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왼손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1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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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름을 받아들이는 자세 - 낯선 행성에 도착할 때


소설은 낯선 행성과 친교를 맺기 위해 온 특사 '겐리 아이'와 그 행성을 이루는 나라 중 한 나라 카르히데의 수상인 '에스트라벤'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보통 낯선 곳에 도착하여 자신들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두려움이 앞선다. 자신들의 안전을 보장받아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장받을까? 흔히 두려움때문에 무장을 하고, 혼자가 아닌 여럿이 낯선 곳에 함께 간다.


그렇다면 낯선 이들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또 어떤가? 처음부터 환대를 하는가? 아메리카 대륙을 생각해보면 낯선 존재를 환대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낯선 이들을 환대하는 모습, 그것은 낯선 이들에게 침략당하지 않은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또한 다른 존재를 자신들과 다른 존재로 인정하고 그들에게 편리를 제공하려는 태도가 드러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낯선 이들을 경계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게센 행성은 네 나라로 구성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소설에 나타나는 주요 나라는 카르히데와 오르고레인이다. 자기 나라에 온 낯선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상반되는데... 카르히데에서는 낯선 사람을 환대한다. 반면에 오르고레인에서는 온갖 감시소에 여러 신분증명서를 요구한다. 물론 두 나라 다 낯선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게는 하는데...


에큐멘 행성에서 특사로 온 겐리를 통해 두 나라가 낯선 이를 만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가 낯선 이들을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과연 국경을 통제하면서 낯선 이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또한 낯선 곳에 갈 때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하는데... 에큐멘에서는 낯선 행성으로 사람을 보낼 때 그 행성 사람들이 두려움을 지니지 않도록 가능하면 한 사람만 보낸다고 한다.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기술을 과시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낯선 행성을 정복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서로 신뢰를 지니고 교류하기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 특사를 파견하니 한 사람이 낯선 행성에 도착해서 그들과 교류하고, 신뢰 관계를 쌓은 다음에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이다. 낯선 곳, 낯선 이들을 만나려 할 때와 만날 때 우리가 지녀야 할 자세. 두려움을 떨치고 상대에 대한 믿음을 지니고 함께 하려는 태도. 르귄은 이 소설을 통해서 이런 만남의 자세, 특히 국가와 국가, 행성과 행성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어떠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2. 다름을 인정하기 - 성(性)에 대하여


게센 행성 사람들은 양성이다. 이들은 때와 장소에 따라서 남성이 되기도 하고 여성이 되기도 한다. 그들에게 한 성만 지니고 있는 사람은 성도착자에 불과하다. 그러니 겐리는 성도착자라고 할 수 있다. 


겐리는 우리 성 구분에 의하면 남성에만 해당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양성으로 구분된 세상에서만 살아왔던 겐리에게 양성을 다 지니고 있고, 때로는 남성, 때로는 여성으로 변하는 게센 사람들은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겐리는 최대한 이해하려고 한다. 물론 그들이 지닌 성은 겐리가 이해하고 말고를 떠나서 겐리가 어찌할 수 없는 그들 본유의 성 정체성이다.


마찬가지로 게센 행성 사람들에게 한 성만 있는 겐리는 성도착자에 불과하다. 그들 역시 겐리를 이해할 수 없다. 남성만, 여성만 있는 성을 만나보지 못했던 게센 행성 사람들에게 겐리는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그런데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어찌해야 한다고 하면 문제는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어찌할 수 없는 본유의 특성은 이해하고 말고를 떠나 받아들여야 한다. 그냥 다름일 뿐이다. 가치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가치가 개입하는 순간, 다름은 틀림이 되고, 다름을 교정하려는 강압이 이루어지게 된다. 강압, 폭력이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타고난 내 모습을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이유로 바꾸게 강제한다면, 그보다 더 심한 폭력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성 정체성은 이해 여부를 떠나 받아들여야 할, 먼저 받아들여야 한다. 배척이 아니라 수용이 기본이 되어야 한다. 겐리와 게센 행성 사람들을 통해 르귄은 이 점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다. 소설에서는 너무도 당연하게 서로의 다름을 인식하지만 함께 살아가야 함을, 다름이 틀림이 아님을 인물들을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3. 환대와 인정만으로는 부족 - 겐리와 에스트라벤이 하는 모험


