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인문학 - 인문학과 싸우는 인문학
최진석 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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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모자람을 자책하며 책을 읽는다. 저자의 생각에 닿지 못해 같은 줄을 서너번 되돌아 읽기도 한다. 더러는 내게 오기도 하고 더러는 읽는 속도로 잊혀진다. 행간을 읽지 못한채 '대체 내가 이걸 왜 읽고 있는가' 후회만 가득한 때가 많다. 대체 어디에 써먹자고 이책을 읽고 있는가.  

<불온한 인문학>을 읽으면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이진경의 '횡단의 정치 혹은 불온한 정치학'에서는 읽기를 그만둘까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슬그머니 짜증도 약간(?) 났다. 소외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횡단은 하나의 지식을 다른 지식과 통합하여 단일한 체계를 부여하려는 발상을 가로지르는 것이고, 이런 저런 지식들을 근거짓는 것과 근거지워지는 것, 근본적인 것과 부차적인 것, 일차적인 것과 이차적인 것의 위계적 지위를 부여하려는 발상 전체를 전복하는 것이며, 주어진 자리를 지키는 것과 반대로 거기서 이탈하여 엉뚱한 만남의 장소를 창안하는 것이다.  ... 횡단은 이러한 분할의 경계를 횡단하며 그것은 부수고 전복하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고 말할 수 없던 것을 말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경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권력에 대한 저항이고 

하나의 단어, 담론이라고 해야하나, 횡단이라는 말 속에 담겨있는 뜻을 알지 못했을 때 나는 이 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들만이 경험하고 체득한 주름들이 켜켜이 녹아 있어서 순수 독자인 내가 그 속을 들여다 보기에는 벅차다. 이 책의 저자 대부분은 수유+너머 에서 함께 공부하고 실험하며 그 결과를 체험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 책의 독자가 될 수 없는건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면 똑똑하지 못한 독자의 징징거림이 되는 것인가.  

그렇다고 해도 <불온한인문학>의 모든 내용이 내게 무용해 보이는 것은 아니다. 백화점 문화센터 인문학 강좌를 대표로 정말 인문학의 위기가 맞는가 싶을 만큼 여기 저기 널린 인문학 강좌에 대한 의문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소위 교양있는 시민을 만드는 것이 사실은 다루기 쉬운 시민을 육성하려는 모종의 계책이 숨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동의하면서 어쩌면 이런 상황이야말로 인문학의 위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노숙인들에게 인문학이 치유나 위로가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는 인문학이어야 한다는 말도 불온하지만 나는 동의한다.  

그렇다면 나는 현재 어디에 있는가. 머리로 가슴으로 읽히지 않는 책들을 읽으면서 깨닫지도 못하고 자신을 변화시키지도 못하면서 꾸역꾸역 책을 읽는 것은 대체 내게 어떤 도움이 되는 것일까. 책을 읽고 소통하는 일이 막힌 상태에서 나는 어쩌면 혼자하는 공부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 내가 거둔 가장 큰 소득은 혹은 깨달음은 그것이다. 책을 읽는 이유는 그것이 나를 변화시키리라는 확신 때문이다. 전혀 느껴지지도 않고 눈치 채지도 못하지만 나는 변해갈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그들이 공부하는 현장에 함께 있지 못한다고 해서 소외받았다고 억울해 하거나 부러워할 필요도 없다. 왜 일인 공부는 안된다고 생각하는가. 내가 알고 있는 선생님은 오랫동안 일인 공부를 해오고 있다. 다만 읽고 생각하기를 게을리하는 것이 문제다. 

나는 과거에도 현재에도 어쩌면 앞으로도 사회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한 개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를 들여다보는 일을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남의 작업실을 둘러보고 부러워하는 일도 여전히 하겠지만 그 때도 나는 그들의 작업 결과를 부지런히 내 생활로 옮겨올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 어쨌든 내가 왜, 뭐하러 책을 읽고 있는가 의심하지 않고 읽고, 생각하고, 쓰고 할 것이다. 뭐 어떤가. 내가 누구의 삶을 사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건 내가 사는 것은 나 아닌가. 꺾이지말고 오랫동안 이 생각을 유지해 가길 바란다.  

