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투쟁 - 민주공화국인가, 인민공화국인가? 대한민국 정체성 총서 17
박명수 지음 / 백년동안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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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45년 8.15해방 이후부터 1945년 9월 여운형이 주도한 조선인민공화국 선포까지 약 20일간 여운형, 박헌영 그리고 송진우 세력이 과연 어떠한 세상을 이루고자 하였는지를 다룬 책이다.


이 책의 저자는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좌우합작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였고 박헌영 세력이 편입됨에 따라 좌경화 되었으며 우파세력은 세력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저자는 송진우가 주도한 한민당 계열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았고 대한민국 건국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주장한다. 당시 송진우 계열이 채택한 자유민주주의가 지금현재 북한과 남한의 현실 즉 북한은 인민민주주의를 택해서 자유롭지 못한 국가가 됬고 남한은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해서 세계경재 10위권을 자랑하고 신앙의 자유가 보장된 국가가 되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하지만 저자의 이와 같은 주장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았다고 본다.


저자의 주장이 사실과 무관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저자는 여운형의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좌경화된 단체이고 건준의 행적이 과대포장되었다고 얘기하였다. 물론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 계열이 대거 합류하고 송진우 세력이 건준가담을 거부하면서 건준이 좌경화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건국준비위원회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이 편입하며 좌경화가 되기 전 1944년 8월에 만들어진 건국동맹 시절부터 안재홍, 조만식 그리고 임정의 광복군과 일제의 패망을 대비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고 안재홍을 비롯한 민족주의 독립운동 세력도 건국동맹에 가담하였다. 뿐만 아니라 천황이 항복방송을 하기 전 총독부와 협의하여 국내의 치안을 담당했던 세력이 여운형의 건준세력이다.


둘째 저자는 송진우의 한민당계열이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송진우의 한민당계열은 대부분이 친일세력이었고 1949년에 이르면 한민당 계열 인물중 많은 사람들이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다.따라서 한민당계열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독립운동 세력이 될 수 없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한민당에게 있는게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게 있다.


마지막으로 셋째 인민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운운하며 저자는 현재북한과 남한의 차이를 여운형의 건준과 송진우의 한민당에서 찾았는데 여운형은 사회주의보다는 진보적 민주주의자에 가까웠고 송진우의 한민당계열은 위에서 언급했듯이 친일세력이다. 여운형은 한때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서 활동 하면서 레닌,트로츠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도 만나 조선독립을 얘기했던 적이 있었다. 그가 비록 사회주의에 좋은점을 받아야한다고 주장한 적은 있어도 마르크스주의를 전적으로 도입하여 공산주의 세상을 만들자고 했던 적은 해방정국시기에는 없었다. 오히려 조국이 통일되기 위해선 좌우 갈등을 막고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추구하며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여운형이 인민민주주의를 전적으로 선택한 빨갱이다."라는 저자의 주장은 저자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다.


3년전 국정교과서 문제가 이슈화 되기 전에 나온 극우파계열 책으로써 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 볼수 있는 책이다. 난 말하고 싶다. 여운형은 절대로 공산주의자가 아닌 진보적 민족주의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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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3-10 21: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항일전선에서 가장 적극적인 무력 항쟁 노선을 걸었던 계열이 이른바 좌익세력이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무시하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역사 평가를 내리는 방식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NamGiKim 2018-03-10 21:34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수구들의 그렇게 싫어하는 북한의 김일성도 항일무장투쟁을 했고 그외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이 무장투쟁을 했죠.(김일성을 옹호하는건 절대로 아님!) 북한의 연안파 세력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런 배경을 무시하고 사회주의 성향이 있는 독립운동가들을 무작정 빨갱이라 매도하는 세력이 바로 뉴라이트에요. 참고로 이 책은 뉴라이트게열이 쓴 책입니다.
 
