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 한국사를 조작하고 은폐한 주류 역사학자를 고발한다
이주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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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제 볼 것은 보고 말할 것은 말하자

18대 대통령이 취임한 날이다. 보통의 경우 국가의 수장이 새로 취임한다는 것은 국가나 국민들에게 흥겨운 축제의 장이 아닐까 싶지만 오늘 취임하는 대통령에 대해 딱히 그런 흥겨움은 일부에 국한된 것으로 보인다. 무엇이 이런 사태를 만들었을까? 세상을 보는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불가피한 현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보통의 사람들의 일상은 자신의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두는지에 대해 그리 민감하게 생각하지는 않고 살아가는 것 같다. 자신의 삶에 중대한 전환점에 직면하거나,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무엇을 빼앗기게 되었거나 아니면 사회적 이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는 경우서야 비로써 자신의 가치관을 표출하게 된다. 그렇지만 가치관은 개인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다. 거의 모든 판단을 자신의 가치관에 의해 선택하지만 그것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 현대인들의 일상이 아닌가 싶다.

 

하여, 민족이나 국가, 사회, 역사 등 조금 넓어진 범위의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그런 일상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을까?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 목숨을 내 놓고 대드는 문제에 대해 어떤 사람은 강 건너 불구경인 태도가 이런 모습의 반증이리라. 하지만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우리의 거의 모든 것에 영향을 주면서도 그 중요성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정치, 지도자, 역사, 교육, 분단문제와 같은 것들이 그렇다.

 

그런 맥락에서 ‘한국사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다소 도발적인 책의 출간은 상당한 위험부담을 스스로 안고 출발하고 있다고 보인다. ‘국사를 조작하고 은폐한 주류 역사학자를 고발한다’는 부제 역시 그렇다. 역사에 관심을 갖고 수많은 책을 읽어오고 있는 사람인 나도 잘 모르는 역사계가 안고 있는 맹점에 대해 적나라하게 까발려 놓고 있다. 그 까발림이 당혹스럽거나 억지를 부리는 차원이 아니라 한 민족의 정통성에 맥을 잡는 중요한 문제이기에 더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고 보인다.

 

이 책의 저자 이주한은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이자 역사비평가로 활동 중이다. 저자가 역사를 보는 시각은 ‘역사적 배경과 맥락, 근원을 입체적으로 파헤치는 예리한 역사비평을 추구하며, 사실과 사료비판에 엄밀한 역사, 다양한 시각과 해석이 공존하고 대중이 소외되지 않는 열린 역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역사를 대중화 시키고 있는 이덕일과 맥을 함께하는 저자의 역사를 보는 시각이 돋보인다. 이주환의 전작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에서 이미 접했던 독자에게 문제의 한국사 쟁점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안내서로도 충분하다고 보인다.

 

이 책은 여전히 존재하며 학계와 사회에서 무소불휘의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식민사관과 이를 우리 사회에 정착시키고 역사학계의 정설로 만들어 온 주류사학계가 갖는 구조적 모순이 어디서 무엇이며 어디서 출발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살피고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한국사에 대해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침략의도를 실현시키기 위해 벌였던 일련의 정책이 해방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있으며 그 식민사관이 저지른 과오에 대한 흐름을 알려준다. 저자는 조선총독부가 해체되지만 조선사편수회가 날조하고 왜곡한 역사는 경성제국대학의 후신인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로 이어져 이른바 ‘실증주의’로 치장되며 한국사의 주류로 만들어졌으며 그들과는 달리 일제에 반대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역사학은 비주류로 치부되어 온 현실에 대해 살피는 것이다.

 

저자는 현존하는 식민사관의 여러 가지 문제들 중에서 핵심적인 문제로 고조선과 단군왕검에 대한 시각, 한사군의 실체,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한 인식 등이다. 이들 문제는 한국사의 근본을 뒤흔드는 문제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시각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라고 본다. 또한 한국 통사의 대명사 이기백의 ‘한국사 신론’과 박노자의 ‘거꾸로 보는 고대사’에 집중하며 식민사학이 갖고 있는 한계와 문제점을 파헤치고 있다. 이 책의 전반에 걸쳐 식민사관이 주장하는 시각이 역사학의 기본을 무시하는 행위이며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과 같은 문제에 대응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논리에 근거를 제공해주는 결과를 낳고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왜 이토록 강도 높은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문제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의 중요성 때문이다. 훼손된 역사는 민족의 정체성을 근본부터 흔들리게 만들며 올바른 역사인식 없이는 나라와 민족의 미래 또한 불투명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해결되지 못한 한국 현대사의 쟁점들에 대한 책임은 결국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일 것이다. 저자와 같은 학자들을 이러한 노력이 바로 그 출발점일 것임으로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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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111展 : 서로 사랑하세요 - 김수환 추기경, 사진으로 만나다
김경상 외 지음 / 작가와비평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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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커지는 빈자리에 대한 그리움