<불온한 인문학>은 그렇게 나에게 영향을 주었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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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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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을 공부하고 명상하고 사유 바깥으로 횡단하는 인문학자들이 모여사는 행복한 공동체가 있다.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난다. 도대체 나는 정체가 무엇인가. 아줌마면 아줌마 답게 아이 잘 키우고 살림 잘하고 살면 될 일이지 어쩌자고 자꾸 마음이 이리 저리 넘나들기만 하는가. 고통스러울 정도다. 이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상위 1%의 삶은 확실히 나와 분간이 가는데 대체 이런 사람들의 삶은 분리가 안된다.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공부에 대한 열망때문인지, 이즈음 거의 확신하는 공동체 삶에 대한 희망 때문인지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책 속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 만큼이나 내 현재와 미래의 삶을 기획해보다 말다 했다.  내 몸이 무겁게 느껴지고 질투를 겸한 절망으로 책을 접는것은 오로지 내 탓이다. 행동하지 않은 자의 구구한 변명이다.  

"각각은 모두 하나의 '코뮌'이 되어 또 다른 인접계열들과 접속을 시도해 갈 것이다. 중심은 많을수록 좋다. 별이 많을수록 밤하늘이 찬란한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에 그리고 지구촌 곳곳에 크고 작은 코뮌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를! 길이 길을 만들고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 삶이 온통 길이 되기를!  사람들이 한 곳에서 다른 낯선 곳으로 건너갈 수 있는 길이. "   

공동의 삶이 기획되고 유지되고 진화하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크든 작든 함께 하는 삶의 방향을 알 수 있었다. 화폐가 없어도 최소한의 화폐와  각자가 가진 것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함을증명해 주었다. 이 부분에서 나는 또 한 번 가슴이 쓰라렸다. 공동체 삶을 꿈꾸는 나는 화폐를 대신해 무엇을 나눌 수있을까? 화폐를 대신할만한 무엇이 나에게 있을까? 그야말로 나란 사람은 안락한 가정주부로 남편이 노동한 대가에 얹혀 사는 사람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칠때는 정말 부끄러웠다. 거의 자학의 수준이다.  

나는 수많은 사람의 결 속에 어디쯤 속해 있을까. 내가 정작 괴로운 것은 자꾸 몸에 맞지않는 옷을 어떻게든 입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나이 먹도록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헤매고 있는 꼴이라니. 수유+너머 공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여우가 못먹은 신포도 같기도 하고 '강남좌파' 같기도 하고, 상위 1% 같기도 하다. 절대 비아냥이 아니라 부럽다 못해 이런식으로 비겁하게 질투를 하는 것이다. 진심은 그들 모두를 존경한다. 그들의 노동으로 얻어낸 글과 책들을 내가 이렇게 잘 받아먹고 있다. 문제는 내 생활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책상 앞에서 거의 망상에 가까운 사유나 하면서 몸만 비대해지는 나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그 때가 되어야 나는 길앞에 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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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 인문학의 눈으로 본 신자유주의의 맨 얼굴
엄기호 지음 / 낮은산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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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돌보지 마라’는 제목이 이상했는지 열 살 아들이 갸우뚱 한다. 남은 돌보고 도와줘야한다고 배웠는데 제목이 이상한 모양이다. 엄마가 그런 제목의 책을 읽고 있는 것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뭐라 오래 설명하지는 않고 그저 너도 이상하지? 정도로 넘어갔다. 나도 이상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의 민낯을 우리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에 비추어 보여준다. 읽다보면 왜 이토록 우리 마음이 아프고 늘 피곤한 지 원인을 알 수 있다. 몸이 상품이 되고 소비가 되는 사회가 신자유주의의 끝장 모습이다.

그렇다면 해결하거나 혹은 작은 희망의 빛줄기라도 잡을 방도는 무엇인가.

