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를 뒤바꾼 위대한 순간들
황광우 지음 / 비아북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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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책들이 우연히 내게 온다. 황지우와 형제 관계라는 사실이 놀라웠고 철학콘서트를 읽으면서 왜 여태 이 사람을 몰랐을까 내 독서가 한참 모자랐구나 반성했다. <위대한 순간들>은 아직도 그의 글의 여운이 짙게 남아있던 중이라 내게는 아주 반가운 '순간'이었다. 

아직 글을 읽고 이해하는 재주가 모자란다고 느끼지만 아, 이 사람은 고수구나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다. 그때는 이미 부러움을 넘어서 무한의 존경과 감사로 몸을 낮추는 시점이다. 김영민 교수의 글들을 읽으면서 느꼈던 책읽기의 즐거움을 황광우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 느낀다. 도대체 얼마나 읽고 써야 이 사람들처럼 자유로워 질 수 있을까. 나는 과연 내 인생에서 그런 순간을 경험할 수나 있을까. 멀고 가당치 않은 바램이다. 어쨌든. 

나는 아는 것이 어찌 자유라고 하는 것인지 얼마전까지만 해도 잘 몰랐다. 알기는 했어도 그 참 맛을 느끼지는 못했다. 왜? 잘 몰랐으니까!  

<위대한 순간들>은 우리가 알고 있던 사건들이지만 나는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순간들을 짧은 글 속에 거대한 몸집을 들여놓고 있다. 말과 글은 누구나 할 수 있되, 황광우의 글은 눈으로 보이는 몸피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글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독자는 이상하게도 역사의 위대한 순간들을 한복판에서 겪는듯한 감동을 받는다. 그게 무엇때문일까 생각을 해 보았더니 그것은 제대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다. 또한 그가 돌아보는 역사의 순간들이 지금 이 순간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끊어져버린 역사는 의미가 없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이 역사 혹은 사건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내게는 의미있는 깨달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잘 살고 잘 헤아려야 하는 것이리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에 도착했을때는 머리에 쥐가 날 것 같고, 그냥 넘어가고 싶기도 하지만 도대체 이 사람은 도달하지 못하는 앎의 한계가 어디쯤일까 경외감을 갖고 읽는 것도 나쁘지 않다.  

따옴표도 없고, 대화도 없고, 감탄사도 거의 없이 빽빽한 문자들을 읽어내려가는 순간 말랑말랑, 시끌벅적, 요란지끈, 등등   역사의 순간 순간들을 생생히 경험할 수 있는 독서의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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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꽃나무 우리시대의 논리 5
김진숙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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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따위걸 책으로 만들어 내자고 나무를 베어내도 되는 걸까?"  

책을 내자는 출판관계자에게 그녀가 한 말이다. 책 날개에 적혀있는 이 문장을 나는 여러번 보았다. 글 솜씨가 있다면 이 말 속에 담겨있고 내가 느끼는 이 움직임들을 눈에 보이도록 적어놓을텐데 한없이 깊은 그녀의 삶처럼 헤아릴 길이 없다.  

나는 노동자였던 적이 없다. 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비정규직으로 일을 했으면서도 내가 일을 한다는 자각이 없었다는 뜻이다. 무지하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죄를 짓는 일이다. 나는 무지했다. 내가 뭘 하는지도 몰랐고, 내가 하는 일의 가치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한 때 개인이 하는 박물관에서 표 파는 일과 청소하는 일과 관람객에게 문화재를 안내하는 일을 함께하면서 밥까지 했고, 쎄콤을 설치한 뒤로는 밤에 위층에 있는 화장실도 갈 수 없었던 생활을 하면서도 내가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자각이 없었다. 말도 안하고 이미 일자리를 구해놓고 그만둔다고 말한 나를 관장은 배은망덕한 계집애 취급을 했음은 당연하다. 슬픈 것은 그런 취급을 받으면서도 그게 아무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가 <소금꽃나무>를 읽으면서 여지 없이 콧물 눈물 줄줄 흘려야했던 대목들은 그때 나만큼 어렸던 여자애들의 얘기가 나올 때다. 내 고향 친구들 또한 중졸에 산업체로 돈벌러 갔던 아이들이 있었고 나 또한 그럴 처지였다. 나는 공순이가 아니라 미경이라고 팔뚝에 유서를 남기고 생을 마친 그녀 앞에서, 문도 못닫은 채 매달려 가는 버스 안내양의 곡예 앞에서 나는 내 친정언니의 삶을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이해한다는 일이 참 어렵다. 나는 내가 공감과 이해 능력이 조금은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말뿐이었고 이해의 폭은 그저 내 경험의 폭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그토록 여러번 감정을 터뜨린 것은 그녀가 전하는 삶이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오랜 시간을 오롯이 하나의 바램으로 살아온 사람의 삶이 왜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것인지 정말 모르겠다. 그런데도 세상은 역사는 조금씩 나아진다고 말해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다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사람이 사실은 얼마나 힘이 '쎈' 사람인지 그녀를 보면서 깨닫는다.  