박정희 평전 - 개발독재자
김삼웅 지음 / 앤길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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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독재자 박정희 평전 서평>

2017년 11월 14일은 박정희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민국에서 박정희 만큼 평가가 상반되는 인물을 찾기는 힘들다. 찬양하는 쪽은 “5천년 역사에서 해내지 못했던 배고픔을 해결한 영웅”이고 비판을 하는 민주진영에선 “친일 매국노, 18년간 독재를 일삼은 독재가”다. 찬양하는 쪽은 거의 샤먼에 가깝다. 박정희 세력의 땅인 대구와 구미에선 박정희를 칭찬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박정희 초상 앞에 촛불을 켜놓고 기복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로 박정희의 존재는 반신반인과 같은 존재다.


2016년 11월 14일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음에도 불구하고 구미의 박정희 생가에선 99주기 추모제가 열렸고 박정희 생가에서 ‘박근혜 퇴진’ 피켓을 든 몇몇 양심 있는 구미시민들의 저항하였으나 박근혜 추종자들로 인하여 온갖 욕설을 들으며 쫓겨났고 그 현장에선 박사모와 그 추종자들은 박정희 달력을 들며 만세를 불렀다. 이처럼 대구나 구미에선 박정희의 존재가 거의 신과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면 수구세력들이 반신반인이라는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리는 말을 하면서 찬양하는 박정희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위대하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일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절대로 아니다”다. 박정희 그는 개인사적으로 보면 매우 불행한 인물이다. 가장 따르던 셋째형 박상희가 대구 10ㆍ1항쟁 당시 미군정 경찰의 총탄에 맞아 죽고, 박정희 본인과 부인도 각각 총에 맞아 죽었다. 그의 아들은 한 때 마약 중독자였으며 둘째 딸과 큰 딸은 남매의 혈육관계가 끊기고, 후계자로 대통령이 된 장녀 박근혜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디까지나 개인사적으로 보면 그렇다. 몇몇 수구들은 이와같은 이유를 들어 박정희의 과오와 박근혜의 과오르 덮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그의 과오를 덮는 결정적인 이유가 돼서는 절대로 안 된다. 박정희 인생 중에 논란이나 평가가 양극단으로 갈리는 사건들에 대해 수구세력의 주장을 반박하는 차원에서 써볼까 한다.


1940년 박정희는 혈서를 써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했다. 그리고 1944년에는 만주군에 배속된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친일행위다. 수구 쪽에선 이 사실을 부인하고 그가 만주군에 있었을 당시 독립군을 토벌한 일은 없다고 하며 심지어는 중공의 앞잡이 팔로군을 토벌한 것은 매우 잘한일이라며 찬양하는 정신 나간 이들도 있다. 1944년 박정희가 만주군에 배속되었을 당시 그가 맡았던 임무는 팔로군 토벌이었다. 팔로군은 중국 공산당쪽의 군대였고 이들중엔 김원봉이 창설한 조선의용군 같은 독립군들도 있었다. 애초에 팔로군 자체도 일본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 창설된 중국의 군대이다. 따라서 박정희는 팔로군 토벌에 앞장섰기에 적극적으로 친일을 한 것이고 수구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행각을 부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만주군 활동이 “사실은 독립운동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수구세력들의 주장이 있다. 이는 근거 없는 주장이다. 그가 해방 후 광복군에 합류하여 귀국했던 것은 항일투쟁을 한 광복군대가 아닌 귀국하기위해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귀향대였다. 그가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광복군에 합류했다는 주장은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5.16쿠데타를 일으킨다. 수구세력들은 5.16을 쿠데타가 아닌 위댛한 군사혁명이라 궤변을 늘어놓는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을 몰아낸 뒤 만들어진 장면정부는 나름대로의 개혁을 실행하려 했으나 국민들의 불만 또한 많았다. 어느 정도 무능했던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장면정부에 불만을 느낀 박정희는 5.16쿠데타를 감행하여 정권을 잡는다. 수구세력들은 군사혁명이라 말한다. 그들은 혁명의 개념부터 다시 알아봐야 한다. 혁명이란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이지만 박정희 정권은 반공의 제1의 국시로 삼는 둥 오히려 반혁명을 일삼았고 그들이 얘기하는 혁명은 군이 민중과 협력하여 일으킨 것이 아닌 일부군인들이 일으킨 군사반란일 뿐이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북베트남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북폭을 감행했다. 이에 따라 한국군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수구세력들은 월남 파병이 자유진영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고 월남 파병이 매우 옳았다는 듯이 얘기하곤 한다. 월남 파병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외화벌이를 할 수 있는 황금 빛 엘도라도이긴 했다. 그러나 월남 파병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월남 파병이 자유진영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는 수구세력들의 주장은 베트남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얘기하는 것이다. 당시 미국이 지원하고 있었던 남베트남 정권은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정권전복을 위한 군사 쿠테타가 끊이질 않았고 공산주의자라 의심되는 사람들은 숙청당했다. 남베트남 민중들도 남베트남 정권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월맹의 호치민과 베트콩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에서 월맹은 독립운동가들이 주측이된 민족해방세력이었고 남베트남은 부정부패를 일삼는 정치인들의 주축이된 민족반역자세력이었다. 즉 월남 파병은 부정부패한 정권을 지키기 위해 파병된 셈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군은 전쟁범죄 민간인학살 강간등 베트남 민중에게 아주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따라서 월남 파병은 우리가 매우 반성해야할 일이다.