혼란스러운 현실에 불투명한 미래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가 무엇일까 하고 물으면 어떤 답을 할까? 개별화된 현대사회에서 사회적 존재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그 속에서 자아를 실현할 무엇을 찾지는 않을지 조심스런 생각을 해 본다. 아무리 개별화 되는 현대 사회라지만 어쩔 수 없이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런 사회적 관계에서 정신적 가치를 공유하거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삶이라면 분명 암담하고 혼란스러운 현실일지라도 희망을 놓지 않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존재가 사회적 어른이 아닐까 싶다.

 

몇 년 사이 이 사회를 지탱해 주었던 어른들이 짧은 삶을 마감하고 난 후 그 자리를 채우는 존재의 부재가 어쩌면 혼란스러운 현실과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키운 것이 아닌가는 생각도 한다. 어른의 부재를 생각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최근의 법정스님이며 얼마 전 김수환 추기경이 그렇다. 이 둘은 종교도 다르고 사는 모습도 달라도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을 향한 진정성은 많이도 닮아 보인다. 특히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던 김수환 추기경의 모습은 종교를 떠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위안과 희망이 되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분을 다하면서도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열린 가슴으로 모두를 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2009년 2월 16일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일이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더 그리운 사람이다.

 

김수환 추기경은 민주화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에 명동성당을 찾은 사람들을 지키며 한국 천주교의 상징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굳이 천주교라는 종교와 가까운 사람이 아닐지라도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제각기 나름의 그리움을 간직한다.

 

이미 달라이 라마 111展 히말라야의 꿈, 한국의 얼 111展, 기억합니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등으로 사진 작업의 결과물로 사람들을 만나온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경상의 ‘김수환 추기경 111展 : 서로 사랑하세요’는 20여 년 동안 김수환 추기경을 사진으로 담아온 결과물이며 김수환 추기경 추모 사진에세이다. 이 에세이에 발간에 동참한 사람으로는 김명훈, 김병주, 박성도, 박찬현, 임연수, 조성범, 조이령, 주민아, 한정화, 허금행 등 10명의 필자다. 각기 김수환 추기경과의 소중한 인연을 담아 존재의 부재가 주는 그리움을 펼쳐 놓고 있다.

 

사진에세이집이기에 살아생전의 모습을 보는 양 생생함이 담겨 있다. 여섯 가지 주제로 묶여 있는 사진은 생가의 모습이나 당시 명동성당의 모습들과 신부로 살아온 삶 속에서 성스러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하늘로 부치는 우리 111인의 편지는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그리움의 압권이라 할만하다. 병환 중 문병 온 모든 사람들에게 ‘고맙습니다. 사로 사랑하세요’라고 하신 말씀이 이후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져 그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모든 생명이 있는 존재에게 주어진 시간은 각기 다르다. 짧기도 하고 때론 긴 시간을 보내지만 그 시간이 갖는 의미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시대의 어른, 정신적 지주로 살아오신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그리움은 다시 그런 존재의 부재를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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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자의 꿈, 실크로드 - 봉인된 과거와 열린 미래로의 황홀한 시간 여행
문윤정 글.사진 / 바움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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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라는 시간 위에 선 여행자

무수히 많은 여행에세이가 있다. 다양한 이유로 매어 사는 현대인들에게 여행이 화두로 등장하면서부터 낫선 여행길에 선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 매어 사는 삶이 그만큼 풀어낼 이야기가 많아서가 주된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여행이 현실에 매이고 묻혀 있던 스스로를 발견하게 하고 깊은 성찰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여행의 바로 이 점이 다양한 이유로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이젠 없어서는 안 될 요소가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굳이 국경을 넘어 해외로 나가는 것만이 아니라면 현대인 누구나 삶이 여행이듯 그 여행의 길 위에서 걷고 있는 중이라고 본다.

