일본 정계 막후 실력자가 청와대에 은밀히 드나들며 소위 ‘정계 원로’들과 일본어로 소통하고 사법부에서 본인들 영역을 넘어 한일 외교에 간섭하고 삼권분립을 위반하고 행정부 수반에게 사법부 수반이 충성을 하는 ‘사법농단’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당시 일본어가 가능한 정계원로들이 얼마나 공화주의 원리에 무신경하고 전근대적인 인물들인지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학적 측면에서 이 책이 주장하는 주제 중 가장 유의를 해야 할 점은 이승만 정부의 ‘경제부흥계획’에 대한 점입니다.

아무런 인용이 없이 신현확씨가 주도해서 경제부흥계획을 작성했다고 주장하는데 국가경제계획이 4.19이전에 존재했다면 국가기록으로 존재한다는 점이 증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하나 한국 경제개발계획의 기원이 1960년대 ‘사상계’그룹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이 기안 작성되고 5.16이전 민주당 정부에서 시행하려 하다가 5.16 군사쿠데타로 이 계획이 그대로 제1차 경제개발계획으로 계승되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즉 극우 정치권이 주장하듯 경제개발계획이 박정희 정부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주장입니디.

신현확씨의 주장은 사상계 지식인들의 경제개발계획 기안 주장과 상충되는 지점이 존재하는 보기에 따라 상당히 ‘정치적’인 주장입니다.

책에 따르면, 신현확씨가 노태우 대통령을 조언해 3당합당울 막후에서 조율해서 현재 제1야당의 전신인 민주자유당 출범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의 사상계 발 경제개발계획 기원 주장을 무력화시킬 수도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입니다.

끝으로 제가 읽은 몇 몇 평전 내지 회고록을 보면 저자들의 ‘자화자찬’이 너무 과합니다. 읽기 싫어집니다. 훌륭한 경험을 자신들이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에 할애하면 도대체 그걸 읽고 무엇을 배우나요?
이런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자화자찬으로 일관하는 회고록 나지 자서전은 혐오를 일으킬 뿐 이 분야를 좋아하는 소수의 독자들을 더 멀어지게 할 뿐입니다.

자서전이나 평전은 영미권에서 하나의 논픽션 장르를
이루고 있고 역사서를 보완하는 훌륭한 2차 사료로 가능하기도 합니다.

한국에 자서전 평전 회고록 쟝르가 발전할 수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 저자들의 ‘자화자찬’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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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대에서 연구를 하셨던 손정목 교수님은 한국의 도시화과정에 대한 역사에 있어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시는 분입니다.

특히 1970년대 강남 개발 과정에 서울시 도시계획 담당 공무원으로 재직하신 바가 있어 정책담당자의 입장에서 직접 경험하거나 일선에서 들은 당시 서울의 도시계획과 국토개발계획의 과정을 직접 설명하셨기 때문에 그 가치가 큽니다.

상당한 수의 서울의 도시계획 혹은 건축관련서들, 도시사회학 관련서 등에서 저자의 책들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저자의 ‘서울도시계획 이야기1-5(한울,2003)’는 서울의 도시공간, 서울의 도시경관 발달사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읽어야할 필독서로 자리잡았습니다. 저 역시 시간이 나면 한번 일독할 예정입니다.

지금 소개하는 책은 2005년 초판이 나왔으니 그 내용이 1945년 해방이후 미군정시기를 거치고 한국전쟁을 거친 후 전쟁복구부터 시작해 1960-1970년대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현재 서울의 경관을 이루고 있는 건물들과 도로, 특히 경부고속도로와 영동지역 개발 계획, 그리고 양화대교와 한남대교가 놓이게 된 과정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광화문 거리에서 전차가 없어지게 된 경위가 1960년대 미국 대통령 방한행사 퍼레이드 때문에 먼저 없앴다고 하는 대목에서는기분이 착잡하기까지 합니다.

1950-60년대 위정자들은 목표를 놓고 달성하는데만 열을 올렸지 국민에 대한 배려따위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리고 선진국이 되는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으며 거의 종교적으로 이 목표를 추구했습니다.
정작 국민들의 삶에 대해 전혀 의견을 구하지 않고 국민을 통치의 대상으로 바라봤다는 점에서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나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대통령이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근대화를 추구한다고 했지만 당시 고위 관료들이나 대통령 모두 전근대적인 가부장적 봉건사회를 산탓에 매우 전근대적 지도자였습니다.


마지막의 두 장은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이야기와 구한말부터 1990년대 말까지의 한국의 자동차산업 발달사가 상세하게 설명되고 있습니다.

