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 내전은 20세기 역사에 있어 최악의 내전이자국제분쟁이었다서로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와 혐오민간인 학살인종청소부녀자들과 아이들에 대한 인권 유린 등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던 나치들이 저질렀던 만행들이 이 내전이 지속되는 와중에 일어났다유고슬라비아의 영웅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사망한 이후 국가가 사분오열된 유고슬라비아는 종족분쟁과 소수민족 대립의 무서움을 보여주는 사태였다.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과정)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과 인종청소는 참으로 추악하고도 잔인했다그러나 이 추악하고 잔혹한 내전에 이른바 NATO군의 이름으로 군대와 대규모의 항공력을 투입했던 나라가 있다그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다이 글을 쓰는 이유는 간단하다그것은 이 추악한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생각보다 안 알려졌다는 점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이라크 전쟁 이전에 미국이 개입했던 또 다른 전쟁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도데체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어떤 일을 했는가따라서 이 글에서 필자는 유고슬라비아 내전 그 자체 보단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미군의 개입을 중심으로 보고자 한다.

(1990년대 당시 한국 언론에도 보도되었던 유고슬라비아의 상황)

 

지금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 나라 유고슬라비아는 현재의 세르비아크로아티아마케도니아몬테네그로슬로베니아보스니아를 합친 6개의 연방으로 이루어진 국가였다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았던 유고슬라비아 연방은 공산주의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Josip Broz Tito)가 4년간의 파르티잔(빨치산투쟁을 전개했었다동쪽에서 진격하던 소련군과 연합하여 유고슬라비아를 해방시킨 티토는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가 되었다냉전 초기 스탈린과 대립하던 티토는 동유럽 국가 중에 유일하게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가입하지 않은 나라가 되었고이른바 자주노선을 택하면서 미국과 소련 그리고 제3세계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했었다심지어 사회주의권에서 해외여행의 자율화를 최초로 성공시킨 나라였다.

 

그러나 1980년 티토가 사망한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점차 힘을 잃게 되었고냉전의 종식과 더불어 연방이 해체가 되었고티토 사후 표출된 민족갈등 그리고 종족 갈등은 내전으로 이어졌다물론 이것이 내전으로 이어지고 연방국가로 나뉘게 된 것은 유고슬라비아의 인구 구성이 중국의 한족(중국 인구의 94% 이상)이나 베트남의 비엣족(킨족베트남 인구의 87%이상)과는 달리 가장 많은 종족이 40% 안팎이었던 점도 많이 작용했다.(이는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소수민족과 다수종족의 인구 비율과 비슷하다.) 


1992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던 보스니아에서 내전이 발발했다. 3년 동안 지속되었던 이 보스니아 내전에서 세르비아측은 차마 입으로 표현하기도 힘든 학살과 범죄 그리고 인종청소를 자행했다당시 미국은 평화유지군(사실상 NATO)의 일원으로 대략 2만 명이 넘는 병력을 파병했다이것은 평화유지군으로 들어갔던 미지상군을 뜻한다. 1993년 4월 미국과 NATO 소속의 항공기들은 이른바 작전명 디나이플라이트(Deny Flight)로 알려지게 되는 작전에서 보스니아에 비행금지구역을 강제로 적용했다그리고 그해 8월엔 사라예보(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된 그 도시가 맞다.)를 포위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인들을 응징하기 위해 공중폭격을 실시하겠다는 위협을 가했다.

(보스니아 내전 당시 평화 유지군으로 파견된 미군)

 

1994년 4월 미군 항공기들은 세르비아측의 목표물들에 산발적인 항공기 타격을 가했지만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1995년 8월 28일 세르비아측에서 사라예보 시장에 박격포 공격을 가하자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이른바 딜리버럿포스 작전(Operation Deliberate Force)을 나섰다이 작전은 17일간 전개되었다. 400대 이상의 나토군 항공기가 항시 대기했고, 5개국 18개 비행장과 최대 3척의 항공모함에서 3,500회 이상의 비행이 이루어졌으며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NATO(사실상 미군이라 봐야함항공기는 1,026발의 폭탄과 미사일을 48개의 표적에 발사했다.

(코소보 내전 당시 투입된 미군)


(F-15 전투기,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군에게 맹폭을 가했던 항공기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보스니아에 개입하면서 RQ-1 프레데테 무인 항공기(UAV)도 실전에 투입했다알바니아의 자데르에 있는 부대가 보스니아로 날아가는 프레데테를 조종했고총 15회나 출격시켰다물론 이것이 효과가 크기 않았기에 미국은 공습을 지속하는 쪽으로 나아갔다당시 미군의 교전 방식은 단순했다세르비아측을 섬멸하기 위해 들어간 미군은 세르비아측 저격수가 사격을 가하면 바로 공군기를 출동시켜 저격수가 있는 건물 자체를 무너뜨려 버렸다특히나 F-16혹은 F-18 공군기가 세르비아군 거점에다 무차별 맹폭을 가했었다아무튼 내전은 전황이 불리해진 세르비아가 협상 테이블로 나오면서 종결되었다.

