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진 - 미국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한 불복종자
아거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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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 서평: 저항적 지식인의 표본

나는 하워드 진을 좋아한다. 역사학자로써 그가 보여준 ‘아래로부터 역사 쓰기‘는 당시 미국역사 학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준 것이었다. 많은사람들이 배우는 미국의 역사는 자랑스러운 역사다.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더불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온 필그림 파더즈들의 정착 영국에 맞선 독립전쟁, 미국건국 그리고 그 이후 서부로의 팽창 등이 미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교육된다.

이것은 대중적인 미국 교과서의 내용만은 아니다. 국내에 출판된 미국사 전공자가 쓴 책들도 그렇다. 내가 읽어본 이보형 교수의 ‘미국사 개설‘이나 뉴라이트 계열의 이주영 교수의 ‘미국사‘등도 앞에서 얘기한 프레임으로 미국사를 접근한다. 여기 더 나아가 미국의 제국주의와 팽창의 역사도 합리화 되고 ‘좌파는 개갞끼다‘와 같은 반공주의 도그마로 얼버무린다.

그러나 미국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달랐다. 그는 1980년대 미국 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를 집필함으로써, 미국에서 존경하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사실은 대학살자이자 사리사욕을 채운 장사꾼이라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논증해냈다. 그외에도 조지 워싱턴, 토마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등과 같이 미국 지폐에 들어가 있는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이 내세운 ˝평등˝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모순적이었는지를 원주민과 흑인 그리고 여성의 시각에서도 조명해냈다. 또한 이들이 부의 불평등을 조장한 장본인들이라는 사실을 입증해냈다. 쉽게 말해 하워드 진은 미국의 보수사관을 철저히 거부했고, 위로부터 억압받고 착취받고 차별받던 이들의 시각에서 역사를 해석했다.

1991년 냉전이 끝나고 난 이후 미국은 명실상부 초강대국이었다. 1970,80년대 부터 세력을 키운 네오콘들은 1990년대 당시 자랑스러운 미국의 역사를 가르치고자 했다. 아들 부시 대통령 당시 부통령을 지낸 딕 체니와 그의 부인 린 체니는 실제로 그러한 기관을 양성했고, 그 과정에서 일종에 반미주의적 인사 리스트를 만들었다. 당연히 거기에는 하워드 진도 포함됐다. 물론 진은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워드 진이 가장 훌륭한 점을 뽑자면, 바로 실천하는 운동가라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하워드 진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결정적인 이유다. 제2차 세계대전에 B-17 폭격수로 참전했던 진은 반전주의자로써 전쟁에 반대했다. 또한 1950년대 스펠먼 대학 교수 시절에는 흑인차별에 분개하여 민권운동에 앞장섰다. 학교 도서관 출판운동, 식당칸 공동사용 투쟁등 항상 압장섰다.

진은 1960년대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부터 미국이 침략전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65년 당시 총 3만 명이 참가했던 반전운동에도 진이 있었다. 또한 그는 1967년 ‘베트남 철수의 논리(Vietnam The Logic of Withdrawal)‘를 집필했다. 그의 반전운동은 1990년대 미국의 유고 내전과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2003년 이라크 전쟁에서도 드러났다.

진은 빈부격차와 소수의 자본가가 독점하는 체제에 저항적이었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가 마르크스가 얘기한 계급사회임을 인지하고, 자본주의 사회를 변혁해야 한다 생각했다. 그는 저서 미국 민중사에서 미국의 그런 모순적 구조를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역사적으로 논증해냈다. 따라서 지배계급의 역사가 아닌 노동자의 역사도 보고자 했다.

이 책은 하워드 진의 인생을 다룬 소책자다. 분량도 얼마 되지 않아 몇시간이면 충분히 다 완독할 수 있다. 하워드 진이 집필한 책들은 국내에 많이 번역된 편이다. 그러나 하워드 진의 인생사를 타인이 정리한 책은 없었다. 소책자임에도 이 책이 가지는 의미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워드 진이 세상을 떠난지 10년이 지났다. 한국의 저항적 언론인 리영희 선생이 돌아가셨던 연도에 그 또한 세상을 떠났다. 나는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다. 한국에 리영희가 있다면 미국에는 하워드 진이 있다고! 세상을 실천으로 변혁하고자 하는이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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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네비이 씰이 전개했던 넵튠 스피어 작전 전개도)

 

2011년 4월 30일 오후 11(아프가니스탄 현지 시각), 레이더망을 피할 수 있는 스텔스 블랙 호크 헬기 두 대가 활주로를 이륙했다두 대의 헬기는 미군 특수부대인 네이비 씰(Navy Seal) 대원 24명을 태우고 있었다헬기는 이륙한 지 10분 만에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파키스탄 영내로 진입했다. 3대의 치누크 수송헬기도 활주로에서 이륙해 블랙호크 헬기의 뒤를 따랐다이들이 목표물인 파키스탄의 아보타바드 가옥으로 접근했던 시점은 밤 12시가지나 5월이 되어 있는 상태였다.

 

목표물에 도착한 네이비 씰 대원들은 침착하게 자신들이 계획한 작전을 수행해 나갔다비록 작전 중 가옥으로 접근한 헬기 한 대가 꼬리를 담에 부딪치는 바람에 마당 안으로 불시착했지만작전자체에는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네이비 씰 대원들은 침착하게 마당에서 현관 철제문을 파괴하고 안으로 진입했고두 번째 헬기에 있던 요원들도 정문을 부수고 안으로 진입했다진입한 특수부대는 목표물을 살해했다그 목표물은 바로 9.11 테러를 주도했던 오사마 빈라덴(Osama Bin Laden)이었다.

