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해 관심이 많다. 소위 제국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아프가니스탄은 근현대 역사만 보더라도 영국과 소련 그리고 미국의 침공을 차례대로 물리친 나라다. 지난 202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탈레반의 승리로 끝이 났고, 현재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하고 있다. 사실 탈레반은 이미 30년 전에 아프가니스탄 내에서의 내전을 통해 집권을 했으며, 1996년부터 2001년까지 5년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통치했다. 즉, 그런 상태에서 미국이 9.11 테러를 빌미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해 관심이 많기에, 나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관련 한국 영화가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이 영화를 감상하게 됐다. 영화를 즐기며 보긴 했으나, 한쪽 편향으로 흐르는 영화적 흐름이 맘에 안든 것과 동시에, 나중에 실체를 알고 나서 영화에서 피해자들로 나오는 이들에 대한 분노를 금할 수 가 없었다.


영화는 시작부터 오사마 빈라덴이 주도한 9.11 테러 영상을 보여주며 자막을 통해 전쟁에 대해 설명한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시간을 2006년으로 되돌려 아프가니스탄에 선교하러온 이들이 버스타고 가는 보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전반적인 내용은 납치당한 국민들을 구하기 위해 황정민과 현빈이 개고생한다는 것이다. 즉, 영화는 사고친 국민들도 우리 국민들이니까 국가가 구해야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사실 국가가 이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자꾸 이 선교사들에 대한 심각한 미화가 되는 점이 많이 우려가 됐다. 이 영화의 실제 모티브가 된 교회는 굳이 가지 말라는 곳 아프가니스탄에 갔고, 거기서도 정말 위험한 전투 지역에 호위 차량 단 한대도 없이 버스 한대만 대여해서 들어가고자 했다. 말 그대로 자살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들을 선교활동가들로만 묘사하기 바빠, 실제 모티브가 되는 이들이 어떠한 사고를 쳤고, 얼마나 편협한 사고관을 가지고 어리석을 했는 짓을 했는지를 전혀 얘기하지 못했다. 대신 신파적 요소, 그러니까 가족이 보고 싶어요와 같은 부분을 넣어서 감정샘을 자극하게 만든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실제 모티브가 되는 사건에 대해 좀 찾아봤다. 당시 탈레반에게 납치됐던 이들이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한 짓거리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들은 이슬람 사원에 가서 예수 찬송가를 부르고, "이슬람 사원이 제발 무너지게 하소서"와 같이 타국 문화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는 민폐 그 이상의 행동거리를 자행했다. 심지어 고아원에 가서 과자를 주며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에게 예수 찬송가를 부르게 하는 등, 타국에 대한 문화 존중이 전혀 없는 짓거리만 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런 내용들을 당시 이들이 싸이월드와 블로그에서 확인되었다는 것이다. 영화는 이 사실을 전혀 얘기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보면 이들에 대한 극심한 동정감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 정부의 고생으로 귀국한 이들이 한 짓거리는 전혀 반성없는 행위들 뿐이었다.


심지어 이 교회는 이런 국제 망신적 사고를 저질러 놓고도, 정신을 못 차린채, 2010년대 다시 한번 아프가니스탄에 선교단을 보내려 했다. 나는 이 점에서 이들에 대한 평가는 절대 좋을 수 없다고 본다.


영화 평을 쓰다보니, 실제 모티브가 된 이들에 대해 길게 비판하게 됐다.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한 영화니 기대하고 봤는데, 딱 평타는 한 것 같다. 장엄한 아프가니스탄 사막에 대한 묘사는 충실하다. 그런 영상미는 제법 볼만할 것이다.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 영화에서 신파를 벌이는 인질들은 국민이기 이전에 저런 행패를 부린 어리석은 이들이었다는 사실 말이다. 이건 꼭 인지하고 영화를 감상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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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8 2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 그래도 영화소식 듣고 미화 됐을까봐 우려스러웠는데 역시나 그랬군요. 후기 잘 봤습니다.

NamGiKim 2023-01-28 21:26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그래서 이렇게라도 리뷰를 남겨봅니다.

2023-02-04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23-02-05 20:23   좋아요 0 | URL
정확히 어떤 문구죠?

2023-02-06 0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NamGiKim 2023-02-06 13:40   좋아요 0 | URL
아하. 이건 그냥 넣은것 뿐입니다.ㅎㅎㅎㅎㅎ 진짜 그리 생각한다기 보단.
 

최근들어 러우전쟁이 격화되면서, 과거 서방 사회가 진행하던 홀로도모르 제노사이드 사기극 운운이 더 심화되고 있고, 심지어 독일 정부까지도 지들이 2,700만 명의 소련인들을 학살한 사실은 망각한 채, 홀로도모르가 러시아의 학살이라는 말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나는 예전부터도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학살이 아니라고 주장했던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젤렌스키 정부가 서방의 지원을 받아가며 그런 네오나치식 사기극을 퍼뜨리는 것이 얼마나 말 안되는 소리인지 반박할 필요가 있어 이렇게 긴 글을 정리해 보았다.


