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2개월간 올리지 않았네요. 기다리는게 좀 느리더라도 개인 사정이 있으니 양해 부탁 드립니다.)
1919년 식민지 조선에서 일어난 3.1운동은 5.4운동이나 다른 식민지 지배 국가들의 독립운동 세력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었지만, 궁극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났던 결정적인 이유에는 한일합병 이후 일본이 실행했던 무단통치에 대한 반발이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노선을 바꾸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문화통치였다. 문화통치가 실행되며 출판과 집회 및 결사의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용되었고, 민족자치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 관련 서적)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 총독으로 취임한 사이토 미노루 총독은 1927년까지 조선 총독으로 있으면서 문화통치를 실행했다. 그러나 이 문화통치는 일본의 식민지배 차원에서 전개된 것이었고, 진정한 목적은 친일파 양성을 통한 조선통치에 있었다. 일제는 민족대표 33인이었던 최남선이나 이광수를 이용하여 민족개량주의를 선전했고, 최린과 박영효를 앞세워 민족주의자들을 일본과 타협하도록 설득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화도 실행되었다. 교육을 통해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조선은 옛날부터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온 열등한 민족이다’와 같은 말들을 세뇌시켰던 것이다.
(사이토 미노루, 식민지 조선 초대 총독인 데라우치 집권 이후 자리를 이어받은 그는 1920년대 이른바 식민지 조선에서 문화통치를 실행했다.)
(문화통치의 실상)
1920년대 당시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게 문화통치를 했듯이, 당시 일본 내에서도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를 맞이했다. 일본의 다이쇼 데모크라시는 민중과 정당의 성장을 바탕으로 전개됐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인 1918년에는 미가 앙등에 따른 생활고에 민중들이 반발하여 쌀 소동이 전국적으로 발생했고, 이런 대규모 저항의 움직임은 정치적으로 큰 충격을 주기도 했었다. 이로 인해 조선 총독 출신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끄는 번벌 내각이 총사퇴했고, 사태 수습을 위한 대안으로 하라 다카시가 이끄는 정우회 내각에 의해 정당내각이 수립되기에 이르렀다. 1925년에는 25세 이상 남성에게 재산에 상관없이 선거권을 부여하는 보통 선거법이 제정되었으며, 보통선거법의 제정은 민중의 정치적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민주주의의 확대를 가져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산미증식계획의 진실)
앞에서 서술한 쌀소동에 대한 일본의 대책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산미증식계획에 있었다. 일본의 통계자료에 따르면 조선의 쌀 생산량은 늘었다. 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1921년에 1,400만 석이었던 것이 1928년에는 1,700만 석으로 300만 석이 증가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조선인 1인단 쌀 소비량은 크게 감소하였다. 왜냐하면 일본으로의 쌀 이출이 1921년 300만 석에서 1928년 700만 석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질적인 조선인들의 쌀 소비량은 줄어들 수 밖에 없는 구조였다. 즉 이것이 산미증식계획의 핵심이었다. 거기다 지주의 숫자도 증가하여 농민들은 점차 빚을 잔뜩 짊어진 채무농민이 되어갔다. 일본의 경제 구조도 자본주의적 착취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식민지 조선 만큼은 아니더라도 마르크스가 말한 계급 계층 간의 구조적 불평등은 극심했다.
(일본 공산당, 1922년에 창당된 일본 공산당은 현재까지 일본 정당정치에서 원내정당으로 남아 있다. 다만 예전과는 달리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으로 개량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독도 문제, 위안부 문제 그리고 일본 침략 문제에 있어선 항상 진보적인 시각을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다.)
거기다 1917년 레닌의 볼셰비키 혁명이 러시아에서 성공하면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이 시기부터 주목을 받기도 했으며, 아나키즘, 사회주의 등과 같은 진보 이념을 표방하는 집단 및 단체들이 일본에서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1922년 7월에는 일본 공산당이 창당되었고, 일본 공산당은 “군주제와 귀족원 폐지, 18세 이상 모든 인간에게 보통 선거권 부여, 집회·결사·출판의 자유, 1일 8시간 노동 실시, 실업보험을 포함한 사회보장 및 최저임금제, 누진소득세에 따른 과세 실시”를 슬로건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박열, 박열은 아나키즘 계열 독립운동가로 1920년대 주로 활동했다. 그러나 관동 대지진 이후 체포되어 22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이 둘은 혁명 동지이자 연인이었다. 박열은 해방 후 석방되었지만, 감옥살이를 하던 중 가네코는 1926년에 죽었다. 이들의 이야기는 2017년 영화 박열로 개봉하기도 했다.)