1960년대 당시 한국은 북한보다도 훨씬 못사는 나라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도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경제발전이 필수적이었다. 그의 집권기간 동안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수구세력들은 이를 두고 오직 박정희의 공으로만 치부한다. 경재 발전에 있어서 박정희의 공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서독에 파견된 광부나 간호사 월남파병에 나갔던 군인들 그리고 전태일 동지와 같이 극심한 착취를 당하면서 경제발전에 이바지 했던 노동자들의 공은 전부다 빼놓은 채 오직 박정희의 공으로만 치부하기에 문제인 것이다. 한홍구 교수의 지적이다. “그래도 박정희가 경제는 성장시키지 않았느냐 하는 주장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이런 주장은 박정희 같은 독재를 하고도 경제를 성장시키지 못한 우간다의 이디 아민이나 중앙아프리카의 보카사, 버마의 네윈 같은 독재자들과 비교할 때 쓸 수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과거 박정희 시대를 경험했던 수구들 중에서는 “아 그래도 박대통령시대가 좋았어!”라며 그 시대를 찬양하는 이들이 있다. 박정희 시대는 국민의 말과 생각을 탄압하는 아주 무서운 시대였다. 정권에 대해 조금이라도 불만을 토로하면 반공법이라는 반동적이고 파쇼적인 법을 적용하여 인민들을 탄압했다. 그 시대에 행해졌던 반공법 사례를 보면 히틀러의 나치독일과 맞먹는다. 굳이 나치독일과 다른 점이 있다면 형식적으로 나마 야당이 존재하고 정적 김대중 세력이 있었다는 점 일 것이다. 박정희 시대는 반공이라는 말 하나면 누구든지 잡을 수 있었고 감옥에 보낼수 있었고 필요에 따라선 죽이기까지도 했다. 그랬기에 난 박정희 시대의 반공법을 히틀러의 나치독일에 비유한 것이다. “박정희 시대가 살기 좋았다.”며 과거를 회상하는 일은 매우 어리석고 무서운 일이다.