“기근에는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첫째, 뱟까(現 키로프 일대 - 주) 북부에서도 마주쳤던 여름의 반(半)건조성 기후대는 1932년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남부 지역 전역에 걸쳐 흉작을 야기했다. 둘째, 집산화를 둘러싼 투쟁은 작황을 혼란하게 만들었다. 집산화는 관료적 규범에 바탕을 둔 질서정연한 과정이 아니었다. 집산화는 당의 지원으로 빈농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빈농들은 "쿨락"의 토지를 몰수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지만, 집단농장에 기초한 경제를 운영하는 데에 있어서는 별다른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당은 1930년 무렵부터 일찍이 실수를 밝혀내고 과오를 정정하기 위해 당원들을 파견했다. (...) 1933년의 강우량은 시의적절했다. 당은 꼴호즈의 운영을 돕기 위해 엄격한 기준을 바탕으로 선별된 당원들을 농촌에 파견했다. 당원들은 성공했다. 1933년의 풍작 이후 농촌의 상황은 경이로운 속도로 급격하게 개선됐다.“


Tottle, Douglas. Fraud, Famine, and Fascism. Toronto: Progress Books, 1987, p. 102


사실 러우전쟁 전부터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대해선 볼셰비키의 학살이네, 소련의 학살이네, 스탈린의 학살이네 하는 주장들이 즐비했다. 이 주장의 핵심은 잔혹한 소련 공산당이 우크라이나인들을 의도적으로 말살하기 위해 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이고, 실제로 수백만 명이 스탈린과 소련에 의해 굶어 죽었으며, 현재 러시아는 이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며, 의도적으로 반소 및 반러 감정을 부추기기 위해 만들어 놓은 레파토리다. 사실 우크라이나 대기근은 공산당이나 스탈린의 학살이라고 하기에 무리가 많은 점이 있다. 그것이 뭔지 알아보고자 한다.


홀로도모르가 조직적인 학살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은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기근이 일어날 당시 우크라이나측의 기후를 보면 생산력에 영향이 생길 정도로 좋지 않았다는 점

2. 부농과 소작농의 계급투쟁이었다는 점

3. 이 기근이 비단 우크라이나에서만 일어나는 기근이 아니었다는 점


무엇보다 세간에 잘못알려진 사실이 있다면, 소련 공산당과 스탈린이 구제정책을 하지 않았다는 것과 곡물 징발을 기근 도중에도 강도를 높였다는 식의 주장이다. 우크라이나 대기근 당시 소련 정부가 기근 도중에도 곡물징발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스탈린의 지도부는 기근에 대응하고 곡물 수출을 줄이고 모자라는 곡물을 수입해서 기근 지역에 보내는 등 기근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최소한 소련 공산당은 기근을 의식했으며, 일각에서 주장하는 것 처럼 의도적으로 학살하려고 벌이지는 않았다. 홀로도모르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역사학자이자 농업 학자인 마크 타우거(Mark Tauger)는 소련 정부는 소량의 곡물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식량을 끊임없이 배포했으며, 소련 전역이 식량 부족에 실질적으로 직면했고, 곡물 수매량과 배분량에 대한 정보가 의심의 여지 없이 정확했다는 사실에 미루어볼 때, 당대의 소련이 명실상부하게도 극심한 식량 부족에 부딪혔기 때문에, 기근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1931년과 1932년의 흉작에 있었다.고 논문에서 밝혔다.(Mark Tauger. 「Natural Disaster and Human Actions in the Soviet Famine of 1931-1933 Pittsburgh: University of Pittsburgh」, 2001, p. 5)


그 외에도 타우거 교수는 2017년에 출간된 앤 애플바움(Anne Applebaum)의 저서 『붉은 기근: 스탈린의 우크라이나 전쟁 1921~1933(Red Famine: Stalin's War On Ukraine, 1921~1933)』에 대한 반박 서평을 실은 적이 있다. 타우거 교수는 애플바움은 1930년대 초반의 식량부족 사태가 "이전보다 많은 곡물을 생산하려는 농민들의 동기를 총체적으로 무너뜨린" 식량 부족 사태의 근본적인 원인이 정부의 곡물 수매에 있었다고 주장하며, 하지만 이후에는 1930년의 수확량이 1929년의 숫자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도 말했지만, 애플바움의 말대로, 농민들의 동기가 "완전히 일소"됐다면 이와 같은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겠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애플바움은 또한 1929~1930년 당시 소련의 기근 구제책에 대해서도 논하지만, 흉년과 기근에 대한 구제가 농민들에게 동기를 마련해준 경위를 염두에 두지 않았으며, 단지 1928~29년 곡물 위기 도중에 소련 지도부의 상당수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위험요소로 지목했고,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 계열 조직들에 대한 약식재판을 열며, 농민들의 저항이 민족주의와 연계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사실만 의도적으로 강조했음을 지적했다.(Mark Tauger, 「Review of Anne Applebaum's "Red Famine: Stalin's War on Ukraine」, 2018.07.01)


