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대패한 프랑스는 제네바 협정에 따라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나게 됐다. 프랑스가 물러나자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 분단되었다. 북베트남에는 프랑스에 맞서 독립을 쟁취했던 호치민이 이끄는 공산당 정부가, 남쪽에는 1940년대 후반 프랑스가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선포했던 바오다이가 이끄는 베트남국이 유지됐다. 이 남북분단에는 결정적인 한 가지의 전제 조건이 붙었었다. 그것이 바로 2년 이내에 남북전역에서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 때부터 반공주의에 빠져 베트남 문제에 개입을 해왔던 미국은 당연히 이 조항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고, 당연히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군사기지를 만들고자 했다. 이렇게 해서 미국이 내세운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자 부패한 독재자인 응오딘지엠(Ngo Dinh Diem)이었다.

 

응오딘지엠은 식민지 시절 고위 공무원직을 보냈던, 전형적인 반공주의 성향의 가톨릭 신자였다. 반공민족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던 그는 프랑스가 식민 지배를 하기 위해 일으킨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남을 떠나 유럽과 미국에서 살았던 인물로, 출신 성분이나 정치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반공 독재자 이승만을 상당히 닮은 인물이었다.

 

1950년대 초 미국에 정착했던 디엠은 미국 뉴저지의 가톨릭 신학교에서 몇 달을 보낸 뒤 자신의 동포를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해야 한다.”는 메시아적인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끝나가던 1954년 응오딘지엠은 베트남으로 귀국했는데, 당시 프랑스의 괴뢰 황제였던 바오다이는 제네바 협정이 타결되기 2주일 전 응오딘지엠을 베트남국의 수상으로 임명했다.

 

19548월 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기본 정책 구상은 바오다이를 통한 해결응오딘지엠에 대한 해결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물론 1954년 베트남에 귀국했던 응오딘지엠의 권력은 미약했다. 일단 군권은 디엠에 반대하는 친프랑스 집단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갱 집단인 빈쑤옌(Binh Xuyen)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친프랑스적인 호아하오(Hoa Hao)와 까오다이(Cao Dai) 교파들도 그에 대항하는 조직이었다. 비록 아직까진 프랑스가 만들어낸 토착 지배세력의 권력이 강했지만, 미국이 선택한 것은 토착 지배세력의 중심이 아닌 반공 민족주의적 관료계급인 응오딘지엠이었다. 그는 CIA 요원 에드워드 랜스데일의 지원을 받으며 즉각 반대파를 분쇄하고 베트민에 가담했던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으며, 베트민이 총선을 실시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위원회 사무실들을 강제로 폐쇄했다.

 

19554월 응오딘지엠의 강력한 지지자인 미국의 맨스필드(Mansfield)는 상원 연설에서 바오다이를 응오딘지엠으로 대체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미국의 계획대로 디엠은 바오다이를 중심으로 한 군주제를 그대로 유지할지, 혹은 디엠의 새로운 정부를 인정할지를 국민투표를 통해 결정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551023일 남베트남 전역에서 국민투표가 실행됐다. 결과는 득표율 98.2%의 지지를 얻은 응오딘지엠의 승리였다. 개표결과 찬성이 5721,735, 반대가 63,017표 그리고 무효표가 44,105표였다. 물론 이 투표 자체는 아이러니 하게도 부정선거였다.

 

이 시기 응오딘지엠을 후원하는 미국의 엘리트 계층은 꽤나 많았다. 그들은 베트남의 미국 친구들(American Friends of Vietnam)’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열렬한 디엠 지지파로는 프랜시스 스펠먼 추기경, 조지프 케네디(케네디 대통령의 아버지), 상원 의원 마이크 맨스필드, 휴버트 험프리, F.케네디 등이 있었다. 이들은 강경 보수 성향으로 반공주의자인 지엠이 입맛에 맞았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자 민족주의자인 그가 대세를 뒤집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와 더불어 응오딘지엠은 1954년부터 이른바 반부패운동을 전개했었다. 물론 이 반부패운동은 말이 좋아 반부패운동이지, 그 중심에는 관료들을 통제함으로써 디엠 자신의 권력기반을 강화한다는 목표가 자리잡고 있었다. 1955년 말 응오딘지엠은 이른바 4대 악덕운동으로 도박, 알콜, 마약중동 그리고 성매매의 추방을 추진했었는데, 이것은 대중들에게 정권의 정당성을 선전할 기회로 작용했으며, 이것 또한 정치 경제적 계산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의 핵심은 본인의 반대세력인 빈쑤옌의 경제적 기반을 파괴하는 데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친프랑스 빈쑤옌이 몰락하면서 이 4대운동 또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쉽게 말해 응오딘지엠은 이 프로그램을 본인의 권력 강화차원에서 이용한 것이지,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 한 것이 절대 아니었다.

