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평론" 155호다. 여전히 녹색평론에서 할 말이 많은 것을 보니, 우리나라 상황이 여전하다고 할 수 있다.

 

시민들은 깨어있는데, 정치인들이 시민들의 의식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 그래서 시민들은 한 발 앞서갈 준비가 되어 있는데, 정치인들은 앞서가려는 시민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이 현재의 상황 아닌가 한다.

 

일자리 창출부터 친환경 산업, 핵발전 포기, 남북관계 개선, 교육의 난맥상 타개 등등 정말로 촛불을 통해 탄생한 정부가 할 일이 많은데, 그 전에 선출직이라고 뽑힌 정치인들이 과거의 생각으로 과거의 행동만을 거듭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국회의원 소환제 같은 시민들의 참여정치제도가 없는 상황에서 다음 선거까지 기다려야 하는 이런 일이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시민들의 의식과 행동을 따라가지 않아도 되게 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녹색평론은 시민들이 계속 깨어 있게 한다. 시민들이 깨어 있어야 다음 선거에서 제대로 된 정치인을 선출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선출직을 언제든지 잘못하면 소환할 수 있는 그런 제도를 마련하려고 시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지속적으로 녹색평론에서 제기한 승자독식의 선출직이 아니라 비례대표로 소수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들도 정치권에 들어갈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지 못한다고, 국회의원들에게 국회의원 선출방식, 즉 선거제도의 개선을 맡길 수는 없다. 그것은 국회의원이 아닌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권력을 위임하고는 더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지금의 제도가 아니라.

 

이번 호에서는 '되돌아보는 러시아혁명'을 기획으로 삼았다. 러시아혁명 100주년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러시아혁명이 근현대 역사에 끼친 영향이 프랑스혁명만큼이나 크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러시아혁명을 이야기하면 무슨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냐고, 이미 망한 나라, 망한 제도를 언급하는 것은 돈키호테가 풍차를 보고 돌진하는 모습과 같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은 사회주의혁명으로 한 시대를 바꾸어놓은 혁명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러시아혁명 100주년에 대한 총론격인 박노자의 '100년 후에 되돌아보는 러시아혁명'이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 혁명에 대해서 공과를 명확히 구분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자본주의가 복지국가의 모습을 지니게 되지 않았던가.

 

노동자와 농민, 여성 등의 권리에 대한 자각이 생기지 않았던가. 많은 나라들이 식민지에서 벗어나지 않았던가. 이런 긍정적인 면이 있었지만 제도의 경직화, 관료들의 권력독점, 부패 등의 부정적인 면도 있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러시아혁명으로 인해 초반에 러시아에서는 급속한 경제성장이 일어났다고 한다. 이는 사회주의의 성공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자본주의 관점에서 러시아혁명을 판단해도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50년이라는 기간 동안, 소련은 국내총생산(GDP)을 9배나 증가시켰다. (앨런 우즈, 러시아혁명, 무엇을 성취했고 왜 좌절했나.133쪽.)

 

이런 자본주의 성장지표 가지고 사회주의를 평가하다보면 자연스레 사회주의 권도 성장 프레임에 갇히게 된다. 문제는 성장이 아니다. 더글러스 러미스의 책도 있지 않은가. "경제성장이 안 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라는.

 

그래서 러시아혁명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최근 최저임금 시급 1만원 주장 구호를 생각해 봤다. 1만원 인상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최저임금이란 최소한의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임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도입된 것 역시 러시아혁명의 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구호에 한 가지 더 첨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고 또는 구조 조정 없는 최저임금 인상.

 

아파트 경비직들이 최저임금 인상으로 해고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임금은 올랐는데, 지출총액은 같기 때문에 경비원들의 숫자를 줄이는 것이다. 그러면 임금은 올랐지만 누군가는 해고가 되고, 남은 사람들은 해고된 사람들의 몫까지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노동강도는 더 강해지는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다. 근무조건 변형없는 최저임금 인상이 구호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노동시간이 더 줄어야 한다. 러시아혁명이 목표로 했던 것이 바로 노동시간의 감축 아니었던가.

 

보통 4시간 일하고 4시간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그런 사회를 꿈꾸었지 않은가. 그런데도 세계 최장시간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우리나라는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노동자들이 살 만하게 노동시간 감축, 구조조정없는 임금인상이 더불어 이루어져야 한다. 그 점이 바로 지금 우리가 주장해야 할 것이 아닌가 한다.

 

녹색평론에서 다룬 러시아혁명 100주년에 대한 글을 통해 이런 점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러시아혁명은 이제 끝났다고 하지만 이번 호에 있는 박노자의 말처럼 '혁명의 종착지는 또하나의 혁명의 출발지'일 것이다. 그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이것과 더불어 이번 호에서 다룬 글 중에서 한윤정의 '중국의 생태문명 실험'이란 글의 내용 중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 구절이 있었다.