또한 타우거 교수는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소련의 집산화로 굶주렸다고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이런 연구들은 낮은 수확에 영향을 준 환경적 요인과, 기근과 흉작의 지속적 회복, 1930년대 당시의 대규모 수확, 이 시기의 소련 농장의 기계화, 소련인구 증가, 소련 시대의 식량생산과 소비의 장기간 증가 등을 축소하거나 실제 수확자료를 무시한다.(홀로도모르 사기: 일어나지도 않았던 이오시프 스탈린의 범죄(번역) http://mlkorea.org/v3/?p=10477&fbclid=IwAR299Mw4JN5PBVU_faYy2_W1tSvsJQkz9zlUtW6T-fnTrery0_2tbNDqhqE%7C )


서방에 알려진 홀로도모르의 자료들은 조작된 것들도 상당히 많다. 캐나다 역사학자인 더글라스 토틀은 『사기, 기근 그리고 파시즘: 우크라이나 학살 신화 히틀러에서 하버드까지(Fraud, Famine, and Fascism: The Ukrainian Genocide Myth from Hitler to Harvard)』라는 책에서 1987년에 나온 우크라이나 대기근 관련 영화인 <절망의 추수>에서 사용된 사진들이 1921년에서 1922년 볼가 기근(Volga Famine) 당시의 사진이라는 사실과 사진이 1932년에서 1933년 기근을 보여주기 위해 이용되었다는 사실을 밝혔으며, 더글라스 토틀에 따르면 억만장자인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1934년 여름에 나치 독일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독일이 허스트 소유의 인터내셔널 뉴스 서비스(International News Service)사의 국제 뉴스를 구매하겠다는 계약을 맺었으며, 당시 나치 출판물은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대한 흑색선전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기근에 대한 다른 비슷한 기사가 허스트사에 의도적으로 실렸다고 한다.


우크라이나에서 600만 혹은 700만 명이 아사했다는 서구의 주장 및 수치는 사실 1차 출처가 나치들이다. 마리오 소사가 쓴 『진실이 밝혀지다』라는 책을 보면, 600만 명이 소련에서 아사했다고 주장한 1차 출처는 나치독일의 선전장관인 요제프 괴벨스였다. 나치는 기본적으로 반볼셰비즘과 반공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물로, 우크라이나 대기근에 대해 악의적인 선전을 했는데, 그 주장이 미국이나 영국에서 아무런 비판없이 사용되었다는 것이 마리오 소사의 주장이다. 아래 마리오 소사의 책 서평을 썼던 국내 프레시안 기사를 한번 보도록 하자.


나치가 찾아낸 협력자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였다. 허스트는 황색저널리즘을 마케팅전략으로 이용해 25개의 일간신문, 24개의 주간신문, 12개의 라디오방송국, 2개의 국제뉴스 통신사 등을 소유하게 된 언론계의 거물이었다. 허스트가 발행하는 신문의 구독자는 미국에서만 4000만 명에 달했다. 미국 성인의 3분의 1이 허스트의 신문을 읽고 있었다. 1934년 극렬한 보수반공주의자였던 그는 독일로 가서 히틀러를 만나게 된다. 이후 허스트는 자신의 언론을 통해 친독일성 향의 선전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독일로부터 받은 뉴스기사는 소련에서의 대량학살, 살육 등으로 채워진 기사들 일색이었다. 이때 만들어진 괴담이 우크라이나 괴담이었다. 1935년 2월 18일 <시카고 아메리칸(Chicago American)>지 1면 머리기사로 소련에서 600만 명이 굶어 죽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후 허스트는 독일이 요구하는 선전물을 자신의 언론 제국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퍼뜨린다.(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45981?fbclid=IwAR0qXXXS4_ua8l2p9Wp99BU4eSXvPQ7P8N-HEqF0o9q-G7gGrX88hM4Jovo)



또한 우크라이나 대기근으로 700만 명이 사망했다는 주장의 출처도 니콜라스 프리초드코(Nicolas Prychodko)라는 인물인데, 독소전쟁 당시 나치가 키예프를 점령하자 임명한 문화 교육 장관이었다. 1933년 미국인 기자 프레드릭 비첼(Frederick Birchall)은 400만 명 이상 죽었다고 했는데, 그는 그 당시 베를린에 있었고 히틀러 정권을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최초의 미국인 기자이기도 했으며, 몇년 전에 개봉한 영화 <미스터 존스>의 주인공 가레스 존스 또한 히틀러와 괴벨스하고 각별한 사이었던 친나치 성향의 기자였다.


우크라이나에서 기근이 발생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에는 쿨락들의 의도적인 사보타주도 컸다. 루도 마르텐스가 쓴 스딸린 바로 보기의 내용을 한번 보도록 하자.


1932―1933년의 우끄라이나 기근은 네 가지 원인이 있었다.


