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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 - 기술이 경험을 대체하는 시대, 인간은 계속 인간일 수 있을까
크리스틴 로젠 지음, 이영래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5월
평점 :
'주객전도(主客顚倒)'와 '운칠기삼(運七技三)'
우리가 좀더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개발한 기술이 오히려 우리를 종속시키고 있음을 개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기술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이미 개발된 기술, 그것을 없앨 수는 없다. 또한 기술은 이상하게도 인간이 주체적으로 개발했지만, 한번 개발이 되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인간을 객체의 지위로 떨어뜨린다. 기술이 계속 발전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그 기술에 문제가 있다고 퇴보하지는 않는다. 특히 인간의 편리를 증진시킨다면 더더욱.
현대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에 살고 있다. 인공지능을 개발한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우리 인간의 삶을 보조하기 위해서 일 텐데... 오히려 인간이 인공지능에게 휘둘리고 있는 것이 지금 현실 아닌가.
현대 기술을 대표하는 것이 스마트폰이라고 하자.(인공지능은 지금 논외로 하고) 그런 스마트폰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많다. 특정 연령 때까지는 금지한다는 법안을 제출한 나라도 있다. 우리나라도 학교에서는 스마트폰을 금지한다는 법을 제정한다고 하니까.
(제정이 되었나? 내년부터 학교에서 실시한다는 말이 있으니...그런데 학교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금지한다는 것이 아니라 수업 중에 사용을 금지한다는 것 아닌가. 이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수업 중이 아닌 다른 시간에는 사용해도 된다는 말인지.. 아니면 학교에 등교하면 하교할 때까지 스마트폰을 쓸 수 없다는 말인지. 학교에 따라 교칙을 정해야 한다고 알고 있는데)
스마트폰이 학생들에게 문제라면 성인들에게는 무엇이 문제일까? 그것은 바로 시도때도 없이 연결되는 현실 때문 아닌가. 자신이 있는 장소에서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간에 있는 사람들과 스마트폰으로 연결이 되는 것.
즉 장소성을 잃어버리고 대면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우리 육체의 물질성이 약화되는 것. 또한 자신이 있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고 스마트폰 속의 공간이, 만남이 중요해지는 것.
이는 바로 관계의 악화로 나타나고, 어디서 언제든 스마트폰을 하고 있으면 그것 자체로 사람들과의 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
이래저래 스마트폰은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바꾸었는데... 이 스마트폰으로 경험하는 온갖 사이버 세상들을 스마트폰이라는 범주에 포함시킨다면,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대로 우리 인간의 경험을 없애는 데 스마트폰만큼 큰 역할을 하는 존재는 없다.
이것이 왜 문제인지를 7장에 걸쳐서 보여주고 있는데, 이미 우리가 심각하게 여기는 현상도 있어서 새삼스러운 주장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새삼스런 주장이 아님에도 우리는 스마트폰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마도 힘들 것이다. 그 세계가 주는 편리함이 바로 우리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우리가 이제는 주체가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구현되는 기술의 세계가 주체인 것이다.
우리는 객체로 전락했다. 아니라고? 자신의 생활을 살펴보자. 운전을 하는 성인이라면 아마 내비게이션 없이 운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고, 하이패스를 장착하지 않은 차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빠름과 편리함. 최신 내비게이션으로 가장 빠른 길을 찾아 운전하는데, 그것을 누가 찾는가? 운전자? 아니다. 내비게이션이다. 내비게이션이 가라는 곳으로 간다. 주객전도다.
학생들은 스마트폰에 빠져 있다. 왜 학교에서 스마트폰을 금지해야 한다고 하겠는가. 스마트폰을 허용하는 학교의 쉬는 시간, 점심 시간의 모습을 보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스마트폰에 눈을 준 채 주변을 살피지 않는다.
운동장에서 노는 극소수의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이마저도 줄고 있는 현실인데, 대부분의 아이들은 게임을 하거나 사회적관계서비스망을 이용하고 있다. 게다가 학습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무엇인가를 고민할 시간을 갖기 싫어한다. 검색하면 금방 나오니까. 굳이 외울 필요도 없다. 지식을 암기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기다림이 사라지고, 자신 주변에 있는 사람보다는 사회적관계서비스망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더 많이 연결되는 현실. 그런 현실에서 직접 몸으로 하는 경험은 줄어들거나 사라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세계로 가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삶에서 만나는 불확실성을 줄이기 위해서다. 불확실성, 우연은 우리를 힘들게 한다. 두렵게 한다. 그래서 없애야 할 것으로 인식하고 기술을 통해서 이를 없애려 한다.
하지만 삶은 우연의 연속이다. 삶을 가장 잘 대변하는 말이 '운칠기삼' 아닌가 한다. 우리가 계획한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30%정도라면,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는 일들이 70%라는 것. 그 70%가 바로 우리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도 있는데, 기술시대에 우리는 그런 70%의 우연을 아예 없애려고 한다. (운이라고 하지만 이 운은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불확실한 삶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는 괴롭고 슬프고 힘들지만 그것들을 통해서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고, 주변 존재들과 관계맺으면서 자신이 살아갈 길들을 조심스레 나아가게 된다.
이런 불확실성을 다 없앴을 때 과연 우리의 삶이 행복해질까? 우연이 개입하지 않는 삶이, 모든 것이 계획대로 되어가는 삶이 과연 행복할까?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기술이 우리를 객체의 자리로 밀어넣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더 견뎌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기술에 대해서 다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하지만 저자가 대안으로 제시한 것은 희망사항이다. 기술을 통제할 수 없다면 기술의 문제점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없다. 그런데 기술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대안을 마련하려면 우리의 생활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편리와 빠름에 익숙해진 생활을 바꾸지 않으면 이러한 기술이 우리에게 주체로 다가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저자의 주장은 당연한 말이지만 그만큼 힘든 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기술을 기업들이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고, 빠름과 편리함에 익숙해진 사람들 역시 그러한 삶을 버리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의 저자가 주장하는 '인간의 미덕을 되찾고 가장 뿌리 깊은 인간의 경험을 멸종의 위기에서 구하려면 기술 예찬론자들이 제안하는 극단적인 변혁 프로젝트에 기꺼이 한계를 두어야 한다. 혁신을 억압하는 수단으로서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성에 대한 헌신으로서의 한계 말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육신이 있는, 기발하고 모순적이며 회복력 있고 창의적인 인간의 모습 그대로 자유롭게 살 수 있다.'(330-331쪽)는 말이 헛된 울림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생활을 되돌아봐야 한다.
거대한 기술관련 기업들에, 그러한 기업들을 지원하는 정부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정부와 기업에 압력을 넣을 수 있는 인간들의 관계가 먼저 확립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음은 이미 역사가 보여주고 있으니... 참.
우리의 삶이 '운칠기삼'이라는 것, 그래서 기술이 우리의 주체가 되는 '주객전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이와 같은 책을 학교에서부터 읽고 토론하게 하면 어떨까? 아래에서부터의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니까...기후재앙에 대한 대응을 촉구하는 청소년들의 움직임 일어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