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늦여름 더위로 지친 마음에 숲을 찾아가면 의례껏 반기는 식물이 있다. 곧장 하늘로 솟아 올라 오롯이 꽃만 피웠다. 풍성하게 꽃을 달았지만 본성이 여린 것은 그대로 남아 있다. 키가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대로 꽃이 주는 곱고 단아함은 그대로다.

연분홍색으로 피는 꽃은 줄기 윗부분에서 꽃방망이 모양으로 뭉쳐서 핀다. 흰꽃을 피우는 것은 흰무릇이라고 한다. 꽃도 꽃대도 여리디여린 느낌이라 만져보기도 주저하게 만든다.

어린잎은 식용으로, 뿌리줄기는 식용이나 약용으로, 비늘줄기와 어린잎을 엿처럼 오랫동안 조려서 먹으며, 뿌리는 구충제로도 사용하는 등 옛사람들의 일상에 요긴한 식물어었다고 한다.

꽃은 '무릇' 이러해야 한다는듯 초록이 물든 풀숲에서 연분홍으로 홀로 빛난다. 여린 꽃대를 올려 풀 속에서 꽃을 피워 빛나는 무릇을 보고 '강한 자제력'이라는 꽃말을 붙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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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을 벌린걸까? 뜰의 잔디가 경계를 넘어 화단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부분 부분 잠식해 들어가는 힘이 대단하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화단의 식물들이 터전을 잃을 판이어서 더 늦기전에 골를 파고 기왓장으로 경계를 두텁게 했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나 한시름 놓는다.


구름 한점 없는 파아란 하늘이 높아만 간다. 곧 가을이 뜰까지 내려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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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어인鑑於人'
무감어수 감어인無鑑於水 鑑於人에서 온 말로 '자신을 사람에게 비추어 보라'는 말이다. 겉모습에 집착하지 말고 속내를 바로 보자는 의미로 이해한다.


보여지는 모습으로 거의 전부를 판단하는 세상이라고 한탄들 한다. 그렇다면 보여지는 모습을 전부 무시하란 말인가. 보여지는 모습은 속내를 드러내는 중요한 방편이니 그 드러남을 통해 속내를 보는 통로로 삼는다면 드러남은 백분 활용해야할 측면이 된다.


속이든 겉이든 보여야 알 수 있다. 꽃들이 앞을 다투어 화려하고 특이한 자신만의 모양과 색으로 치장하는 이유는 그 속내를 드러내어 주어진 사명을 다하고자 함에 있다. 그러기에 드러냄은 꽃에게는 곧 사명을 완수하는 중요한 수단인 것이다.


사람이 자기를 가장 잘 비출 수 있는 곳은 역시 사람이다. 나를 비춰주는 사람, 내가 비춰줄 사람을 얻고, 그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자. 하여, 외롭고 힘든 세상살이에 조금은 위로 받고 의지하며 산다면 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어둠이 내린 골목길에 등불을 밝혔다. 늦은 사람이 돌아올 길을 밝히는 것이며 혹, 걷는 사람 없더라도 스스로 밝힌 불로 골목은 외롭지 않다. 골목을 지키는 가로등 처럼 누군가를 위해, 또는 스스로를 돌아보기 위해 본성의 불을 밝히고자 한다. 그 기준으로 삼는 것이 사람이다.


'감어인'鑑於人, 내 스스로를 돌아보는 방식이며 본질로 나아가는 기준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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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해냄

작가 김훈의 아홉 번째 장편소설 '공터에서'다. 그간 작품 모두를 한번도 놓치지 않고 발간 되기가 무섭게 손에 들었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미루기를 반복하다가 이제서야 손에 들었다.

왜 그런것지 이유는 모른다. 책에 대한 어떤 이야기일지라도 애써 귀를 닫았고 이제 막상 손에 들었지만 아직 표지도 열어보지 못했으니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향해 가슴을 열어 두며 때를 놓치지 않고 지성인의 목소리 냈던 김훈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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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정楚亭을 질책하여주오
與李洛瑞書九書


"이 못난 사람은 단것에 대해서만은 성성이(오랑우탄)가 술을 좋아하고, 긴팔원숭이가 과일을 좋아하듯 사족을 못 쓴다오. 그래서 내 동지들은 단것을 보기만 하면 나를 생각하고, 단것만 나타나면 내게 주지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초정(박제가)은 인정머리 없이 세 번이나 단것을 얻고서 나를 생각지도 않았고 주지도 않았소. 그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게 준 단것을 몰래 먹기까지 했소. 친구의 의리란 잘못이 있으면 깨우쳐주는 법이니, 그대가 초정을 단단히 질책하여주기 바라오."


*형암 이덕무가 낙서 이서구에게 초정 박제가를 흉보느라 보낸 편지다. 피식피식 웃음이 나는 건 참을 도리가 없다. 솔직하고 담백하다. 기지와 해학이 넘치는 문장이 막힘없이 읽힌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소위 백탑파(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백동수, 서유구 등)로 일컬어지는 벗들의 사람 사귐이 이와같았다. 백탑파는 원각사지 10층석탑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련의 지식인 무리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박지원과 홍대용은 노론 명망가 출신의 양반이었고,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상수 등은 서얼 출신이었지만 신분의 차이를 넘어 함께 스승이자 제자로, 벗이자 동지로 삶과 학문, 여가를 뜨거운 가슴으로 나눴다.


사람의 관계가 어쩌면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역사 속 먼 이야기만은 아니다. 감정과 의지가 하나로 모아진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이런 아름다움이 있어 왔고, 지금도 여전히 이런 만남을 누리고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묵묵히 따뜻한 마음을 나누지만 일부러 드러내지 않아서 더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내게도 이런 꿈이 있다. 습기많은 여름 숲에 잠시 살다가는 버섯이 피었다. 한자리에 이웃하여 나서 같은 시간을 살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온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시간 기댈 수 있는 벗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꿈은 꾸는 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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