2017년 3월 10일 적폐의 여왕이자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는 탄핵되었다. 5월 10일 새 정권이 들어섰다. 정권은 교체되었지만 우린 아직도 박정희라는 아주 근본적인 적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은 인물은 바뀌었지만 세력은 그대로였다.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수평적 정권교체는 청와대 주인만 바뀌었을 뿐, 국회ㆍ사법ㆍ검찰ㆍ재계ㆍ언론ㆍ대학ㆍ연구소 등 한국사회의 상층부, 지배구조는 대부분 박정희체제의 지속상태였고 새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그 지배구조는 무너지지 않았다. 김삼웅 선생이 쓰신 박정희 평전은 과거 박정희 정권이 국가를 파쇼화 시키고 국민을 개돼지로 세뇌시키면서 했던 만행과 현재 우리 사회에 놓여있는 박정희 적폐청산의 중요성을 알리는 아주 좋은 책이다. 저자 김삼웅은 박정희 시대의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서 박정희 평전을 썻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가 박정희 적폐를 극복하기 위해선 박정희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알고 있어야한다. 박정희 시대의 엄청난 경제 성장을 표현한 단어가 있다. ‘한강의 기적’이 바로 그것이다. 2016년 민중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인하여 박근혜정권에 분노했고 이에 맞서 투쟁했다. 3월10일 적폐의 여왕을 탄핵시키면서 민중은 광화문의 기적을 보여주었다.개발독재자 박정희 평전에서 나온 마지막 글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넘어야 하는 질곡은 천박하기 짝이 없는 한국자본주의 괴물이다. 박근혜의 몰락은 한 비리 정치인의 몰락에 그치지 않고 56년 망령처럼 우리 주위를 떠돌던 박정희 개발독재 신화의 확실한 종언이 되어야 한다. 개발독재로 얼마간의 번영을 누렸지만, 그것이 뒤틀린 산업화의 결과일 수 없다는 반박논리는 접어둔다 해도 결과적으로 공짜는 없었다.
산업화의 과실은 왜곡된 분배구조를 통해 불평등심화를 초래하고, 중산층을 붕괴시켰다. 세계화에 특화된 재벌기업과 자본은 부를 무한 축적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지속적 임금삭감과 자산하락으로 고통받아왔다.
더욱이 승자들의 패자들에 대한 손실전가 행위는 날로 더 심해지고 있으며, 최대의 희생자 중 하나는 나라의 미래인 청년세대다. 불평등과 갑질천국의 헬조선을 만든 한강의 기적은 던져버리고, 이제 대한민국은 광화문의 기적 위에 우뚝 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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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6-07 1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꼴댓글은 사절입니다. 비판도 정당한 비판만 받지 남을 원색적으로 욕하며 색깔론으로 모는 비판은 사절입니다. 북으로가라니 빨갱이라니 뭐니 하는 수구적폐들의 댓글은 제가 개인적으로 남긴 리뷰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좌빨을 보았나 2018-07-03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와 더불어 민주화교주 김대중의 정체를 알려주마

1980년 수감된 옥중의 김대중 회고록 내용이다

1. 8․15해방후 신민당(후에 남로당에 합병)과 민주애국청년동맹, 전국노동평의회등 ˝극렬
좌익정당과 단체˝에서 활동했고 ˝남로당˝ 목포시 당청년부장으로 공산계 파괴활동의 중추적
분자였다. 이 당시 김대중은 공산독재체제를 위한 적색혁명투쟁에 광분했다.

2. 6․25가 발발, 목포가 공산군 수중에 들어가자 목포시 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부역
행위를 관리했다.

3. 특히 남로당 섭외부장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한 죄
로 전남도경에 검거됐다.

4. 김대중이 의장인 국민연합이 1980. 5월 22일 개최하기로 예정한 민주화 촉진 집회에서 시
위를 선동하여 폭력으로 국가기관을 장악하려 했다. (핵심죄목 1: 내란음모죄: 15년)

5. 김대중은 1972년 도일하여 정치적 망명을 가장하여 한국을 비난,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
했고, ˝한민통˝을 결성하여 반정부 교포들을 규합, 한국정부를 전복시키려했다. 국가보안법
제1조 제1호 위반에 해당하는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저지른 것이다(사형).

