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꾼 만남 - 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1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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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사제지간이 된 지 스무 해가 넘었다. 강릉과 서울을 사이에 두고 일 년에 한 두 번 문안 삼아 뵈었다. 서울에 터를 잡아 살면서도 만남의 횟수는 좀처럼 늘어나지 않는다. 오월에 한 번, 연말이나 연초에 한 번, 그나마도 그 중 한번은 그냥 지나친다.

스승의 머리는 반백이 되었고, 제자는 그냥 아줌마가 되었다. 차마 제자라고 말하기 어렵다. 나 말고도 시를 쓰는 제자들과 직장 생활을 하는 제자들이 시인을 함께 만난다. 금대봉 산행을 계획한 것은 지난 5월, 헤어지기가 아쉬워 다음 만남을 약속하자는 성화에 못 이겨 스승이 정한 일이다. 스승의 안내를 받아 지난 8월 25일과 26일 금대봉에 다녀왔다. 아랫녘으로 태풍 볼라벤이 북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출발했다. 다행이 날이 좋았다.

 

 

그즈음 읽기 시작한 책이 <삶을 바꾼 만남-스승 정약용과 제자 황상>(정민, 문학동네, 2011)이다. 이제 막 어린 황상이 주막집에서 다산을 만났다.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자기도 공부를 할 수 있겠느냐고 스승에게 묻는다. 스승은 빙그레 웃으며 어린 황상에게 <삼근계>를 써준다.

 

“공부는 꼭 너 같은 사람이 해야 한다. 둔하다고 했지? 송곳은 구멍을 쉬 뚫어도 곧 다시 막히고 만다. 둔탁한 끝으로는 구멍을 뚫기가 쉽지 않지만 계속 들이파면 구멍이 뚫리는 게지. 뚫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구멍을 뻥 뚫리면 절대로 막히는 법이 없다. 앞뒤가 꼭 막혔다고? 융통성이 없다고 했지? 여름 장마철의 봇물을 보렴. 막힌 물은 답답하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빙빙 돈다. 그러다가 농부가 삽을 들어 막힌 봇물을 터뜨리면 그 성대한 흐름을 아무도 막을 수가 없단다. 얼마나 통쾌하냐? 어근버근 답답하다고 했지? 처음에는 누구나 공부가 익지 않아 힘들도 버벅거리고 들쭉날쭉하게 마련이다. 그럴수록 꾸준히 연마하면 나중에는 튀어나와 울퉁불퉁하던 것이 반진반질 반반해져서 마침내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구멍은 어떻게 뚫어야 할까? 부지런히 하면 된다. 막힌 것을 틔우는 것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연마하는 것은 어찌해야 하지? 부지런히 하면 된다. 어찌해야 부지런히 할 수 있겠니?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으면 된다. "(35쪽-36쪽)

 

시 쓰는 재주를 인정받은 황상은 스승에게 받은 삼근계를 평생의 길잡이로 삼았다.

스승은 어린 제자를 혹독하게 훈련시킨다. 잠시라도 허튼 기색이 보이면 다산은 벽력같이 호통을 쳐 제자의 마음을 다잡는다. 새신랑 황상이 공부를 게을리한다 생각하여 절로 보내버리고 이 제자는 아무 말 없이 스승의 말을 따른다.

어린 제자가 사회비판적인 시를 써 올리자 스승은 제자의 앞날을 걱정해 그 시를 절대 남에게 보이지 말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는 자신 또한 제자가 쓴 시와 같은 시를 써 보내 시 공부를 시킨다. 그 시가 <애절양>이다. 어린 아이까지 세금을 내야하는 현실을 비관해 젊은 아비가 자신의 양물을 자르고 만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나는 시인을 젊어서는 스승으로 알았고, 결국 주례로 모셨다. 맥이 풀리고 사는 일이 잘 안 풀릴 때 스승의 주례 말과 시는 내가 걸어갈 이정표와 같았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자괴감에 빠져있을 때 엄마로서, 아내로서 내 자리를 지키게 해 주었다.

그보다 앞서 언젠가 세상에 혼자인 것 같아 떨고 있을 때, 서울에서 제자들이 모여 스승을 뵈었다. 어두운 밤, 헤어지는 길 위에서 스승은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아무 말 없이 잠시 잡았다 놓아 준 그 손길은 그 후로 오랫동안 나를 잡아 주었다. 꺼내 말하지 않은 일이다.