‘그들의 반대파(꿀락)는 그들의 소와 말들을 집단소유로 하기보다는 차라리 도살하는 방식을 초기에 취했다. 그 결과 쏘비에뜨 농업은 통탄할 만한 타격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대다수의 소와 말들을 꿀락들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28년과 1933년 사이에, 쏘련에서 말의 수가 거의 3,000만 두에서 1,500만 두 이하로, 뿔 달린 소의 숫자는 7,000만 두(젖소 3,100만 두 포함)에서 3,800만 두(젖소 2,000만 두 포함)로; 양과 염소는 1억 4,700만 두에서 5,000만 두로, 돼지는 2,000만 두에서 1,200만 두로 감소했다. 쏘비에트의 농촌 경제는 1941년 무렵까지 이러한 치명적인 손실에서 회복되지 못했다.’


‘... 몇몇은[꿀락들은] 관리를 살해했고, 집단농장의 재산에 불을 질렀으며, 심지어 그들 자신의 수확물과 종자까지 불태웠다. 보다 많은 이들이 파종과 수확을 거부했는데, 이들은 아마도 당국이 양보를 하거나 어차피 그들을 먹여 살릴 것이라는 가정 아래 이런 행동을 하였다.’


‘그 여파로 1932-1933년에 “우끄라이나 기근”이 닥쳤다.... 독일에서는 나찌 출판물에 그리고 미국에서는 허스트 출판물에 등장한, 대부분 허구인 무시무시한 서술에는, 1921년 볼가 지방에서 촬영된 것으로 밝혀진 사진이 종종 예시된다. .... 일본에서의 전쟁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명백하게 야기된, 1932년 봄의 특별 징발로 인해 종자와 수확물의 급격한 감소에도 불구하고, “기근”은 그 후반기에는 식량 부족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농장에 파종을 거부하거나 자신들의 수확물을 불태운 꿀락들이었다.’


이러한 목격자의 진술이, 우끄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이자, 1918년 뻬뜨리우라(Petliura) 하에서 수상을 지냈던 이삭 마제파(Issac Mazepa)가 쓴 1934년 기사에서 증명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는 우끄라이나에서 우익이 1930-1932년 동안 농업 분야에서 광범위한 파괴행위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떠벌렸다.


‘처음에는, 꼴호즈들에 대한 방해공작이 자행되었고 공산당 관리들이나 그들의 대리자들이 살해당했으나, 나중에는 볼셰비끼의 파종과 수확 계획을 조직적으로 좌절시키는 데 목표를 두는 소극적인 저항 방식이 선호되었다.... 1932년의 대재앙은 쏘비에뜨 우끄라이나가 1921-1922년의 기근 이래로 직면해야 했던 가장 혹독한 재난이었다. 가을과 봄의 파종 운동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전체 농지에 파종이 안 되었고, 게다가 농작물을 수확할 때, ... 많은 지역에서 특히 남부지방에서 20%, 40%, 심지어 50%가 토지에 그대로 방치되었고, 그리고 전혀 수집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탈곡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두 번째 기근의 이유는, 1930년, 1931년, 1932년에 우끄라이나 특정 지방에 닥친 가뭄 때문이었다. 하버드에서 우끄라이나의 우익 노선을 옹호하는 제임스 E. 메이스 교수에게는 그것은 쏘련 정권이 꾸며낸 이야기였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들 스스로가 ‘우끄라이나의 선구적인 역사가’로서 묘사한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Mykhailo Hrushevsky)는, 그의 책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 1932년 상황을 서술하면서, ‘혼란스러운 농업 상황에 또 다시 가뭄까지 겹쳤다.’라고 말했다. 하버드의 러시아 연구소에서 강의를 했던 니콜라스 리아스노프스키(Nicholas Riasnovsky) 교수는 1931년과 1932년에 가뭄이 있었다고 썼다. 내전기간 동안 볼셰비끼에 대항해 싸웠던 미카엘 플로린스키(Michael Florinsky) 교수는 이렇게 적었다. ‘1930년 1931년의, 특히 우끄라이나에서 심각한 가뭄은 농업상태를 악화시켰고 기근에 가까운 환경을 만들었다.’


기근의 세 번째 요인은, 우끄라이나와 북 코카서스를 황폐화시킨 장티푸스 전염병이었다. 세계적 명성의 도시 계획가이자 캐나다 훈장을 받은 한스 블루멘펠드 박사(Dr. Hans Blumenfeld)는 기근 시기에 우끄라이나 마카예프카(Makayevka)에서 건축가로 일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기근으로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에게는 그들의 숫자를 추정할 방법은 없다.... 아마도 1933년의 대부분의 죽음은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이질 등의 전염병 때문이었다. 마카예프카에서 수인성 질병은 흔한 것이었다: 나는 티푸스 열병에 걸려 간신히 살아남았다.’