백제의 고도 공주에서 1970년대 진행된 무령왕릉 발굴은 고고학적으로 세계적 대발견인 동시에 최악의 졸속발굴이기도 했습니다. 고고학 발굴을 단 하룻밤만에 졸속으로 끝냈다는 에피소드애서는 헛웃음만 나옵니다. 고고학 발굴이 무슨 촌각을 다투는 군사작전인것처럼 향한 것 자체가 후진적입니다.

1970년 당시는 정말 너무 많은 군인들이 정치에 참여해 국정을 몰상식하게 운영했다고 생각합니다.


도시사와 도시계획과 관련된 설명이니 도로확장이나 수송수단과 관련된 논의는 피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많이 읽는 책이니 가볍게 읽어보길 권합니다.

서문에 따르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잡지에 연재되었던 글들을 모아놓은 것이어서 중복되는 내용도 있지만 자주 인용되는 글들이고 재미가 상당합니다.

끝으로 손정목 교수님이 다른 매체에서 인터뷰하신 글을 보면 소개한 ‘서울도시계획 이야기’ 를 별로 달가와허시지 않는 걸 보실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분이 일제시대 도시발달사가 전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30여년 정도 밖에 안된 이분의 일제시대 도시발달사 관련 책들을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1990년대 중반에 출판된 책인데 구할 수가 없다니 황당합니다.

다시 출판되기를 바라는 책으로

일제강점기 도시계획연구(1990)
일제강점기 도시화과정 연구(1996)
일제강점기 도시사회상 연구 (1996)

등입니다.

영미권의 책들 중 출판된지 60년 이상 된 책들도 절판되지 않고 나오는 현실을 생각하면 한국의 출판계, 특히 학술출판계는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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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상명대 교수이신 조관희 작가의 책으로 이미 2013년 출판되었던 ‘ 조관희 교수의 중국현대사 강의’의 개정판입니다.

2019년 출간된 책이니 6년만에 개정되어 다시 책이 출간된 것이죠. 책은 총 6장 440쪽의 본문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참고문헌 목록은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다. 편집상의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이 특이한 점은 중국현대사에 관한 책인데도 중국 측 사료의 인용이 거의 전무하고 한국애서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역 30여년전 번역출간된 중국현대사 번역서의 인용이 많다는 점입니다.

중국 특히 과거 중공이라고 불리던 시기 중국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고 이 자료를 보는 것이 터부시 되었던 1980년대라면 이해가 되지만 2021년 현재나 책이 출간된 2019년 그리고 처음 책이 출간된 2013년으로 시간을 되돌려도 이렇게 오래된 자료를 인용하는 것이 맞는지 의심이 됩니다.

이책에 인용된 몇권의 중국현대사 저서를 일부 소개합니다. 모두 일본 내지 미국의 학자들의 저술입니다.

1. 조너선 D 스펜스, 김희교 옮김 ,현대중국을 첯아서1 (이산,1998)

2. 에드거 스노, 신복룡 옮김, 모택동 자전 ( 평민사,2001)

3. S. 슈람, 김동식 옮김, 마오쩌뚱 (두레,1979)

4. 히메다미츠요시 외, 중국근현대사 ( 일월서각,1985)

5. 장 세노 외, 신영준 옮김, 중국 현대사 1911-1949 ( 까치,1982)


이외에도 몇권 더 있지만 알라딘에서 등록이 되지 않은 오래된 저작이 있습니다.


번역서로만 한정해도 수많은 중국 근현대사 관련 서적이 2010년대 이후 출간되었을텐데 최신 연구성과를 책에 반영하지 않는 건 좀 안타깝습니다.

초고가 2010년 경 작성되었다고 해도 1980년대 출판된 저작들에 주로 인용된 사실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책을 읽게된 동기는 최근에 읽은 한권의 중국현대사 책 덕분이었습니다.

연세대 백영서 교수님의 최신작인 ‘중국현대사를 만든 세가지 사건( 창비,2021)’ 을 읽고 중국현대사를 너무 모른다는 자각과 함께 이 책에서 강조한 ‘신해혁명, 1949년 신중국의 성립, 그리고 1989년 천안문 사건 ‘의 간극을 좀 더 메우고 싶었습니다.

이미 백영서 교수님의 책이 중국현대사 전반에 대해 알고 있다는 가정하에 상당히 저세하게 사건의 내막과 영향을 설명하고 있어 관련 지식이 전무한 저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 개론서 격인 이 책입니다.

오래된 번역서 위주의 인용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신해혁명이후 권력공백 상태에서 군벌세력이 등장하고 국민당과 공산당 정권이 어떻게 성립되어 변천되어 왔는지, 그리고 동북의 만주지역에 세워졌던 일제의 괴뢰국 만주국과의 관계와 갈등, 일제의 중국 침략으로 발생한 중일전쟁과 국민당 정권의 수도였던 난징에서 일제의 대학살극, 그리고 마오쩌뚱의 등장, 대장정, 일제에 대항하기 위한 2번의 국공합작, 일제와의 전쟁이후 중국대륙을 차지하기 위한 국공내전,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이후 바로 발생한 한국전쟁과 1960년대 말 일어난 문화대혁명, 이후 덩샤오핑의 등장과 개혁개방 정책과 1989년 천안문 사건까지 모두 아우릅니다.

