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속의 신체지도
샌드라 블레이크슬리 & 매슈 블레이크슬리 지음, 정병선 옮김 / 이다미디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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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 여전히 미지의 세계다

사람의 마음에 대한 관심으로 선택한 전공이 심리학이었다. 큰 기대를 가지고 있던 전공수업에 실망하여 도대체 이게 무엇이란 말인가? 대단히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새롭다. 심리의의 한 분야인 발달심리학이나 지각심리학이 바로 그 대상이 아니었나 싶다. 심리학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구체적 학문의 영역에 들어가면서 혼란을 겪게 된 사례다.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배웠던 내용을 심리학 시간에 공부하고 있으니 어쩜 당연한 의문일지 모르지만 당시엔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러한 혼란스러움을 겪으며 사람이 외부적 자극을 받아 이러한 정보를 적절하게 처리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과정에 대한 이해는 결국 마음의 작용에 의해 행동을 결정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에서 몸과 정신활동의 상호작용으로 그 사고의 영역을 넓혀갔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이 사람의 몸과 정신활동의 상호작용을 올바로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 여전히 의문 속에 있는 것이 인지과정과 정신활동에 대한 것이다. 전문 학자들도 수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아 부어 우리 몸이 가지는 신비를 하나씩 풀어가고 있는 점을 볼 때 대단히 어려운 부분이며 쉽게 접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님을 알게 된다. 나의 이러한 관심은 일반인이 가지는 지극히 일반적 흥미를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뇌 속의 신체지도’는 뇌 과학 전문 저널리스트로 활동하였던 샌드라 블레이크슬리와 과학 전문 저술가 매슈 블레이크슬리의 공동저작물이다. 이 둘은 모자관계라고 한다. 저자들이 주목하는 점은 마음과 몸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연결의 과정에 뇌 속에 신체지도를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신체지도(Body Map)'란 우리의 몸과 내장 기관, 그리고 신체의 주변공간까지 모든 것이 뇌 속에 부호로 지도화 되어 있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지도 덕분에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실제 생활 속에서 마주하는 자극과 환경의 변화에 적절한 결정을 하개 만들어 일상생활을 매끄럽게 영위할 수 있게 한다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신체지도는 고정 불변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상황의 변화나 조건이 달라지는 것에 영향을 받으며 적극적으로 이에 대응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하여 신체지도는 자라고 수축하고 변형되면서 우리의 필요에 부응하며 단순히 신체에서 시작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의 주변의 공간으로까지 확장된다고 한다. 이를 확인하는 증거로 제시되는 것이 옷을 입거나 벗을 때, 자전거를 탈 때, 연장이나 도구를 사용할 때 등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총 10장으로 구성된 ‘뇌 속의 신체지도’는 현대 뇌과학이나 신경과학의 연구성과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다양한 분야의 실제 사례들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이해하도록 이끌고 있다. 유명한 스포츠 스타들이 다른 정상에 서 있는 운동선수들과 아떤 차이가 있는지, 간질이나 자폐증 환자들이 보이는 증상을 해석하는 부분에서도 이를 설명하고 있다.

 

한 곡의 음악은 그 속에 다양한 기호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기호들이 상호작용으로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우리 몸도 각종 기관들이 이처럼 긴밀하게 상호작용하여 한 곳의 음악처럼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수동적으로 따라가는 선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각기 영역이 충분히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작용으로 우리 몸을 모든 것을 조율하고 있다고 본다. 우리 몸은 이해 불가능 한 것에서 과학의 발달로 그 베일이 한 꺼풀씩 벗겨지고 있다. 그렇더라도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대해 얼마나 알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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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 - 언제 어디서든 거부할 수 없고, 상관해야만 하는 질문
마르틴 부르크하르트 지음, 김희상 옮김 / 알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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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럴까?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자