 

그런 여행길에서 보고 느낀 다양한 체험을 글로 담아 내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는 것이 여행에세이라면 그 많은 여행자들이 내놓는 글들이 몇 가지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여행지를 소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것과 여행길에서 자신과의 만남이 주를 이루는 것으로 말이다. 물론 이 둘 사이는 상시 넘나들며 상호작용하기에 여행길에 선 당사자에겐 그리 다른 것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오로지 여행자가 내 놓은 글을 통해 만나는 낫선 여행지는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여행자가 여행길 위해서 보고 느낀 것을 통해 독자는 자신만의 여행길을 가는 것이기에 독자의 몫은 저자의 이야기를 떠난 자신이 감당하는 몫만큼 받아들이고 체험하는 것이다.

 

봉인된 과거와 열린 미래로의 황홀한 시간 여행이라는 부제를 단 ‘걷는 자의 꿈, 실크로드’는 옛날의 영화를 간직하고도 숨죽이고 있는 실크로드를 서쪽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길을 나선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크로드는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 삶과 죽음 사이의 ‘시간 여행’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 시간 여행을 저자는 봉인된 과거와 열린 미래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저자의 발길이 닺는 실크로드의 모든 곳은 봉인된 과거에 집중하며 열린 미래의 가능성에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목숨을 담보로 할 수밖에 없었던 옛 실크로드 여행자들의 고단함이 잠시 쉬던 곳들에 남겨진 흔적들을 찾아보고 셀 수도 없는 시간이 흐른 뒤에도 시간을 봉인한 체 갇혀 있는 듯 존재감을 지켜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감싸 안은 자연이 공유하는 역사는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윤정의 ‘걷는 자의 꿈, 실크로드’는 파키스탄의 라호르, 이슬라마바드, 탁실라, 카라코람하이웨이, 길기트, 훈자마을, 소스트에 잠시 머물다 중국의 탁스쿠르칸, 카슈가르, 우루무치, 타클라마칸사막, 투루판, 돈황, 란주, 천수, 시안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대장정을 시작한 저자의 발길이 머무는 곳으로 안내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흔적을 남기지만 시간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뜨거운 사막,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선 산, 천 길 낭떠러지의 길의 실크로드의 그것도 마찬가지리라. 이미 사라졌고 지금도 사라지고 있는 흔적들이 가픈 숨을 몰아쉬고 있는 현장에서도 시간을 멈춘 듯 여전히 사람들의 삶이 이어지지만 이미 예전의 그 삶은 아니다. 발길이 머무는 곳 마다 찾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만나는 친절한 미소가 낫선 여행길에 선 여행자의 가슴을 따스하게 만들어주는 것, 이것이 어쩌면 시간 앞에 속절없는 모든 것을 대신하여 여전히 사람들을 살아가게 만드는 요소가 아닌지. 저자도 그 따스한 미소 앞에 여행자의 조심성마저 한없이 풀어지고 있다.

 

실크로드라는 여행지를 소개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여행에세이는 풍경을 바라보는 객관자의 입장이 더 강해 보인다. 풍경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와 하나 되는 것보다는 그 풍경들을 바라보는 입장에 서서 관찰자로써의 자자의 시각이 강하다. 머뭄의 여행과 다른 점이 이것이 아닌가 싶다. 저자의 발길을 따라 가다보면 글로는 부족한 상상의 현장을 보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사진은 그곳을 담아내지 못했다. 저자와 공감하는 부분의 차이가 아닌가 싶다.

 

문명과 문명이 만나는 통로 ‘실크로드는 교류와 융합을 통해 동 서양이 상생해온 길이며, 동서남북을 소통시키고 인류역사의 어제를 오늘로 이어준 길이었던 것’이다. 저자는 그 길에서 과거와 미래의 공존을 본다. 현실에 묶여 움직이지도 못하는 것 같은 우리의 삶도 그 시간 속에서 공존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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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선운사를

다른 누군가는 오동도를

어떤이는 남해안 바닷가를

또 다른 사람은 ..

.

.

사람들은 자신의 그림움을 담아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달래곤 한다.

 

육지를 향한 그리움으로

먼 바다를 건너온 바람이

붉디 붉은 속내를 가만히 내려 놓는 곳마다

꽃으로 피어난다.