 

'원자력, 태양열, 풍력, 조력, 지열 등 비화석연료 비중 역시 2014년 11.2%에서 2030년 20%까지 늘인다는 계획이다.' (46쪽)

 

그런데 원자력이 이러한 생태문명에 함께 포함되어야 하는지... 최근 중국은 원자력 발전이 청정하고 안전한 발전이라면서 더욱 확대하겠다고 했다던데... 이것은 반생태정책이 아닌지...

 

생태문명과 원자력이 함께 한다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는데, 이 글을 쓴 사람은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오히려 중국의 생태문명 실험이라는 것이 또 하나의 생태 파괴 운동은 아닐지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닌가.

 

좀더 심도 깊은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까. 녹색평론의 관점에서 보면 원자력은 반생태적인 발전일텐데. 그 점이 좀 아쉽다.

 

우리나라는 이번 정권에서 핵발전 폐기 쪽으로 가고 있는데, 중국은 반대로 핵발전 유지 및 확대로 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점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해야 하는 것이 녹색평론 아닐까 하는 생각. 좀 녹색평론의 방향과 맞지 않는 글이 '중국의 생태문명 실험'이란 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다. 물론 내가 잘 몰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 밖에 4대강 사업에 대한 통렬한 비판... 그래, 이것은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책임질 사람들은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김정욱의 '4대강 사업 '그 총체적 사기극을 돌아보며'가 좋다.

 

한 꼭지 한 꼭지 음미하면서 읽어볼 필요가 있는 책이다. 내 생각이 굳지 않게, 적어도 시민의식을 지니고 있게 해주는 책이니, 참 귀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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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7-07-14 14: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구독할 때는 꼬박꼬박 챙겨 읽었는데, 배송 사고가 워낙 잦아서 구독 끊고 나니, 자꾸 잊어버리게 되네요. 끊을 때는 그래도 챙겨 보겠지 싶었는데 말이죠.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kinye91 2017-07-14 15:31   좋아요 0 | URL
정기 구독을 하지 않으면 챙겨 보기가 만만치 않더라고요... 두 달에 한 번 그래도 녹색평론을 읽으면서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아요...

무해한모리군 2017-07-14 17: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번호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동산문제나 복지 문제같은 분명해 보이는것도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은 것을 보면 나같은 소시민은 무엇부터 하면 좋을까 같은 생각이 들곤합니다.

kinye91 2017-07-15 11:45   좋아요 0 | URL
사회적 합의는 쉬울 수가 없다고 봐요. 원전 문제만 해도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켜 쉽지 않으니까요. 이럴 때일수록 개인들인 우리 소시민들이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사후생 - 죽음 이후의 삶의 이야기, 개정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지음, 최준식 옮김 / 대화문화아카데미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잎이 필 때는 꽃이 없고, 꽃이 필 때는 잎이 없어서 서로를 볼 수 없는 '상사화'

 

어쩌면 죽음과 삶 역시 이러한 상사화 같을지도 모른다. 서로를 볼 수가 없으니 말이다. 어느 한쪽만 존재하게 된다. 한쪽이 오면 한쪽은 물러나야 한다. 그럼에도 삶은 자신이 살아 있음으로 볼 수 있지만, 죽음은 자신이 볼 수 없다.

 

죽음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죽음 이후의 삶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도대체 죽음 뒤에 어떤 삶이 있을까?

 

그냥 없어진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고, 무언가가 있다는 사람도 있고, 분명 새로운 삶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누구의 말이 옳은지는 죽어보아야만 알 수 있으니 여전히 죽음은 사람에게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미지의 세계, 그래서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박사는 수많은 죽어가는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죽음에 대해서 연구를 했다. 어쩌면 그는 근사체험(近死體驗)을 한 사람들을 통해, 또 자신의 근사체험을 통해 죽음에 대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죽음은 결코 두려운 것이 아니라고. 또 다른 사랑의 이름이라고. 온전하게 사랑하지 못한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도 쉽지 않다고.

 

그래서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는 온전한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고. 우리나라에서 쓰는 말들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나.

 

악하게 행동하던 사람이 갑자기 착하게 행동하면, ' 저 사람 죽을 때가 되었나, 왜 저렇게 행동하지'라는 말을 하지 않던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와 함께 하면서 죽음의 길로 가게 된다고 하는 로스 박사의 말은, 많은 과학자들은 찬성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그것을 죽어가는 사람의 소망이 담겨서 환각으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로스 박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여러가지 사례를 들어 그것은 상상이나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고, 죽음은 실제라고 말을 한다.