책과 나름대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에게도 철학은 낯설게 다가온다.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에 다양한 학문이 그렇다. 왜 이런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일까? 혹 그동안 학문하는 사람들이 일반인들에게 학문과 관련되어 나름의 성을 쌓아두고 접근하는 것을 꺼려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었는지 의심해 본다. 사회의 어느 부분이든 자신들만의 고유한 영역이 존재하며 그 영역은 자신들뿐 아니라 이웃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인정해주는 분위기와 무관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아니면 학문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나 표현하는 방식이 일반인들과 다소 차이가 있고 이러한 차이가 일반인들로 하여금 스스로 그러한 벽을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학문과 일반 대중 사이에 벽이 생기고 그로인해 편견이 날로 강화된다면 이는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인문학의 범주에 들어가는 학문의 영역이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과 동 떨어진다면 그 학문이 본래적으로 가지는 임무를 방기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출발하여 그 일상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해결해 가고 또한 사람들의 삶의 가치와 지향을 한층 높여가려는 것이 학문의 출발이라고 할 때는 더욱 더 그럴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의 철학’은 출발부터 학문에 대한 기존 선입견을 무너뜨리고 있다. 특히, 철학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거창한 이론이나 학설에 의해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우선 주목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할만하다. 바로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도 지극히 당연하고 사소한 문제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하면서 그렇게 당연하면서 사소한 것에 담긴 심오한 뜻을 함께 모색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주목하는 것은 바로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 안에 깃들어 있는 철학과 사상의 역사’다. 당연하고 사소하게 생각되는 키워드로 저자가 선정한 것들을 보면 금방이라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알파벳, 동전, 하느님 아버지, 김나지움, 수사학, 진리, 법률, 십자가, 순결, 아르바이트, 시계, 세금, 개인, 자연, 역사, 진화, 섹스, 정보, DNA 등이다.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이라고는 하지만 이들 면면을 살펴보면 이러한 것들이 과연 당연하고 사소한 것으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저자가 당연하고 사소하다고 말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생활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러한 것들은 동전이나 알파벳처럼 생활과 밀접한 것들이 있는가 하면 정치, 국가, 역사나 경제와 같은 다소 큰 의미를 담고 있는 것들도 있다.

 

저자는 이러한 당연하고 사소한 것에 해당하는 키워드에 접근하는 방식을 보면 그 말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근원에 대한 탐구에서 시작된다. 이러한 키워드의 원작자를 대부분 찾을 수 없다는 공통점을 이야기하면서 그 키워드의 의미가 담고 있는 본래의 뜻을 찾아 그 말의 어원까지를 살핀다. 그 속에서 자자가 주장하고 싶은 의미를 찾고 이를 통해 본래적인 사물이나 단어의 핵심으로 들어가고 있다. 철학과 사상의 근원에 대해 이렇게 사람들의 일상에 익숙한 것들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이 사상가나 철학자가 아니라 그들이 남긴 명제다. 이를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철학자나 사상가들이 등장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분명하게 등장하지만 그들이 등장하는 이유는 철학적 명제가 도출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며 마지막에 남는 것은 바로 철학이나 사상의 핵심을 담은 명제가 남는다. 이러한 명제는 수 천 년이 지난 현재에도 인간의 근본에 대한 유효한 질문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다.

 

하지만, 자자의 이러한 이야기는 당연하고 사소한 것에서 느껴지는 가벼움은 결코 아니다. 근본으로 시작점으로 찾아가 그 출발로부터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고 있기에 그 시작점에서 보는 것은 진중하고 무거운 생각으로 연결된다. 바로 철학과 사상이 그것이다. 저자가 머리말에서 철학은 의문에서 시작한다고 전재했듯이 의문할 수 있는 사람의 ‘생각하는 능력’에 방점을 확실하게 찍고 있다. 또한 너무도 사소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 속에 그토록 깊은 사유의 결과가 담겨 있는 것인지 새삼 놀라게 된다. 하여, 우리 일상에 늘 익숙하게 접하면서도 그 구체적 실체에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생각의 습관을 돌아보게 만들기에도 의미를 둘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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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평전 - 우리 시대에 던지는 오백년 선비의 역사
이성무 지음 / 글항아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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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정신의 긍정적 가치를 어떻게 살려야 하나?

