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로만 듣던 영화, '옥자'를 봤다. 참 보기 힘든 영화인데... 운 좋게도 봉준호 감독의 무대인사도 보고... 참...

 

  세상이 변해가면서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보다는 이제는 집에서 보는 영화가 대세로 자리를 잡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영화는 극장에서 보아야 한다. 집에서 혼자 또는 몇몇이 볼 때와 여러 사람이 한 공간에서 볼 때는 차이가 있다.

 

  상영관에 가서 본 '옥자'는 볼 만했다. 동물과 사람이 별개의 존재로 되어가는 세상에서 '옥자'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피터 싱어였던가, 동물해방을 주장한 학자가. 이런 학자들 이외에도 영화에 등장한 것처럼 동물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단체들도 있다는 것.

 

  인간이 인간만으로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영화를 보면서 영화 '매트릭스'를 패러디한 '미트릭스'가 생각이 났고, '미트릭스'가 짧은 단편들 시리즈로 구성되어 있다면, '옥자'는 동물과 인간이 교감하는 모습을 우리나라 정서에 맞게 잘 펼쳐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유전자조작된 돼지 '옥자'. 그러나 유전자조작이 되든, 되지 않았든 '옥자'가 어엿한 생명을 지닌 생명체임에는 틀림없다. 생명체의 생명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영화의 후반부에 가면 이런 돼지들이 어떻게 도살되는지 잘 나온다. 도대체 생명에 대한 경외심은 쥐꼬리만큼도 없는, 그런 도살 장면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많은 생명체들에게 못된 짓을 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에서 '옥자'는 살아남는다. '옥자'는 이미 주인공인 미자에게 가족인 셈이다. 그 가족은 독립영화 '워낭소리'에서처럼 죽을 때까지 함께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옥자'가 살아남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렇게 '옥자'가 살아남았다고 다른 동물들 역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영화에서 다른 유전자조작된 슈퍼돼지들은 모두 죽음의 길로 들어선다. 자신들의 죽음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알고 새끼 돼지를 울타리 밖으로 내보내 살게 하지만, 그것은 예외일 뿐이다.

 

이런 대량 살육이 벌어지는 공간이 바로 공장식 축산이다. 공장식 축산, 이것을 없애는 방법은 미자가 한 것처럼 '옥자'를 구해내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비록 옥자는 살았지만 다른 돼지들은 죽음에 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우리의 식생활 습관이다. 우리가 식생활 습관을 고치지 않으면 옥자에서 나타난 그런 살육은 언제든 일어날 수밖에 없다. 우리 개인의 행동 하나하나를 바꾸어야 한다. 그렇다고 극중 등장인물처럼 방울토마토 하나 먹는데도 망설이자는 것은 아니다.

 

생명은 다른 생명을 바탕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생명을 빼앗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음밖에 없다.

 

살기 위해서 생명을 해쳐야 하는 현실, 그렇다면 내가 죽인 생명들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내가 살아있음은 다른 생명들의 목숨으로 뒷받침되고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먹는 것 하나, 행동하는 것 하나도 이렇게 다른 목숨들의 목숨값임을 명심해야 한다. 영화 '옥자'를 보면서 우리가 수많은 목숨들로 목숨을 이어가고 있음을 생각했다. 내 목숨은 이렇게 다른 생명들에게 빚지고 있음을.

 

그래서 말 그대로 정말 잘 먹어야 함을, 잘 살아야 함을 생각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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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7-10 16: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장식으로 생산되는 육식도 끊어야겠고,,, 영화도 이젠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완전히 탈피하려는가 봅니다.

kinye91 2017-07-10 16:26   좋아요 0 | URL
공장식으로 생산되는 육식은 끊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요. 적어도 제 몸에 들어오는 목숨들인데, 그 목숨값을 제대로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