본문 쪽수가 440쪽에 이르지만 중일전쟁이나 중국내의 군벌간의 다툼, 국공합작, 중국과 미국간의 국교정상화, 문화대혁명 등은 각기 별도의 단행본이 필요한 내용입니다. 개론인 관계로 너무 간략하게 축약되어 설명되아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현대사의 전체적 흐름을 아는데 부족함은 없는 책으로 보입니다. 처음 중국현대사를 접하는 이들에게 권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은 후 워에서 언급한 각각의 사건에 대한 연구서를 읽으면 될 듯 합니다.


한국의 대외관계는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 러시아가 항상 같이 고려되어야 할 상수입니다.

미국과 한국이 전략적 동반관계라고 해서 위에서 언급한 국가들과의 관계가 소홀히 취급되거나 적대적으로 취급되는 실수를 범하는 것은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이들나라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지정학적으로 이 나라들과 균형을 맞춰야만 하는 운명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어떻게 병합했는지 그과정을 복기하면 이유가 확실해집니다.

일본은 조선을 병합하기 위해 두번 전쟁을 치룹니다.

첫번째가 조선을 속국으로 여기고 영향력을 행사하려던 청나라와의 청일전쟁입니다.

청일전쟁이후 조선은 힘을 의탁할 강대국을 찿게 되고 울미사변이후 아관파천과 함께 러시아가 그 대상이 됩니다.

국방력이 형편없던 조선은 러시아의 무력에 독립과 안보를 의존하게 되고 청을 물리친 일본은 러시아가 연해주와 한반도에 미치는 영향력을 어떻게 제거할지 고심합니다.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러시아와 마침내 전쟁을 하게 됩니다.
러일전쟁입니다.

이 두 전쟁이후 청과 러시아의 영향력을 제거한 이후 일본은 조선병합을 진행합니다. 병합이후 일본인들을 한반도와 만주 그리고 중국본토로 서서히 이주시키고 이후 조선을 병참기지로 삼고 만주지역에 만주국을 세운 후 본격적으로 중국을 침략합니다.

일본 입장에서는 청조 멸망 후 국민당과 공산당으로 남북으로 갈려있는 중국대륙에 군벌들까지 자신들 세력권 안에서 독자적으로 행동했으니 중국이 권력 진공상태라고 여길 여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일어난 전쟁이 중일전쟁입니다.
임진왜란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일본의 중국대륙 침략여욕이 1930년대 마침내 현실이 된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1930년대 만주국의 관동군 일부 장교는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일본 본토의 군부 중앙의 지시를 받지않고 무단으로 사변을 일으켰다는 겁니다. 추후 일본 군부는 이들의 이런 무단적 무력사용을 추후 승인했다는 점입니다. 일제 당시 군인들의 호전성과 막무가내는 군의 지휘체계조차 우습게 볼만큼 몰상식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난징에서 중국인들을 무차별 학살한 것도 아들의 무모함과 호전성과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일본의 전쟁범죄는 공산권과의 대결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지켜야 하는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자 패전국인 일본과 그 식민지였던 조선을 공산주의 중국과 러시아의방어선으로 삼으면서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일본과 한국을 병참기지로 만들면서 단죄를 거치지 않은 체 수면아래로 잠복합니다.

미국은 원래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을 지원하면서 당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을 중국 본토에서 막으려고 했으나 마오쩌뚱이 중국을 접수하고 공산주의 중국을 세우자 한반도 남쪽까지 공산주의 봉쇄선이 밀린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부 소위 보수쪽애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미국은 20세기 초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던 초기 소련과 공산정권 수립이전 중국의 공산당과도 활발한 교류를 했습니다.

이외로 장제스의 국민당 정권의 무능과 부패를 혐오하고 국민당을 지원하면서도 내심 달가와허지 않은 면이 있었습니다.

군인이었기 때문에 장제스라는 인물 자체가 민주적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한국의 몇몇 골수 보수 또는 극우세력이나 그에 동조하는 이들이 무조건 중국을 무시하고 친미일변도로 기우는 것은 첫번째로 무식의 소치이고 두번째로 한국의 안보를 불안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한국은 절대 중국을 무시할 수 없는 상대인데 철이 없는건지 생각이 없는건지 중국을 무시하는 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중국은 우리의 중요한 외교 파트너이고 이들을 어떻게 상대하느냐에 따라 한국의 국익이 결정됩니다.
그리고 그 첫번째가 바로 상대를 알아야 하는 것이죠.
중국에 대해 아는 건 따라서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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