‘뿌리 깊은 나무’라는 드라마가 주목을 받고 있다. 주목받는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내가 주목하는 요인은 ‘밀본’이라고 하는 것에 있다. 정도전의 유지를 담고 있다는 밀본은 무엇일까? 그것의 실제 존재했는지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조선을 개창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정도전이 꿈 꾼 나라에 대해 주목하기 때문이다. 정조전은 신하의 나라를 꿈꿨다. 강력한 중앙집권에 의해 왕이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 왕은 상징적의미가 크며 실질적인 권력은 신하들에 의해 움직이는 나라를 설계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조선을 개창한 태조와 이후 왕권에 도전하는 왕족들과 대결하는 과정에 그런 꿈은 무너졌다.

 

밀본이라는 것이 바로 정도전이 꿈꾼 나라를 대표하는 것이라면 이는 조선시대 권력을 양분했던 신하들의 생각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의정부를 중심으로 한 신하들의 권력에 방점을 두고 왕권과 대립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하들의 권력의 중심이 되는 의정부를 구성했던 세력들은 누구일까? 고려의 신하와 조선이 개국하며 공로를 세운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물론, 고려 왕조에 끝가지 충성하며 조선의 신하로는 살수 없다는 신념을 가진 이들도 있었지만 대세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조선은 기틀을 만들게 된다. 이 중심에 사대부들인 신하들이 있었고 이후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에 의해 조선은 움직이게 된다.

 

조선을 대표하는 말로 ‘조선은 선비의 나라’라고 한다. 바로 선비들에 사상과 정치적 이념에 의해 왕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움직였다는 것이다. ‘선비’라고 하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조선의 당쟁사와 정치 제도사를 연구해온 저자 이성무의 ‘선비평전’은 바로 조선을 이끌어온 선비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신문 지면에 연재한 글을 모아 책으로 발간한 것이다. 선비의 역사적 유래에서부터 행적, 인간관계, 그들이 지향한 학문, 정치지형도에서의 힘의 역학관계 등에 대해 다루고 있다.

 

‘선비평전’에서 저자는 선비의 개념에 대해 역사적인 고증을 통해 밝히며 그들이 국가를 운영하는 가치와 삶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들 학문의 중심이 되는 유교문화에 대해서 살핀다. 고려 말 이후 조선조가 진행되는 동안 전쟁이나 당파, 사화 등 각각의 정치지형에서 무슨 역할을 어떻게 하게 되었는지 알아보며 그들의 사상적 지향점, 정치적 실천 등을 밝히고 있다. 또한 부록 ‘선비와 선비사상’에서는 선비들의 삶의 가치를 지탱해 준 철학과 정신세계를 체계적으로 살핀다.

 

“민본주의는 어디까지나 선비들의 덕치를 표방한 것이요, 백성들은 덕치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 점이 현대 민주주의와 다른 점이다. 선비들은 지주이자 관료요, 지식인으로서 조선의 정치 주체였고, 그들이 내세우는 여론정치도 사론士論, 즉 선비들의 여론을 바탕으로 했다.”

 

조선의 정치이념은 민본정치라고 한다. 이 민본정치가 담고 있는 지향점은 무엇일까? 저자는 선비는 특정한 계급을 형성하며 사회를 지배했다고 이야기한다. 민본의 민은 백성을 지칭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기에서 민은 정치권력의 중심 역할은 한 것이 아니라 통치의 대상으로써 백성이었다는 점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선비라고 하는 계급이 가지는 이중적인 모습이 아닐까도 싶다.

 

저자는 본문에서 당파를 이야기하며 일부 학계에서 주장하는 당파를 붕당으로 불러야 한다는 이야기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의 잔재이니 이를 탈피하여 올바른 개념정리를 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일제에 의해 정리된 개념이 그것뿐 아니기에 이 모든 것을 고친다면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이와는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또한 송시열과 윤휴의 이야기에서는 주자학에 대한 둘의 입장을 교조주의자와 자유주의자로 보면서 양비론의 입장을 위하고 있다. 저자 자신의 시각이 무엇인지 밝힐 필요도 있지 않을까? 이 점은 사회적 논의나 공감대가 필요한 부분이긴 하나 전공한 학자의 의견을 밝히는 것이 독자로 하여금 판단의 근거를 가지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조선이라는 나라와 선비는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는 시대였다. 불의에 대해 자신의 목숨을 내 놓고 저항하거나 때론 권력의 투쟁과정에서 목숨을 담보로 당파를 세우고 반대당파의 목숨을 빼앗기도 했다. 목숨보다는 의리와 명분이라는 대의를 앞세웠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사회의 이념과 가치와는 구별되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생각하게 된다. 이런 시각은 저자가 ‘선비정신’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신적 가치로 삼을 수 있을지 조심스런 접근을 하고 있다는 점과 맥을 같이한다고 보인다. 선비정신이 담고 있는 긍정적 가치를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깊은 사고가 필요한 부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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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치세어록 - 난세를 사는 이 땅의 리더들을 위한 정조의 통치의 수사학 푸르메 어록
안대회 지음 / 푸르메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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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 담긴 정조의 진면목을 살피다