 

 

이번 금대봉 산행은 가을꽃을 보기 위함이다. 열매를 맺기 전에 피는 것이 꽃이라 이미 여름꽃은 졌다. 가을꽃을 보려면 지금이 적기다.

시인과 걷는 산행은 느리다. 꼭대기를 목표로 삼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금대봉 초입부터 꽃들이 만발이다. 스승이 꽃 이름과 그 내력을 설명하고 어른 제자들이 세상 처음 듣는 얘기 인듯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따른다. 고등학생 딸을 둔 제자도 열심히 듣는다. 지난 밤 만남의 회포를 푸느라 약주가 과했는가 날숨에 취기가 진하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열심히 스승의 꽃 이야기 듣는다.

금대봉 가을꽃은 이질풀, 쥐손이꽃, 투구꽃, 진교, 곤드레, 잔대, 오이풀, 톱풀, 눈빛승마, 마타리, 물봉선, 그 중에서도 스승이 특히 아끼는 참취가 한창이다. 돌배가 떨어졌는데 그 향이 무척 진하다.

간밤에 맷돼지가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몹시 분주했는가, 여기 저기 흙이 파헤쳐져 있다. 금대봉을 가로질러 가는 길에 저희들끼리 마음대로 피고 자라고 지는 꽃들이 어디 이것들 뿐이랴. 스승의 말은 길고 풍부했지만 미련한 제자가 기억하는 게 많지 않아 딱할 뿐이다.

금대봉은 허가를 받아야 한다. 그나마 사람 발길에 망가지지 않은 곳이다. 그래도 대형버스로 실어나르는 등산객을 받느라 금대봉 등허리도 하루 종일 바쁘다.

서너시간을 걸어 내려온 곳이 이번 산행의 목적지 검룡소다.

검룡소는 한강이 발원하는 곳이다. 대개의 발원지가 생각보다 협소해서 심심했는데, 내가 본 검룡소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장했다. 하루에 뿜어져 나오는 물의 양이 천톤 단위라고 하였다. 보는 눈이 없다면 그 물을 떠 마시고 싶었다. 얼마나 시리고 차고 달까 싶어서 꾹꾹 참은 갈증이 더 심해졌다.

그러나 차마 그 물에 내 손을 담글 수가 없었다. 보는 눈이 없다고 해도 함부로 손을 담글 수 없을 것 같았다. 검룡소에서 한참을 머문 뒤에 내려오기로 하자 참았던 비가 쏟아졌다.

길게 쏟아지는가 싶어 서둘렀는데 산자락을 미처 다 내려오기도 전에 비가 그쳤다. 선배 언니는 검룡소에서만 비가 내린 것이 참으로 신기하다고 말했다.

집에 돌아와 책을 마저 읽다보니, 황상과 정학연, 혹은 다산이라면 이번 여행을 틀림없이 시로 남겼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늠되지 않는 상상일 뿐이다.

 

 

황상은 다산의 큰아들과 각별한 우정을 쌓았다. 유배지에 아버지를 보러 온 다산의 큰 아들 정학연과 함께 공부하고 산행도 다녔다. 그때마다 그들은 꼭 시문을 써 문답했다. 다산이 사망하고 정학연 마저 사망하자 늙은 황상은 더 이상 시를 쓰지 않았다. 자기의 시를 읽어준 유일한 사람이 없으니 쓸 마음이 없어진 것이다.

다산에게는 많은 제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끝까지 다산의 제자답게 살다 간 사람은 황상이다. 아전의 자식이라 벼슬길에 한계가 있지만 스승은 끝까지 공부하고 과거를 보라고 채근한다. 황상은 자신의 재주가 모자람을 내세워 끝내 과거를 보지 않고 스승의 소망을 대신하여 유인으로 살다 간다. 산속으로 들어가 일속산방을 열고 그곳에서 시 쓰고 공부하다 늙어 생을 마친다.

