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평전 - 개발독재자
김삼웅 지음 / 앤길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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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독재자 박정희 평전 서평>

2017년 11월 14일은 박정희가 태어난 지 100년이 되는 날이다. 대한민국에서 박정희 만큼 평가가 상반되는 인물을 찾기는 힘들다. 찬양하는 쪽은 “5천년 역사에서 해내지 못했던 배고픔을 해결한 영웅”이고 비판을 하는 민주진영에선 “친일 매국노, 18년간 독재를 일삼은 독재가”다. 찬양하는 쪽은 거의 샤먼에 가깝다. 박정희 세력의 땅인 대구와 구미에선 박정희를 칭찬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박정희 초상 앞에 촛불을 켜놓고 기복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로 박정희의 존재는 반신반인과 같은 존재다.


2016년 11월 14일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음에도 불구하고 구미의 박정희 생가에선 99주기 추모제가 열렸고 박정희 생가에서 ‘박근혜 퇴진’ 피켓을 든 몇몇 양심 있는 구미시민들의 저항하였으나 박근혜 추종자들로 인하여 온갖 욕설을 들으며 쫓겨났고 그 현장에선 박사모와 그 추종자들은 박정희 달력을 들며 만세를 불렀다. 이처럼 대구나 구미에선 박정희의 존재가 거의 신과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면 수구세력들이 반신반인이라는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리는 말을 하면서 찬양하는 박정희는 그들이 말하는 대로 위대하고 존경받을 만한 인물일까?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절대로 아니다”다. 박정희 그는 개인사적으로 보면 매우 불행한 인물이다. 가장 따르던 셋째형 박상희가 대구 10ㆍ1항쟁 당시 미군정 경찰의 총탄에 맞아 죽고, 박정희 본인과 부인도 각각 총에 맞아 죽었다. 그의 아들은 한 때 마약 중독자였으며 둘째 딸과 큰 딸은 남매의 혈육관계가 끊기고, 후계자로 대통령이 된 장녀 박근혜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탄핵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어디까지나 개인사적으로 보면 그렇다. 몇몇 수구들은 이와같은 이유를 들어 박정희의 과오와 박근혜의 과오르 덮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그의 과오를 덮는 결정적인 이유가 돼서는 절대로 안 된다. 박정희 인생 중에 논란이나 평가가 양극단으로 갈리는 사건들에 대해 수구세력의 주장을 반박하는 차원에서 써볼까 한다.


1940년 박정희는 혈서를 써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했다. 그리고 1944년에는 만주군에 배속된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친일행위다. 수구 쪽에선 이 사실을 부인하고 그가 만주군에 있었을 당시 독립군을 토벌한 일은 없다고 하며 심지어는 중공의 앞잡이 팔로군을 토벌한 것은 매우 잘한일이라며 찬양하는 정신 나간 이들도 있다. 1944년 박정희가 만주군에 배속되었을 당시 그가 맡았던 임무는 팔로군 토벌이었다. 팔로군은 중국 공산당쪽의 군대였고 이들중엔 김원봉이 창설한 조선의용군 같은 독립군들도 있었다. 애초에 팔로군 자체도 일본제국주의에 맞서기 위해 창설된 중국의 군대이다. 따라서 박정희는 팔로군 토벌에 앞장섰기에 적극적으로 친일을 한 것이고 수구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박정희의 친일행각을 부정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의 만주군 활동이 “사실은 독립운동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수구세력들의 주장이 있다. 이는 근거 없는 주장이다. 그가 해방 후 광복군에 합류하여 귀국했던 것은 항일투쟁을 한 광복군대가 아닌 귀국하기위해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귀향대였다. 그가 독립운동을 하기위해 광복군에 합류했다는 주장은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주장이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5.16쿠데타를 일으킨다. 수구세력들은 5.16을 쿠데타가 아닌 위댛한 군사혁명이라 궤변을 늘어놓는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을 몰아낸 뒤 만들어진 장면정부는 나름대로의 개혁을 실행하려 했으나 국민들의 불만 또한 많았다. 어느 정도 무능했던 것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장면정부에 불만을 느낀 박정희는 5.16쿠데타를 감행하여 정권을 잡는다. 수구세력들은 군사혁명이라 말한다. 그들은 혁명의 개념부터 다시 알아봐야 한다. 혁명이란 헌법의 범위를 벗어나 국가 기초, 사회 제도, 경제 제도, 조직 따위를 근본적으로 고치는 일이지만 박정희 정권은 반공의 제1의 국시로 삼는 둥 오히려 반혁명을 일삼았고 그들이 얘기하는 혁명은 군이 민중과 협력하여 일으킨 것이 아닌 일부군인들이 일으킨 군사반란일 뿐이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북베트남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북폭을 감행했다. 이에 따라 한국군도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수구세력들은 월남 파병이 자유진영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고 월남 파병이 매우 옳았다는 듯이 얘기하곤 한다. 월남 파병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외화벌이를 할 수 있는 황금 빛 엘도라도이긴 했다. 그러나 월남 파병은 분명히 잘못된 일이다. 월남 파병이 자유진영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었다는 수구세력들의 주장은 베트남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얘기하는 것이다. 당시 미국이 지원하고 있었던 남베트남 정권은 부정부패가 극에 달해 정권전복을 위한 군사 쿠테타가 끊이질 않았고 공산주의자라 의심되는 사람들은 숙청당했다. 남베트남 민중들도 남베트남 정권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월맹의 호치민과 베트콩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미국이 일으킨 베트남 전쟁에서 월맹은 독립운동가들이 주측이된 민족해방세력이었고 남베트남은 부정부패를 일삼는 정치인들의 주축이된 민족반역자세력이었다. 즉 월남 파병은 부정부패한 정권을 지키기 위해 파병된 셈이다. 뿐만 아니라 한국군은 전쟁범죄 민간인학살 강간등 베트남 민중에게 아주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따라서 월남 파병은 우리가 매우 반성해야할 일이다.