왕조의 나라에서 권력의 중심은 왕에게 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했을 때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왕조국가 조선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조선은 권문세도가들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들의 권력과 왕권이 상시적으로 충돌하며 양자의 힘의 구도에 의해 나라가 운영되었다고 보는 측면이 강하다. 왕권이 강했을 때는 강력한 중앙집권으로 왕을 중심으로 정책이 집행되었으나 그러한 시기에도 신하의 견제를 상시적으로 받았다. 이렇다 보니 왕은 때론 명목상 왕일뿐 일 때도 있었다. 당파에 의한 무수한 사화가 이를 증명해 준다.

 

500여 년 동안 27대 왕을 이어오는 동안 치세를 잘하여 기억되는 왕으로는 몇 명이 되지 않는다. 조선을 개창한 태조야 그렇다 치더라도 조선 초 세종이나 세조를 비롯하여 후반기에 와서 영조나 정조 등은 나라를 반석위에 올리며 민본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던 왕들이다. 그 중에서 할아버지 영조의 후원으로 왕위에 올라 재위기간 24년 동안 당쟁과 아버지 사도세자의 불운과 관련되어 어려운 시대를 보냈다. 하지만 정조는 치세기간 중 탕평책에 의거하여 인재를 등용, 서적보관 및 간행을 위한 규장각 설치, 임진자, 정유자 등의 새 활자를 만듦, 실학을 발전시킴, 문화적 황금시대 등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김 왕으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재위기간동안 정조 왕이 이러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근원한다고 봐야 하는가? 안대회는 그의 저서 ‘정조 치세어록’을 통해 글쓰기에서 출발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역대 통치자들 중에서 정조만큼 글을 많이 쓰고 남긴 왕은 없었다고 하면서 학문하는 왕으로써의 정조를 살피고 있다. 이 책에 담긴 글은 정조의 글을 모아 엮은 ‘홍재전서’를 중심으로 ‘일성록’ 등의 자료에서 몇 가지 주제를 선정하여 선별하고 이 글에 대한 저자의 해설을 달았다.

 

저자 안대회는 정조의 어록에서 선별한 글을 나라의 근간이 되는 힘, 공부,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 임금의 길, 인재에 대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법, 신하에게 이르는 말, 공정한 나라를 위함, 인간 정조를 엿보다 등 총 8가지 주제로 분류하고 묶었다. 왕으로써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 권력의 중심에서 신하들에게 내린 교서, 인재를 바라보는 시각을 비롯하여 인간 정조의 면모를 살필 수 있는 글들이다. 특히, 난세로 표현되는 현대 정치를 돌아볼 때 지금도 정치가들이 머리에 세기고 살펴야 할 만한 내용들이 많다. 정치의 근본이 무엇인지 살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뿌리를 튼튼하게 하는 길은 백성에게 달려 있고, 백성을 배양하는 길은 먹을 것에 달려 있으며, 먹을 것이 풍족해야 교육이 가능하다. 교육하고 난 다음에도 반드시 조심스럽게 지켜주고 도와주어 이익을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나라를 보존하는 큰 근본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고 3년 뒤 첫 번째 조참에서 반포한 선언에 담긴 내용이다. 조참이란 문무백관이 한 달에 네 번 대궐의 인정전에 모여 국왕에게 문안드리는 의식을 말한다. 정조의 정치 틀을 확인할 수 있는 글로 경제, 인재, 국방, 재정 등에 관한 정조의 중심 사상을 담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오늘날 정치에서 무엇이 중심이어야 하는지 살펴도 조금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유난히 학문을 좋아하고 글쓰기를 즐겼던 왕이 정조다. 또한 세손시절부터 써온 일기를 왕위에 오른 후에도 쓸 만큼 자신의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런 정조의 면모는 학문에 갇힌 고루함보다는 가을 산 단풍든 모습이나 국화가 피어있는 풍경을 보는 감성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궁중 음악의 곡조가 빠른 것을 보고도 세상이 돌아가는 세태를 짐작하여 이를 바로 잡기를 지시했다. 감성이 메마르면 세상을 보는 눈도 메마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고 이를 올바로 포용하려는 마음을 결코 일어날 수 없다. 정조가 보여준 탁월함은 풍부한 감성에서 출발하고 있지 않나 싶다. 오늘날 정치가들이 본받아야 할 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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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꼽밑에 지혜의 등불을 밝혀라 - 성 초월로 가는 이야기
천명일 지음 / 지혜의나무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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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성본능에 대한 고찰