(프레디터 드론, 드론 중에 가장 유명한 드론으로 미국이 21세기 중동분쟁에서 많이 사용한 최신식 무기다. 물론 이 최신식 무기는 무고한 양민학살을 불러오기도 했다.)

 

9.11 테러 이후 미국은 테러리스트인 오사마 빈라덴을 추적해왔다그리고 10년 뒤 그를 사살할 수 있었다네이비 씰이 작전을 전개할 당시 수도 워싱턴에 있는 백악관에선 대통령 오바마를 포함한 각료들이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당시 이 현장을 중계한 것이 바로 무인정찰기 RQ-170이었다무인정찰기 RQ-170은 미국이 개발한 무기인 드론 중 하나였다이 드론들은 중동분쟁에서 최신식 무기로써 많은 임무를 수행했었다그러나 이 드론들은 중동에서 반미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주된 요소이기도 했다왜 그런 것일까?

 

앞에서 서술한 네이비 씰의 오사마 빈라덴 사살 작전의 공식 명칭은 넵튠 스피어 작전(Operation Neptune Spear)이었다넵튠 스피어 작전이 성공한 이후 대통령 오바마는 방송에 나와 정의는 승리했다라고 하며 미국국민들과 함께 승리를 만끽했다그러나 작전이 진행되었던 파키스탄에선 이 사건 전체가 극도로 치욕스럽게 다가왔다왜냐하면 이런 작전 자체가 파키스탄 정부의 어떠한 허가나 사전얘기 없이 진행된 것이었기 때문이다물론 이 때문만은 아니었다파키스탄 정부와 국민이 이런 작전을 벌인 미국에게 반감을 느꼈던 것에는 작전 당시 사용했던 RQ-170과 같은 드론의 공격이 파키스탄에서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버락 오바마, 버락 오바마는 미국사람들에게 진보적인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만 그의 외교 정책은 미국의 이익을 네오콘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이었다. 특히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오바마는 병력을 증강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은 바로 알카에다와의 접촉을 의심하여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초반에는 탈레반의 주요 거점들을 장악하면서 승리하는 것으로 보여줬지만결국 수렁으로 빠졌다무엇보다 미국 편이었던 부패한 군벌들을 대리고 중앙 정부의 통제를 따르게 하는 건 불가능한 상태였다거기다 아프가니스탄의 지형은 탈레반들의 게릴라전에 적합하였고테러전도 동반되었다이러는 과정에서 탈레반의 병력은 2007년 기준으로 최소 1만 명 이상으로 증가했다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또한 2만 6,000명으로 늘어난 상태였다물론 이 상황에서도 진전이 없었기에 미국 정부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미군을 더 증강하고자 했다.

(드론 공격으로 인한 무고한 희생을 비판하는 현지 주민들이 쓴 벽화)

 

이와 동시에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은 이웃나라인 파키스탄까지도 번졌다특히나 국경지대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그리고 탈레반은 파키스탄에서도 암암리에 활동했다이를 군사적인 차원에서 해결하기 위해 미국은 2004년부터 또 다른 전략전술을 사용했다그것이 바로 드론을 이용한 공습이었다아프가니스탄 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미국의 CIA는 주로 정찰에만 사용되었다그러나 2004년이 되면서 드론 공습을 개시하기 시작했고, 2007년과 2008년에는 그 숫자가 예전보다 증가했다이런 상황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일으켰던 조지 부시 대통령은 결국 임기를 마쳤고민주당의 버락 오바마가 그 자리를 이었다.

 

2009년에 출범한 오바마 행정부는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한 병력을 증강했다. 2010년에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숫자가 10만 명을 돌파했다이와 더불어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의 드론 공습의 숫자를 급증했다미군 특수부대와 CIA가 운용하는 대테러 추적팀은 파키스탄 정부가 꾸물거리는 사이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곳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고드론 공습의 숫자를 급증시켰다미국 워싱턴 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오바마 재임 첫 3년간 드론 공격으로 1,350~2,250명이 드론 공습으로 사망했다드론 공습의 비율로 따져 보았을 때오바마는 취임 첫 9개월 동안 부시 대통령이 퇴임 직전 3년 동안 재가한 것만틈의 드론 공격을 재가했다이에 따른 무고한 민간인 사망자 숫자도 급증했다.

(드론 공격 풍자 만화)

 

2006~2008년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 장군의 게릴라 소탕전담당 보좌관으로 일한 데이비드 킬컬렌과 2002~2004년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육군 장교로 복무한 앤드루 액섬은 2009년 5월 파키스탄인들의 분노를 실감나게 소개했었다두 사람이 인용한 파키스탄 언론 보도들에 따르면 지난 3년간 미국의 드론 공격으로 민간인은 700명이 살해된 반면 테러조직 지도급 인물은 14명밖에 죽이지 못했다이는 게릴라 1명당 민간인 50명이 사망한 것으로 명중률 2%”밖에 안됐다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이 공동으로 집필한 저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라는 책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뉴욕 타임스 스퀘어 차량폭탄 테러범으로 널리 알려진 샤하자드는 체포 직후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미국을 공격한다면 당신들은 기분이 어떻겠습니까당신들은 지금 주권국가 파키스탄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재판정에서 판사가 어떻게 무고한 여성과 어린이를 죽일 수도 있는 일을 꾸몄느냐고 묻자 그는 미국의 드론 공격은 어린이를 가리지 않는다그 누구도 가리자 않는다여성과 어린이를 죽이고누구든 죽인다고 답했다파키스탄 사람들에게 드론 공격의 희생자들은 인간이지만 드론 조작 요원들에게는 때려잡은 벌레였다.”

