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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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사제지간이 된 지 스무 해가 넘었다. 강릉과 서울을 사이에 두고 일 년에 한 두 번 문안 삼아 뵈었다. 서울에 터를 잡아 살면서도 만남의 횟수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다. 오월에 한 번, 연말이나 연초에 한 번, 그나마도 그 중 한번은 그냥 지나친다.

스승의 머리는 반백이 되었고, 제자는 그냥 아줌마가 되었다. 차마 제자라고 말하기 어렵다. 나 말고도 시를 쓰는 제자들과 직장 생활을 하는 제자들이 시인을 함께 만난다. 금대봉 산행을 계획한 것은 지난 5월, 헤어지기가 아쉬워 다음 만남을 약속하자는 성화에 못 이겨 스승이 정한 일이다. 스승의 안내를 받아 지난 8월 25일과 26일 금대봉에 다녀왔다. 아랫녘으로 태풍 볼라벤이 북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출발했다. 다행이 날이 좋았다.

 

 

그즈음 읽기 시작한 책이 <삶을 바꾼 만남-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정민, 문학동네, 2011)이다. 이제 막 어린 황상이 주막집에서 다산을 만났다.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자기도 공부를 할 수 있겠느냐고 스승에게 묻는다. 스승은 빙그레 웃으며 어린 황상에게 <삼근계>를 써준다.

 

“공부는 꼭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둔하다고 했지? 송곳은 구멍을 쉬 뚫어도 곧 다시 막히고 만다. 둔탁한 끝으로는 구멍을 뚫기가 쉽지 않지만 계속 들이파면 구멍이 뚫리는 게지. 뚫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구멍을 뻥 뚫리면 절대로 막히는 법이 없다. 앞뒤가 꼭 막혔다고? 융통성이 없다고 했지? 여름 장마철의 봇물을 보렴. 막힌 물은 답답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빙빙 돈다. 그러다가 농부가 삽을 들어 막힌 봇물을 터뜨리면 그 성대한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단다. 얼마나 통쾌하냐? 어근버근 답답하다고 했지? 처음에는 누구나 공부가 익지 않아 힘들도 버벅거리고 들쭉날쭉하게 마련이다. 그럴수록 꾸준히 연마하면 나중에는 튀어나와 울퉁불퉁하던 것이 반진반질 반반해져서 마침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구멍은 어떻게 뚫어야 할까? 부지런히 하면 된다. 막힌 것을 틔우는 것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연마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어찌해야 부지런히 할 수 있겠니?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으면 된다. "(35쪽-36쪽)

 

시 쓰는 재주를 인정받은 황상은 스승에게 받은 삼근계를 평생의 길잡이로 삼았다.

스승은 어린 제자를 혹독하게 훈련시킨다. 잠시라도 허튼 기색이 보이면 다산은 벽력같이 호통을 쳐 제자의 마음을 다잡는다. 새신랑 황상이 공부를 게을리한다 생각하여 절로 보내버리고 이 제자는 아무 말 없이 스승의 말을 따른다.

어린 제자가 사회비판적인 시를 써 올리자 스승은 제자의 앞날을 걱정해 그 시를 절대 남에게 보이지 말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는 자신 또한 제자가 쓴 시와 같은 시를 써 보내 시 공부를 시킨다. 그 시가 <애절양>이다. 어린 아이까지 세금을 내야하는 현실을 비관해 젊은 아비가 자신의 양물을 자르고 만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시인을 젊어서는 스승으로 알았고, 결국 주례로 모셨다. 맥이 풀리고 사는 일이 잘 안 풀릴 때 스승의 주례 말과 시는 내가 걸어갈 이정표와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자괴감에 빠져있을 때 엄마로서, 아내로서 내 자리를 지키게 해 주었다.

그보다 앞서 언젠가 세상에 혼자인 것 같아 떨고 있을 때, 서울에서 제자들이 모여 스승을 뵈었다. 어두운 밤, 헤어지는 길 위에서 스승은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아무 말 없이 잠시 잡았다 놓아 준 그 손길은 그 후로 오랫동안 나를 잡아 주었다. 꺼내 말하지 않은 일이다.

 

 

이번 금대봉 산행은 가을꽃을 보기 위함이다. 열매를 맺기 전에 피는 것이 꽃이라 이미 여름꽃은 졌다. 가을꽃을 보려면 지금이 적기다.