2011년 12월 12일, 고등학생이 초등학교에 들어가 화장실 청소를 하는 여학생을 성폭행 했다는 뉴스에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 하는 개탄의 소리가 많다. 이러한 뉴스를 접하는 것은 이제 일상이 되었다. 도대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도덕성이나 사회적 규범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한 개인의 탈선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만연해 있는 성폭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은 사회적 문제로 바라보기에 충분한 요소를 가진다고 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이러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까? 인간의 기본 욕구 라고 하는 식욕, 수면욕, 성욕 등은 생존과 관련되어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온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기본적인 욕구가 사회적 조건과 환경에 의해 변화를 거치면서 왜곡되어 왔다는 점 또한 누구나 알고 있다. 특히, 산업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인간의 정신적 산물 보다는 물질적 풍요로움을 추구하는 사회로 전환되면서 이러한 기본 욕구는 자본이라는 괴물과 결합되어 그 왜곡의 강도를 높여왔다. 우리가 살아갈 사회는 앞으로도 이런 물질적인 풍요를 벗어난 삶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적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는 길은 요원한 문제로 남게 되는 것일까?

 

‘배꼽밑에 지혜의 등불을 밝혀라’는 인간의 기본 욕구가 되는 성의 문제에 대해 근본적 해결을 찾아 나선다. 이 책의 저자는 성이 가지는 근본적인 속성으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항상 미워하고 사랑하는 상호작용을 일으킨다고 본다. 즉, 인간의 근본적인 고뇌가 바로 성의 속성 때문이라는 시각으로 보고 있다. 이 성에서 자유로울 때 인간의 근본적 고뇌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마음에 대해 근원적인 이해를 전재로 우주와 인간이 생성된 근원을 찾아간다. 초신성의 폭발과 같은 우주의 팽창이론이나 종교에서 말하는 우주와 인간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저자의 기본적 시각이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우주론과 인간에 대한 이해에서 출발하고 있어 보인다. 이로부터 인간이 태어나고 근본적으로 성에 대해 종속되어온 역사를 밝히며 인간과 성 본능에 대한 이해를 설명하고 있다. 성의 속성에 매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래 모습을 도출하여 이를 극복해 갈 수 있는 방법으로 제시하는 것이 명상법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명상은 관심법으로 모아진다. 성의 본능이 일어나는 시점에서 무심히 그것을 바라보고 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렇게 마음의 동요를 잠재울 수 있도록 하는 방법으로 몸의 올바른 자세를 이야기한다. 흔히 불가에서 참선하는 자세와 동일한 자세를 취해 몸과 마음을 긴장시키고 때론 호흡을 가다듬어 차츰 차츰 성 본능을 잊어가야 한다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근본적인 고뇌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며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가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성폭력 등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각에 동의할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의문이다. 성에 대한 생각의 차이부터 성의 본능을 극복해야 할 문제로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깨달음의 길에 서서 수행해가는 수행자들이라면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사항이 될 테지만 일반인들에게 이러한 시각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배꼽밑에 지혜의 등불을 밝혀라'는 어쩌면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일반사람들이 받아들이기에는 다소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이 책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성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문제제기를 통해 깊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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