 

출처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 p.396~397

 

파키스탄인들이 2011년 넵튠 스피어 작전 이후에 미국과 오바마에게 분노를 감추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부시부터 오마바까지 행한 드론 공격은 2017년에 이어받은 트럼프 행정부 또한 끝나지 않은 중동전쟁에서 사용했다아무튼 이런 무자비한 드론 공격은 중동에서 반미정서를 자극하는 자극제였다무엇보다 이에 따른 무고한 민간인 사망자에 중동사람들이 분노했다베트남 전쟁 당시 수많은 민간인들이 해방전선(베트콩)을 지지했듯이중동의 민중 또한 반미를 내세우는 저항 세력을 지지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다.(물론 자유와 독립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가치를 내걸고 싸우던 베트콩과 이슬람 극단주의에 심취한 집단은 질적으로 다르지만.)

 

정리하자면 중동전쟁이 지금까지도 끝나지 않고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이란이라크시리아 등에서 지속되는 이유에는 결정적으로 미국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왜냐하면 미국이라는 주체가 이 지역에서 전쟁을 자극했기 때문이다여기서 설명한 드론 공격 또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만행으로 중동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이고당연히 이점에 있어서 미국은 크나큰 정책적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참고자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들녘, 2015

 

이슬람 전사의 탄생정의길한겨레출판, 2015

 

전쟁 국가의 탄생레이첼 매도박중서갈라파고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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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민의회는 매우 급박한 상황이기는 하나 열정과 신뢰로 가득 찬 가운데 이번 회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대항해서 조국을 구하려는 운동이 곳곳에서 끓어오르고 있습니다.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에서 모두 커다란 성공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난 10여 년 간 미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은 무자비한 전쟁을 획책하여 남베트남의 동포들에게 수많은 슬픔을 안겨 주었습니다. 지난 몇 개월간 그들은 미친 듯이 전쟁을 북베트남에까지 확대했습니다. 글들은 1954년의 제네바 협정과 국제법을 무시하고 수백 대의 비행기와 수십 척의 군함을 보내 북베트남을 계속해서 폭격했습니다. 스스로 해적임을 드러낸 채 미제국주의 침략자들은 뻔뻔스럽게도 우리나라를 잠식해 오고 있습니다. 그들은 무력으로써 우리 3천만 동포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크게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반드시 굴욕적인 패배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베트남 인민들은 영웅적인 민족입니다. 지난 10여 년 간 남부의 1,400만 동포들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온갖 희생을 감수하면서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들은 빈손으로 일어서서 적에 대항하여 적으로부터 무기를 빼앗아 승리에 승리를 거듭했으며, 줄기찬 공격을 퍼부어 미국 침략자와 반역자들에게 더 큰 패배를 안겨 주고 있으며 그들은 점점 깊은 수렁 속으로 빠뜨리고 있습니다. 패배가 커질수록 그들은 더욱더 미친 듯이 가장 잔인한 수단들, 예를들면 네이팜 폭탄과 독가스 등의 무기들을 동원하여 남부와 동포들을 대량학살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광란적으로 북베트남을 공격하고 있는 것은 남베트남에서 수렁속으로 빠져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둑이 거기 서라, 도둑놈아!”하고 소리치는 것이 습관적인 속임수이듯이, 침략자인 미제국주의자들은 철면피하게도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침략했다고 비방해 왔습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은 명백히 제네바 협정의 파과자들입니다. 뻔뻔스럽게도 자신들은 평화회복제네바 협정의 수호를 바라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미군을 보냈다고 선언하면서 학살과 파괴를 자행했습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은 명백히 우리나라를 황폐화시키고 우리 인민들을 살해했으며 위선적이게도 자신들은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나라 인민들에게 국가 발전과 생활개선을 위해 1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떠벌리고 있습니다.

 

미 대통령 존슨은 우리 인민을 정복하기 위해 폭력에 호소하겠다고 큰소리치며 위협했습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우리 인민은 절대로 정복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테일러 계획은 좌절되었습니다. 맥나마라 계획 역시 붕괴되었습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이 현재 북베트남에서 수행하려고 애쓰고 있는 확산계획도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수만 명이 넘는 장교와 사병들을 파견하고 더 많은 자신들의 위성국 군대들을 이 범죄적 전쟁에 끌어들이려고 갖은 노력을 다 기울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군대와 인민은 그들과 싸워 격퇴시키고자 하는 결의에 차 있습니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성명은 그러한 영웅적인 의지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베트남 조국 전선의 호소는 분명히 강철같은 결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지만 전쟁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미제국주의 침략자들을 몰아내고 우리 조국의 자유, 독립, 영토보전을 수호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인민은 자신들의 전투적 우대, 용감성, 창조적 지혜와 세계 인민들의 동정과 지원으로써 반드시 이 위대한 항전을 완전한 승리로 이끌겠다는 확고한 신념에 차 있습니다. 우리 인민들은 사회주의 나라들, 특히 소련과 중국, 그리고 가장 잔인한 인류의 적 미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대한 우리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모든 대륙의 인민들의 우호적인 유대와 헌신적인 도움에 대해 대단히 감사하며 또 그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미제국주의와 그 앞잡이들에 대항해서 용감하게 싸우고 있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인민들에 대해 우리 인민은 부단히 그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성심성의껏 그들을 지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국 침략자들과 싸우기 위해 베트남으로 와서 우리와 동참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수많은 나라의 젊은이들을 뜨겁게 환영합니다. 미국인들은 그들 정부의 선전에 속아 왔습니다. 미 정부는 인민들로부터 수십억 달러를 강탈하여 전쟁의 구렁텅이에 쏟아넣고 있는 것입니다. 수천 명의 미국 젊은이들 그들의 아들과 형제들이 미국으로부터 수천 마일 떨어진 베트남의 전쟁터에서 비극적 죽음을 맞거나 처참한 부상을 당해 왔습니다. 지금 미국의 수많은 대중조직과 개인들이 그들의 정부에 대해, 이 불의한 전쟁을 즉각 중단할 것과 남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민들은 불구대천의 원수 미제국주의자들을 물리치려는 결의에 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진보적인 미국인들에 대한 우리의 우정을 표합니다.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는 다시한번 우리의 확고한 입장을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우리는 베트남의 독립, 주권, 통일, 그리고 영토 보전을 단호하게 지킬 것입니다. 베트남은 하나이며 베트남 민족도 하나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우리 민족의 이 신성한 권리를 침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입니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제네바 협정을 존중하고 남베트남에서 철수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베트남 전쟁 문제를 해결하고 1954년의 제네바 협정을 준수하며 인도차이나와 동남아시아 제국의 평화를 지키는 유일한 길입니다. 다른 해결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미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우리 인민과 정부의 답변입니다.

