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정楚亭을 질책하여주오
與李洛瑞書九書


"이 못난 사람은 단것에 대해서만은 성성이(오랑우탄)가 술을 좋아하고, 긴팔원숭이가 과일을 좋아하듯 사족을 못 쓴다오. 그래서 내 동지들은 단것을 보기만 하면 나를 생각하고, 단것만 나타나면 내게 주지요.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초정(박제가)은 인정머리 없이 세 번이나 단것을 얻고서 나를 생각지도 않았고 주지도 않았소. 그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내게 준 단것을 몰래 먹기까지 했소. 친구의 의리란 잘못이 있으면 깨우쳐주는 법이니, 그대가 초정을 단단히 질책하여주기 바라오."


*형암 이덕무가 낙서 이서구에게 초정 박제가를 흉보느라 보낸 편지다. 피식피식 웃음이 나는 건 참을 도리가 없다. 솔직하고 담백하다. 기지와 해학이 넘치는 문장이 막힘없이 읽힌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소위 백탑파(박지원, 박제가,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백동수, 서유구 등)로 일컬어지는 벗들의 사람 사귐이 이와같았다. 백탑파는 원각사지 10층석탑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련의 지식인 무리를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박지원과 홍대용은 노론 명망가 출신의 양반이었고,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상수 등은 서얼 출신이었지만 신분의 차이를 넘어 함께 스승이자 제자로, 벗이자 동지로 삶과 학문, 여가를 뜨거운 가슴으로 나눴다.


사람의 관계가 어쩌면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역사 속 먼 이야기만은 아니다. 감정과 의지가 하나로 모아진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이런 아름다움이 있어 왔고, 지금도 여전히 이런 만남을 누리고 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묵묵히 따뜻한 마음을 나누지만 일부러 드러내지 않아서 더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내게도 이런 꿈이 있다. 습기많은 여름 숲에 잠시 살다가는 버섯이 피었다. 한자리에 이웃하여 나서 같은 시간을 살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온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시간 기댈 수 있는 벗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꿈은 꾸는 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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