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한국의 첫개항지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항구입니다. 중국 산동(山東), 요동(遼東)지방과 배편으로 지척인 곳입니다. 중국 산동성 출신 화교(華僑)들이 인천에 정착한 건 그래서 우연으로 볼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인천과 인연이 있는데다 중국음식 , 특히 짬뽕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인천에 정착한 화교들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해외에서는 휘황찬란한 차이나타운을 많이 보았는데 상대적으로 인천역 앞에 자리한 현재의 인천 차이나타운은 그리 큰 곳은 아닙니다.
일본의 나가사키(長崎)나 미국 뉴욕만해도 엄청난 차이나타운이 있는데 인천은 정말 소소합니다.
이는 제가 알기로 1960-70년대 이땅에 사는 중국인들에게 가해진 차별과 멸시때문에 이렇게 적은 수의 중국인들만이 이땅에 살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별도이니 더이상 언급은 하지 않습니다.
중국인들이 한국땅에 본격적으로 정착해 살기 시작한 건 사실상 1876년 강화도 조약이후 인천항을 개항(開港)한 이후부터입니다.
개항이후 청국조계지(淸國租界地)가 인천에 들어섰고 그 이후 인천에 뿌리내린 화교들은 이후 150년이 넘는 오랜 시간을 인천을 터전으로 살고 있습니다.
구한말 고종때 체결된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1882)이후 중국인들의 본격적인 경제활동이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될 것입니다.
하지만 청조의 멸망이후 중국 대륙이 국공내전과 군벌(軍閥)들 사이의 권력투쟁과 내전의 양상을 띄는 혼란이 일어나는 무정부상태가 계속되는데다 이후 일본의 중국침략까지 더해져 혼란이 가중되면서 한국땅에 정착한 화교들도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게 됩니다.
처음 중국산 면포와 비단등을 거의 독점적으로 거래하던 화상(華商)들은 조선 땅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조선총독부와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사업을 그들 손에 맡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국산 면포 등에 대해 일본산 직물들이 싼값에 거래되기 시작하고 총독부에서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올리자 갑자기 사업에 큰 타격을 받게됩니다.
이렇게 총독부의 규제를 받아오다 최악의 상황은 중국과 일본간의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적국의 나라에서 버틸 수 없던 많은 중국인들이 조선을 떠나 귀국했고 화상들의 사업은 쇠락하기 시작합니다.
해방후 미군정은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관계개선을 위해 한국과 중국과의 교역을 확대합니다. 패전국 일본과의 교역은 군정 당국이 막아서 일시적으로 인천화상들은 호황을 잠시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국내전이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끝나고 국민당 정부가 타이완으로 쫓겨가게 되자 이후 동아시아 지역을 둘러싼 냉전(Cold War)의 영향으로 공산국 중국과 민주주의 국가 한국간의 교역은 중단되고 인천 화상들의 대 중국 교역도 타격이 불가피하게 됩니다.
이후 들어선 한국의 군사정부는 중국과의 거래를 불허하기 시작하는 것을 시작으로 중국인들을 차별하는 정책을 취하게 됩니다. 한국인에 비해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은 한국정부의 차별과 함께 경제적 불이익을 보게 되고 이동과 작업선택의 자유마저 박탈당하게 되자 많은 중국인들은 중국집을 하게 됩니다.
초기 화교들은 포목상이나 잡화점 등 장사를 주로 많이 했지만 이들 업종이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기점으로 쇠퇴하게 되자 음식점 등 다른 업종에 대한 비중이 많이 커진 것으로 압니다.
근대이후 한국땅에는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살았고 그들만의 기억과 흔적을 남겼습니다.
본의 아니게 외국인들과 같이 섞여 살게 된 역사가 벌써 100년이 넘어간다는 말이지요.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경험과 기억을 되살려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삶을 연구한 책도 이전에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 (선인,2016)
심층 인터뷰를 통한 인류학적 접근을 했던 위의 책과 달리 이 책은 인천화교들의 경제적 활동과 그들의 사회조직에 대한 연구입니다.