 

우리 인민들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시기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사회주의 진영과 제국주의, 식민주의, 신식민주의에 대항해서 싸우고 있는 전 세계 인민들의 최전방 지역이라는 크나큰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인민들은 자신들만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보편적인 자유와 독립, 그리고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싸워 왔고 스스로를 희생해 왔습니다. 미제 침략자들과의 전선에서 우리 인민들의 임무는 막중한 것이지만, 또 대단히 영광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미국과 싸워서 나라를 구하는 것이 모든 베트남 애국자들의 가장 신선한 임무입니다. 남베트남 인민의 진정하고 유일한 대표인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지도 아래 남베트남의 영웅적인 인민과 투사들은 더욱 큰 승리를 거두어서 남부를 해방시키고 북부를 수호하기 위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북부의 무장세력과 인민들은 북부를 수호하고 남부를 전심전력으로 지원하기 위해 용감하게 싸우는 한편 사회주의 건설에 경쟁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나는 국민의화가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성명과 베트남 조국 전선의 호소를 열렬하게 지지할 것을 제의합니다. 남베트남의 영웅적인 우리 동포와 투사들을 열렬히 환영합시다!

 

지금 생산경쟁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새로운 업적을 기록하려고 적에 대항해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 북베트남의 우리 무장세력과 인민들에게 뜨거운 축하를 보냅시다!

 

전 인민의 노력배가경쟁운동을 발전시키고, 모든 어려움들을 단호하게 극복하며, 사회주의 북베트남의 건설과 수호, 그리고 남베트남 동포들의 애국적인 투쟁을 전심전력으로 지원하기 위해, 나는 우리 동포와 투사들에게 혁명적 영웅성, 경계심, 투쟁정신을 끊임없이 강화해 주기를 요청합니다!

 

우리 모두 한 사람처럼 일치단결해서 미제 침략자들을 물리칠 결의를 합시다!

 

우리 조국의 미래를 위해, 그리고 우리 인민의 행복을 위해, 전국의 모든 동포와 투사들이여, 용감하게 전진합시다!

 

1965415

호치민의 연설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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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혁명을 두 개의 역사적 단계로 구분해보면, 제1단계는 신민주주의 혁명이다. 이것은 중국혁명의 새로운 역사적 특성이다. 이 새로운 특성이 중국 내부의 정치적 관계 및 경제적 관계에 있어서는 또 어떻게 구체적으로 표현되고 있는가? 아래에서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설명하기로 하자. 1919년 5·4운동 이전(5·4운동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및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 후에 일어났다)에 있어서 중국 자산계급 민주주의 혁명의 정치지도자는 중국의 소자산계급 및 자산계급(지식계층)이었다. 당시 중국 무산계급은 아직 각성한, 독립적인 계급적 역량으로서 정치무대에 진출하지 못하고 소자산계급 및 자산계급의 추종자로서 혁명에 참가하였다. 예를 들면 신해혁명 때의 무산계급이 바로 이러한 계층에 속하는 것이다.


5·4운동 이후에 있어서 중국의 민족자산계급이 계속 혁명에 참가하기는 하였지만, 중구 자산계급 민주주의혁명의 정치지도자는 중국 자산계급인 것이 아니라 중국 무산계급이었다. 이때 중국 무산계급은 벌써 그자신의 성장과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각성한 독립적인 정치역량으로 신속히 전환되었다.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와 전반 중국 자산계급 민주주의혁명의 철저한 강령은 중국 공산당이 제기한 것이며 토지혁명은 중국 공산당이 단독으로 수행한 것이다.