저자는 공동체에서 대안을 찾는 것 같다. 희망과 연대로 뭉친 공동체가 파편화 되고 개별화 된 인간들을 모으고 인간성 혹은 영성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아울러 사유 하기를 권한다. 사유란 무엇인가. 생각하는 것이다. 금방 해답이 나오는 문제도 있지만 오래도록 생각해야하는 문제도 있다.

늘 열혈 남아의 고조된 억양에 함께 흥분하며 책을 읽게 된다. 함께 분노하고 가슴을 치며 속상해 한다. 이게 현실이라면 나는 현실을 정말 모르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반성하며 읽는다. 상대적으로 내가 중산층의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살고 있다는 안도감 마저 들게 하면서 또 한번 죄책감에 빠지게 한다.

하자센터나 간디학교에서 실행하고 있는 교육들이 해답처럼 들여오는 것이 나는 왜 불편하고 힘들까. 간디학교에 입학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더 그런 것 같다. 까다로운 심사와 자격 조건이 있어서 마음 하나로는 안된다는 패배감에 빠져버렸다. 분명 잘 모르고 짐작하는 것이다. 아이가 아직 어려 본격적으로 대안교육을 생각해 보지 않는 탓도 있다. 하지만 늘 공동체를 꿈꾸고 대안 교육을 희망하는 사람인데 왜 자꾸 그것 또한 그들만의 리그처럼 느껴지는 지 모르겠다.

뭐든 구하는 자가 얻는 것이 진리라면 내가 구하지 않은 탓이다. 그러면 정말 공교육 현실에서 아이들은 희망없이 공부하는 기계로 조립될 수 밖에 없는가.

모두가 대안 교육을 받을 수 없는 현실이다. 나는 어느 정도 대안학교가 귀족화되었다고 생각할 정도다. 투정이나 패배 의식에 사로잡힌 자의 빈정거림이라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어떻든 공교육 현장의 아이들도 뭔가 출구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바램이다. 대다수의 평범한 아이들이다. 튀거나 문제거나가 아닌 정말로 평범한 이 땅의 수많은 아이들은 누가 위로해주어야 하나.

각자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걸 극복하고 함께 하자는 것이 연대일텐데 나는 어디서 연대의 희망을 볼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갑자기 심각해졌다. 희망의 연대를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돌보지 마라는 신자유주의의 얼굴에 훅을 날릴 수 있는 힘이 내게는 없다. 그냥 전전긍긍 누가 날 도와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이제는 정말 사유를 하고 선택을 하고 실천을 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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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의 숲과 동무공동체 - 어울림으로 비평으로 숲으로
김영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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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비밀(?)을 이제서야 하나 알아냈다. 글 속에 숱한 철학자들의 말과 글이 단 한 순간도 멈춤 없이 오르내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표절을 손으로 축구를 하는 선수는 이미 축구 선수가 아니라는 말로 대신하는 그를 읽으면서 그의 말과 그의 말이 아닌 것을 분명히 가르는 것이다. 학인으로서(그는 학자라는 말 대신 학인이라는 말을 쓰는데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그의 모습을 본다.  

 알면서도 모른체 하기라든가 몸을 끄-을-고, 산책 혹은 몸이 좋은 동무라는 말의 속뜻을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다. 이해할 수 있는 부분 보다 어려운 부분이 더 많다. 하지만 관심을 갖고 잘 들으면 곧 알아 들을 수 있다. 그의 글은 독자로 하여금 글을 잘 들여다'보고' 잘 '듣게'한다. 아마 내가 그의 글이 읽기가 힘들면서도 읽고 싶은 이유가 이런 훈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그의 글에 나타난 그의 면면을 더듬어 보자면 그는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고 센 사람이다. 그것을 엿볼 수 있어서 좋다. 가령 "우리의 산책은 오직 체계와의 창의적 불화의 형식이며 그 형식에서 뺄 수 없는 부분이 곧 자본제적 도시다. 도시를 정화할 힘이 없으면 이미 그것은 인문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 곳곳에 있다. "산책 하지 않는 자는 결국 인식의 고리나 내성적 자아의 반성에 머무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에도 밑줄이 그어져 있다.