시인과 걷는 산행은 느리다. 꼭대기를 목표로 삼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대봉 초입부터 꽃들이 만발이다. 스승이 꽃 이름과 그 내력을 설명하고 어른 제자들이 세상 처음 듣는 얘기 인듯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따른다. 고등학생 딸을 둔 제자도 열심히 듣는다. 지난 밤 만남의 회포를 푸느라 약주가 과했는가 날숨에 취기가 진하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열심히 스승의 꽃 이야기 듣는다.

금대봉 가을꽃은 이질풀, 쥐손이꽃, 투구꽃, 진교, 곤드레, 잔대, 오이풀, 톱풀, 눈빛승마, 마타리, 물봉선, 그 중에서도 스승이 특히 아끼는 참취가 한창이다. 돌배가 떨어졌는데 그 향이 무척 진하다.

간밤에 맷돼지가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몹시 분주했는가, 여기 저기 흙이 파헤쳐져 있다. 금대봉을 가로질러 가는 길에 저희들끼리 마음대로 피고 자라고 지는 꽃들이 어디 이것들 뿐이랴. 스승의 말은 길고 풍부했지만 미련한 제자가 기억하는 게 많지 않아 딱할 뿐이다.

금대봉은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나마 사람 발길에 망가지지 않은 곳이다. 그래도 대형버스로 실어나르는 등산객을 받느라 금대봉 등허리도 하루 종일 바쁘다.

서너시간을 걸어 내려온 곳이 이번 산행의 목적지 검룡소다.

검룡소는 한강이 발원하는 곳이다. 대개의 발원지가 생각보다 협소해서 심심했는데, 내가 본 검룡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장했다. 하루에 뿜어져 나오는 물의 양이 천톤 단위라고 하였다. 보는 눈이 없다면 그 물을 떠 마시고 싶었다. 얼마나 시리고 차고 달까 싶어서 꾹꾹 참은 갈증이 더 심해졌다.

그러나 차마 그 물에 내 손을 담글 수가 없었다. 보는 눈이 없다고 해도 함부로 손을 담글 수 없을 것 같았다. 검룡소에서 한참을 머문 뒤에 내려오기로 하자 참았던 비가 쏟아졌다.

길게 쏟아지는가 싶어 서둘렀는데 산자락을 미처 다 내려오기도 전에 비가 그쳤다. 선배 언니는 검룡소에서만 비가 내린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고 말했다.

집에 돌아와 책을 마저 읽다보니, 황상과 정학연, 혹은 다산이라면 이번 여행을 틀림없이 시로 남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늠되지 않는 상상일 뿐이다.

 

 

황상은 다산의 큰아들과 각별한 우정을 쌓았다. 유배지에 아버지를 보러 온 다산의 큰 아들 정학연과 함께 공부하고 산행도 다녔다. 그때마다 그들은 꼭 시문을 써 문답했다. 다산이 사망하고 정학연 마저 사망하자 늙은 황상은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다. 자기의 시를 읽어준 유일한 사람이 없으니 쓸 마음이 없어진 것이다.

다산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다산의 제자답게 살다 간 사람은 황상이다. 아전의 자식이라 벼슬길에 한계가 있지만 스승은 끝까지 공부하고 과거를 보라고 채근한다. 황상은 자신의 재주가 모자람을 내세워 끝내 과거를 보지 않고 스승의 소망을 대신하여 유인으로 살다 간다. 산속으로 들어가 일속산방을 열고 그곳에서 시 쓰고 공부하다 늙어 생을 마친다.

스승은 제자에게 삶의 길을 열어주기도 하지만 더러 제자에게 어리광을 부리기도 한다. 질투를 하기도 하고 아프다고 투덜대기도 한다. 스승은 복숭아뼈에 구멍이 날 만큼 무섭게 공부하고 글을 쓴다. 제자는 스승의 길을 묵묵히 따를 뿐이다.

이 모든 삶의 과정을 스승과 제자는 산문으로, 시로 남겼다. 몇 달이 걸려 도착하고 또다시 몇 달이 걸려 답장이 도착하는 식이었다. 그 사이 없어지는 편지도 있었다.

이 책에는 다산의 생얼굴이 많이 보인다. 아비이자, 스승이자, 유배 죄인이자 지식인의 얼굴을 모두 볼 수 있다. 스승을 꼭 닮은 제자 황상은 다산의 얼굴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스승과 제자는 서로 닮아가고 앞서간 스승의 길을 제자가 꼭 그 걸음으로 뒤따르는 그림을 보여준다. 몹시 부럽고 아름다운 그림이다.

 

금대봉 산행은 여행기이면서 그 흔한 사진 한 장 찍지 않았다. 스마트폰으로 꽃 몇 장을 찍었지만 나 혼자만 보기로 했다.