기근 동안 1500만 명의 말도 안 되는 수치 ― 1932년 2,500만 명의 우끄라이나인구 중 60% ― 를 제시했던 인물인 호슬리 그랜트(Horsley Grant)는 그와 동시에 이렇게 적었다. ‘발진티푸스 전염병의 절정은 기근과 일치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죽음을 야기하는 더 큰 원인이 되었는지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네 번째 기근의 원인은, 농업의 재편성 과정과, 경제적 및 사회적 관계에서의 근본적인 대격변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무질서였다: 빈곤한 농민들과 일부 관리들의 경험부족, 즉흥적이고 혼란스러운 지시들, 준비부족, 좌익 급진주의.(http://www.lodong.org/board/board.html?mtype=view&page=3&bid=3&num=290&seq=1436&replynum=290&shownum=288&key=&searchword=&fbclid=IwAR1eYeERWLGlxeb7cLnMtGmlRnU892yps60an9m28vpKW-hV-TpdtzAZuGU%7C)


따라서 1932년에서 1933년에 일어난 기근은 소련이나 스탈린의 의도적인 학살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복합적인 이유들이 작용했으며,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우크라이나측 쿨락이 의도적으로 사보타주 및 테러 행위를 광범위하게 한 탓이 크다. 기근이 일어나자,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스탈린 정부는 자신들 나름의 구제정책을 펼쳤으며, 기근으로 인한 사망자의 숫자는 나치와 우크라이나 나치 협력자들에 의해 부풀려졌다. 소련 연방 해체 이후 소위 분리된 우크라이나에서는 자칭 반데라주의자들이 이러한 홀로도모르 신화 및 사기극을 퍼뜨렸으며, 현재까지도 우크라이나에서는 이것이 마치 소련과 스탈린 그리고 러시아에 의한 의도적인 우크라이나인 학살로 포장하고 있는 중이며, 캐나다를 포함한 서방 국가들도 홀로도모르가 학살이라는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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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dvs117 2023-06-29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책을 소개하는 기사가 국내 언론에 없다는 사실...!
 

다시 돌아보는 러우전쟁

2022년이 끝나고 2023년이 됐다. 그러나 2월에 시작된 전쟁은 지금도 끝나질 않고 있다. 애초에 이번 전쟁의 가장 큰 이유는 2013년 유로마이단 폭동으로 미국이 포로셴코 네오나치 정부를 세운 것과 NATO의 동진정책에 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고문단을 파견했고, 아조프 민병대와 같은 네오나치 군대를 훈련시켰으며, 이들을 정규군화했다.

네오나치 조직을 정규군화하고, 기존에 군사력이 약했던 우크라이나에게 온갖 최신식 무기와 국제법적으로 금지된 무기들을 대폭 지원해주었으며, 우크라이나 정부는 복지 예산을 탕감해가며 군사력을 키웠다. 2019년에 탄생한 젤렌스키 정부는 잠시나마 통합적인 지도자인 것 처럼 포장되었으나, 현실은 정 반대였다.

젤렌스키도 마찬가지로 돈바스에 대한 탄압과 학살을 자행했으며, NATO의 동진정책에 협력하여 러시아를 자극하는 짓거리를 벌여왔다. 그 결과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국내의 언론들은 경향ㆍ오마이ㆍ한겨레ㆍ조선일보ㆍ동아일보ㆍ중앙일보 할 것 없이 미국 CNN이나 영국 BBC가 쓰는 언론을 완전 그대로 복사하는 수준의 찌라시 내용들을 살포했고, 서방의 세뇌선동은 먹혀들어갔다.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에 대한 비정상적인 동정여론이 급증했고, 언론에는 아조프 대대가 찍은 영상들이 무비판적으로 보도되며 자유투사 운운하기 바빴다. 온갖 가짜뉴스들이 판을 쳤으며, 이에 대한 정정보도는 국내에서 눈씻고 찾아보기 힘든 수준이다.

예를들어 마리우폴 공습에서 임산부가 테러를 당했다느니 부차학살 당시 강간당한 여성의 시신이 있다느니 등 얘기들이 이후 가짜임이 밝혀저도 국내 언론은 정정보도 따위 1도 안했다.

나는 이번 전쟁을 겪으며 언론의 자유ㆍ표현의 자유ㆍ세계 언론자유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서방의 언론 검열 수준이 이번 전쟁을 통해 최고조에 달했다는 생각이 든다.

일각에서는 위성사진이 있기에 우크라이나 측이 사건을 조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말이 안되는 소리다. 2003년 미국이 이라크 침공 당시 신무기가 있다는 공장을 위성사진으로 공개했는데, 이것이 조작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조작은 충분히 가능하다.

또한 이번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의 사이버전의 효과도 가히 파급적이다. 현재 서방과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측 얘기는 본론적으로 원천차단하면서, 우크라이나 네오나치들 입맛에 맞는 얘기들을 무한히 찍어내도록 유도하고 있다. 하이브리드 전쟁에서 우크라이나와 서방의 전술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전쟁 초기 언론이 우크라이나를 선전하는 동안, 러시아는 동부 남쪽을 차츰 점령했고, 결과적으로 합병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지만 우크라이나가 이 곳을 죄다 회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애초에 그걸 되찾을 힘이 우크라이나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러나 이 전쟁이 얼마나 장기화 될지 모르겠다. 우크라이나-대만-한반도로 이어질 수 있는 위기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제는 서방 일변도의 세계관이 아닌, 우리들 중심적으로 외교를 보는 사고를 할 때이다. 그래야 생존과 공존 평화가 있을 것이다.