중국의 민족자산계급은 식민지, 반식민지적 국가의 자산계급이며 제국주의의 억압을 받고 있기 때문에 비록 제국주의시대에 처해 있기는 하지만 일정한 시기 및 일정한 정도에서는 의연히 외래 제국주의 및 자국의 관료군벌정부를 반대하는(후자는 예를 들면 신해혁명시기 및 북벌전쟁시기에 있어서) 혁명성을 가지고 있으며 무산계급, 소자산계급과 연합하여 자기들이 반대하려는 적을 반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중국의 자산계급이 제정 러시아의 자산계급과 다른 점이다. 제정 러시아는 벌써 군사봉건적 제국주의로서 남을 침략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자산계급에게는 아무런 혁명성도 없었다. 제정러시아에 있어서 무산계급의 임무는 자산계급과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식민지, 반식민지로서 남에게 침략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민족자산계급은 일정한 시기와 일정한 정도에서 혁명성도 가지고 있다. 중국에 있어서 무산계급의 임무는 민족자산계급의 이러한 혁명성을 경시하지 말고 그들과 더불어 제국주의를 반대하고 관료군벌정부를 반대하는 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할 것이다.


그러는 한편 그들은 식민지, 반식민지의 자산계급이고 경제적 및 정치적으로 매우 연약하기 때문에 다른 한 가지 성질, 즉 혁명의 적에 대한 타협성도 가지고 있다. 중국의 민족자산계급은 혁명할 때에도 제국주의와 완전히 결렬하려 하지 않았으며 또한 농촌에서의 소작료 착취와도 긴밀한 연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국주의를 철저히 전복하려 하지도 않거니와 철저히 진복시킬 수도 없으며, 봉건세력에 대하여서는 더구나 철저히 전복시키려 하지도 않거니와 철저히 전복시킬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중국 민족자산계급으로서는 중국 자산계급 민주주의혁명의 두 개의 기본문제, 즉 두 개의 큰 기본임무를 하나도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국민당을 대표자로 하는 중국 대자산계급을 본다면 그들은 1927년부터 1937년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동안 줄곧 제국주의의 품안에 안겨 있었으며, 봉건세력과 동맹을 맺고 혁명적 인민을 반대해왔다. 중국의 민족자산계급도 1927년 및 그후의 한 시기 동안은 반혁명을 따르지 않은 적도 있었다. 항일전쟁 과정에서 왕정위를 대표자로 하는 대자산계급의 일부는 또 적에게 투항하여 대자산계급의 새로운 배반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점도 중국 자산계급이 역사상의 구미 각국의 자산계급, 특히 프랑스의 자산계급과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구미 각국에 있어서, 특히 프랑스에 있어서는 그들이 혁명적 시대에 처해 있을 당시에 자산계급에게는 비교적 철저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국의 자산계급에게는 이 정도의 철저성 조차 없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혁명에 참가할 가능성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의 적에 대한 타협성이 있는, 이것이 바로 중국 자산계급의 양면성이다. 이러한 양면성은 역사상의 구미 자산계급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있었다. 큰 적이 앞에 닥치면 그들은 노동자, 농민과 연합하여 적을 반대하고 노동자, 농민이 각성하면 그들은 또 적과 연합하여 노동자, 농민이 각성하면 그들은 또 적과 연합하여 노동자, 농민을 반대한다. 이 점은 세계 각국 자산계급들의 일반적인 법칙이다. 다만 중국 자산계급에게 있어서는 이 특성이 더욱 돋보일 따름이다.


중국에서는 인민을 영도하여 제국주의와 봉건세력을 타도할 수 있는 자가 인민의 신임을 얻게 된다는 것이 아주 자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인민들의 철저한 원수가 제국주의와 봉건세력, 특히 제국주의이기 때문이다. 오늘에 있어서는 인민을 영도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민주정치를 실시할 수 있는 자가 바로 인민의 구성원이다. 역사가 실증하는 바와 같이 중국 자산계급은 이 책임을 감당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책임은 무산계급의 어깨에 지워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중국 무산계급, 농민, 지식인 및 기타의 소자산계급은 여하튼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기본적 세력이다. 이미 각성한 자도 있고 지금 각성중에 있는 자도 있는 이 계급들은 필연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가 구성 및 정권 구성의 기본적 부분이 될 것이며 무산 계급은 영도적 역량이 될 것이다. 지금 창건하려는 중화민주공화국은 오직 무산계급 영도하에서의 반제, 반봉건적인 모든 사람들의 연합독재의 민주공화국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즉 신민주주의공화국이며 또한 진정한 혁명적인 3대 정책을 실시하는 신삼민주의공화국이다.


이러한 신민주주의공화국은 한편으론 구민주주의공화국과 같은 낡은 형태의, 구미식의, 자산계급 독재의 자본주의공화국과는 다르다. 그러한 공화국은 이미 때가 지난 것이다. 다른 한편으론 그것은 소련식의, 무산계급의 사회주의공화국과도 다르다. 이러한 사회주의공화국은 이미 소련에서 강대해지고 있고 또 각 자본주의국가들에서도 수립될 것이며 장차 틀림없이 공업이 발달한 모든 국가들의 국가 구성 및 정권 구성에 있어서의 지배적인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화국은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들의 혁명에는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들의 혁명이 일정한 역사적 시기에 있어서 취할 국가형태는 오직 세 번째 형태, 즉 신민주주의 공화국이라는 형태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형태이고 따라서 과도기 적인 형태기는 하지만 또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없는 필요한 형태다.


그러므로 전 세계의 여러 가지 국가체제를 그 정권의 계급적 성격에 의하여 구분한다면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즉 자산계급 독재 공화국, 무산계급 독재 공화국, 몇 개 혁명적 계급의 연합독재 공화국이다.


첫째 형태는 구민주주의 국가에 해당한다. 제2차 세계대전이 폭발된 오늘에 있어서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에서는 민주주의 냄새조차 없어지고 자산계급의 피비린내 나는 국가적 독재로 이미 전환되었거나 전환되어가고 있다. 지주계급 및 자산계급이 연합하여 독재하는 일부 국가들도 이 부류에 넣을 수 있다.