1960년대 당시 한국은 북한보다도 훨씬 못사는 나라였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도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선 경제발전이 필수적이었다. 그의 집권기간 동안 경제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수구세력들은 이를 두고 오직 박정희의 공으로만 치부한다. 경재 발전에 있어서 박정희의 공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서독에 파견된 광부나 간호사 월남파병에 나갔던 군인들 그리고 전태일 동지와 같이 극심한 착취를 당하면서 경제발전에 이바지 했던 노동자들의 공은 전부다 빼놓은 채 오직 박정희의 공으로만 치부하기에 문제인 것이다. 한홍구 교수의 지적이다. “그래도 박정희가 경제는 성장시키지 않았느냐 하는 주장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다. 이런 주장은 박정희 같은 독재를 하고도 경제를 성장시키지 못한 우간다의 이디 아민이나 중앙아프리카의 보카사, 버마의 네윈 같은 독재자들과 비교할 때 쓸 수 있는 이야기일 뿐이다.”


과거 박정희 시대를 경험했던 수구들 중에서는 “아 그래도 박대통령시대가 좋았어!”라며 그 시대를 찬양하는 이들이 있다. 박정희 시대는 국민의 말과 생각을 탄압하는 아주 무서운 시대였다. 정권에 대해 조금이라도 불만을 토로하면 반공법이라는 반동적이고 파쇼적인 법을 적용하여 인민들을 탄압했다. 그 시대에 행해졌던 반공법 사례를 보면 히틀러의 나치독일과 맞먹는다. 굳이 나치독일과 다른 점이 있다면 형식적으로 나마 야당이 존재하고 정적 김대중 세력이 있었다는 점 일 것이다. 박정희 시대는 반공이라는 말 하나면 누구든지 잡을 수 있었고 감옥에 보낼수 있었고 필요에 따라선 죽이기까지도 했다. 그랬기에 난 박정희 시대의 반공법을 히틀러의 나치독일에 비유한 것이다. “박정희 시대가 살기 좋았다.”며 과거를 회상하는 일은 매우 어리석고 무서운 일이다.


2017년 3월 10일 적폐의 여왕이자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는 탄핵되었다. 5월 10일 새 정권이 들어섰다. 정권은 교체되었지만 우린 아직도 박정희라는 아주 근본적인 적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은 인물은 바뀌었지만 세력은 그대로였다.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수평적 정권교체는 청와대 주인만 바뀌었을 뿐, 국회ㆍ사법ㆍ검찰ㆍ재계ㆍ언론ㆍ대학ㆍ연구소 등 한국사회의 상층부, 지배구조는 대부분 박정희체제의 지속상태였고 새 정부가 들어섰음에도 그 지배구조는 무너지지 않았다. 김삼웅 선생이 쓰신 박정희 평전은 과거 박정희 정권이 국가를 파쇼화 시키고 국민을 개돼지로 세뇌시키면서 했던 만행과 현재 우리 사회에 놓여있는 박정희 적폐청산의 중요성을 알리는 아주 좋은 책이다. 저자 김삼웅은 박정희 시대의 적폐를 청산하기 위해서 박정희 평전을 썻다고 한다. 그렇다. 우리가 박정희 적폐를 극복하기 위해선 박정희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알고 있어야한다. 박정희 시대의 엄청난 경제 성장을 표현한 단어가 있다. ‘한강의 기적’이 바로 그것이다. 2016년 민중은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인하여 박근혜정권에 분노했고 이에 맞서 투쟁했다. 3월10일 적폐의 여왕을 탄핵시키면서 민중은 광화문의 기적을 보여주었다.개발독재자 박정희 평전에서 나온 마지막 글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친다.