6, 동년 8월 귀국, 반국가단체인 한민통 일본본부 구성원들과 통신하면서 10․26 사태로 인
한 정국불안을 틈타 민주회복을 구실로 반정부의식이 강한 복학생 및 재야인사들에게 활동
비를 뿌리며 반정부 조직을 강화했다.

7. 박수부대까지 동원, 강연장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강연 모습과 내용을 담은 비디오 테이
프, 녹음 테이프, 책자까지 제작하여 학원가 및 추종자들에게 배포, 학생 및 일반 국민들에
게 반정부의식을 고취하다가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 5백만원을 주어 광주사태를 유발시
켰다.
(핵심죄목 2: 반국가단체 구성죄, 국가보안법 제1조제1호: 1980년 9월 11일 사형구형)

8.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이 김대중의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바로 이날
전두환은 김대중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으며 미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3월 3일 징
역 20년형으로 또 감형했습니다


(1988년 11월 30일 국회청문회에서 밝혀진 사실)

1. ˝해방 후 1946년까지는 좌익활동을 했고 1947년부터는 완전히 손을 끊었다˝(김대중의
말).

2. 1945년 8월 25일 좌익단체인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시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한 사실이 있다
(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3.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목포시지부 청년들이 남교동 파출소를 습격한 배후 조종의 혐
의로 구속되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4. 당시 좌익정당인 신민당(당수 김두봉, 북한 부주석)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사
실이 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5. 1950년 9월 7일 ˝간첩˝ 장금성이 남로당 전남 목포시 당위원장 앞으로 제출한 당원등록
청원서에 1946년 6월 16일 김대중씨의 활약상이 나열돼 있다. 여기에는 ˝민주청년동맹 목포
시지부위원회 간부 김대중이 적극 찬동하고 있다˝, ˝민청 간부 김대중에서 교양을 받았다
˝는 대목이 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북에서 받은 돈)

1, 일본에 있는 동안 간헐적으로 좌익인물들로부터 산만하게 수십-수백만엥씩 받았다는 수
사기록은 있으나 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당사자간에 주고받는 돈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2. 1997년, 평양에서 김병식 부주석이 김대중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여기에는 김대중이
1971년 20만달러를 김병식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확실히 기록돼 있습니다.

3. 1999년 김정일 발언록에는 ˝DJ가 김일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총애를 받았다˝ 요지의 글
이 있습니다(일본 문예춘추 12월호).


NamGiKim 2018-07-16 23:00   좋아요 1 | URL
김대중은 왜 6.25때 인민재판 받고 죽을 뻔했지? 인민군 때문에 사형선고 받았는데.ㅋㅋㅋ
 
개고기
안용근 지음 / 효일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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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한민국에 개식용 반대 소음공해를 일으키는 똥물론자들이 매우 많다. 그들중 수장이라 할 수 있는 박소연은 "서양에서는 개를 식용으로 삼지 않았다."라고 거짓 선동을 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만 해도 서양인들도 개를 아주 잘먹었다. 1933년 히틀러가 동물보호법을 실행하면서 서양도 개고기를 안먹는 쪽으로 기울였던거지 절대로 식용화를 안했던 것이 아니다. 거기다 "개고기=야만"이라는 단순한 논리는 히틀러의 게르만 우월주의나 19세기 서구제국주의자들의 논리를 보는것 같다.

나의 외할아버지 집에 보리라는 6개월된 애기 시츄가 있다. 애기가 워낙 귀엽기에 같이 안있다 보면 계속 생각나기까지 하고 요즘도 우리 보리 사진을 볼때마다 페이스북에 올리기까지 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가 가지고 있는 감정이지 그렇다 해서 남이 먹는것을 야만이라 규정하며 못먹게 할 수는 없다. 따라서 현재 박소연을 비롯한 동물권 단체들은 말그대로 파시즘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는것이다.