<참고로 나는 러우전쟁 관련 자료는 외신 자료도 보고 한신대 이해영 교수나 한설 장군의 페북도 자주 보지만, 국내 유튜브로는 러시아 학당과 박상후의 문명개화를 주로 본다. 특히나 박상후의 경우 예전에는 싫어했으나, 러우전쟁에 대해 제법 공정한 보도를 하고 있으며 우크라 네오나치들의 홀로도모르 학살 운운에 반론을 잘 제시해서 생각이 좀 바꼈다. 러시아 학당의 경우 러시아어를 원어민급으로 하고 관련 정세분석도 좋아서 자주 애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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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대한 논쟁 중의 한 가지를 뽑자면, 아마도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는가?”는 빠질 수 없는 논쟁일 것이다. 사실 이승만 시대부터 이어온 반공주의 사회에서는 “한국전쟁은 저 북한 괴뢰집단이 일으킨 침략전쟁이고, 전쟁을 일으킨 북괴의 수장 김일성은 민족반역자다.”는 생각을 국민들에게 주입해왔다. 그러던 1980년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겪고, 이른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격해지면서,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다시 재정립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논쟁을 촉발한 저작은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the Korean War)』일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이라는 한 사건을 통해, 단순히 북한의 침략이라는 미국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이 전쟁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를 분석하고자 했다. 따라서 한국전쟁을 발발하게 만든 그 기원을 추적했으며, 그 결과 만주에서의 독립군 대 친일파라는 간단명료하면서도 복잡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80년대 당시 커밍스의 저작에 영향을 받았던 박명림과 같은 학자들은 1990년대에 이르러, 커밍스의 주장을 반박하고자 하는 시도를 했으며, 그 결과 커밍스의 연구 중 몇몇 부분들이 반박당했다. 박명림의 경우, 연방 해체 전후로 공개된 러시아측 기밀문서에 집중했으며, 이를 통해 “한국전쟁은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구체적인 근거를 통해 주장했다.


물론 이러한 연구결과가 학계의 연구성과를 높인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의미에선 미국의 공식적 견해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주장을 입증한 셈이 됐다. 즉, 그 연구를 바탕으로 현재까지도 남한의 주류학계는 한국전쟁의 시작을 북한과 김일성의 침략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옛 소련 문서들이 어떠한 의미에서 공개됐고, 또 어떠한 정치 편향성을 가졌는지를 학계와 사회가 크게 집중하지 못한 것 같다. 


우선 소련 연방 해체 전후로 공개된 문서들은 1980년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과정과 옐친의 연방 해체라는 시대사적인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고르바초프든 옐친이든 이들은 근본적으로 소련 사회의 업적에 대해서 부정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이 1930년대 단행한 대숙청에 대해 공격했고, 옐친은 더 나아가 소련을 건국한 레닌 그 자체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됐고, 기밀해제 되었던 자료들이 공개됐다. 


사실 소련에서 기밀해제한 자료들을 통해, 스탈린 시기 진행된 대숙청의 진상이 공개되어 아치 게티(Arch Getty)가 쓴 『대숙청의 기원(The Origin of the Great Purges)』과 같은 훌륭한 연구저작도 나왔지만, 한국전쟁의 경우 도리어 미국의 주류적 시각을 강화하는 측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수정주의 연구가 미국 학계의 주류적 견해는 아니며, 여전히 스탈린의 대숙청에 대한 미국의 인식은 반공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냉전의 종결이 한국사회에서 진행된 현대사 관련 연구를 한쪽 측면으로만 이끈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당시 학자들은 1950~1987년 동안 언급하기만 해도 곧바로 감옥에 끌려갔던 역사 당연히 불법이었던 그 역사를 발굴하고 있었으며, 민주화 정부를 거치며 진실화해조사위원회와 같은 단체가 만들어저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도 진행했다. 


그 결과, 이제 1945~1946년 한반도 전역에 퍼져 있던 좌익 인민위원회, 1946년 가을 남한 남부 지역에서 발생한 각종 봉기들, 1948년 제주도와 지리산의 항쟁과 그리고 여수-순천 항쟁, 남한 보안대와 우익 비정규 학살단이 자행한 수십만 명의 무고한 남녀와 아이들의 학살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책, 논문, 문서, 구술사, 기타 자료들이 무수히 많이 나왔다. 심지어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에서 운영했던 일본군 위안부의 후신인 한국군 위안부의 실체가 1990년대 김귀옥(현재 한성대 교수)이라는 연구자를 통해 실증적으로 입증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김동춘(현재 성공회대 교수)의 한국전쟁 연구 또한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과 훗날 국가폭력의 연관성에 집중한 연구성과가 나왔으며, 김태우라는 연구자를 통해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의 참혹한 실태를 연구한 성과도 나왔다.