낯선 사람을 환대하고 다른 성 정체성을 지닌 모습을 인정한다고 해도 쉽게 함께 하지는 못한다. 이들이 함께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과정을 모험이라고 해도 좋겠다. 소설은 그래서 에스트라벤이 반역자로 추방당해 이웃나라 오르고레인으로 도망치고, 겐리 역시 카르히데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 자신이 온 목적을 달성하기 힘들어졌으므로 - 오르고레인으로 간다.


서로 영토 분쟁을 하고, 왕이 있고 왕이 통치하는 나라와, 또 친교인들이 공동 통치를 하는 나라를 겐리를 통해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소설은 이들이 정보를 통제하면서 나라를 운영하는 모습도 보여주고 있는데, 겐리를 유일하게 완전히 믿고, 겐리에게 불신을 받는 사람인 에스트라벤이 이용가치가 없다고 수용소에 갇힌 겐리를 구출해 다시 카르히데로 가는 과정을 통해 서로가 서로를 더 알아가고 이해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렇다. 환대와 인정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들은 함께 일을 해야 한다. 함께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마음을 열고 완전한 신뢰로 나아갈 수 있다.


적어도 낯선 행성, 낯선 나라, 낯선 사람과 만날 때는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쇠도 두드려야 강해지듯이 낯선 이들은 함께 하는 과정에서 더 강한 유대감을 형성한다. 이런 유대감을 통해 신뢰가 이룩되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더 좋은 관계로 나아가게 된다.


겐리가 카르히데를 떠나 다시 카르히데로 돌아오기까지, 에스트라벤과 함께 하는 과정에서 그는 마음으로 대화를 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어느 정도 마음으로 대화를 할 수 있게도 된다.


마음으로 대화를 하게 되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마음으로 대화를 하게 되면서 이들에게는 완전한 믿음이 형성된다.


우리가 남극을 횡단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그들이 겪었던 고난을 상상할 수 있듯이, 이 소설에서 오르고레인을 탈출해 카르히데로 가려는 이 둘의 모험은 남극을 횡단하는 모험을 하는 사람들이 겪었던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던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고 있다. 그 과정에서 둘이 우정을 쌓아가는 모습도... 


4. 왜 어둠의 왼손인가 - 어둠의 왼손은 빛


소설 제목이 된 어둠의 왼손을 보면서 왜 어둠의 저편이 아니고 왼손이지 하는 생각을 했다. 보통 우리는 빛과 어둠이라고 하지 않나... 그러니 왼손이라는 말은 좀 낯설었는데, 소설을 읽다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빛은 어둠의 왼손 / 그리고 어둠은 빛의 오른손 / 둘은 하나, 삶과 죽음은 함께 있다. / 케메르를 맹세한 연인처럼, 마주 잡은 두 손처럼, / 목적과 과정처럼.' (321쪽)


게센 행성은 겨울 행성이라고 불릴 수 있다. 추위와 눈보라, 얼음으로 뒤덮인 행성이다. 그럼에도 이들에게도 봄은 있다. 어찌 겨울만 있겠는가? 추위 속에서도 따뜻함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낯선 곳에 온 겐리가 겪는 고난도 새로운 세상을 위한 희망과 다르지 않다.