공부와 삶이 어긋나지 않게 이드거니 어울리며 어리눅어 가기를 희망하는 것 또한 내 공부의 방향을 보여주는 것 같다.  아카데미 좀비 조차 아닌 평범한 주부지만 주부라고 공부할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내 지적 능력으로는 그의 숲 언저리조차 도달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허나 몸을 끄-을-고 나서보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그러고 나니 아무도 없는 시간에 혼자 읽게 되었다. 역시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아직도 그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단 한 발자국도 걸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아무것도 아니어서 나는 그의 책을 몰래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런 나를 그는 뭐라고 할까. 여보쇼 어렵고 이해도 안되는 것 그만 내려놓고 차라리 아침 드라마나 보라고 면박을 줄까. 그렇게 몸을 끄-을-고 읽는 나를 동무로서 봐줄까. 아무래도 상관 없다. 이것이 나의 실재고 나는 내 실재를 받아들이고자 한다. 아무것도 아니지만 읽을 권리조차 없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언젠가는 산책길에 나설지도 모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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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ph 2011-03-27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주부님. 존경합니다.^^ 저또한 철학에 대한 보잘것 없는 바탕지식을 가진 무식한(?) 독자이지만 열심히 밑줄그으며 읽고 있답니다. 김영민 선생님의 책이 철학에 대해 잘 모르거나 오히려 부정적으로(저처럼)생각했던 독자에게 열심히 읽히고 있다면, 그것은 그분이 내내 강조하시는 '수행성'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철학책'으로 읽히는 게 아니라 실천에 주목하게 되는 '생활의 지혜'로 읽히는게 책을 잘 읽는것 같기도 하고요.

여울 2011-04-11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은 책을 읽게 되어 반갑습니다. ㅎㅎ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 20대와 함께 쓴 성장의 인문학
엄기호 지음 / 푸른숲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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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다. 요근래 하버드 대학의 마이클 샌델 교수 강의를 보면서 하버드 대학생들의 깊이있는 질문과 교수의 폭넓은 대화 수업을 부럽게 보았다. 괜히 하버드 대학생이 아니구나 솔직히 부러웠다. 날것의 말을 철학의 언어로 정리해주는 강의실의 모습이 부러웠다.  

엄기호의 이 책을 통해 나는 이 시대 청춘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내가 부러워했던 하버드 대학생 못지 않은 청춘이었음을 알았다.  엄기호는 선생으로서 샌델 교수 못지 않았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책은 저자가 직접 수업을 진행했던 내용이 바탕이 되었다. 문화 인류학이라는 과목을 진행했는데 수업의 주제는 다분히 사회적이다. 살아있는 주제를 선정해서 집중적인 대화가 오고간다. 그 사이 학생들은 자신들의 삶이 학문적인 언어, 철학적인 사유로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한다. 잉여라는 마음 아픈 현실을 위로받는 것은 내 삶이 결코 의미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확인하는 순간이다.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청춘들을 이해하는 말로 가득하다. 청춘들이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춘들은 치열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 누군가의 눈에는 백수처럼 보일지라도. 문제는 오히려 학교밖의 사회며, 제도며, 기성 세대들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실감나게 제시하기때문에 공감하기도 쉽다. 한순간도 놓칠 수 없는 말들로 가득하다.  

나는 책이, 사유가 사람을 치유할 수있다는 것을 믿는다. 책 속에도 말하듯이 누군가 내 얘기를 귀담아들어준다는 사실만으로도 내 삶은 비루하지 않다. 학교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와 선생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알게 해주는 것도 고맙다.  

유한한 미래에 저당잡혀 오늘을 즐기지 못하는 삶을 조금만 다르게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치열하게 살든, 잉여로 살든 삶은 가치있다.  누가 뭐래도 자기 삶에 가장 열심인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그걸 인정하면 너는 왜그렇게 사느냐고 한심해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공부의 깊이는 눈에 보이는 얄팍한 현실을 인식하고 사유할 수 있는 힘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삶의 깊이를 헤아리는 인식의 힘, 사유의 힘을 생각하게 한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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