스승은 제자에게 삶의 길을 열어주기도 하지만 더러 제자에게 어리광을 부리기도 한다. 질투를 하기도 하고 아프다고 투덜대기도 한다. 스승은 복숭아뼈에 구멍이 날 만큼 무섭게 공부하고 글을 쓴다. 제자는 스승의 길을 묵묵히 따를 뿐이다.

이 모든 삶의 과정을 스승과 제자는 산문으로, 시로 남겼다. 몇 달이 걸려 도착하고 또다시 몇 달이 걸려 답장이 도착하는 식이었다. 그 사이 없어지는 편지도 있었다.

이 책에는 다산의 생얼굴이 많이 보인다. 아비이자, 스승이자, 유배 죄인이자 지식인의 얼굴을 모두 볼 수 있다. 스승을 꼭 닮은 제자 황상은 다산의 얼굴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스승과 제자는 서로 닮아가고 앞서간 스승의 길을 제자가 꼭 그 걸음으로 뒤따르는 그림을 보여준다. 몹시 부럽고 아름다운 그림이다.

 

금대봉 산행은 여행기이면서 그 흔한 사진 한 장 찍지 않았다. 스마트폰으로 꽃 몇 장을 찍었지만 나 혼자만 보기로 했다.

금대봉에 오르기 전에 함백산에 들러 반만 살아 있는 주목을 보았다. 사방이 트여 가슴이 뻥 뚤리는 것 같은 함백산 정상에서 일행은 모두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겹겹이 쌓인 산자락이 마치 그림 같았다. 황홀한 눈길을 날카롭게 가르며 아프게 들어오는 스키장, 그것은 산의 속살이었다.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 어떻게 그 높은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기어코 산을 파헤칠 생각을 하였을까.

일행은 깎아 내린 산자락을 보며 인간이 참으로 못됐다, 못됐다 몇 번씩 중얼거렸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깎이고 파헤쳐지고 그야말로 인간의 손에 유린당하는 강과 산을 볼 때마다 어찌 견디시는가 물었더니 스승은 그냥 하루 종일 걷는다고 했다.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걷고 또 걷는다. 그러다가 영 안되면 검룡소를 찾기도 하고 꽃을 보러 간다고 했다.

몇 해 전만해도 스승이 금대봉 꽃을 보러 오면 이곳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드물었다. 지금은 인터넷 검색만 하면 금대봉에 사는 온갖 꽃의 사진과 찾아가는 길이 안내된다.

꽃 사진을 함께 보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은 스승의 말을 따르고자 함이다. 그저 마음에 담아가면 된다는 말에 그리하기로 한 것이다. 저희들끼리 꽃피우고 씨 퍼뜨리며 사는 곳에 우리는 잠깐 들렀다 가는 셈이다. 그 길은 조심스러워야 함이다.

황상이 스승을 모시고 이곳을 다녀간다면 꼭 시로 남겼을텐데, 나는 그럴 재주가 없다. 그저 꽃을 마음에 담아가라는 스승의 말을 기억할 뿐이다.

자연이 아플 때마다 ‘걷는 것’으로 화를 식힌다는 스승의 말을 귀담아 들을 뿐이다. 그 걷기가 미안함을 대신하는 것임을 안다. 그리고 그 장하고 장한 검룡소를 마음에 넣어둘 뿐이다. 그리고 스승의 시를 다시 꺼내 읽는다. 어리석은 제자 또한 스승을 따라 하리라 마음 먹으면서.

 

기분이 우중충하여/ 궂은 추억만 불러내는 날이면/ 기분전환을 위해 생각한다/ 검룡소의 맑고 시원한 물맛을/ 만회할 수 없는/ 바보짓에 대한 후회가/ 울적한 슬픔으로 가라앉을 즈음/ 마음을 추스르려고 떠올린다/ 한강이 발원하는 검룡소에서/ 힘차게 솟구치는 샘물을/ 솟구쳐 암반을 세차게 타고내려/ 시내가 되는 모습을/ 먹고 싸고 마시고 씻는/ 일상사를 온전히 의탁한 /한강의 주민으로서/ 세상을 사느라 맡은 배역이/ 누추해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문득 한 마리 물고기 되어/ 한강 천삼백 리 거슬러/ 태백의 금대봉 골짜기를 오른다/ 서해 용이 승천하러 오른다는 전설의/ 검룡소를 찾아가/ 시원의 약물 마시며/ 오장에 스민 병을 다스린다