앞에서 언급한 이런 훌륭한 연구들이 나왔음에도, 한국 사회와 학계가 주장하는 한국전쟁 시작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미국의 공식적인 견해를 따라가고 있으며, 여기에 대해 다른 입장을 제시하기 힘든 사회적 구조로 되어 있다. 그것은 결국 1990년대 냉전의 해체라는 분위기에서 한국은 성공 북한은 실패라는 등식화된 논리가 한국전쟁의 시작점에 대한 논쟁을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잠재웠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훌륭한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전쟁 발발에 대해선 미국의 공식적 견해를 따르고 있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을 거치며 공개된 소련의 기밀 자료들은 심하게 제한되고 정치적으로 선별되어 해제된 문서들이었다. 즉, 정치적으로 옐친의 입맛에 맞는 자료들이 주로 공개된 셈이다. 그래서 사료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아주 공정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물론 이 자료를 통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은 김일성에 의해 계획적으로 일어난 전쟁이다.”라고 말한다면 반박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그에 걸맞은 충실한 사료가 아직 발견된 것도 아니라는 말밖에 못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의 편향성에 대해선 얼마든지 공격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 가지 사건으로만 설명하기 어렵고 복잡한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한반도에 나타난 분단이라는 현상은 당연하게도 미국의 책임이 막중했으며, 당시 해방된 조선 민중을 무시하며 친일 경찰을 대거 등용한 대에서 문제가 생긴 점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적 구조를 만드는데 일조했던 주체는 바로 미국이었고, 그 미국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제주 4.3학살과 같은 극단적인 민간인 학살을 통해, 최소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한 책임이 있다. 


따라서 제한적으로 공개된 러시아 기밀문서만 고집해서 한국전쟁의 발발을 설명한다면,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점은 논쟁에서 사라지며, 그 결과 역사적 맥락생략이라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도 농후해진다. 즉,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 대해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 마오쩌둥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에게만 책임을 묻는 견해들은 결과적으로 전쟁의 본질을 무시하는 시각이며, 브루스 커밍스 교수 또한 이러한 점을 지적하며 비판적으로 얘기했다.


또한 현재까지 러시아에서 제한적으로 공개된 한국전쟁 관련 문서들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은 러시아 기밀문서에 어떠한 내용이 있을지도 유심히 봐야한다. 이러한 얘기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당장 미국에 있는 NARA 국립문서보관소만 하더라도 새로운 사료발굴을 통해, 기존의 주장을 뒤집어엎는 내용이 나오는 예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극구 부정하던 세균전의 경우 2010년 NARA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미국이 당시 세균전을 명령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 미국이 주장했던 공식적인 견해와 상반된 입장이다. 즉, 그러한 점에서 한국전쟁 발발 관련한 것도 새로운 사료발굴이 러시아 기밀문서나 미국 문서를 통해 나올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단순히 옐친 시대에 발굴된 기밀문서를 통해 한국전쟁 자체를 김일성의 침략으로만 보려는 시도는 시대적인 한계도 있고, 그러한 한계성을 극복해야한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한국전쟁 관련 연구는 갈 길이 멀다. 커밍스 선생께서 말한대로, NARA 국립문서보관소에는 아직도 일반인들과 사회에 공개되지 않은 문서들이 무수히 많이 남아 있다. 무수히 많은 문서 속에서 그러한 사실관계를 밝혀내고, 새로운 연구 성과를 만들어 내며, 발전해 나가야 하는 태도가 바로 사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필요하며,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반공주의적 인식 극복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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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가장 많은 희생을 치른 나라는 과연 어디일까? 아마 소련과 중국일 것이다. 특히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이 치른 희생은 어마어마했다. 냉전 말기인 1989년 존 키건이 쓴 <2차 세계대전사>에서는 대략 1,300~1,500만 명의 소련인이 전쟁으로 죽었다고 추산했는데, 이 책을 번역한 류한수 교수는 최근의 연구는 2,600만에서 2,700만 명 이상의 소련 사람이 죽은 것으로 최근 학계가 추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중 1,000만 명은 군인이고 1,700만 명은 민간인이었다.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로 600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다고 하는데, 이보다 3배 정도 많은 소련 민간인이 나치에게 학살당한 셈이다. 거기다 학살당한 유대인 대다수는 소련 쪽 유대인들이었다.

 

이러한 인명피해에 못지않게 소련은 경제적으로도 극심한 타격을 받았다. 무려 2,500만 명의 소련인이 집을 잃었고, 1,700여개의 도시와 소읍, 7만 이상의 촌락, 32,000개 이상의 공장, 65,000km의 철도, 10만의 콜호즈와 소호즈가 파괴 또는 소실됐다. 히틀러의 침공으로 소련 국부의 1/3이 날아간 셈이다. 대략 98,000개의 협동조합과 5,000개에 가까운 국영농장과 트랙터, 농업기계 창고가 나치에게 약탈당했다. 수만 개의 병원과 학교, 예술학교, 고등 교육기관, 도서관이 완전히 파괴됐다. 히틀러의 침략으로 소련의 입은 물질적인 피해 6,800억 루블을 포함하여 소련의 전쟁피해는 총계 26천억 루블이나 됐다.

