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 경쟁하는 냉전시대에 돌입했다. 미국과 소련이 동맹적인 관계에서 적대적인 관계로 변모함에 따라,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나는 국가 내부의 이념 대립이나 식민지 해방 전쟁 또한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을 받게 되었다. 베트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제국주의가 독립 베트남에서 물러나자 그 자리에 샤를 드골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가 다시 식민 지배를 하기 위해 그 나라에 수십만의 군대를 상륙시켰고, 이것은 결국 1946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The First Indochina War)으로 확대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민을 지휘한 호치민(Ho Chi Minh)이 하노이 바딘광장에서 프랑스 혁명 인권선언문의 내용을 바탕에 둔 독립을 선포했을 당시부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기까지 미국과 소련은 호치민의 베트민에 대해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했다. 미국이 베트남 문제에서 호치민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프랑스에 있었다. 형식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인 프랑스가 소련의 영향력 아래 편입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도 있었고, 비록 제2차 세계대전 당시 OSS와 협력했던 사이이지만 사회주의에 가까웠던 호치민에 대한 막연한 의심같은 것이 존재했다. 특히나 루스벨트 이후 권력을 계승한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강력한 반공주의자였다.

 

베트남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원하는 프랑스가 호치민을 인정할 리가 만무했었다. 거기다 프랑스의 대표적 좌파 단체인 프랑스 공산당도 인도차이나에 대한 문제에서 초기에 양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당시 프랑스 공산당 당수였던 모리스 토레즈(Maurice Thorez)1935년 당시 호치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난한 적도 있었다.

 

우리는 호치민을 신뢰할 수 없다. 그는 심정적으로는 트로츠키주의자다.”

 

이건 1930년대 당시 프랑스 공산당이 초기에 건설된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대해 트로츠키주의자들과 협력한다고 봤던 시각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토레즈를 포함한 프랑스 공산당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까지도 이러한 시각으로 호치민과 베트민을 판단했던 것은 아니었다. 1940년대 토레즈는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독립 열망에 우호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면서 프랑스 공산당도 프랑스 입장에서 생각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런 프랑스 공산당 입장의 이면에는 소련의 부추김에 힘입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고, 호치민 평전의 저자이자 OSS 요원으로 호치민을 만났던 찰스 펜(Charles Fenn)은 판단했다. 즉 모스크바 입장에서는 프랑스에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선다면 프랑스령 식민지를 유럽 공산당 체계 안에 두는 것이 아시아적 독립을 모색한다고 우왕좌왕하게 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기인 1947년의 프랑스 공산당은 전쟁을 비판하는 세력이 되어 있었지만 말이다.

 

소련의 스탈린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초기에 호치민과 베트민을 지원하지 않았던 이유에는 이들에 대한 스탈린의 개인적 의구심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스탈린의 의구심 중에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호치민이 프랑스와의 대립 사이에서 미국과의 관계를 수립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럽에선 사회주의 사회를 유지하면서 스탈린의 지도에 반발했던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의 사례가 존재했다. 티토와 스탈린의 대립을 생각하면 비록 옳지는 않더라도 스탈린의 이러한 의구심이 이해가 아주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스탈린과 트루먼은 이 점에 있어서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19473월 미국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이라는 것을 선언하면서, “무장한 소수 세력이 기도하는 정복에 저항하는 자유 국민을 돕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다.”라고 주장했다. 이것에 대한 대표적인 예시로 미국은 1940년대 후반에 그리스 내전에 개입하여 그리스에 우익군사독재정권을 세우기도 했다. 따라서 냉전 초기 미국의 정책은 신제국주의적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비슷한 시기의 소련 정책은 미국과는 사뭇 달랐다. 스탈린의 부관격인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19479월 유명한 연설을 했다. 그 연설에서 즈다노프는 소련은 억압받는 식민지 민족들의 제국주의 착취자들에 대한 투쟁을 지지한다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식민지 지역에서 독립을 위해 싸우는 부르주아 민족주의 세력도 우호적으로 본다는 의미였다. 또한 이것은 호치민에게 있어 소련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을 가능성이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베트민에 대한 소련의 실질적인 지원은 없었다.

 

스탈린이 베트민을 다시보게 된 계기는 1949년 중국 국공내전에 있었다. 2차 국공내전에서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국은 호치민에 대한 물질적인 지원을 시작했고, 1950년부터 군사고문단과 탄약, 소총, 식량, 의료품 등과 같은 물자를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1950년 초 중국과 가까워진 호치민은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말에 따르면 스탈린은 무례하고, 화를 돋우는태도로 호치민을 상대했다고 한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에 따르면 이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호치민은 스탈린으로부터 지지를 얻기 위해 모든 지략을 동원했다고 한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은 자신의 자서전인 디엔비엔푸에서 스탈린이 다음과 같은 대답을 호치민에게 했다고 한다.

 

베트남의 요구는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중국과 소련 사이에는 역할 분담이 필요합니다. 소련은 현재 동유럽 국가들에 전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베트남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줄 것입니다. 중국이 비축하지 않은 물자들은 지원계획에 따라 소련이 중국에 보급중인 목록 중에서 선택하면 됩니다. 그러면 소련이 중국에게 더 보내줄 것입니다.”

 

스탈린이 호치민에 대해 어떠한 의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래도 스탈린은 호치민의 요청들 가운데 한 가지는 확실하게 들어주었다. 1950130일 스탈린은 호치민의 베트남민주공화국을 베트남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는 공식 발표를 했다.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남을 공식적인 국가로 인정한 것이다. 호치민과 스탈린은 1952년에 다시 한 번 만났다. 당시 두 정상 사이에 회담이 열렸을 때 스탈린은 회의실의 의자 두 개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호치민 동지, 여기 의자 두 개가 있소. 하나는 민족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요. 동지는 어디에 않고 싶소?”

 

여기에 대한 호치민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스탈린 동지 나는 두 의자에 다 앉고 싶습니다.”

 

이 내용은 윌리엄 J. 듀이커가 쓴 호치민 평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대목에선 호치민이 실리적인 외교 정책과 국제관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국제관계와 외교를 상당히 베트남의 현실에 맞게 이용하고자 노력을 다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호치민은 스탈린 뿐만 아니라 중국의 마오쩌둥과의 관계에서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원을 얻기 위해 상당히 실리적인 태도를 보였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1950년에 스탈린으로부터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호치민은 상당히 실리적인 외교를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스탈린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자료

 

디엔비엔푸, 보 응우옌 잡, 강범두(), 길찾기, 2019

 

왜 호찌민인가?, 송필경, 에녹스, 2013

 

호치민 평전, 찰스 펜, 김기태(), 자인, 2001

 

호치민 평전, 윌리엄J.듀이커, 정영목(역), 푸른숲, 2003

 

프랑스 공산당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글루스 파리13구 블로그, 2020528일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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