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은 남한 동해안 위쪽의 항구로 38도선에서 약 50마일(8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큰 시멘트 회사 오노다는 한국에 많은 공장을 세웠는데, 삼척에 있는 것을 제외하면 전부 북한에 있었다. 다른 곳의 공장과 마찬가지로 815일 공장노동자들로 구성된 자치위원회가 즉각 공장을 접수했으며, 그 결과 모든 것을 한국인들이 스스로 관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오병호의 지도로 몇 달, 몇 년 동안 공장을 관리했다.

 

오병호는 1943년 공업학교를 졸업한 뒤 공장에 들어왔고, 전쟁 중에 일본인 기술자 6명이 군대로 징집되면서 빠르게 승진했다. 이는 식민지 시기 막바지에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오병호는 공장의 기술과장 구사가와 신타로 밑에서 실무를 익혔다. 신타로는 식민지 이주민 2세대로 1928년 북한의 승호리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진주의 지주 가문 장남이던 오병호는 1945년에 겨우 25살이었다.

 

공장의 숙련노동자였던 우진홍은 1920년 삼척에서 태어났고 나중에 서울의 선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우연히도 나(브루스 커밍스)는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그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1943년 우진홍은 기술과의 숙련노동자였다. 일본인 기술자들이 공장에 흔히 길게는 3년까지도 머물렀던 북한과 달리 삼척 공장에는 아무도 남지 않았으며, 따라서 해방과 더불어 즉시 한국인들이 기술직과 관리직으로 이동했다.

 

915일경 미군정 민정팀의 채프먼이라는 대위가 공장을 방문했고, 이제부터 공장의 모든 중요한 결정은 먼저 자신과 의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노다 공장의 주거 시설을 자신과 의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오노다 공장의 주거 시설을 자기 팀의 본부로 썼다. 얼마 후 오병호는 서울로 가서 미군정에 공장 가동을 위한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상공부 공업국장 유한상으로부터 약간의 자금을 얻었고, 공장은 101일에 한국인 기술자와 공장노동자로 완전히 재가동되었다. 다음달 좌파-자유주의적인 전평(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에서 온 조직자들이 오노다에 지회를 설립했다. 우진홍에 따르면 노동자의 70%좌익이었는데, 이는 아마도 그들이 노동조합을 원했다는 뜻으로 보인다.

 

194512월 미군정은 명령 제33호를 발포하여 모든 공장의 자치위원회를 금지했다. 명령은 또한 이전에 일본인이 소유했던 모든 공공재산과 사유재산, 즉 큰 공장을 전부 포함하여 약 3000개의 재산이 군정에 귀속된다고 선언했다. 당시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서울 사람들이 공장 관리인을 선언했다. 당시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서울 사람들이 공장 관리인을 임명했다. 오노다의 관리자로 임명된 사람은 유한상의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부재 관리인으로서 1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고, 서울에서 임명한 다음번 관리자도 마찬가지였다. 역시 누군가의 친구이자 부재 관리인이었다.

 

1947년 마침내 미군정은 좌익분자들을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미군정이 전평을 불법 단체로 규정한 지 이미 1년이 넘었지만, 전평은 자치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번창했다. 공장위원회의 지도자 전부를 포함하여 이른바 좌익분자와 빨갱이 30명이 체포되었다. 우진홍의 기억에 따르면 몇 년에 걸쳐 노동자 정치는 서서히 역전되었다. 1950년대에는 70%가 이른바 우익이었다. 이들도 노동조합은 갖지 못했다.

 

19506월 재래식 전쟁이 발발했을 때, 자치위원회 출신자들은 대부분 공장노동자로 복귀했다. 일부 관리자와 기술자는 부산방어선으로 피신했으나 전부 다 달아나지는 않았다. 1950년 가을부터 19524월까지 남한군과 북한군은 서로 여러 차례 공장을 빼앗았고, 결국 석 달 연속으로 공장을 가동했던 북한군이 완전히 떠난 뒤로는 남쪽 사람들이 공장을 확보하여 보유했다.

 

1957년 마침내 이승만의 친구들은 서울에서 지명한 다섯 번째 부재 관리인 강직순에게 공장을 매각했다. 공장이 전쟁으로 파괴되지는 않았지만(자재 일부를 도둑맞았고 주 크레인이 파괴되었지만 나머지는 멀쩡했다), 미국은 국제연합 구호기금으로 공장에 632000달러를 배정했다. 매각은 그 후 4년 만의 일이었다. 구사가와 신타로 밑에서 기술을 배웠으며 남한 시멘트 기술자의 최고봉이었던 오병호는 1960년대 좌익이자 빨갱이라는 오명을 썼다. 이른바 좌익이었던 우진홍은 삼척에서 시멘트 관련 사업체를 소유했다.

 

이 이야기에서 끌어낼 논점은 많다. 20세기 중반 한국사를 풍부하게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그곳은 단지 하나의 시멘트 공장이었을지는 모르지만, 이 이야기는 필연의 정치, 즉 결정되던 그날(즉 채프먼 대위가 도착한 날)에는 작아 보였지만 나중에는 매우 크게 나타나는 정치적 선택에 관한 것이다.

 

채프먼 대위가 이렇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잘하고 있군요, 미스터 오. 계속 잘 하도록 하시오. 나도 조합원이요.” 이러한 처리 과정에 중립이나 공평, 불간섭을 요구하는 정중한 항변, 자신들의 점령정부에서 순진한 방관자로 남는 미국인 따위는 없었다. 채프먼 대위와 서울에 있는 그의 정치적 상관들이 무엇을 했든 하지 않았든 간에, 어쨌든 그들은 선택을 했다. 그리고 결국 미국인들이 잊힌 전쟁으로 알고 있는 그 내전을 초래한 것은 바로 오래전 따뜻한 9월의 그날들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미국인과 러시아인, 한국인이 했던 선택이었다.

 

출처 :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 p.178~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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