 

루도 마르텐스에 따르면, 독일군은 후퇴하는 동안에도 고의로 소련에서 사용될 수 있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불살랐다. 2,000곳의 도시, 7만 곳의 마을, 400만 명의 노동자들이 일하는 공장들이 전부 혹은 일부분 파괴됐다. 독일군이 침략한 지역에서는 40~60%의 석탄, 전기, 철강, 금속과 기계 생산력들이 파괴됐으며, 몇몇 사람들은 소련이 나치에 의해 받은 상처를 모두 회복하는 데는 수십 년이 필요할 것이라고 추산하기까지 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처칠의 철의장막(Iron Curtain) 발언과 더불어 1947년 트루먼 톡트린(Truman Doctrine)이 선포되면서 이른바 냉전(Cold War)이 시작됐는데, 한때 파시즘에 맞서 같이 싸웠던 미국과 영국은 소련의 전후 재건을 돕지 않았으며 오히려 늦추려 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 스탈린은 전후 재건에 나섰는데, 이 과정에서 보기 좋게 서방에게 한 방 먹였다. 스탈린 집권 말기에 시작된 전후 재건으로 소련은 발 빠르게 전후복구 과정을 거쳤으며, 이는 이후 냉전에서 사회주의 진영에 선 국가들의 모범적 모델로 비추어졌다.

 

이러한 소련의 전후 재건 발전상은 당시 소련을 방문한 문학가 이태준이나 역사학자나 북한의 정치인인 백남운이 쓴 책에도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이태준은 1946년에 소련을 방문한 이후 3년 뒤 다시 소련을 방문했는데, 수도 모스크바를 둘러보며 “ 3년 전과 비교하여 자동차는 10배 이상 많아 보였고 쏘련 차보다 외국차가 더 많던 것이 이번에는 바뀌되 외국 차는 어쩌다가 한 대씩 볼 수 있는 정도, “국영들이나 상점이 부쩍 늘었고 길 가면서도 사기 쉽게 필수품들은 이동점포들이 많았다. 전에는 사람들이 표를 들고 물건을 따라가 줄지어 섰었으나 오늘은 물건들이 이동점포로 줄지어 다니며 사람들을 따르고 있었다.”라며 극찬했다.

 

1950년 기준으로 소련은 공업 생산고가 전쟁 전인 1940년 수준을 73%나 상회할 만큼 빠른 경제회복과 성장을 보였다. 나치 독일이 침략한 지역에서는 40~60%의 석탄, 전기, 철강, 금속과 기계 생산력들이 파괴되었지만, 1948년 전후 재건의 성과로 공업 생산량은 1940년의 공업 생산량을 넘어섰으며, 1951년에서 1955년까지 매년 12%의 공업 성장률을 보였을 정도였다. 자본재의 경우 5년 동안 80%의 성장을 보였으며, 소련의 공업생산은 서방측의 계산으로도 연평균 12~14%의 고도성장을 기록했다. 이는 서방세계의 성장속도를 최소 2배 이상이나 뛰어넘는 수치였다. 당시 전력생산도 크게 늘었는데, 1954년에는 세계최초의 원자력 발전소가 세워지고, 세계 최대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를 비롯해 수천 개의 발전소가 건설되어, 모든 산업에 충분한 전기를 제공해줄 수 있게 되었을 정도다.

 

전후복구 과정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은 1946년 당시 다음과 같이 연설을 했었다.

 

우리는 점진적으로 상품의 원가를 줄이고 모든 종류의 과학적 연구기관을 설립함으로써, 소비재의 생산량 증가와 노동자들의 삶의 수준 향상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일 것입니다.”

 

비록 스탈린 시기 소련은 만성적인 소비재 부족 현상에 시달렸고, 이를 완벽히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전후복구 과정에서의 소비재 생산도 많이 발전했다. 1947년에 이르러서는 소련에서 이른바 배급제가 폐지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배급제를 시행했던 영국보다 6년이나 빠른 속도였고, 미군정하의 일본보다도 2년이나 앞섰다. 전후복구 과정 초기 성과로 소비재 생산은 23% 증가했다. 심지어 반북성향을 가진 국민대학교의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 또한 스탈린 시기 최소 1주일에 한 번은 소련 사람들이 육류를 섭취했다고 강조했을 정도다.

 

1970년대 중후반 박정희 시절이나 전두환 집권 초기인 1980년대 초 한국 사회가 과연 육류 소비를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면, 소련의 소비재 현황이 그렇게 나빴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소련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풍요로운 소비재 생산과 의식주 문제 해결이 된 1960년대 초 소련 사회의 기본적인 토대는 스탈린의 전후재건이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안드레이 란코프 또한 1940년대 후반부터는 소련에서 밥을 굶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을 자유아시아방송에서 얘기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소련 사회는 밥을 굶는 사회가 절대로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게 받은 상처를 놀라운 수준의 속도를 보이며 회복했다. 전후재건으로 소련은 자본주의 최강대국인 미국과 겨루는 나라로 거듭났고, 세계 곳곳에서 자본주의 국가 미국과 충돌했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이오시프 스탈린이 전후재건을 통해 소련을 미국과는 다른 강대국으로 거듭나게 했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재평가를 받을만한 점이 있다. 스탈린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점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는 그러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굳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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