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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새 보이스 ㅣ 문지 푸른 문학
황선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6년 9월
평점 :
김무의 17년은 버려지기의 연속이다. 지속적으로 버림받는 김무를 겨우 버티게 하는 건 분식집에서 때운 라면 한 그릇이다. 그런데 김무는 불행의 쓰레기통 같다. 엄마의 원망, 이웃집 동생의 죽음, 보육원과 위탁 가정에서 받았던 정신적, 육체적 폭력, 감출 수 없는 몸의 상처, 해리를 버렸다는 자책. 그래서 그 모든 불행의 시작인 생물학적 아버지를 만나야한다.
겨우 17년 인생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가 이렇게 가혹하다. 친구들은 또 어떤가. 유학에 실패하고 주식 도박을 하는 기하, 가난을 편집증적 지식으로 포장하는 도진, 학업 스트레스로 욕설을 하는 틱 장애를 가진 윤, 할아버지에게 정신적, 육체적 겁탈을 당한 해리 등. 이들을 돕는 어른은 없으며 오로지 인물들이 겪고 있는 삶이 참으로 힘겹다.
서사의 흐름이 악화일로를 겪어야하는 것은 이야기의 운명이다. 결국 무는 아버지를 넘어섰고, 이웃 집 동생의 죽음을 넘어섰고 엄마와 화해하고 해리의 가족이 되어줌으로써 쓰레기통 같은 삶을 비워냈다. 틈새 분식집에서 만나고 헤어진 주변 인물들이 겪을 삶의 리듬도 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는 삶이 가능해지는 것으로 황선미가 무에게 보여준 것은 그림이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나에게 집중하고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그 무언가다. 그게 있으면 살고 없으면 죽는다.
이 정직하고 뻔한 서사를 의식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것은 궁상떨지 않는 인물들 때문이다. 최소한의 말로 의사소통을 하며, 눈물과 악다구니를 싹 거둬낸 장면들은 거추장스럽지 않다. 극적인 화해도 없고 엄마라는, 선생이라는, 친구라는 존재가 갖고 있는 선의, 희생, 감상적 위로들이 없어 전체적으로 세련되었다는 인상을 준다.
그나마 무와 윤이 주고받는 문자나 사소한 선물, 미술학원 선생님이 보여준 관심에 마음이 출렁이는 무가 이 냉정하고 이성적인 이야기에 약간의 물기를 느끼게 할 뿐이다.
자기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는 아이들은 더 이상 어른의 보호권 안에 있지 않다. 적어도 이 작품에서 어른들과 청소년의 관계는 그렇다. 어른도 삶이 힘들고 완전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에서 좀 더 나아간 지점이 여기다. 이제 삶 앞에서는 어른과 청소년이 대등하며 이 작품이 인식하고 보여주는 것도 그것이다. 어설픈 위로나 교훈이 없다는 것, 적어도 이 작품 안에서 무와 도진, 기하, 윤, 해리는 이제 살아도 되는, 괜찮은 삶을 시작하려는 입구에 막 들어섰다. 오로지 자기 힘으로 겪어 냈다. 도움은 그저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 확인하면 되는 친구 정도.
해리를 데려 간 무가 엄마에게 밥이나 먹고 난 뒤 혼을 내라는 장면이 인상적인 것은 거기서 뭔가 생겨날 것 같은 기운 때문이다. 문학은 끝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기어이 그 끝까지 가서 거기서 생겨나는 뭔가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가족을 찾아 헤매던 해리와 무가 엄마라는 불완전한 존재에게 깃들어 이제 같이 만들어 갈 가족의 다음. 텅 비운 사람들끼리 채워갈 공간들이 어떤 색으로 물들어갈지. 그 작은 기대만으로도 독자는 안심을 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 작품은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고 말해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무라는 불행 덩어리가 그 불행 덩어리를 어떻게 덜어내는지 보여줄 뿐.
청소년소설은 점점 세련되어 간다. 너무 어른스러워 어려워지는 것은 아닌지. 아이가 크면서 어려워진다고 말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른으로 대접한다는 마음과 함께 아이 시기가 주는 어떤 것들이 사라졌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청소년소설의 매력은 그 지점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