둘째 형태는 현재 소련에서만이 실현되어 있고, 그 외에는 현재 자본주의 제 국가에서 준비하고 있다. 장차 그것은 일정한 기간 동안은 세계적으로 지배적인 형태가 될 것이다.


셋째 형태는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의 혁명이 취하는 과도적인 국가형태다. 각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의 혁명은 필연적으로 약간의 각각 다른 특성들을 가지게 될 것이지만 그것은 대동소이한 성격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 혁명이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의 혁명이라면 그 국가 구성 및 정권 구성은 기본상 필연적으로 같게 될 것이다. 즉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몇 개의 계급들이 연합하여 공동으로 독재하는 신민주주의국가가 될 것이다. 오늘의 중국에 있어서 이러한 신민주주의적 국가형태는 다름 아닌 항일통일전선의 형태다. 그것은 항일하는 것이고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며 또한 몇 개의 혁명적 계급이 연합하는 것이고 통일전선적인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항전을 시작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민주 근거지를 제외한 기타의 대부분 지역들에서는 아직도 기본적으로 국가의 민주주의화에 관한 사업이 착수되지 못하고 있으며, 일본 제국주의는 바로 가장 근본적인 이 약점을 이용하여 대대적으로 침입하고 있다. 만일 과거의 방침을 변경하지 않는다면 민족의 운명은 매우 위험하게 됐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국체(國體)’ 문제다. 이 국체문제는 청조 말년부터 수십 년 동안이나 논쟁해왔지만 아직까지도 제대로 확실하게 해명되지 못하고 있다. 사실인즉 그것은 단 한 가지 문제, 즉 국가에 있어서 사회 각 계급들이 차지하는 지위를 말하는 것이다. 자산계급은 언제나 이러한 계급적 지위를 은폐하고 ‘국민’이라는 명사를 사용하여 실지로는 자기들 한 계급의 독재를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은폐는 혁명적 인민들에게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하는 것이니 그들에게 확실하게 밝혀주어야 한다. ‘국민’이라는 명사는 사용할 수 있는 것이긴 하지만 반혁명분자, 민족반역자들은 국민 속에 들지 않는다. 반혁명분자, 민족반역자에 대한 모든 혁명적 계급들의 독재가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국가다.


“근세 각국의 소위 민권제도는 왕왕 자산계급에게는 독점되어 평민을 억압하는 도구가 되고 있다. 그러나 국민당의 민권주의는 일반평민이 공유로 하는 것이고 소수인이 사유로 하는 것이 아니다.” 이 말은 1924년 국공합작에 의한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의 선언에서 선포한 장엄한 성명이다. 지난 16년 동안 국민당 자신이 이 성명을 위반하였으므로 오날과 같이 국난이 심각한 상황으로 조성되었다. 이것은 국민당이 저지른 극히 큰 오류 때문에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항일이라는 세례를 받아서 이 오류를 시정하기 바란다.


이밖에 또 ‘정체(政體)’ 문제라는 것이 잇는데, 그것은 정권 구성의 형태문제를 말하는 것이며 일정한 사회적 계급이 어떠한 형태를 취하여 적을 반대하고 자신을 보호하는 정권기관을 조직하느냐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적당한 형태의 정권기관이 없이는 국가를 대표할 수 없다. 현재 중국에 있어서는 전국인민대표대회성(省)인민대표대회, 향(鄕)인민대표대회에 이르기까지의 체계를 취할 수 있으며, 각급 대표대회를 통하여 정부를 선거할 수 있다. 그러나 성별, 신앙, 재산, 지식정도 등의 차별이 없는, 진정으로 일반적으로 평등적인 선거제를 실시해야 한다. 그래야만 국가 내에서의 각 혁명적 계급들의 지위에 적응할 수 있고, 인민의 의사를 표시하고, 혁명투쟁을 지휘하는 데 적응할 수 있으며 신민주주의정신에 적용될 수 있다. 이러한 제도가 곧 민주주의 중앙집권제다. 오직 민주주의 중앙집권제를 실시하는 정부라야만 모두 혁명적 인민들의 의사를 충분히 발휘시킬 수 있으며 혁명의 원수들을 가장 강력하게 반대할 수 있다. “소수인이 사유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정신은 정부와 군대의 구성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민일 진정한 민주주의 제도가 없다면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것인데 이런 것을 가리켜 정체와 국체가 서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한다.


국체는 각 혁명적 계급들의 연합독재이고 정체는 민주주의 중앙집권제이다. 이것이 신민주주의의 정치며 신민주주의공화국이며 항일통일전선공화국이며 3대 정책을 실시하는 신삼민주의공화국이며 명실이 부합되는 중화민국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중화민국이란 명칭은 있으나 아직 중화민국다운 내용이 없다. 그러므로 그 명칭에 부합되게 내용을 충실히 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과업이다.


이것이 혁명의 중국, 항일의 중국이 수립해야 할 일이며 또 결정적으로 수립하지 않으면 안 될 내부적 정치관계다. 이것이 ‘건국’ 사업에서의 유일하게 정확한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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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퐁니 퐁넛 학살 피해자인 응우옌티탄씨, 퐁니 퐁넛 학살 당시 8살이었던 그는 이 학살에서 가족을 잃었고, 본인 또한 총에 맞았다.)