<<검룡소>> 전문, 최두석 <꽃에게 길을 묻는다>, 문학과지성,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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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09-02 1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고 갑니다.
걷는 행위 속에 여러 가지 처방이 들어있음을 저도 조금씩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수수꽃다리 2012-09-03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늘 하이네라고 불러보게 되는 님! 보잘 것 없는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걷는 행위 조차 게으름으로 그만두고 마는 저라서 심하게 부끄럽습니다, 저는!
들어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걷습니다. 목적을 정해두지 않는 그 행위를 이해하려면 제가 더 '우중충'하거나 만회할 수 없는 잘못을 더 저지르거나 해야하는 건지^^

이진 2012-09-03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수수꽃다리님 오랜만이예요.
<북항>리뷰를 보고는 처음인 거 같은데 그새 리뷰를 두 개 정도 쓰셨군요+_+
오랜만에 인사하니까 좋은걸요, 되게!

수수꽃다리 2012-09-04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되게라는 말은 우리 강원도에서 정말로 자주 쓰는 말이랍니다. 되게 많이 쓰지요^^
늘 소이진씨 보고 있어요.
어디 끼이는 걸 잘 못하는 사람이라 쭈뼛거리다가 나와버리는 일이 많지만.
항상 놀랍고 감동하며 지켜보고 있으니 늘 건투를!!!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접시 위에 놓인 이야기 5
헬렌 니어링 지음, 공경희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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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는 얘기가 있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과 요리를 잘하고 싶어하는 사람, 세 번째 부류는 요리를 잘하지 못하면서 잘하려고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인데 헬렌 자신이 세 번째 부류다. 그들 부부의 삶 자체가 평범한 삶이 아니라 실천가적 삶이다. 그러니 헬렌이 자신을 그렇게 분류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대충 말고 철저하게 살자. 부드럽게 말고 단단하게 먹자. 음식에서도 생활에서도 견고함을

추구하자. 이 책은 육신에 영양을 공금하기 위해 식사할 뿐 미식에 빠지지 않는 검소하고

절제하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는 말은 그들 부부가 실천가적 삶을 살았다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헬렌 니어링이 주장하는 소박한 밥상이란 채식 위주의 제철 재료를 가지고 최소한의 조리기법으로 원재료의 맛을 살리는 요리, 적게 먹고, 단순하게 먹는 것이다.

주부가 요리를 하느라고 부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대신 간단하고 소박하게 먹고 시간

을 아껴 개인의 발전을 위해 시간을 쓰라는 말은 반복되는 부엌일에 지친 주부들을 위로하

기에 충분하다.

 

헬렌 자신이 윤리적 소비 개념을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실천한 생활 자체가 윤리적 소

비다. 즉 탄소가스 배출의 주범이 되는 수입 재료 안쓰기, 제로 거리를 실천한다. 자급자족

생활화, 비윤리적인 육식 거부 등은 윤리적 소비를 생각하게 한다.

 

굽기, 튀기기를 생략하면 냄비와 팬을 끝없이 닦아야하는 고역도 줄어든다. 접시나 그릇 하

나로 먹자. 음식 준비뿐 아니라 불필요한 도구와 그릇의 사용도 과감히 줄이자.(28쪽)는 주장은 주방 세제를 쓸때 마다 죄책감이 드는 주부들이라면 환영할 만한 제안이다. 이렇듯 그녀가 말하는 견고함을 추구하자는 것은 실천가적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그녀가 만드는 음식은 각종 조리료를 넣어 “맛”을 낸 것 보다는 당연히 “영양가가 우선이다.(28쪽)”

 

영양에 대한 그녀의 믿음은 나아가 생식을 주장한다. “조리는 파괴하는 것이요, 재로 만드는 것이다. 음식을 조리하면 정말로 음식이 죽게 될 수 있다.(37)

생식은 수행자들의 수행법중 하나다.

 

그러나 가족, 특히 어린 아이를 부양해야 하는 주부가 헬렌이 주장하는 섭생법을 얼마나 따

를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고 그녀가 앞뒤 꽉 막힌 사람은 아니다. “음식을 먹는 방식은 음식을 먹는 사람의 의식에 따라 상대적이다. 매사에 철저한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손 치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 세상에 가능한 최소의 피해를 끼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다.(70쪽)” 어떤 방법이 있을까?

