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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8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평점 :
“베갯머리를 보니 겹꽃잎동백 한 송이가 다다미 위에 떨어져 있다. 다이스케는 지난밤에 이 동백꽃이 떨어지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그의 귀에는 그 소리가 천장에서 고무공이 떨어지는 소리만큼 크게 울렸다.”(16p)
갓난아기의 머리만큼이나 큰 동백꽃을 바라보며, 다이스케는 자신의 혈관을 흐르는 선홍색 피를 상상하고 생명을 느낀다. 동백꽃에 얼굴을 묻고 향을 맡은 후, 하얀 요 위에 놓는다. 다이스케의 동작 하나하나를 따라가게 하는 시각, 청각, 후각이 동원된 아름다운 첫 장면이다.
그림 같은 장면은 낮잠을 자는 다이스케의 머리위에 늘어진 은방울꽃, 이 모습을 본 미치요가 가져온 백합, 이 백합을 바라보는 다이스케의 화폭으로 이어진다. 4폭 병풍을 상상하게 한다.
무의식의 욕망인 듯 머리맡에 떨어진 붉은 동백꽃은 하얀 요와 선명한 대비를 이루며, 현실의 괴리된 자의식을 발견한다. 미치요의 등장과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인해 그는 자의식 과잉상태에 빠진다. 그에게 있어 이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마음이 향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부조리한 사회에서 전도유망할 수 없는 그는, 러일 전쟁 이후 상공업 팽창에 의해 형성된 신흥 부르주아인 아버지가 부정 축재 하는 것을 비판하면서도 거기에 의존하고 있는 유민(流民)이다. 이중적이다. 이 상태에 빠진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사랑과 결혼도 마찬가지다. 정조관념에 붙잡혀 불행과 매번 마주치는 결혼은 거부한다. 그러기에 미치요를 좋아하면서도 히라오카와의 결혼을 주선해주었다. 이제 와서 후회하고,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구속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 또한 모순이다. 그는 분열된다. 미치요의 백합을 보며, 순수한 마음을 따르고 싶은 동시에, 그 향기에 취해 죽고 싶은 두 가지 감정은 그의 신경증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마지막 결정은 폭발로 이어진다.
미치요를 선택하는 것이 친구와 의(義)를 저버리고, 사회의 규범을 어기고, 가족들과의 단절을 가져올 것을 알면서도 그는 결정한다. 그리고 그는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불안한 감정에 휩싸인다. 다이스케는 거리로 뛰어나가 전차를 탄다. 모든 것이 빨갛게 물들어 불타고 있는 세상에서 현기증을 느낀다.
“갑자기 빨간 우체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자 그 빨간색이 갑자기 다이스케의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와 빙빙 돌기 시작했다. 우산 가게 간판에 빨간 양산 네 개가 겹친 채 높이 걸려 있다. 양산 색깔이 다시 다이스케의 머릿속으로 들어와 빙빙 소용돌이쳤다. 네거리에 크고 새빨간 풍선을 팔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전차가 갑자기 모퉁이를 돌자 풍선이 따라와 다이스케의 머리에 달라붙었다.……나중에는 세상이 전부 빨개졌다. 그리고 다이스케의 머릿속을 중심으로 불길을 내뿜으며 빙빙 회전했다. 다이스케는 머릿속이 다 타버릴 때까지 계속 전차를 타고 가기로 결심했다.”(325p)
한 송이 붉은 동백꽃의 이미지로 시작한 소설은 빨갛게 물든 세상으로 마치고 있다. 욕망이 번져 가는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시로』 그 후인 이 작품에서 산시로의 욕망과 불안이 다이스케에게서는 잠잠해지고, 체념의 정서마저 느끼게 한다.
자의식에 갇혀 있었던 그가 자신의 욕망을 따름으로 자유함을 얻으려 하나, 오히려 불안에 휩싸임을 보게 된다. 어정쩡한 상태를 깨고 욕망을 선택했을 때 그를 엄습해온 불안은 무엇 때문일까? 개인의 욕망과 사회의 욕망이 서로 대립할 때 불안하다. 규범이 세분화되고 강한 사회일수록 정도는 심하다. 인간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다는 조건을 떠올린다. 다이스케가 말한 것처럼, 정신적, 도덕적, 구조적으로 건강하지 않다면 분열적 양상은 더욱 극단적이게 된다. 그렇다면 개인의 선택은 건강한지 질문하게 된다. 이어지는 작품 『문』에서 이 생각은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