1921년 11월에는 일본 내 조선인 학생들에 의해 이른바 ‘흑도회’가 조직되었고, 이는 일본 내 유학생들 최초의 이념 서클로서, 이후 많은 유학생단체들에 큰 영향을 주기도 했었다. 그리고 당시 흑도회의 회원은 2017년 영화로도 만들어진 주인공 박열도 있었다. 박열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은 1923년 10월로 예정되어 있던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에 요인을 암살하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으며, ‘불령사’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상하이에 인사를 보내 폭탄을 구입하기도 했었다. 1925년에는 김재봉, 박헌영 등이 주도해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제1차 조선 공산당이 창당되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좌파조직들이 식민지 조선과 일본 내에서 생겨나고 투쟁을 전개하기에 이른 건 자본주의와 식민주의라는 일본 제국주의의 유산이 고스란히 사회 구조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당시 불타는 일본)
또한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기 일본에서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여러 좌파조직들이 탄생했다고 해서 그 분위기가 자유로웠던 것도 아니고, 조선에 대한 식민 지배가 약했던 것도 아니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방에서는 이른바 대지진이 일어났었다. 이 지진의 규모는 7.9의 격진이었고, 일본 사가미만 연안과 보소반도 남부에서는 목조가옥의 50% 정도가 파괴되었으며, 수도 도쿄에서는 화재로 인한 사망이 4만 4천 명을 초과했다. 요코하마의 경우 6만 가옥 이상이 전소되었었다. 이 지진으로 인한 사망자와 행방불명자가 15만 명에 달했고 피해액은 65억 엔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관동 대지진 당시 자경단의 학살, 이들의 학살로 수천 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이런 대지진이 있자, 일본인들은 증오의 대상을 찾았다. 그 대상이 바로 일본에 살고 있던 조선인이었다. 그 다음날인 2일에는 일본에서 계엄령이 선포되어 군대가 치안유지를 담당하였는데, 관동지방 각지에서는 경찰의 협조아래 재향 군인회, 청년단, 소방대 등을 중심으로 자경단이 조직되어 조선인을 무차별 살해 및 학살했다. 지진 이후 일본인들에게 퍼진 유언비어는 “지진 이후 도쿄와 요코하마에서 조선인들이 방화하고,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유언비어는 일본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조선인에 대한 적대감을 부추겼고, 학살로 이어졌다. 학살은 6일간 계속되었으며 6,433명의 조선인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그리고 관동 대지진 이후 학살을 부추겼던 일본 정부는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들에 대한 체포도 진행했는데, 여기서 박열을 포함한 아나키스트들도 체포했다. 이렇게 해서 박열과 그의 연인인 가네코 후미코는 사전에 계획했던 암살 계획이 드러나면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옥중에서 결혼한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7월에 사망했고, 박열은 1945년 10월 27일까지 즉 해방이 되고 난 이후까지 22년 동안 옥살이를 했다.
(일제 치안 유지법, 치안 유지법은 1925년에 제정되어 독립운동가들과 좌파들을 탄압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 치안 유지법은 1948년 여순항쟁 시기 대한민국 정부에서 국가 보안법이라는 법의 기초가 되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1925년 일본에선 이른바 ‘치안유지법’이라는 것이 통과됐다. 치안유지법 제1조에 따르면 “국체를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할 목적으로 결사를 조직한다든가 또는 그 사정을 알고 이에 가입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식민지 조선 내에 있던 사회주의자들과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이 덩달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잡혀 들어갔다.
(다나카 기이치, 다나카 기이치는 중국 대륙 침략에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을 일본에 부여한 인물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1919년 당시 일본 도쿄에 온 젊은 독립 운동가 여운형과 회담했었는데, 조선인을 전부 학살하겠다는 협박을 시도했었다. 물론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이를 논리적으로 반박하여, 그를 놀라게 하기도 했었다.)
1926년 12월 다이쇼 천황이 사망한 이후, 새로운 천황이 일본에 즉위했다. 쇼와천황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천황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히로히토 천황이었다. 히로히토 천황이 즉위하면서, 일본의 상황도 점차 바뀌어 갔다. 1927년 4월에 성립한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기존에 중국과 추구했던 협조 외교 대신에 대륙 적극 정책을 전개했다. 다나카 내각은 동방회의를 개최하여 만몽지역을 중국 본토에서 분리하여 일본의 세력 하에 두기로 결정했다.
(장작림, 장작림은 1920년대 만주에 있던 중국 군벌이다. 일본의 계획으로 폭사하게 된다.)
(장작림 폭사 사건 당시 열차, 장작림이 사망했던 열차다.)
(장학량, 장쉐량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장작림의 아들이다. 일본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그는 반일감정이 강했고, 1930년대 일본과의 전투를 상대적으로 피하고자 했던 장제스에게 반감이 강했다. 따라서 1936년 시안사건을 주도해 장제스로 하여금 제2차 국공합작을 성사시키는데 기여했다.)
당시 중국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가 북벌을 진행하자 이에 대한 맞대응으로 중국 산동으로 출병하여 무력 대응을 하기도 했으며, 1928년에는 만주 군벌 장작림이 장제스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관동군의 계획에 따라 철도 폭파 사고를 위장한 장작림 암살을 단행했다. 이게 바로 장작림 폭사 사건이었다. 중국 산동 지역에 출동한 일본 일본군은 총 5천 명이었고, 중국군과의 전투 도중 발생한 사상자 50명 이내였다. 이에 반해 중국은 민간인을 포함해 최소 1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나왔고, 1,700명이 일본군의 포로로 붙잡혔다.
(중국 대륙에 진입한 일본군, 일본은 1920년대부터 노골적으로 중국 대륙에 침략의 마수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처럼 다이쇼 시대가 끝난 이후 일본은 중국 대륙에 대한 야욕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기다 1925년 제정된 치안유지법을 통해 사회주의자와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재건에 착수했던 몇몇 유럽 국가들은 점차 경제를 회복시켰던 반면, 일본은 불황을 겪었다. 1923년에 일어난 관동대지진은 그런 일본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1920년대의 일본 경제는 그러했다. 그러던 1931년 9월 18일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드디어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의 마수를 드러내는데 그것이 바로 만주사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