 

또한 응오딘지엠이 까오다이나 호아하오 그리고 빈쑤옌 같은 친프랑스적 토착 조직에 대항하였던 것 또한 프랑스 제국주의에 부역했던 세력이나 인사를 청산하고 숙청하기 위한 작업이 아니었다. 물론 형식상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프랑스가 물러나면서 남은 토착 지배층의 기반이 응오딘지엠의 숙청으로 사라지기도 했지만, 흡수되어 남베트남 정부의 지지기반을 형성했다. 그러나 응오딘지엠은 권력을 장악한 이후 구세력 척결 후 등용한 인물들은 월남한 가톨릭 세력과 친프랑스 매판세력 그리고 지주세력이었다. 또한 남베트남의 군부는 죄다 프랑스군 사관학교를 나온 매국노들이었다. 그래서 민주화운동가이자 베트남 전쟁을 연구했던 리영희 교수는 남베트남 군대에는 육군 중령 1명 외에는 죄다 친불친미 매국노들이라고 표현했을 정도였다.

 

19551023일 투표를 통해 옹오딘지엠은 남베트남의 대통령이 되었고, 이른바 베트남 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을 선포했다. 그리고 이후 응오딘지엠 정권은 제네바 협정에서 약속했던 총선거를 일방적으로 파기했고, 식민지 시절 일본 제국주의와 프랑스에 맞서 싸웠던 항불항일조직인 베트민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들을 공산주의자들로 몰아 구금하고 처형하는 반인륜적 범죄를 미국의 지원 아래 저질렀다. 따라서 응오딘지엠은 미제국주의자들의 하수인이었으며, 반동적 지배계급을 대변하였으며 당연히 혁명으로 타도되어야할 반동이었다. 보 응우옌 잡 장군이 1964년에 썼던 글의 일부를 인용하면서 마치겠다.

 

미제국주의자들은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뻔뻔스럽게도 제네바 협정을 파기하고 남베트남을 그들의 새로운 식민지와 군사 기지로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를 영원히 양분하는 음모를 꾸몄다. 정전협정 조인이래, 남쪽에서는 침략자에 의해 야기된 전쟁이 결코 그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미국의 허수아비, 응오딘지엠 정부는 파시스트적 독재 법률로 테러와 집단학살 정책을 추구해 왔다. 그 지도자들은 수백 번의 소탕작전을 감행하고, 말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으며, 적에 대항하고, 독립, 민주주의, 국가 통일과 생존권을 주장하는 정치적 투쟁에 가담한 비무장 동포들을 체포하고 죽였다. 지난 몇 년간, 미제국주의자들은 군 인사와 전투부대를 유입시키면서 남베트남에 공공연한 간섭을 자행했다. 그들은 수만 톤의 무기를 들여왔고, 수십억 달러를 지출했다. 그들은 여러 나라의 해방 운동을 억압하기 위해, 남베트남을 그들이 특별한 전쟁이라 부르는 이론을 시험하기 위한 전장으로 사용하면서 선언되지 않은 전쟁에 불을 지폈다.”

 

참고자료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마이클 매클리어, 유경찬(), 을유문화사, 2002

 

호치민 평전, 윌리엄J.듀이커, 정영목(), 푸른숲, 2003

 

베트남과 한국의 반공독재국가형성사, 윤충로, 선인, 2005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 들녘, 2015

 

디엔비엔푸, 보 응우옌 잡, 강범두(), 길찾기,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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