인천화교협회의 사료를 통한 경제사회사 연구죠. 인천대학교에서 지역의 역사에 대해 이런 연구를 진행하는 건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생각합니다.
인천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던 화교들의 과거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인천의 중국음식을 이야기한다면 짜장면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예전에 보았던 책 한권을 소개합니다.
짜장면뎐( 프로네시스,2009)
오래전에 출간된 책이지만 어릴 적 부모님이 사주시던 짜장면을 먹은 기억이 있는 분들이라면 한번쯤 회상에 잠길만한 내용을 처음으로 문화사적으로 풀어낸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천 구도심에 가게되면 저는 근처의 유명한 화상 중국집에 들어가 점심을 먹습니다. 기본 50년 이상된 곳들도 많고 짜장면의 경우 발상지가 인천이라 가면 먹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중국에 대해 잘 모르지만 우려스러운 요새의 중국관련 뉴스와 담론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좋던 싫던 중국인들이이땅에 들어와 산지 150년이 넘어가고 있고 특히 인천의 경우 작지만 아직도 중국화교와 화교들이 제공하는 특유의 중식에 대한 역사가 있습니다. 화상 중국집을 이야기하면 인천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미 인천 문화의 일부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중국의 경제력과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다 보니 이 상황에 긴장한 일본과 미국 등 해양세력들과 서구 유럽에서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마치 서구의 자유주의(liberalism)와 민주주의(democracy)만이 유일한 정의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두 길어봐야 18세기 이후 나온 개념과 체제입니다. 그것도 유럽의 백인 남성들애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민주주의 종주국이라는 미국에서도 여성이 참정권을 가진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1860년대까지도 미국은 백인과 흑인들이 다른 화장실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수많은 흑인들이 백인 경찰들이 쏜 총에 맞아 죽습니다. 조강하다가 죽은 사례도 있고 황당한 사례가 많습니다.
소위 유럽의 근대 이전 동서양은 모두 절대주의 전제왕정 체제였습니다.
그 기간이 훨씬 길었습니다. 그리고 현재 민주주의체제도 변질되어 정말 국민의 의사가 정치에 반영되고 있는지 의심스러운 상황인데 덮어놓고 민주주의만이 옳은 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당장 한국만 봐도 20대 국회의 약 40%의 의원들이 법조인 출신이라고 한 글을 보았습니다.
한국인들의 40%가 법조인인가요? 법조인이 국회를 과다점 유(over represented)하고 있고 목소리를 내야할 여성과 청년 그리고 농민들은 국회에 목소리를 전혀 내지 못합니다. 즉, 대의민주주의가 작동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다양성이 사라지고 50-60대 남자 국회의원이며 법조인출신 일색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민주주의가 다른 정치체제보다 우위에 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습니다.
이상황은 차라리 대의제 만주주의를 악용하는 쪽에 더 가깝습니다.
소수의 고위 공산당원들이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중국과 차이가 뭐죠? 두 국가 모두 소위 엘리트 집단들이 정치과정을 이끌어갑니다.
따라서 그 정치체제를 부르는 명칭보다 중요한 건 정말 정치과정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는가를 보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이런 면에서 요새 서구의 지식인 층에서 나오는 중국 혐오 발언은 과한 면이 많습니다. 다분히. 인종적이기까지 합니다.
여기 따라하기 좋아하는 한국의 여론주도층도 본인이 미국과 유럽에 사는 것마냥 중국에 대한 혐오발언을 쏟아냅니다.
역사적으로 미국보다 중국과의 역사가 훨씬 길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공이던 전쟁이던 외교 등 무엇이던간에 한국은 중국과 더 오해 관계를 맺어왔습니다. 관계가 끊어진 건 냉전으로 인한 몇십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역사적 사실을 망각하고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한국은 그 지정학적 위치 상 중국과 미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해야 합니다. 숙명입니다. 방법이 없어요.
미국이 중국에 적대한다고 덩달아 적대하는 실수를 범하면 안됩니다. 자살골이죠.
오히려 미국과 일본을 분리해서 대응하고 일본과의 마찰은 미국과 해결해야 합니다.
인천의 화상들은 100년 이상 한국에 살아온 이웃이란 생각도 하면서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