1968년 원숭이의 해는 베트남 전쟁의 전환점이었다. 1968년 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을 포함한 약 120개의 도시와 군사시설을 공격했고, 남베트남 전역에 있는 성과 부의 중심지는 전쟁터로 변했다. 이른바 구정공세(Tet Offensive)라는 명칭을 가진 이 공격은 베트남 전쟁에 있어 전환점이었다. 이 한 번의 대공세로 1달 동안 베트콩 37,000명이 전사했지만, 미군 또한 2,500명이 전사했고,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던 린든 B.존슨 대통령은 미국 내의 반전운동에 시달려야 했다. 남베트남에 주둔한 54만 9,000명의 미군은 충격에 휩싸이는 1968년의 해였다.

(퐁니 퐁넛 학살 위령비, 한국 사람들이 많이 놀러가는 베트남 휴양지 다낭에서 12km 떨어진 곳에는 퐁니 퐁넛 학살의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가 있다. 안타깝게도 이 사실을 아는 한국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1968년의 해는 베트남 전쟁에서 잔혹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난 해이기도 했다. 1968년 3월 16일 손미(Son My) 지역에 착륙한 찰리 중대(Charlie Company) 소속 병사들은 마을로 들어가 504명의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하고, 부녀자를 강간한 뒤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여성, 노약자, 아이가 학살 대부분의 비율을 차지했고, 학살당한 이중 1/10은 유아였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이다. 이러한 민간인 학살은 1968년 2월 12일 꽝남성 디엔반 현(Điện Bàn)에서도 있었다. 그게 바로 한국군 청룡 부대가 저지른 퐁니 퐁넛 학살(Phong Nhi Phong Nhat Massacre)이다.


앞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1968년 구정 공세는 미군과 그 동맹국 군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965년 베트남 전쟁에 전투부대를 파병한 박정희 정권은 전쟁 기간 연 5만 명 이상의 병력을 유지했었다. 1968년 남베트남에 주둔한 한국군의 숫자는 총 4만 9,869명이었다. 이들 또한 구정 공세 이후 반격에 나섰고, 이러한 작전은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디엔반 현에 있는 퐁니와 퐁넛 촌에서도 한국군 청룡부대가 반격에 나섰다. 대략 청룡 부대 소속 1개 중대 병력이 반격 작전인 괴룡 1호 작전을 벌여 베트콩 수색 및 소탕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던 1968년 2월 12일 소탕과정에서 학살이 일어났던 것이다.

(미군 본 상병이 찍은 사진, 그는 퐁니 퐁넛 학살의 현장을 사진 기록으로 남겼다.)


베트남 전쟁의 경우 베트콩이 게릴라전을 하고, 미군이나 한국군 그리고 남베트남군이 게릴라전을 하는 이들을 소탕하는 작전을 벌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다. 학살이 일어나는 지역들을 보면 미군을 포함한 연합군이 소위 자유 사격 지대(Free Fire Zone)으로 설정한 곳이 많았고, 그 지역에서는 보이는 건 무조건 쏴 죽여도 됐다. 그러나 퐁니 퐁넛 마을은 달랐다. 퐁니 퐁넛의 경우 미구니 ‘발포제한 구역(Control Fire Zone)’으로 설정해놓은 곳이었다. 거기다 인근 1번 국도의 끼엠루(Kiem Lu) 초소엔 남베트남군이 적지 않았으며, 그들의 일가친척이 퐁니 퐁넛에 살았다. 그러나 이런 지역 근처에서 작전을 벌이던 한국군은 퐁니 퐁넛 마을에 진입하여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학살 당한 어린 아이, 이 어린아이는 한국군의 쏜 총에 맞고 사망했다. 당시 나이가 6~7살 정도 되는 어린이였다고 한다.)


1968년 2월 12일 청룡부대 제2여단 제1대대 1중대 병사 150명이 수색정찰에 나갔었다. 그날 오전 한국군은 퐁니와 퐁넛 마을 측면을 동에서 서로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한 병사가 지뢰를 밟았고, 1소대원 한 명이 저격당했다. 여기서 청룡부대 중대장은 마을 진입을 지시했다. 1소대가 진입했고, 그 뒤를 2,3소대가 따랐다. 즉 여기서부터 대대적인 민간인 학살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응우옌티탄(Nguyen Thi Thanh)은 8살이었다. 응우옌티탄은 퐁니 퐁넛 학살 당시 언니 응우옌티쫑(Nguyen Thi Trong), 남동생 응우옌득쯔엉(Nguyen Duc Truong), 이모 판티응우(Phan Thi Ngu), 엄마 판티찌(Phan Thi Tri)를 포함하여 전 가족을 잃었다. 응우옌티탄 또한 학살의 현장에서 한국군이 쏜 총을 맞았다. 학살 당시 그는 엄마를 찾아다녔지만, 엄마 또한 총에 맞아 죽어 있었고, 5살짜리 그의 동생 응우옌득쯔엉은 한국군의 쏜 총에 맞고 죽었다. 그것도 입이 다 날아간 채 죽었다. 8살의 응우옌티탄 또한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다. 창자가 튀어나올 정도로 심각하게 부상을 당했으며, 동네의 어른들에게 발견되어 미군 헬기를 타고 병원에 가서 치료받았다. 1년 동안 입원한 뒤에 퇴원 할 수 있었다고 한다.  

(학살 당시 희생된 응우옌티탄, 퐁니 퐁넛 학살 당시 학살 당한 응우옌티탄 중에는 19살 짜리 소녀도 있었다.)