"넘어야 하는 질곡은 천박하기 짝이 없는 한국자본주의 괴물이다. 박근혜의 몰락은 한 비리 정치인의 몰락에 그치지 않고 56년 망령처럼 우리 주위를 떠돌던 박정희 개발독재 신화의 확실한 종언이 되어야 한다. 개발독재로 얼마간의 번영을 누렸지만, 그것이 뒤틀린 산업화의 결과일 수 없다는 반박논리는 접어둔다 해도 결과적으로 공짜는 없었다.
산업화의 과실은 왜곡된 분배구조를 통해 불평등심화를 초래하고, 중산층을 붕괴시켰다. 세계화에 특화된 재벌기업과 자본은 부를 무한 축적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지속적 임금삭감과 자산하락으로 고통받아왔다.
더욱이 승자들의 패자들에 대한 손실전가 행위는 날로 더 심해지고 있으며, 최대의 희생자 중 하나는 나라의 미래인 청년세대다. 불평등과 갑질천국의 헬조선을 만든 한강의 기적은 던져버리고, 이제 대한민국은 광화문의 기적 위에 우뚝 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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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6-07 19: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수꼴댓글은 사절입니다. 비판도 정당한 비판만 받지 남을 원색적으로 욕하며 색깔론으로 모는 비판은 사절입니다. 북으로가라니 빨갱이라니 뭐니 하는 수구적폐들의 댓글은 제가 개인적으로 남긴 리뷰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좌빨을 보았나 2018-07-03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그와 더불어 민주화교주 김대중의 정체를 알려주마

1980년 수감된 옥중의 김대중 회고록 내용이다

1. 8․15해방후 신민당(후에 남로당에 합병)과 민주애국청년동맹, 전국노동평의회등 ˝극렬
좌익정당과 단체˝에서 활동했고 ˝남로당˝ 목포시 당청년부장으로 공산계 파괴활동의 중추적
분자였다. 이 당시 김대중은 공산독재체제를 위한 적색혁명투쟁에 광분했다.

2. 6․25가 발발, 목포가 공산군 수중에 들어가자 목포시 인민위원회 결성에 참여하여 부역
행위를 관리했다.

3. 특히 남로당 섭외부장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 유재식에게 활동자금을 제공한 죄
로 전남도경에 검거됐다.

4. 김대중이 의장인 국민연합이 1980. 5월 22일 개최하기로 예정한 민주화 촉진 집회에서 시
위를 선동하여 폭력으로 국가기관을 장악하려 했다. (핵심죄목 1: 내란음모죄: 15년)

5. 김대중은 1972년 도일하여 정치적 망명을 가장하여 한국을 비난,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려
했고, ˝한민통˝을 결성하여 반정부 교포들을 규합, 한국정부를 전복시키려했다. 국가보안법
제1조 제1호 위반에 해당하는 반국가단체 구성죄를 저지른 것이다(사형).

6, 동년 8월 귀국, 반국가단체인 한민통 일본본부 구성원들과 통신하면서 10․26 사태로 인
한 정국불안을 틈타 민주회복을 구실로 반정부의식이 강한 복학생 및 재야인사들에게 활동
비를 뿌리며 반정부 조직을 강화했다.

7. 박수부대까지 동원, 강연장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강연 모습과 내용을 담은 비디오 테이
프, 녹음 테이프, 책자까지 제작하여 학원가 및 추종자들에게 배포, 학생 및 일반 국민들에
게 반정부의식을 고취하다가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에게 5백만원을 주어 광주사태를 유발시
켰다.
(핵심죄목 2: 반국가단체 구성죄, 국가보안법 제1조제1호: 1980년 9월 11일 사형구형)

8. 1981년 1월 23일 대법원이 김대중의 상고를 기각하여 사형이 확정되었습니다. 바로 이날
전두환은 김대중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으며 미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3월 3일 징
역 20년형으로 또 감형했습니다


(1988년 11월 30일 국회청문회에서 밝혀진 사실)

1. ˝해방 후 1946년까지는 좌익활동을 했고 1947년부터는 완전히 손을 끊었다˝(김대중의
말).

2. 1945년 8월 25일 좌익단체인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시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한 사실이 있다
(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3. 목포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목포시지부 청년들이 남교동 파출소를 습격한 배후 조종의 혐
의로 구속되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4. 당시 좌익정당인 신민당(당수 김두봉, 북한 부주석)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사
실이 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5. 1950년 9월 7일 ˝간첩˝ 장금성이 남로당 전남 목포시 당위원장 앞으로 제출한 당원등록
청원서에 1946년 6월 16일 김대중씨의 활약상이 나열돼 있다. 여기에는 ˝민주청년동맹 목포
시지부위원회 간부 김대중이 적극 찬동하고 있다˝, ˝민청 간부 김대중에서 교양을 받았다
˝는 대목이 있다(김대중 시인한 사실이라고 검찰이 증언)


(북에서 받은 돈)

1, 일본에 있는 동안 간헐적으로 좌익인물들로부터 산만하게 수십-수백만엥씩 받았다는 수
사기록은 있으나 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한 당사자간에 주고받는 돈은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2. 1997년, 평양에서 김병식 부주석이 김대중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여기에는 김대중이
1971년 20만달러를 김병식으로부터 받은 것으로 확실히 기록돼 있습니다.

3. 1999년 김정일 발언록에는 ˝DJ가 김일성에게 많은 빚을 지고 총애를 받았다˝ 요지의 글
이 있습니다(일본 문예춘추 12월호).


NamGiKim 2018-07-16 23:00   좋아요 1 | URL
김대중은 왜 6.25때 인민재판 받고 죽을 뻔했지? 인민군 때문에 사형선고 받았는데.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