나의 경우,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고, 수입품이 아니라 협동조합 제품을 사용하는 것. 적게

먹는 것, 커피를 줄여 보려고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생각은 있어도 실천은 어렵다. 헬렌을 존경하는 이유가 그들 부부가 철저하게 실천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물을 인간의 노예로 만든다. 또 인간은 자기 자신을 착취해서 동물의 노예가 된다. 목축업자, 우유 짜는 이, 양치기, 목동, 농부, 도살자 모두 가축의 시중을 드는 일에 관련된 노동을 한다. 키우고 돌보는 데 쓰는 시간과 노력을 더 나은 인간을 키우고 돌보는 데

쓰면 좋으련만.(71쪽)“ 이라고 안타까워 하는데 이는 윤리적 소비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도 그렇게 주장한 바 있다.

 

조금 더 들여다 보면 그녀는 음식을 만들 때, 조미료를 쓰지 말 것. 재료 자체의 풍미를 즐길 것, 소금 후추 양을 줄이거나 거의 사용하지 말 것을 제안한다. 재료 자체의 염분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한다.

빵은 먹지 말고, 과일과 야채를 먹고 이것만으로도 수분 섭취는 충분하니 물도 더 먹을 필요가 없다.

 

헬렌의 밥상을 따라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선 가족의 동의다. 가족 모두 소박한 밥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장기 아이를 둔 부모는 더 고민이 많다.

야채와 과일을 일년 내내 공급하기 위해 과일 나무와 채소 밭이 있어야 한다. 나만의 텃밭

이 있어야 가능한 생활이다. 도시 생활에서는 어려운 점이 더 많다.

야채와 과일 값이 비싸다. 견과류도 값이 비싸다. 오히려 고기 값이 싸서 가난한 도시 서

민들은 값비싼 채소, 과일, 견과류를 먹는 대신 고기를 먹는 일이 생긴다.

음식 종류가 다르다. 쌀이 주식인 우리 식단은 익히고 찌고 무치는 음식이다.

 

그러나 나물 반찬을 할 때 화학 조미료를 넣어 똑같은 맛을 내지 않고 최소한의 소금과 기

름만으로 나물 맛을 살리는 조리법은 응용 가능하다.

기본은 같다는 것. 즉 모든 음식은 원 재료의 맛을 살리는 것, 그것은 재료의 맛을 살리는

것이기도 하면서 재료 자체가 가진 생명력을 살리는 것과 같다.

자연 상태에 가까운 재료를 먹는 다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조리 과정을 거치면 거칠 수

록 원료의 맛은 떨어지고 생명력이 떨어지는 것은 이해 가능하다.

백미 보다 잡곡을 먹는 것은 그녀의 말대로 거친 음식을 먹는 것이다. 우리 식단의 그렇게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자연요리 전문가 임지호는 먹는 사람을 생각하며 음식을 만든다. 헬렌이 요리를 못하고 싫

어 하는 사람이라면 임지호는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이다. 그가 재료를 얻는 방식은 헬렌과

닮았다. 사는 곳 주변에 있는 다양한 풀(이끼 조차)이 음식의 재료가 된다. 못 먹는 것이

없다. 거리가 거의 없는 음식이다. 재료의 맛을 살리는 것도 같다. 조미료는 하지 않는다.

나물 삶은 물로 밑물을 하는 것도 같다. 최소한의 양념을 하고 재료의 맛을 살리는 것에

충실한다. (그의 책 <방랑식객>, 문학동네, 2011에 잘 나와있다)

그러나 고기를 먹는다. 생선도 먹는다. 즉 임지호는 모든 것이 음식의 재료다. 그 음식

을 먹는 사람이 원하면 그 재료를 사용하되 살아있는 영양을 고스란히 먹을 수 있게

만든다. 전문 요리가로서 임지호와 실천가로서의 헬렌은 같은 입장이면서도 만드는

것은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누구의 말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의 공통점을 찾아보는 것이 의미가 있다.