하나로만 되어 있지 않다. 게센 행성 사람들이 양성을 구비하고 있듯이 이들에게 어둠의 왼손은 곧 빛이다. 그러니 고통은 곧 행복의 다른 면이다. 하나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겨울 행성이었던 게센, 그리고 특사인 겐리의 말을 믿지 않거나 또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부정했던 사람들, 하지만 이것으로 끝나지 않음을, 이러한 어둠을 통해 빛으로 나아가게 됨을 르귄은 소설을 통해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소설 제목인 어둠의 왼손은 여러 행성들이 서로 교류를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인 빛을 향해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 우리에겐 무엇이 있나? 이것 아니면 저것? 아니다. 이것과 저것은 음과 양처럼 결코 떨어질 수 없다. 태극에서 음양이 나오고 어쩌고 하는 동양철학을 운운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은 결코 하나로만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이 소설처럼 어둠의 왼손은 빛이고, 빛의 오른손은 어둠이다. 또한 단일한 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융이 주장하듯이 우리 역시 단 하나의 성만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남성성-여성성 중에 어느 성이 더 우세하게 나타나는가 하는 점이 있을 뿐이다.


게센인들이 지니고 있는 양성이 때와 장소에 따라서 다르게 발현하듯. 그리고 그럼에도 이들은 한 성만을 지닌 존재도 인정해주는, 다름이 다름일 뿐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살아가듯, 개인간 만남이든, 나라간 교류든, 또는 외계 존재와 만날 때든 우리가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할지에 대해 이 소설은 생각하게 해주고 있다.


역시 르귄은 배신하지 않는다. 소설을 읽으며 마지막 장을 덮기가 아쉽다는 마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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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7-07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kinye91 2021-07-08 04: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07-08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

kinye91 2021-07-08 04:4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페드로 파라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3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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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 문학에 관한 책 "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를 읽다가 발견한 작가다. 내게 좋은 책이란 바로 이렇게 다른 책으로 인도하는 책이다. 라틴아메리카 문학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많이 읽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책을 통해 소개받고 읽기도 한다.


후안 룰포라는 작가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 라틴아메리카 문학에서는 고전의 반열에 든 작가라고 한다. 특히 이 소설 "뻬드로 빠라모'는 여러가지 기법이 실린 작품으로 '마술적 사실주의'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한다.


마술적이라는 말과 사실주의라는 말. 서로 어울리지 않는 이 말이 하나로 합쳐져 환상적인 공간, 상상의 내용이 펼쳐지지만 그것이 사실을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 되고 있으니... 


라틴아메리카라는 이름에서 느껴지는 환상을 소설에서도 느낄 수 있다.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내용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꼬말라'라는 장소. 이곳에는 이제 사람이 살지 않는다. 이 도시는 파괴되었다. 이 도시로 뻬드로 빠라모를 찾아오는 후안 쁘레시아도로부터 소설은 시작한다. 그런데 그는 곧 죽는다. 죽는 과정이 나와 있지도 않는데, 죽어 있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이야기를 한다.


소설이 중간으로 넘어가면 후안 쁘레시아도는 더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이제는 뻬드로 빠라모가 등장한다. 이렇게 소설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뻬드로 빠라모의 아들인 후안 쁘레시아도가 서술자로 등장하여 '꼬말라'가 지닌 면모를 보여주는 부분.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리고 그도 곧 유령이 되어 유령들과 대화를 한다. 또 그는 옆 무덤에서 나오는 소리도 듣는다. 이 소리들이 다시 과거로, 유령들의 세계라기보다는 뻬드로 빠라모의 세계로 이끌어 간다.


혼란에 휩싸인 멕시코. 피폐한 민중들의 삶. 여기에 절대자로 군림하는 토호. 이도저도 못하는 종교. 그리고 반란. 이런 면들이 모두 표현되고 있는 소설인데...


뻬드로 빠라모를 통해 토호가 온갖 비행을 저지르면서도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 부패한 정부도, 이들에게 봉사하는 지식인들의 모습을 표현하면서 당시 혼란스러운 멕시코의 상황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죗값이라고 하는데... 뻬드로 빠라모가 죗값을 제대로 치렀으면 상황은 나아지겠지만,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수사나의 죽음으로 오히려 꼬말라를 파괴한다. 죗값을 치르기는 커녕 더 큰 죄를 더하고 만다.