진심을 다해 그녀가 이루고자 하는 일이 단 한 발자국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그저 그 높은 곳에 있는 그녀의  이마를 스치고 가는 바람조차도 되지 못할 마음 뿐이지만 나는 지금 김진숙을 생각한다.  한없이 고맙고 또 죄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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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사색 - 시골교사 이계삼의 교실과 세상이야기
이계삼 지음 / 꾸리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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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없는 사회의 교육>에서 저자는 진정한 스승의 모습을 고민했다면 <변방의 사색>에서는 학교 밖으로 나온 모습을 많이 보여준다. 물론 여전히 학교 안에서 교사의 모습을 고민하지만 어느덧 그는 활동가의 근육이 단단해진 모습이다.  

최근 2-3년 사이 자신이 겪고 목격한 묵직한 사건들에 대한 사색이 담긴 이번 책은 저자가 힘들었던 만큼 읽는 사람도 함께 힘이 들었다. 세상은 그나마 제자리 걸음이라도 하는가 싶었는데 이젠 더이상 걷기를 멈추어 버린 것만 같다. 나는 늘 궁금하다.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옳다고 하는 일이 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가. 나처럼 그저 변두리에서 멍청한 눈으로 곁눈질이나 하면서 이것도 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인가. 새삼 이 세상에 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 김진숙 보다 그녀를 끌어내리려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이고, 강정마을을 그대로 두라는 사람보다 기어이 해군기지를 짓겠다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다. 사람과 자연은 한 몸이라 자연이 아프면 나도 아픈 지율 같은 사람보다 삽질로 돈을 버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자본과 권력까지 양 손에 들고 있다.   

나는 그가 언제까지나 교사였으면 좋겠다. 그가 학교 '안'에서 버텨 주었으면 좋겠다. 좌절도 절망도 하겠지만 그가 아니면 안되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나의 스승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지금 전교조도 좌초직전이고 진보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맥을 못추지만 그가 최후의 보루라도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물론 그리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흙과 일의 중요성에 깊이 닿아있는 그의 생각이 실행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내가 그렇게 살 수 없기에 더 간절히. 

그가 참 좋은 선생님이라는 것을 나는 "아이들은 미래의 유권자이며 우리가 해결하지 못하고 떠넘기는 이 사회의 온갖 문제를 풀어가야하는 당사자들"이라는 말 속에서 깊이 느낀다. 자식에게 지금보다 좀 더 좋은 세상을 물려주는 것이 부모(기성세대)의 몫이 아닌가. 나는 그가 한 이 말에서 뭍 아이들을 부모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속깊은 스승의 걱정과 미안함을 느낀다.  

늘 어둠이었고 새벽은 아직도 멀다. 나는 그래도 새벽이 온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 그저 여전히 어둡고 답답할 뿐, 전망 혹은 희망을 얘기할 수 없다. 나는 비겁하고 사는 일에 게으른 사람이다. 이런 깨달음도 이계삼 같은 선생님이 없었다면 얻지 못했으리라.  

몸만 멀리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마음도 멀리 있었던 김진숙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할 길 없어 이계삼이 알려준 그녀의 책 <소금꽃나무>를 주문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이것뿐이라고 짐짓 이것이 최선인 양 하는 꼬라지를 용서하지 않을테다. 너, 그러지 마라. 이래 저래 내가 마음에 안든다. 이게 뭐냐고. 이 더운 날, 선풍기 펑펑 돌려가며 한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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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좌파 -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 강남 좌파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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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강준만 교수는 부지런하다. 그가 듣고 읽은 말, 글들은 그가 자신의 논리를 펴 가는데 요긴한 소재로 쓰인다. 언론학자로서 나는 그의 자세를 배우고 싶고 존경한다. 그가 하는 말을 모두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그의 말에 모두 공감할 수는 없어도 이게 뭔가 싶은 것들의 속살을 꺼내 보여주면서, 이게 그겁니다. 알려주고 깨우쳐 주었다.  

오래된 독자로서 한동안 그의 근황이 궁금했던 것은 그나마 한겨레에서 그의 글들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새 많은 일들이 있었나보다.  

<강남좌파>는 인물을 벗어나야 우리 나라 정치가 발전한다고 하면서도 정치가 인물없이 가능한가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지금의 정부에서 나는 희망을 찾을 수도 없거니와 더 절망적인 것은 그래도 믿고 따를 구심점이 없다는 것이다. 내 식대로는 스승이 없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최빈국의 농민들은 한끼의 식사보다 한 줌의 씨앗에서 삶의 희망을 본다고 한다. 먹고 사는 문제는 어찌됐든 각자 해결할 수 있다고 쳐도 살다가 앞이 캄캄해질 때 물음표하나 해결해 줄 희망은 있어야하지 않을까. 