 

영적 존재는 분명 존재한다고, 우리에게는 누구나 다 가장 사랑하는 영적 존재가 있고, 그 존재와 죽음의 순간에 함께 하게 된다고, 그 때는 사랑으로 충만해진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런 로스 박사의 말을 믿으면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세계로, 이 책에 나오는 용어로 하면 우선 육체라는 고치를 벗고 영혼이 나비가 되어 날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른 세계에서 온전한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일, 그것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질적인 변환을 하는 시작이라는 것이다.

 

이런 죽음, 그렇다면 사람들이 굳이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우리나라처럼 묘지나 화장터가 혐오시설이 되는 나라에서는 로스 박사의 이런 책이 반드시 읽혀야 한다.

 

어차피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세상에서 가장 평등한 것이 죽음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죽음에 대해서 늘 생각하는 문화를 지니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죽음을 그냥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들 이야기가 이 책에 나오는데, 이럴 땐 부모의 죽음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죽음을 애도하고, 이야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에 대한 바른 태도라고 한다. 그래야만 아이도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고 한다.

 

누구에게나 한 번은 꼭 찾아오는 죽음, 그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 우리는 여전히 모른다.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다. 마냥 행복한 것으로 그려져 있지만,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로스 박사의 말을 들으면 그렇다. 우리는 잘 살 수밖에 없다. 죽음에 이르러서 나를 심판하는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삶이라고 하니 말이다.

 

결국 우리가 죽음을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삶을 잘 살기 위한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누구나 가야 할 길이지만, 갔다가 돌아와 이야기해주지 못한 그 삶에 대해 이렇게라도 근사체험을 통해 들려주는 이유는 바로 지금 잘 살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한다.

 

읽어볼 만하다. 읽어봐야 한다. 잘 살기 위해서라도. 잘 죽는다는 것, 그것은 잘 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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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3 08: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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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3 09: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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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선 아리랑


산 좋고 물 좋은 동네

숲이 우거지고 나무들은 뗏목이 되어

한양으로 한양으로

사람 살게 하는 재목이, 땔감이 되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강을 가던

정선은 뗏목꾼들의 목숨값을 노래로 달랬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이 산 좋고 물 좋던 고장은

나무 대신 땅 속에서 석탄을 내어

탄광으로 막장으로

다른 이들의 생명을 잇기 위해

다른 이들의 겨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정선은 광부들의 목숨값을 노래로 달랬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폐광이 늘고 인부들이 떠나 폐가만 늘어

정선은 버려진 곳

레일바이크로 다시 사람을 불러 모았으나

어찌어찌 산 좋고 물 좋은 이 곳에

강원랜드, 카지노를 만들어

정선은 사람들의 도박값을 노래로 달래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정선은 여전히 산 좋고 물 좋은데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고(길재의 시조)

뗏목도 석탄도 아닌 도박으로

도박값이 목숨값을 대신하는

그런 곳이 되었지

목숨값이 넘치던 내 기억 속 정선은

이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정선아리랑으로만 남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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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2 1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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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2 1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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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달콤한 복수 - 현대예술에 대한 거침없는 풍자
에프라임 키숀 지음, 반성완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글쓴이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힘들지만, 많은 부분에서는 공감한다. 사실 현대미술은 너무도 어렵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미술이 아니라 눈으로 보되 머리 속으로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정서에 호소하기보다는 이성에 호소하는, 그것도 고도의 지능을 요구하는 그런 미술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미술관에 자주 가보는 편이 아니지만 마음 먹고 가본 미술관에서 현대미술을 보고는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적이 있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가 되지 않으니 마음 속에 다가오지 않고, 미술에 대한 흥미도 생기지 않는다. 이런 것을 현대인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겠지만, 그래도 나같은 보통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미술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현대미술에 관한 책을 몇 권 읽었다. 도무지 현대미술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에서 가장 유명한 앤디 워홀이라든지, 릭텐슈타인의 그림을 누가 아름답다고 느끼겠는가. 그냥 상품을 나란히 배치했다든지, 만화를 조금 더 크게 그렸다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잭슨 플록의 그림을 보면서 감흥을 느끼는 사람,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냥 물감을 흩뿌린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어떻게 감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인지...

 

마찬가지다. 청계천 앞에 서 있는 커다란 스프링, 우리 눈에는 기껏해야 대형 고동이나 다슬기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 그것을 수많은 돈을 주고 세웠다니.

 

이 책의 저자가 비판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현대미술을 하는 작가들이 자신들이 좋아서 하는 것은 뭐라 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을 엄청나게 많은 돈을 들여 사들이는 지역자치체들이 문제다. 이에 영합하는 비평가들까지.

