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에 대한 논쟁 중의 한 가지를 뽑자면, 아마도 “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는가?”는 빠질 수 없는 논쟁일 것이다. 사실 이승만 시대부터 이어온 반공주의 사회에서는 “한국전쟁은 저 북한 괴뢰집단이 일으킨 침략전쟁이고, 전쟁을 일으킨 북괴의 수장 김일성은 민족반역자다.”는 생각을 국민들에게 주입해왔다. 그러던 1980년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겪고, 이른바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격해지면서, 한국전쟁에 대한 시각은 다시 재정립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에 대한 논쟁을 촉발한 저작은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한국전쟁의 기원(The Origin of the Korean War)』일 것이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이라는 한 사건을 통해, 단순히 북한의 침략이라는 미국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이 전쟁이 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를 분석하고자 했다. 따라서 한국전쟁을 발발하게 만든 그 기원을 추적했으며, 그 결과 만주에서의 독립군 대 친일파라는 간단명료하면서도 복잡한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80년대 당시 커밍스의 저작에 영향을 받았던 박명림과 같은 학자들은 1990년대에 이르러, 커밍스의 주장을 반박하고자 하는 시도를 했으며, 그 결과 커밍스의 연구 중 몇몇 부분들이 반박당했다. 박명림의 경우, 연방 해체 전후로 공개된 러시아측 기밀문서에 집중했으며, 이를 통해 “한국전쟁은 스탈린과 마오쩌둥 그리고 김일성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구체적인 근거를 통해 주장했다.


물론 이러한 연구결과가 학계의 연구성과를 높인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의미에선 미국의 공식적 견해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주장을 입증한 셈이 됐다. 즉, 그 연구를 바탕으로 현재까지도 남한의 주류학계는 한국전쟁의 시작을 북한과 김일성의 침략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옛 소련 문서들이 어떠한 의미에서 공개됐고, 또 어떠한 정치 편향성을 가졌는지를 학계와 사회가 크게 집중하지 못한 것 같다. 


우선 소련 연방 해체 전후로 공개된 문서들은 1980년대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과정과 옐친의 연방 해체라는 시대사적인 배경에서 이루어졌다. 고르바초프든 옐친이든 이들은 근본적으로 소련 사회의 업적에 대해서 부정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이 1930년대 단행한 대숙청에 대해 공격했고, 옐친은 더 나아가 소련을 건국한 레닌 그 자체를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됐고, 기밀해제 되었던 자료들이 공개됐다. 


사실 소련에서 기밀해제한 자료들을 통해, 스탈린 시기 진행된 대숙청의 진상이 공개되어 아치 게티(Arch Getty)가 쓴 『대숙청의 기원(The Origin of the Great Purges)』과 같은 훌륭한 연구저작도 나왔지만, 한국전쟁의 경우 도리어 미국의 주류적 시각을 강화하는 측면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물론 이런 수정주의 연구가 미국 학계의 주류적 견해는 아니며, 여전히 스탈린의 대숙청에 대한 미국의 인식은 반공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냉전의 종결이 한국사회에서 진행된 현대사 관련 연구를 한쪽 측면으로만 이끈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당시 학자들은 1950~1987년 동안 언급하기만 해도 곧바로 감옥에 끌려갔던 역사 당연히 불법이었던 그 역사를 발굴하고 있었으며, 민주화 정부를 거치며 진실화해조사위원회와 같은 단체가 만들어저 과거사에 대한 진상규명도 진행했다. 


그 결과, 이제 1945~1946년 한반도 전역에 퍼져 있던 좌익 인민위원회, 1946년 가을 남한 남부 지역에서 발생한 각종 봉기들, 1948년 제주도와 지리산의 항쟁과 그리고 여수-순천 항쟁, 남한 보안대와 우익 비정규 학살단이 자행한 수십만 명의 무고한 남녀와 아이들의 학살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책, 논문, 문서, 구술사, 기타 자료들이 무수히 많이 나왔다. 심지어 한국전쟁 시기 한국군에서 운영했던 일본군 위안부의 후신인 한국군 위안부의 실체가 1990년대 김귀옥(현재 한성대 교수)이라는 연구자를 통해 실증적으로 입증되기도 했다. 그 외에도 김동춘(현재 성공회대 교수)의 한국전쟁 연구 또한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과 훗날 국가폭력의 연관성에 집중한 연구성과가 나왔으며, 김태우라는 연구자를 통해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의 참혹한 실태를 연구한 성과도 나왔다.