어쨌든 여러가지 불만이 생기는 <강남좌파>다. 생각을 논리적으로 쓸 재주가 없어서 답답할 뿐이다. 그래도 강준만 교수가 박근혜에 대해 쓴 글에 대해서는 영 못마땅하다. 이런것이 그가 책에서 말하는 소통일까. 반대쪽에 있는 사람도 그 쪽에서는 이쪽도 반대라고? 왜 이렇게 무디어졌거나 두루뭉술해졌을까. 쏜 화살처럼 날카로웠다고 생각했던 강준만 교수의 글끝이 당황스럽다. 박근혜의 여성적 매력에 대한 부분은 도대체 박근혜가 정치인인가 싶기도 하다. 조국이 잘 생긴 외모 때문에 입길에 오른다고 들엇는데 조국의 외모는 마이너스가 되고 결혼도 하지 않은 박근혜의 섹시함은 플러스가 된다니 나는 도무지 어안이 벙벙하다. 박근혜의 정책 부재를 비판할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다. 이상하게 부드럽다. 혹은 무디다. 강준만 교수가 이상하다. 

 학벌에 대한 강준만 교수의 생각이 가장 궁금했는데 그 또한 새로울 것이 없었다. 오히려 김규항의 전언들이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부르디외의 주장을 요약한 부분이 있는데 "교육은 사회적 불평등의 유지와 강화에 기여한다." 같은 부분을 강준만 식으로 더 강화해서 비판할 줄 알았는데 그저 현상만 나열할 뿐이어서 애 키우는 엄마로서 가장 김빠지는 순간이었다.  

남편은 책은 유행같은 거라고 하지만 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깨우침 혹은 앎에 대한 욕구 때문이다. <강남좌파>는 깨우침보다는 확인의 과정이고 카타르시스 없이 피곤한 책읽기였다.  그래서 나는 별을 세 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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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신의 함정 - 금태섭 변호사의 딜레마에 빠진 법과 정의 이야기
금태섭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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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태섭 변호사의 딜레마에 빠진 법과 정의 이야기" <확신의 함정>에는 정말 많은 소설이 등장한다. 애초에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젊은 변호사가 현장에서 직접 겪은 일을 이야기하고 있는가해서다. 물론 검사 시절 경험한 일들이 등장한다. 내가 착각을 했거나 책 광고를 오해한 것 같다. 어쨌든 그 많은 소설들은 소설로만 떠돌지 않는다. 소설이 다루는 이야기는 현재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나는 <확신의 함정>을 읽는 내내 문학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했다. 그만큼 현실의 문제를 설득력 있게 다루기 위해 금 변호사는 소설을 도구로 삼았다.  

그런데 소설이 시대 정신을 담고 있고 시대 상황을 형상화하고 있다고는 해도 이 책이 문학 에세이인지, 법조계에 종사하는 변호사로서의 치밀한 고민의 흔적인지 조금 헛갈린다.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문학은 시대를 대표하고 상황을 형상화하기는 하지만(현실성이 있지만) 작가의 상상이고 창작이라는 점이다. 한 편의 소설은 충분히 문제적일 수 있다. 현실의 문제를 현실이 아닌 문학 작품을 읽고 이해하고 분석하고 모순을 찾고 법과 정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어쩌면 조금 불편했나 보다. 즉 문학 작품(소설)이 매개가 된다기 보다는 문학 작품에서 원인과 해결을 찾고 현실의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짧게 마무리 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럼으로서 작가가 신의 위치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법과 정의 문제를 문학에 기대지 않고 치열하게 다루지 않은 점이 못내 아쉬웠나보다.   

법의 문제를 다루고 조정하고 판결을 내리는 판사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은 이 책 덕분이다. 판사의 판결은 개인적 감정에 의해 다루어질 문제가 아니지만 책 속에서도 잠깐 스쳐지나가지만 판사가 어떤 성향인지에 따라서 판결이 달라진다면 법 위에 판사가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한심한 생각도 해보았다. 즉 판사의 판단에 따라 누구는 죽을 수도 있고 누구는 살 수도 있는. 그런데 만약 그런 절대 힘을 가진 판사의 생각이 오류가 있거나 편협하거나 잘못된 것이라면?  

어쩌면 법은 완전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람이 정해진 법을 지켜야 하지만 사실은 그 법이 문제 투성이라는 것은 쉽게 경험 할 수 있다.  

<확신의 함정>은 법이 옳다는 확신에 그렇지 않다는 함정이 숨어 있는 것으로 나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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