그의 죽음은 이러한 치르지 못한 죗값을 보여주고 있고, 그 결과 꼬말라는 안정되기보다는 계속 혼란에 빠지게 된다. 꼬말라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가 죗값을 치렀다면 "꼬말라'를 그 아들인 후안 쁘레시아도가 재건하는 모습으로 그렸을 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 그 아들이 죽어버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세가 잘못을 딛고 일어설 수 없는지경에 이르게 만든 사람. 뻬드로 빠라모. 


자, 이것은 "꼬말라"라는 환상적인 장소에서 펼쳐지는 사람들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라틴아메리카가 한동안 혼란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게 마술적 사실주의 표현을 통해 라틴아메리카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결코 길지 않은 소설이지만 다양한 기법들이 쓰여서 여러 길로 상상의 날개를 펼치게 한다. 이제 "꼬말라"에는 더이상 사람이 살지 않는다. 오는 사람도 없다. 


소설은 이렇게 황폐한 꼬말라로 끝나지만 라틴아메리카는 그 황폐함 속에서 다시 일어서고 있다. 아마도 작가가 "뻬드로 빠라모"의 죽음으로 소설을 끝낸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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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을 뚫고 시가 내게로 왔다 - 소외된 영혼을 위한 해방의 노래, 라틴아메리카 문학 서가명강 시리즈 7
김현균 지음 / 21세기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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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책들이 많이 번역되었다. 해방신학이라고, 기존의 체제를 옹호하는 종교가 아닌 기존 불합리한 체제를 전복시키는 종교를 주창한 해방신학. 그리고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저항시인으로서 파블로 네루다라는 이름이 알려졌다. 또한 우리나라 독재체제를 어떻게 종식시킬 수 있나 고민하면서 쿠바 혁명을 비롯한 라틴아메리카 혁명에 관한 책들도 많이 번역되었다.

 

그때 처음을 라틴아메리카에 관심을 가졌다고나 할까? 어쩌면 라틴아메리카는 여전히 미지의 대륙일지도 모른다. 큰 마음 먹어야 여행을 할 수 있는. 그리고 아직도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다고 여겨지는. 또한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이와 상반되게 축구를 엄청 좋아하고 잘하는 나라들이 모여있는 대륙으로.

 

라틴아메리카 사람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내게는 '체 게바라'였다. 그 다음이 '파블로 네루다' 여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지리적 거리만큼이나 심리적 거리도 멀었다. 지구촌이라는 말, 고상한 척하는 사람들이 글로벌이라고 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과거의 시야에 갇혀 있었다.

 

오장환이 시를 통해 말한 '성벽'에 갇혀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러다 읽게 된 이 책을 통해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변방 문학이 아님을 알게 됐다. 아니, 문학에 변방이 어디 있는가? 문학은 그 자체로 모두가 중심이다.

 

문학을 지구에서 차지하는 힘의 논리에 따라 '중심-주변'으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세계문학사가 유럽 중심으로, 백인중심으로 기술되었지만, 이제는 그러면 안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학자들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문학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고, 아프리카 문학을 포함한 다른 나라들의 문학을 연구하고 소개하는 사람도 늘어나게 되었다.

 

그 중에 라틴아메리카 문학, 그 중에서도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루벤 다리오,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호, 니카노르 파라'는 라틴아메리카 문학이 변방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 사람들이다.

 

모든 문학이 중심임을, 자신들의 삶을, 표현 양식을 반영하고 있음을, 그래서 가치가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이 네 시인을 중심으로 책을 썼지만, 이들 외에도 많은 라틴아메리카 작가가 나온다. 특히 소설에서 마르케스와 보르헤스를 빼놓을 수는 업다. 이들은 어느 한 나라, 대륙을 대표하는 작가가 아니라 우리들 모두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라틴아메리카 문학이라고 해도 모두 같지는 않다. 같을 수가 없다. 문학은 문학자 수보다도 더 많은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이 라틴문학이다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책에서는 이 네 시인을 통해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문학이 무엇이었나를 보여주면서, 그들이 서로 주고받은 영향에 대해서도 알려주고 있다.