앞에서 언급한 이런 훌륭한 연구들이 나왔음에도, 한국 사회와 학계가 주장하는 한국전쟁 시작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미국의 공식적인 견해를 따라가고 있으며, 여기에 대해 다른 입장을 제시하기 힘든 사회적 구조로 되어 있다. 그것은 결국 1990년대 냉전의 해체라는 분위기에서 한국은 성공 북한은 실패라는 등식화된 논리가 한국전쟁의 시작점에 대한 논쟁을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잠재웠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훌륭한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전쟁 발발에 대해선 미국의 공식적 견해를 따르고 있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일 것이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을 거치며 공개된 소련의 기밀 자료들은 심하게 제한되고 정치적으로 선별되어 해제된 문서들이었다. 즉, 정치적으로 옐친의 입맛에 맞는 자료들이 주로 공개된 셈이다. 그래서 사료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 아주 공정하다고만 할 수는 없다. 물론 이 자료를 통해,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은 김일성에 의해 계획적으로 일어난 전쟁이다.”라고 말한다면 반박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그에 걸맞은 충실한 사료가 아직 발견된 것도 아니라는 말밖에 못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의 편향성에 대해선 얼마든지 공격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 가지 사건으로만 설명하기 어렵고 복잡한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한반도에 나타난 분단이라는 현상은 당연하게도 미국의 책임이 막중했으며, 당시 해방된 조선 민중을 무시하며 친일 경찰을 대거 등용한 대에서 문제가 생긴 점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모순적 구조를 만드는데 일조했던 주체는 바로 미국이었고, 그 미국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제주 4.3학살과 같은 극단적인 민간인 학살을 통해, 최소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을 학살한 책임이 있다. 


따라서 제한적으로 공개된 러시아 기밀문서만 고집해서 한국전쟁의 발발을 설명한다면, 이러한 본질적인 문제점은 논쟁에서 사라지며, 그 결과 역사적 맥락생략이라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도 농후해진다. 즉, 1950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 대해 북한의 김일성과 중국의 마오쩌둥 그리고 소련의 스탈린에게만 책임을 묻는 견해들은 결과적으로 전쟁의 본질을 무시하는 시각이며, 브루스 커밍스 교수 또한 이러한 점을 지적하며 비판적으로 얘기했다.


또한 현재까지 러시아에서 제한적으로 공개된 한국전쟁 관련 문서들이 절대적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은 러시아 기밀문서에 어떠한 내용이 있을지도 유심히 봐야한다. 이러한 얘기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당장 미국에 있는 NARA 국립문서보관소만 하더라도 새로운 사료발굴을 통해, 기존의 주장을 뒤집어엎는 내용이 나오는 예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극구 부정하던 세균전의 경우 2010년 NARA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미국이 당시 세균전을 명령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과거 미국이 주장했던 공식적인 견해와 상반된 입장이다. 즉, 그러한 점에서 한국전쟁 발발 관련한 것도 새로운 사료발굴이 러시아 기밀문서나 미국 문서를 통해 나올 가능성을 염두에 둘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단순히 옐친 시대에 발굴된 기밀문서를 통해 한국전쟁 자체를 김일성의 침략으로만 보려는 시도는 시대적인 한계도 있고, 그러한 한계성을 극복해야한다는 것을 단편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한국전쟁 관련 연구는 갈 길이 멀다. 커밍스 선생께서 말한대로, NARA 국립문서보관소에는 아직도 일반인들과 사회에 공개되지 않은 문서들이 무수히 많이 남아 있다. 무수히 많은 문서 속에서 그러한 사실관계를 밝혀내고, 새로운 연구 성과를 만들어 내며, 발전해 나가야 하는 태도가 바로 사학을 연구하는 이들에게 필요하며, 한국전쟁 발발에 대한 반공주의적 인식 극복도 그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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