 

이들에게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작품은 자신들의 지식을 드러낼 가장 좋은 기회다. 돈을 더 올릴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고. 이렇게 현대미술은 돈이라는 것에 의해 오염되었다고 보는 것이 저자의 입장이다.

 

꼭 돈에 오염된 것이 현대미술만은 아니겠지만, 사람들에게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것만은 사실이지 않을까 싶다.

 

현대미술의 추상성에 대해서 풍자하고 있는 이 책은, 현대미술 앞에서 주눅이 들었던 나같은 사람에게 위안을 준다. 나만이 현대미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미술이 어떠해야 할지 더 생각해 보는 계기도 마련해 주는 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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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08: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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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1 09: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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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7-11 09: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책이네요. 키숀 작가의 책을 좋아해서 부러 찾아서 봤던 기억입니다. 미술이 자본과 결탁하면서 더 이상, 예술의 가치를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게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피카소는 자본에 영혼을 판 대표적인 선수가 아닐까 싶네요.

kinye91 2017-07-11 09:45   좋아요 0 | URL
예술이 삶과 동떨어져 자본으로 전환되는 시대가 현대인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럼에도 예술을 자본과 독립된 자신의 삶에 직결시키는 현대예술가들도 상당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 점을 구분하게 해주는 것이 비평가의 몫이지 않을까 싶고요.

하나 2017-07-11 1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정 수준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많네요.

2017-07-11 10: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kinye91 2017-07-11 10:2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야기로만 듣던 영화, '옥자'를 봤다. 참 보기 힘든 영화인데... 운 좋게도 봉준호 감독의 무대인사도 보고... 참...

 

  세상이 변해가면서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보다는 이제는 집에서 보는 영화가 대세로 자리를 잡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영화는 극장에서 보아야 한다. 집에서 혼자 또는 몇몇이 볼 때와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서 볼 때는 차이가 있다.

 

  상영관에 가서 본 '옥자'는 볼 만했다. 동물과 사람이 별개의 존재로 되어가는 세상에서 '옥자'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피터 싱어였던가, 동물해방을 주장한 학자가. 이런 학자들 이외에도 영화에 등장한 것처럼 동물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단체들도 있다는 것.

 

  인간이 인간만으로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영화를 보면서 영화 '매트릭스'를 패러디한 '미트릭스'가 생각이 났고, '미트릭스'가 짧은 단편들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다면, '옥자'는 동물과 인간이 교감하는 모습을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잘 펼쳐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전자조작된 돼지 '옥자'. 그러나 유전자조작이 되든, 되지 않았든 '옥자'가 어엿한 생명을 지닌 생명체임에는 틀림없다. 생명체의 생명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이런 돼지들이 어떻게 도살되는지 잘 나온다. 도대체 생명에 대한 경외심은 쥐꼬리만큼도 없는, 그런 도살 장면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생명체들에게 못된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에서 '옥자'는 살아남는다. '옥자'는 이미 주인공인 미자에게 가족인 셈이다. 그 가족은 독립영화 '워낭소리'에서처럼 죽을 때까지 함께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옥자'가 살아남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렇게 '옥자'가 살아남았다고 다른 동물들 역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영화에서 다른 유전자조작된 슈퍼돼지들은 모두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자신들의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새끼 돼지를 울타리 밖으로 내보내 살게 하지만, 그것은 예외일 뿐이다.

 

이런 대량 살육이 벌어지는 공간이 바로 공장식 축산이다. 공장식 축산, 이것을 없애는 방법은 미자가 한 것처럼 '옥자'를 구해내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비록 옥자는 살았지만 다른 돼지들은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우리의 식생활 습관이다. 우리가 식생활 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옥자에서 나타난 그런 살육은 언제든 일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 개인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꾸어야 한다. 그렇다고 극중 등장인물처럼 방울토마토 하나 먹는데도 망설이자는 것은 아니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바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빼앗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음밖에 없다.

 

살기 위해서 생명을 해쳐야 하는 현실, 그렇다면 내가 죽인 생명들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살아있음은 다른 생명들의 목숨으로 뒷받침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먹는 것 하나, 행동하는 것 하나도 이렇게 다른 목숨들의 목숨값임을 명심해야 한다. 영화 '옥자'를 보면서 우리가 수많은 목숨들로 목숨을 이어가고 있음을 생각했다. 내 목숨은 이렇게 다른 생명들에게 빚지고 있음을.

 

그래서 말 그대로 정말 잘 먹어야 함을, 잘 살아야 함을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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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7-10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장식으로 생산되는 육식도 끊어야겠고,,, 영화도 이젠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완전히 탈피하려는가 봅니다.

kinye91 2017-07-10 16:26   좋아요 0 | URL
공장식으로 생산되는 육식은 끊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적어도 제 몸에 들어오는 목숨들인데, 그 목숨값을 제대로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