 

라틴문학을 세계문학으로 끌어올린 (이런 표현은 적당하지 않지만, 당시에 라틴아메리카는 변방이었으므로, 그들에게서 변방 문학이라는 의식을 없앴다는 표현으로 생각하자) 사람으로 루벤 다리오를 드는데, 그가 그렇게 인정받게 된 이유는 스페인에서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하여 변방문학이라는 의식을 떨칠 수 있게 되고, 이제 라틴문학은 주변-중심의 문제를 벗어나 그들의 문학을 하게 된다. 여기에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네루다가 나오고, 그와 교류를 하면서도 시집 몇 권을 내지 못했지만,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가는 바예호, 그리고 시를 반시(反詩)로 기존 시에 도전하고 새로운 시를 만들어가는 파라까지.

 

여기에 더해 질문과 답이라는 각 시인을 소개한 글 뒤에 실려 있는 부분에서 우리나라 시인들과 비교해 주고 있는 점이 더 좋았다. 문학은 개별적이지만 보편적이기 하기 때문에, 파라와 같이 반시를 주장하는 사랆으로 대표적인 우리나라 시인 '황지우', 바예호처럼 절망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기형도'를 들고 있으니.

 

이 책 앞부분에 나와 있는 멕시코 시인 에르난데스의 발언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카프카가 우리 곁을 지나간다. 우리는 감격하여 인사한다. 그는 우리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다.' (30쪽)

 

카프카 역시 살아생전에 유럽 문학에서는 변방 아니었던가. 마찬가지로 라틴문학도 변방이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들은 이 책에 언급된 세계적인 시인 4명 말고도 더 많은 시인, 더 많은 문학가들을 낳고 있다.

 

단지 그것만이 아니라 그들은 그들의 문학을 함으로써, 문학에서 '주변-변방'이라는 의미를 해체해 버렸다. 이 책은 그러한 해체의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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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일랜드
올더스 헉슬리 지음, 송의석 옮김 / 청년정신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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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더스 헉슬리 소설이다. "멋진 신세계"에서 디스토피아 세상을 그렸다면, 이번에는 유토피아 세상을 그렸다. 그런데 유토피아란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곳이니, 유토피아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곳이 되어야 한다.

 

"멋진 신세계"에서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되어 인간을 배아 단계에서 이미 결정하는 결정론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다면, 이 소설 "아일랜드"에서는 개인의 존엄을 인정하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

 

개인, 노동, 예술, 가정, 사회, 나라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헉슬리는 이런 세상을 바란다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과연 이런 세상이 존재할 수 있느냐다.

 

제목을 아일랜드, 즉 섬이라고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겠다. 우선 다른 나라들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한다. 영향을 덜 받아야 자신들이 지닌 이념을 지켜낼 수 있다. 하지만 섬은 정체될 수 있다. 즉, 자신들끼리 행복하게 지낼지 몰라도 외부 발전과 동떨어져 있기에 외부의 침략에 대비할 수 없게 된다.

 

외부 침략에 대비하려면 그에 맞서는 기술을 갖춰야 하는데ㅡ 기술 발전이 인간 사회를 행복보다는 파멸로 이끄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아일랜드와 같은 유토피아에서는 그런 발전을 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일랜드 역시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자원이나 또는 다른 나라들이 생산하지 못하는 것을 생산해야 한다. 아무리 아일랜드라고 해도 '닫힌 체계'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비극이다.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나, 외부 세력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곳. 이것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유토피아는 사라지고 만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풍부한 석유자원을 지니고 있어 외국 세력의 노림수가 된다. 여기에 진보를 주장하는, 아마도 그것이 진보를 가장한다고 해야 하겠지만, 정치세력에 의해 팔라라는 아일랜드는 유토피아로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윌이라는 사람을 등장시켜 팔라 섬에 들어가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관찰하고 경험하게 한 다음, 그들에게 동조하게 만드는 소설 줄거리 속에서, 우리는 과연 유토피아란 가능한가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

 

닫힌 체계만으로 유토피아를 이룰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열린 체계를 지향한다면 유토피아는 더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다. 팔라의 경우처럼, 그들은 최소한의 교류를 원하지만, 강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는 주변국들은 그럴 의향이 별로 없다.

