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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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세계 명작 하면 빠지지 않았던 소설이 "로빈슨 크루소"였다. 무인도에 표류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는지 참 흥미롭게 읽었는데...

 

그냥 재미있게 읽었다고나 할까? 로빈슨의 불굴의 의지, 그리고 섬에서 문명을 일구어내는 능력, 결국 다시 문명의 세계로 돌아오는 그러한 사람의 이야기.

 

그것뿐이었다. "로빈슨 크로소"는. 그런데... 어느 순간, 자라면서 다른 세계를 알게 되면서, "로빈슨 크로소"가 인종차별적, 문화차별적 요소를 많이도 지니고 있다는, 제국주의의 이념을 소설로 구현한 작품이라는 얘기를 읽었다.

 

그럴 수도 있구나? 특히나 로빈슨이 '프라이데이'를 하인으로 부려먹는 장면, '프라이데이'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로빈슨이 시키는 일이나 하는, 자기 의지가 없는 인간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또한 '프라이데이'라는 미개인을 문명화시키는 로빈슨의 호의.

 

그랬다. 이 소설은 정말로 서구 사람들이 다른 세계의 사람들에 대해 지닌 우월감을, 그들을 자신처럼 만들어야 한다는 사상이 잘 드러난 소설이었다.

 

이렇게 "로빈슨 크루소"로만 끝났으면 서양 소설은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세계 명작이라는 말도 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로빈슨 크루소"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았기에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세계 명작이라고 할 만하다.

 

적어도 다르게 생각해 볼 여지를 마련해 주는 작품이니 말이다. 그렇게 다른 여지를 마련하는 작품이 나왔다. "로빈슨 크루소"의 한계를 끝까지 밀어부치는 작품.

 

그것이 바로 미셀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이다. 여기서 방드르디는 '프라이데이'다. 하나는 금요일을 뜻하는 영어식 이름이고, 다른 하나는 프랑스식 이름이다.

 

결국 '방드르디'라는 이름에서 "로빈슨 크루소"를 차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제목이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의 이름으로 삼지 않고, 그가 만난 이방인의 이름으로 삼고 있다.

 

제목에서 보듯 이 소설에서 중심은 '로빈슨'이 아닌 '방드르디'다. 그렇다면 제목에서 보듯이 이 소설은 "로빈슨 크로소"를 차용했지만 그것을 거꾸로 뒤집는다.

 

즉 문명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는 이 소설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로빈슨은 천진한, 자연과도 같은 '방드르디'에게 동화된다. 그리고 그는 구출될 기회가 있었음에도 거부하고 섬에 남기로 한다.

 

그는 이미 문명을 떠나 자연의 일부가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이 소설에서 자연과 하나가 되어야 할 '방드르니'는 섬을 떠난다. 그는 새로운 문명을 경험하러 간다.

 

아직, 문명의 험난함을 경험하지 못한 그에게는 새로운 세계는 새로운 도전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이미 문명 세계를 경험한 로빈슨에게는 그 세계는 이미 자신에게 멀어진 세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세계, 돌아가고 싶지 않은 세계가 된다.

 

그에게는 '자안'이라는 또다른 소년이 남는다. 그와 그는 무인도에서 자연과 동화된 삶을 살아가리라. 이것이 이 소설의 끝이다.

 

이렇게 이 소설은 "로빈슨 크루소"를 뒤집는다. 그 뒤집음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최첨단 과학시대에, 이제는 우주를 개척한다는 미망하에 살고 있는 이 시대에 과연 사람다운 삶은 무엇일까?

 

저 자연과 우리는 어떻게 어울리며 살아야 할까? 우리가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문명이 과연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까?

 

이 소설을 통하여 너무도 자명했던 우리들의 생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것은 이 소설의 또다른 주인공인 '로빈슨'의 변모를 통해서 느낄 수 있다.

 

최소한 우리의 생활에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시간, 그런 태도를 이 소설은 지니게 해 준다. 그게 이 소설의 의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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