 

간절함이 얼마나 사무친걸까?

붉은 속내를 가득 안고 피어나

목숨을 통채로 떨구고서도

멈출 수 없는건지

붉은 향기는

봄 바람에 자신을 내 맡기고 있다.

 

나에게 그 붉은 마음은

백수해안도로 한 모퉁이에서

툭...떨어져 나뒹굴던

그리움이었다.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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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운의 조선 프린스 - 조선왕실 적장자 수난기
이준호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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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무게에 넘어진 세자들

법적으로는 신분제가 사라진 현대사회에서 왕자라는 존재에 대해 상상하는 것은 사람들의 바람이 가미된 상상의 산물이 아닐까 싶다. 왕이 존재하는 영국이나 일본 등 몇몇 나라들에서 왕자의 신분도 절대 왕권의 시대와 비교하면 많이 달라진 것 또한 사실이다. 모든 것이 시대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것처럼 현대사회에서 왕이나 왕자, 공주 등 특별한 신분의 사람들에 대한 이미지도 달라진 것이 당연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더라도 여전히 왕이나 왕자에 대한 호기심이나 부러움 등은 존재한다.

 

경제력이 거의 모든 것의 기준이 되는 현대사회에서는 부의 정도가 신분을 대신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현실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달라진 이미지가 있으나 그들에 대한 관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실제 왕권의시에 왕자의 신분으로 살았던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보는 왕자의 모습이 우리가 아는 왕자의 삶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고 봐도 지나친 말이 아닌 현실에서 수 백 년 전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기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글자 속에 담겨진 인물들을 현실로 불러오는 일이니 어쩌면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우리들에게 왕자의 이미지는 현대인의 눈으로 재해석된 극이나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모습이 전부가 아닐까?

 

‘비운의 조선 프린스’는 왕조시대인 조선의 왕자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왕자들 중에서도 차기 정권의 주인공으로 낙점 받은 세자들의 이야기다. 부귀영화, 명예, 권력을 모두 차지할 예정자로 내정된 왕자이기에 그들의 삶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 실제적인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의 제목처럼 세자로 책봉된 왕자들의 삶은 만만치 않았다. 흔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세자의 모습도 궁궐에서 벌어지는 정치적 싸움에 피해자로 그려진다. 조선 왕조의 권력세습 구도는 왕이 죽으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왕권의 승계 보장도 확실치 않았고 거기에다 파벌간의 정치싸움에 희생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왕권을 이어야 할 중요한 인물이었기에 궁궐 생활 전반에 대한 다양한 장치에 의해 통제도 세자의 삶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기도 했다.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세자들로는 불노와 지운, 양녕대군, 월산대군과 제안대군, 영창대군, 소현세자 등이다. 저자가 이들에게 주목한 이유는 무엇일까? 세자로 책봉되고도 부왕보다 먼저 죽거나 폐세자가 된 사연들이 그들의 고단함 삶을 표현해 주는 것이 아닐까? 이처럼 이 책은 조선 왕조의 권력세습 과정에서 희생양이 된 세자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들여다 보고 있다. 저자가 제시한 기준은 태종 이방원이 만든 왕조의 권력세습 구도인‘적서차별’과 ‘적장자계승’의 원칙이 어떤 작용을 하였는지를 살펴 왕자들의 삶을 무너뜨렸는지를 중심으로 그들의 비극적인 사연을 살펴보고 있다.

 

역사를 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판단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시대에 역사를 보고 이해하는데 필요한 시각은 무엇일까? 아직 해결되지 못한 근현대사의 문제를 도외시하고 그 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어쩜 사실상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세자들의 삶을 이해하는 시각도 마찬가지다. 인조왕의 소현세자의 경우 청나라에 볼모생활에 대한 평가가 그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기존의 평가와는 다른 시각을 내놓고 있다. 당시 조선이 처한 국제정치 권력의 이행기에 어떤 시각으로 당시 조선의 현실을 봐야 하는지 등에서 소현세자의 볼모생활 중에 소현세자와 청나라와의 관계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분명한 것은 역사는 지난 시간의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는 점이다. 역사는 역사를 바라보는 시점의 문제와 직결되며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역시 마찬가지다. 저자가 바라보는 시각이 옳고 그름의 문제를 판단하기에 앞서 역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질문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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