 

결국 유토피아는 열린 체계에서 주변국을 고려해야만 한다. 이 소설은 그렇게 한 나라만으로는 유토피아가 가능하지 않음을,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들은 받아들이고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를 추구하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이나 르귄의 소설에 나타나는 유토피아는 결코 완성된, 모두가 행복한 곳은 아니다. 이들이 그리고 있는 유토피아는 만들어가는 과정에 있는 완벽하지 않은,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살아가는 사회다. 그런 사회가 유토피아라는 것을 명심하고... 주변국과 관계를 잘 고려할 수 있어야 함을 생각하게 하는 소설이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유토피아의 모습은 누구나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팔라에서는 매일 2시간의 노동을 하는데, 의무가 아닌 즐거움으로 하는 노동이 되어야 한다(228쪽)고 한다. 이만큼 유토피아에서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관계를 확립해야 한다.

 

또한 유토피아는 전쟁을 반대하고, 다른 사람보다 4-5배 이상 부유한 사람이 없는 사회(233쪽)라고 한다.

 

이 소설에 나와 있는 이 구절...지금 우리가 곱씹을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기, 중공업, 산아제한을 다른 말로 바꿔보는 것도 괜찮을 듯.

 

전기에서 중공업을 빼고 산아제한을 더하면 민주주의와 경제적 풍요가 되고, 전기에 중공업을 더하고 산아제한을 빼면 빈곤, 전체주의와 전쟁이 되는 거지. (231쪽)

 

이미 중공업을 넘어서 과학기술이 이 소설이 발표된 때보다 더 앞으로 간 지금, 우리는 어떻게 해야 우리가 서로를 위하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가 살아가고자 하는 사회를 상상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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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 어슐러 K. 르 귄 걸작선 2
어슐러 K. 르 귄 지음, 최용준 옮김 / 시공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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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라는 말. 참 쉬운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너무도 어려운 말이다. '용서'란 말을 쉽게 써서는 안 된다. 이 말은 피해를 당한 약자들이 자신들의 약함을 극복했을 때, 자신들이 지녔던 두려움을 이겨냈을 때 비로소 할 수 있는 행동이고, 그럴 때에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럼에도 너무도 쉽게 '용서'란 말을 쓰라고 강요한다. '용서'가 무슨 선행이나 베풂인 것처럼 '용서해라, 그래야 네 맘도 편하지.'라는 말을 한다. 특히 자신과 상관없다고 여길 때 더 자주, 더 편하게 이 말을 쓴다.


하지만 '용서'는 함부로 할 수 있지도, 또 함부로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용서'에는 진정한 반성이 앞서야만 한다. 반성, 참회, 행동의 수정, 일명 개과천선을 한 이후에 상대에게 온전히 자신을 맡겼을 때야 비로소 쓸 수 있는 말이다.


그것도 '용서는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 베푸는 것'이다. 결국 용서란 말에는 기존까지 지녀왔던 관계를 뒤집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관계의 전복, 강자와 약자의 역전. 이런 새로운 관계 속에서 '용서'란 말이 쓰이고, 그런 행동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용서'다.


따라서 '용서'란 말에는 새로운 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새로운 행동, 새로운 질서, 새로운 마음 등이 정립되어 있지 않다면 '용서'란 말을 쓰는 행위는 미사여구에 불구하다.