물론 난 개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러나 개고기를 먹는 우리 전통을 파괴하려는 파시스트의 행동에는 절대 동의할 수 없다. 이 책은 국내의 똥물론자들의 파쇼적인 주장(서구권이 개고기를 식용화 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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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2018-03-11 2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책도 있군요.. 정말 상상도 못했는데 ㅎㅎㅎ. 감사합니다.

NamGiKim 2018-03-11 22:32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박소연 같은 똥물론자들이 읽어야할 책입니다.
 
정글북 (미니북)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미니북 (한글판) 71
조지프 러디어드 키플링 지음, 구자언 옮김 / 더클래식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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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었다. 영화와 만화를 같이 보고 난 뒤 이걸 보니 감회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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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운전사 (2disc)
장훈 감독, 송강호 외 출연 / 에프엔씨애드컬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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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택시 운전사>감상평

(7개월 전에 영화보고 쓴 글입니다.)

영화 택시운전사를 봤다.영화 보기 몇달전부터 진심으로 학수고대하며 보기만을 기다렸고 오늘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다.

영화 시작부분에 송강호가 택시운전을 하다가 시위대를 목격하며 "저 대학생들은 공부는 안하고 데모질이나 하냐? 아랍가서 땀뻘뻘 흘리며 고생해야지 "아 우리나라만큼 살기좋은 나라가 없네!!" 하고 뼈저리게 느낄거다." 라는 대사가 있다. 물론 이건 송강호가 광주에 들어가 공수부대의 참상을 보기 직전에 한 얘기지만 70-80년대 일반인들이 가지고 있는 시위대에 대한 인식이 어떤것인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송강호가 독일인기자 한츠 위르겐 피터를 만나 광주로 가서 전두환 군사정권의 무차별 폭력을 보며 충격받는 장면이 나왔는데 난 이 장면을 보면서 송강호 같은 일반인들이 직접적으로 광주의 참상을 보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의 족벌언론이 하는 언론왜곡만을 접했다면 과연 무슨생각을 하며 살았을지 예상짐작이 갔다. 그리고 시위대를 진압하러 나선 공수부대가 광주인민(전혀 죄없는 사람까지)들을 곤봉으로 때리고 m16소총으로 무차별 사격하는 잔인무도한 참상을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독일인 기자 위르겐 힌츠 페터가 광주의 참상을 전세계에 알리기위해 목숨을 담보로 광주에 잠입하지 않았다면 김사복(송강호역)택시기사가 독일인 기자를 태우지 않거나 광주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과연 광주의 참상이 우리에게 알려줬을지 다시한번 생각하게 됐고, 내가 만일 진압군이었거나 광주시민이었다면 무엇을 했을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5월27일 탱크와 장갑차를 동원한 전두환의 군대가 전남도청을 무자비하게 진압을 하면서 형식적으론 사태가 진전되었다. 그러나 광주의 만행은 이미 독일인기자를 통해 세계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 후 대한민국의 대학에 널리 알려지면서 민주화 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전두환 독재정권은 야당인사들과 학생들을 좌경, 용공, 간첩, 빨갱이 딱지를 붙혀 민주주의 국가에선 있을 수 없을 일을 광주사건이후로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학생들과 민주투사들 그리고 시민들은 전두환 정권의 총칼과 폭력압에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 87년 민주화를 이룩했다.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룩했고 그 모든 사건 가운데에는 광주가 있었다. 87년 민주화가 되고 17년 국민힘으로 군사독재의 상징 박근혜를 탄핵하고 정권을 교체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한국당을 비롯한 수구세력들은 버젓이 살아있다. 그리고 그 수구세력들은 아직도 5.18을 폭동으로 규정하며 천인공노할 역사왜곡을 하고있다.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려는 사람들이 많고 조만간 1000만돌파를 할거라 예상되고 있는 현실이 정말 기쁘다. 택시운전사 안본 사람이 있다면 당장 보기를 추천하고 광주에 잠입하여 진실을 세상에 알린 위르겐 힌츠 페터와 김사복 기사에게 감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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