금대봉에 오르기 전에 함백산에 들러 반만 살아 있는 주목을 보았다. 사방이 트여 가슴이 뻥 뚤리는 것 같은 함백산 정상에서 일행은 모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겹겹이 쌓인 산자락이 마치 그림 같았다. 황홀한 눈길을 날카롭게 가르며 아프게 들어오는 스키장, 그것은 산의 속살이었다.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 어떻게 그 높은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기어코 산을 파헤칠 생각을 하였을까.

일행은 깎아 내린 산자락을 보며 인간이 참으로 못됐다, 못됐다 몇 번씩 중얼거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깎이고 파헤쳐지고 그야말로 인간의 손에 유린당하는 강과 산을 볼 때마다 어찌 견디시는가 물었더니 스승은 그냥 하루 종일 걷는다고 했다.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그러다가 영 안되면 검룡소를 찾기도 하고 꽃을 보러 간다고 했다.

몇 해 전만해도 스승이 금대봉 꽃을 보러 오면 이곳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드물었다. 지금은 인터넷 검색만 하면 금대봉에 사는 온갖 꽃의 사진과 찾아가는 길이 안내된다.

꽃 사진을 함께 보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은 스승의 말을 따르고자 함이다. 그저 마음에 담아가면 된다는 말에 그리하기로 한 것이다. 저희들끼리 꽃피우고 씨 퍼뜨리며 사는 곳에 우리는 잠깐 들렀다 가는 셈이다. 그 길은 조심스러워야 함이다.

황상이 스승을 모시고 이곳을 다녀간다면 꼭 시로 남겼을텐데, 나는 그럴 재주가 없다. 그저 꽃을 마음에 담아가라는 스승의 말을 기억할 뿐이다.

자연이 아플 때마다 ‘걷는 것’으로 화를 식힌다는 스승의 말을 귀담아 들을 뿐이다. 그 걷기가 미안함을 대신하는 것임을 안다. 그리고 그 장하고 장한 검룡소를 마음에 넣어둘 뿐이다. 그리고 스승의 시를 다시 꺼내 읽는다. 어리석은 제자 또한 스승을 따라 하리라 마음 먹으면서.

 

기분이 우중충하여/ 궂은 추억만 불러내는 날이면/ 기분전환을 위해 생각한다/ 검룡소의 맑고 시원한 물맛을/ 만회할 수 없는/ 바보짓에 대한 후회가/ 울적한 슬픔으로 가라앉을 즈음/ 마음을 추스르려고 떠올린다/ 한강이 발원하는 검룡소에서/ 힘차게 솟구치는 샘물을/ 솟구쳐 암반을 세차게 타고내려/ 시내가 되는 모습을/ 먹고 싸고 마시고 씻는/ 일상사를 온전히 의탁한 /한강의 주민으로서/ 세상을 사느라 맡은 배역이/ 누추해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문득 한 마리 물고기 되어/ 한강 천삼백 리 거슬러/ 태백의 금대봉 골짜기를 오른다/ 서해 용이 승천하러 오른다는 전설의/ 검룡소를 찾아가/ 시원의 약물 마시며/ 오장에 스민 병을 다스린다

<<검룡소>> 전문, 최두석 <꽃에게 길을 묻는다>, 문학과지성,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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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9-02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걷는 행위 속에 여러 가지 처방이 들어있음을 저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수수꽃다리 2012-09-03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늘 하이네라고 불러보게 되는 님! 보잘 것 없는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걷는 행위 조차 게으름으로 그만두고 마는 저라서 심하게 부끄럽습니다, 저는!
들어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걷습니다. 목적을 정해두지 않는 그 행위를 이해하려면 제가 더 '우중충'하거나 만회할 수 없는 잘못을 더 저지르거나 해야하는 건지^^

이진 2012-09-03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수수꽃다리님 오랜만이예요.
<북항>리뷰를 보고는 처음인 거 같은데 그새 리뷰를 두 개 정도 쓰셨군요+_+
오랜만에 인사하니까 좋은걸요, 되게!

수수꽃다리 2012-09-04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되게라는 말은 우리 강원도에서 정말로 자주 쓰는 말이랍니다. 되게 많이 쓰지요^^
늘 소이진씨 보고 있어요.
어디 끼이는 걸 잘 못하는 사람이라 쭈뼛거리다가 나와버리는 일이 많지만.
항상 놀랍고 감동하며 지켜보고 있으니 늘 건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