제철 음식, 손에 닿는 것은 모두 먹을 수 있다는 것, 최소한의 조리 단계, 원 재료의 맛을

살리는 살아있는 음식, 그러나 임지호는 음식은 보는 것도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재미있는 것은 진심으로 먹는 것을 고민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람에게 가장 좋은 음식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이 같다는 것.

생활에서 우리가 할 일은 헬렌의 말처럼 “창의적으로 응용하여 각자의 레시피를 만드는 것”이다.

또 하나.

내가 먹기 위해 만드는 음식과 남을 먹이기 위해 만드는 음식은 질과 양이 다르다.

나 혼자 먹는다면 찬 물에 밥 말아 먹는다. 그러나 자식을 위해, 남편을 위해 가족을 먹이려고 음식을 만들 때는 들이는 정성이 다르다.

헬렌 니어링에게 성장하는 아이가 있었다면 좀 더 혁명가적 실천이 필요했을 것이다.

내가 먹으려고 소박한 밥상을 차릴 수는 있으나 가족의 동의가 필요한 일이거나 가족을 설득해야 한다.

 

정재승은 최근 진중권과 함께 쓴 책 <크로스 2>에서 ‘육식’에 대해 말하는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복잡한 미각은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고 자연 생태계 전체에서 인간은 유일한 미식가다. 동물과 식물을 가리지 않는 인간의 왕성한 식욕과 잡식 능력은 그 자체로 유일하며 위대하다는 얘기다. ...지난 3만 년간 느리면서도 오랜 진화 과정을 거쳐 인간은 잡식 동물의 몸을 갖게 된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육식을 포함한 인간의 미각은 인정 받아야 하는 진화의 산물이다. 그런데 육식이 공공의 적이 되어가는 분위기다. 그것에 대해 그는 “인간이 동물의 눈을 직접 보지 못하면서” 생긴 기업형 축산업의 폐해를 말한다. 육식은 건강하지 못한 식재료가 아니라 육식고기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시스템이 문제인 것이다.

 

헬렌의 밥상은 그래서 선택의 문제다.

 

다시 정재승의 말을 옮기면서, 나도 그처럼 ‘언젠가의’ 희망사항으로 또박또박 읽어본다.

“도시에 사는 인간은 점점 음식사슬이 긴, 그래서 세상에 의존도가 높은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나도 음식 사슬이 짧은 식사생활을 꿈꿔본다. 내가 재배한 것을 먹고, 직접 사냥한 무언가를 요리하고, 채집해 얻은 것으로 식사를 하는 삶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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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독법 - 유쾌하고도 섬세하게 삶을 통찰하는 법
김민웅 지음 / 이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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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독법>은 동화를 읽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 우리는 분명히 읽었다고 생각했던 동화를 다시 읽는다. 다시 읽는 동안 우리가 읽은 동화는 없어지고 새로운 동화를 만난다. 그게 이 책을 읽는 재미다.

이솝의 동화 속 주인공들이 천 년이 넘는 시간의 문을 열고 나온다. 노동자를 착취하고 즐거움을 탐하다, 한 겨울 ‘낟알 한 알 얻지 못한 채’ 차가운 겨울 바람 속으로 사라진 베짱이는 당대 귀족들의 상징이었다. 개미는 노동자, 노예를 대변한다. 노동의 가치를 개미와 베짱이의 운명을 통해 보여주는 동화다.

저자는 이 동화를 함께 살기로 읽는다. 즉 개미의 노동이 가치를 가지듯이 베짱이의 한여름 연주는 예술행위로 인정 받는다. 노동과 예술이 동등한 가치로 인정받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다. 새롭게 읽는 <개미와 베짱이>는 개미 반장의 생일날, 베짱이가 흥겨운 연주를 하는 것으로 베짱이의 노래가 노동의 가치를 갖는다.

원작에 충실하되 원작을 꼼꼼히 읽는다는 것은 해석을 달리 하는 것이다. 꼼꼼히 읽기를 통해 원래 동화가 말하려는 것을 읽어낸다. 동화가 갖고 있는 특징은 권선징악 그 이상이다. 그 속에는 동화가 지어질 당시의 시대상황이 녹아있다. 시대를 읽어내는 것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오래된 이야기는 현재의 사회적 상황과 맞물려 현재적 의미를 얻고 다시 살아나 생명을 얻는다. 동화는 더 이상 어린 독자를 대상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다.