르귄이 쓴 소설을 읽는 중인데, 늘 감탄하는 것이 바로 이렇게 다른 방향에서, 또는 기존에 놓치고 있던 부분을 더 깊게 생각하게 한다는 점이다.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이라는 제목에서 어떤 용서가 나올까 궁금했는데, 용서라기 보다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편이 더 좋겠다. 바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것 자체가 기존의 질서를 용서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혁명과 해방 이후에 이루어진 배신... 혁명은 하기보다는 혁명 이후에 혁명이 추구했던 것들을 이뤄나가는 것이 더 힘들다. 예이오웨이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그들은 식민지에서 벗어났지만,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한다'는 니체의 말처럼 예이오웨이에서도 해방 이후 다시 권력을 쥔 자와 그렇지 못한 존재들로 나뉘게 되는 현실.


여기에 권력을 쥐기 위해서 상대를 이용하거나 지위를 남용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여성들은 다시 노예의 처지로 전락하는 모습들... 첫번째로 실린 '배신'은 이런 혁명 다음에 일어난 일들을 다루고 있다. 세속의 삶에서 벗어나 죽음을 맞이하려는 요스와 권력자에서 배신자로 떨어진 압바캄.


이 둘이 서로 어울리게 되는 과정, 이것이 바로 용서의 한 길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찾아가면 '용서'는 쉽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용서의 달'이라는 소설에서는 에큐멘 특사인 솔리와 그를 경호하는 테예이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웨렐에 자유와 평등을 관철시키려는 솔리라는 특사. 그를 경호하는 일을 맡은 테예이오. 여전히 여성을 하등존재로 취급하는 웨렐에서 솔리는 그런 행동이 부당함을 이야기하지만... 암살 사건에 연루되고.. 


소설은 솔리와 테예이오가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식민지 전쟁에 참여했던 테예이오가 변해가는 모습. 그가 정신적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 그래서 솔리와 결합하는 과정은 지배계층에서도 자유와 평등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용서'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기존 지배층의 반성과 그것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선행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늘 있음을, 외부의 지원만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그래서 솔리와 테예이오는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는 것이고.


'사람들의 남자'로 가면 이런 외부인이 예이오웨이에 정착하면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이 그려지고 있다. 내부에서 개혁하려는 움직임과 함께 하는 사람. 합찌바... 그가 그동안 겪는 과정들을 통해 르귄이 어떤 세상을 상상하고 있는지를 알아가게 된다.


이 합찌바는 네 번째 소설 '한 여자의 해방'에 다시 나온다. 라캄... 노예로 태어나 지내다가 자유민이 된 사람. 그럼에도 웨렐에서는 여전히 남성들의 지배가 공고하니, 노래로 듣던 예이오웨이로 가기로 하고 그곳에 가는 라캄.


그러나 말로만 듣던, 책으로만 알던 해방된 예이오웨이에서도 권력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고, 그곳에서 여성들의 해방을 위해 일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합찌바와 만나게 되고. 결국 그들은 비밀투표를 통해 자유와 평등이 명문화된 헌법을 만들어내게 된다.


그렇게 된 다음에야 비로소 '용서'가 시작될 수 있음을... 이 소설들을 통해 관계의 역전 없이는 '용서'가 있을 수 없음을 생각하게 된다. 혁명 이후 다시 존재하게 되는 과거의 권력관계... 사람들이 바뀔 뿐 제도는 바뀌지 않는다면 그 속에서 '용서'는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원하는 혁명은 제도를 그대로 두고 사람들을 바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바뀌는 만큼 제도 역시 바뀌어야 한다. 식민지에서 벗어났다고 다시 새로운 권력관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관계 자체를 없애려는 활동들을 해야 하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가장 약했던 존재들의 바람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 읽으면서 끝에 가면 갈수록 책을 덮고 싶지 않아 일부러 천천히 읽은 그런 책. 혁명보다는 혁명 이후가 더 중요함을, 혁명 이후에 진정으로 '용서'란 말을 쓸 수 있으려면 철저한 전복, 그리고 과거의 것을 반복하지 않는 자유와 평등이 중요함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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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6-04 23: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kinye91 2021-06-05 05:3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1-06-05 1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kinye91 2021-06-05 11:06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