1968년 구정 공세 기간에 일어난 퐁니 퐁넛 학살에서 총 74명이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했고, 17명의 민간인이 부상당했다. 심지어 19살의 소녀 응우옌티탄(동명이인)은 유방이 잘렸고, 무차별 폭력에 희생된지 2일 후에 목숨을 잃었다. 학살당한 이들 중에는 어린아이와 영유아도 있었다. 그 아이는 엄마와 같이 장보러 가다가 한국군의 총에 맞아 사망했고, 나이는 6살이었다. 현재 베트남에 있는 퐁니 퐁넛 학살 위령비에는 1,2살짜리 아이의 이름도 3~4명 정도 있다. 

(퐁니 퐁넛 학살 자료를 기록한 미국의 공식 문서)


이 참혹한 학살의 현장은 미국의 한 군인인 본 상병은 퐁니 마을에서 나는 총소리를 들은 이후 오후 쯤에 마을에 들어가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의 현장을 사진으로 담았다. 그가 사진으로 담은 자료들은 주월미군사령부와 대사관을 거쳐 미 국무부와 국방부에까지 올라갔고, 주월한국군 사령부를 포함한 한국의 군 당국에까지 건너갔다. 이렇게 되자 퐁니 퐁넛 학살은 한국과 베트남 간 외교 문제로 비화됐고 미국이 한국에 강하게 항의했다. 당시 주월미군총사령관이던 윌리엄 웨스트모얼랜드는 한국군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물론 채명신은 “한국군은 제네바 협정을 위반하는 어떠한 책임 있는 사건에도 결코 관여하지 않았다”는 회신을 보냈다.

(참전용사의 양심고백, 2000년 당시 학살에 가담했던 한 참전용사는 학살에 가담했던 일에 대해 고백증언을 남겼다.)


퐁니 퐁넛 학살 1년 뒤 한국 정부는 중앙정보부에서 이 사건을 조사 하게 했다. 물론 이 사건은 한국 언론에 전혀 보도가 되지 않았다. 당시 중앙정보부는 퐁니 퐁넛 학살에 가담한 한국군 최영언 중위 등 3명을 조사한 뒤 작성한 문건 목록을 남겼다. 당시 한국은 베트남 전쟁을 반공선전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런 민간인 학살을 절대로 공론화하지 않았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 관련 이야기는 설사 박정희 시기 한국 언론에 보도 된다고 하더라도, 굉장히 정권 입장에 맞게 편집되고 왜곡되어 보도됐다. 

(고경태 기자, 고경태 기자는 한국군 민간인 학살 사건인 퐁니 퐁넛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 민간인 학살이 공론화 된 것은 한국이 민주화를 거치면서 부터였다. 특히나 1990년대부터 한국군 민간인 학살의 공론화에 압장섰던 구수정 박사의 노력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문제를 최초로 연구하고 현장을 직접 조사한 구수정 박사는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해 80여 개 마을에서 9,0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던 2000년 한국군이 저지른 퐁니 퐁넛 학살에 가담했던 한 참전용사가 양심고백을 했다. 김석현을 비롯한 청룡부대 제1대대 1중대 장교 출신들은 “모두 그날 그곳에 갔다.”고 인정했고, 이 1중대 장교들에 대한 인터뷰는 《한겨레21》을 통해 기사화 됐다. 물론 이것을 부정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찌됐든 이 학살 사건은 양심적인 참전용사의 고백증언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2018년 당시 한국군의 범죄를 묻는 피해자 응우옌티탄씨, 한명은 퐁니 퐁넛 생존자고 다른 한명은 하미마을 학살 생존자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대한민국 정부에게 물었다.)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알리는데 주력해온 구수정 박사와 한베평화재단은 2018년 4월 21일부터 22일까지 베트남전 시민평화법정이라는 이름으로 민간 모의법정을 열어 대한민국 정부를 피고로 하여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학살의 책임을 물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이 주심을 맡았고, 그는 “중대한 인권침해이자 전쟁범죄의 성격을 띠는 사건”으로서 대한민국 정부에 책임이 있음을 선고하였다. 원고로서 참여한 두 명의 응우옌 티 탄(한 명은 퐁니 퐁넛 피해자이고, 다른 한명은 하미마을 학살 피해자다.)은 한국의 현대사에서 있었던 학살의 아픔에 공감하기 위해 제주특별자치도를 방문하여 제주 4·3 항쟁의 생존자와 만나기도 했다.

(구수정 박사,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공론화 시킨 구수정 박사는 현재 한베평화재단 이사로 지금도 한국군 민간인 학살 문제의 진실 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1968년 2월 12일, 이 책은 고경태 기자가 집필한 책이다.)


퐁니 퐁넛 학살 사건은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중 제법 공론화 된 사건이다. 또한 사진자료와 미국의 공식문서 그리고 학살 가담자의 증언 고백 등이 있다. 이 때문에 모의법정까지 열어 그 사건의 국가적 폭력이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돈을 번 전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흐름이 2003년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한국의 이른바 보수 언론들은 마치 이것을 베트남 전쟁에 빗대어 경제성장의 기회라는 말이 안되는 논리로 파병을 찬성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바로 한국 사회가 베트남 전쟁으로부터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렇듯 우리는 베트남 전쟁을 마치 돈을 번 전쟁으로만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퐁니 퐁넛 학살과 같은 베트남 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참고자료


『미안해요! 베트남』, 이규봉, 푸른역사, 2011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퐁니·퐁넛 학살 그리고 세계』, 고경태, 한겨레출판, 2015


『한마을 이야기 퐁니·퐁넛』, 고경태, 보림, 2016


『베트남 전쟁, 잊혀진 전쟁 반쪽의 기억』, 박태균, 한겨레출판,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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