너도 읽고 나도 읽은 <심청전> <별주부전> <인어공주> <헨젤과 그레텔> 등은 ‘그게 그런 뜻이었어?’ ‘뭘 읽은 것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풍부한 성서이해(그는 목사다), 사회를 인식하는 깊이, 가늠할 수 없는 지적 깊이로 읽어내는 동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이 사실은 그 반도 안되는 이해였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이런 깨달음, 지적, 새로운 이해에 대한 눈뜸이 즐거운 독자라면 두툼한 이 책을 읽는 내내 동화를 읽는 것처럼 재미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독법은 다른 책을 접할 때도 유용하다. 어떻게 읽는가에 따라 독자로서 얻는 것에 차이가 있다면, 나는 저자처럼 좀 더 꼼꼼히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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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돈이란 무엇일까? - 돈 길담서원 청소년인문학교실 3
이시백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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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담서원 두 번째 청소년인문학 책 <나에게 돈이란 무엇일까>를 읽었다.

 

'돈'에 대한 다양한 시선을 한 묶음으로 읽을 수 있다.

종이 돈의 역사가 금을 맡겼다는 증서에서 시작되었다는 얘기부터 돈이란 것이 결국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서 실체가 없다는 지적까지.

전쟁의 반대가 평화가 아니라 평화 없음이라는 지적처럼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평화롭지 못한 상태다.

교육을 받을 권리는 기본권이지만 돈의 유무에 따라 교육의 질이 달라지는 현실은 여전히 평화롭지 못하다.

착한 소비보다 소비를 줄여야 한다는 충고도 새겨듣는다.

민주주의는 개인이 중요한 사회이지만 지금 우리는 돈이 더 중요해진 사회에 살고 있다. 돈이 사람 앞에 서고 사람이 돈을 쫓아가는 형국이다. 곧 사회에 나가 돈을 만져야 하는 청소년들에게 돈의 실체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돈이 목적이 될 것인가, 수단이 될 것인가, 돈의 주도권을 사람이 쥐고 있을 것인가, 돈에게 넘길 것인가 줄다리기에서 사람이 이기기 위해 필요한 얘기들이 담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을 벌고 싶고 돈이 좋다고 해도 알고 좋아하는 것과 모르면서 좋다고하는 것은 다르다.

 

돈이 무섭다는 것을 아주 조금, 그야말로 쥐똥 만큼 알게 된 것이 최근이다. 돈이 편하지 않고

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돈의 무게가 있다는 것을 안 것도 최근이다.

돈과 내가 가장 편안한 관계, 그 경계를 유지하는 것이 나의 과제다.

어쩌면 이 경계 조차 그 누군가에게는 한참을 올려다봐야 하는 곳임을 늘 기억하면서, 그러기 위해서 나는 지금보다 더 적게 소비하고 더 적게 소유하고 더 적게 욕망하기를 시작해야 한다.

비우고 버리고 치워서 가벼워지기를.

쓸데없는 것은 뱃살의 비곗덩어리뿐만이 아닌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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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 공제控除의 비망록
김영민 지음 / 글항아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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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저자와 독자의 은밀한 사귐의 시간이다.

알듯 모를듯 서로의 마음에 닿지 못해 애달퍼 하기도 하고, 어느 순간 확 끌어당김의 쾌락을 맛보기도 하는 밀당의 시간.

책 밖에 몇 시간 혹은 며칠 동안 세워놓는 매정한 '주름'의 시간도 있다. 인연이 아니면 그만 두면 될 일이건만 구애의 시간은 고통 조차 추억할 사건으로 만든다.   

 

김영민의 <봄날은 간다>을 읽는 동안 나는 내내 책 밖에서 그의 기척을 탐지하기 위해 온 몸의 촉수를 뻗쳐들고 있어야만 했다.

무수한 산책길에 동행하면서 그가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불화'하면서 '이드거니' 스며드는지 눈 똑바로 뜨고 하나 하나 지켜보고 더러 더러 따라해 보기도 했다.  

그가  찔레꽃을 들여다보면 나또한 찔레꽃을 들여다보고, 걷기를 통해 만나는 우연이  불가능한 내 동네를 한탄했다. 그러는 동안 깨닫는다. 산이 아니라고 걷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걷지 않는 내가 문제다. '해넘을녘'의 강가의 는개를 볼 수 없다고 해도 세상 모든 곳에 황혼은 존재한다.  

이렇듯 순간에 집중하려는 나의 노력은, 그러나 휘딱 부는 바람한점에 흔들리고 말았다.

 

무엇보다 그의 책 마디마디마다 끼어있는 숱한 이론(혹은 철학)의 역습은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구애자를 한방에 훅 보내버릴 만큼 막강한 제 삼자(들)다.  

듣다보다 처음인 우리말도 얄미운 방해꾼이고 일상적 말이 한자말로 떡하니 세워지니 독자는 그 또한 어려운 사람 앞에 선 아이나 촌사람이 된 것 같다. 참 어려운 상대다. 

 

그동안 읽었던 저자의 책들이 이 책과 다를 것 없었다. 그런데도 이 책에 대해 급한 마음이 든 건 이 책이 그 중 가장 개인적인 글들이기 때문이다. 철학가이기 전의 생활인으로서의 그를 엿볼 수 있는 기회. 전주와 밀양에서 산책하며, 가르치며, 만나며 궁글린 그의 생각들이 푸짐하다.

그런데도 이렇게 다가가기 힘든 것은 그만큼 여기 실린 글들이 짧은 만큼 여백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백은 많고 내면은 거울 같다.  여백은 독자의 자발적인 이해와 고찰, 생각으로 채워져야 하는 공간이다.  

 

간신히 한 발 다가가면 슬쩍 나 앉는데 그게 저만치다. 갈테면 가라지 하고 돌아서고 싶은 마음인데, 사랑은 그럴수록 힘이 더 세진다. 그러니 때로는 꼭 그에게 가고 말리라는 심정으로 여백을 채워가기도 했다.  그렇게 놓아주지 않는 것이 <봄날은 간다>의 매력이고 저자의 힘이다.

미처 알아듣지 못해 민망하지만 독자로서 나는 이런 멋진 글을 읽을 수 있어서 여전히 행복했다. 그리고 여전히 그에게 다가가지 못한 내 공부에 절망했다.

 

책 한 권이 나의 생활에 영향을 주는 시한을 생각해 본적이 없다. 다만 한 권에 대한 독서가 어떤 식으로든지 내 삶에 '주름'으로 남을 것이라고 믿을 뿐이다.

 

저자가 사랑하는 찔레꽃이 내 주변에도 피기 시작했다. 나 또한 특별히 아끼는 꽃이다. 그는 꽃에서, 은행나무에서 신을 보는데, 그렇다면 나는 그 꽃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시대와 창의적으로 불화하면서 사는 것, 알면서 모른체 하기의 진경을 나는 아직도 가늠할 수 없어서 저자의 책 밖에서 서성대는 외로운 혹은 애처로운 구애자다. 스승이 너무 커서 올려다보다가 목이 꺾이게 생긴 늦되다 못해 될 성싶지 않은 제자마냥, 그또한 과분하니 '독애'하는 저자에 대한 독자의 짝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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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운영 2012-05-18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속에 녹아 있는 수수꽃다리님의 감성을 읽어내고 공감하며 기뻐하는 사람,
때론 문득문득 느껴지는 치열한 좌절에 마음이 아린 사람,
자학하지 못하게 옆에서 응원하고 싶은 사람,
수수꽃다리님에게도 열혈독자가 있다는 걸 잊지마시길......
아! 담백한 생각과 섬세한 표현! 멋지고도 다정한 그것을 느낄 수 있어
열혈독자는 행복합니다

수수꽃다리 2012-05-25 0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운영님!
콩꽃은 활짝 피지 않고 꼬투리를 낳으며 서서히 시들어가네요. 우리집 베란다에 아이 과제로 심은 강낭콩을 들여다 봅니다. 생산을 위한 꽃은 화려하게 드러내지 않고 피는가 봅니다.
열혈독자가 있다는 사실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일이기도 하고 근심스러운 일이기도 하고^^
자운영님의 서재에도 놀러가서 자운영님 글을 볼 수 있다면~~~~부디, 꼬~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