(B-2B 스텔스 폭격기, 한 대당 약 2조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비용을 자랑하는 이 스텔스기는 코소보 내전 당시 미국이 투입했던 최강의 전력이었다. 심지어 이 기종은 유럽 인근이 아닌 미국 본토에서 출격하여 유고를 폭격하고 다시 미국 본토로 복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인 1998내전이 다시 발발했다그 전쟁이 바로 코소보 내전이었다코소보 지역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미국은 1999년 3월 24일부터 6월 10일까지 작전을 전개했다이 작전은 78일간 전개되었고총 829대의 항공기가 동원되었으며, 3만 8,000회 이상의 비행을 실시했었다코소보 내전 동안 미군을 위시한 NATO군은 세르비아의 목표물에 2만 3,600발 이상의 폭탄을 사용했다미군의 첫 공격에만 미국 수상함 4척과 미국 잠수함 2영국 잠수함 1척이 나섰고, 214대의 미국 항공기와 130대의 연합군 항공기(밀리터리 전문가 이세환에 따르면 총 400대의 NATO 항공기)가 100여 발의 레이저 유도 폭탄을 투하했었다.

 

당시 미군이 투입한 항공기 종류는 다음과 같다전투기 F-16, 전투기 F-15, F-117, B-52, B-1B 그리고 B-2A였다특히나 스텔스 폭격기인 B-2A의 경우 폭격 작전에서 미국 본토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발진했다중간에 급유기로부터 기름을 지원받으며 유고슬라비아까지 가서 폭격임무를 마친 뒤 미국 본토로 귀국하는 기록을 보여주었다말 그대로 미국은 코소보 내전에서 매우 비싼 항공기를 투입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코소보 내전도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던 밀로셰비치가 협상 테이블에 나오면서 끝이났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약 3년간 진행된 보스니아 내전과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진행된 코소보 내전에서 벌어진 인종청소와 전쟁범죄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벌어진 전쟁보다 추악하고도 잔인했다물론 보스니아 내전 당시 세르비아나 신유고연방의 밀로셰비치 등이 저지른 악행들은 차마 입으로 표현하기 힘든 전쟁범죄였다그러나 미국의 민중사학자 하워드 진이 주장하듯이인종청소를 자행한 이들과는 별개로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미국이 진행한 폭격 또한 무수히 많은 민간인 사망자를 만들었다.

(코소보 내전 당시 미군의 맹폭격을 받은 베오그라드)

 

이러한 점에서 미국의 공중폭격 또한 한국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에서의 미군 폭격처럼 진보적인 지식인들이나 사학자들에 의해 비판받고 있다또한 코소보 내전 당시 대다수의 러시아인들은 미국을 강력히 비판했었다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폭격에 대해 러시아인의 96%가 반인륜 범죄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0년 조사에서는 81%거 미국의 정책을 반러시아적이라고 응답했을 정도였다대부분의 응답자들은 미국이 러시아 국경지역에 역으로 철의 장막을” 치고 있다고 인식하기도 했다따라서 유고슬라비아 내전에서 벌어진 참상과 더불어 NATO군 형태로 개입하여 마찬가지로 무수히 많은 인명피해를 초래한 미국 또한 비판받아 마땅하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참고문헌

 

궁극의 군대토머스 G. 맨켄김수빈(), 미지북스, 2018

 

미국 민중사 II하워드 진유강은(), 이후, 2008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I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공저), 이광일(역)들녘, 2015

 

좌파 세계사닐 포크너이윤정(), 엑스오북스, 2016

 

하워드 진아거인물과사상사, 2020

 

유고 내전 총합본샤를TV, 2020년 7월 21일자 유튜브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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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필립 쇼트의 저작 마오쩌둥에 나오는 내용을 퍼온 겁니다. 읽던 도중 흥미롭게 읽어서 올려봅니다.)

 

“1968820일 밤,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해 프라하의 봄을 압살하고 체코의 개혁파 공산 정부를 무너뜨렸다. 침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은 어디서든 사회주의 체제가 위협당할 때는 소비에트 블록의 모든 국가들에게 이를 방어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이라고 불렸는데 공식적으로 유럽 지역에 한정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오가 보기에 이것은 소련이 중국을 침공할 수 있는 근거였다. 이듬해 봄, 마오는 선수를 치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수년 동안 중국과 소련 국경선 부근에서 우발적으로 작은 충돌이 계속 일어났다. 하지만 196932일에 발생한 무력 충돌은 사전에 철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 300명의 중국 병사가 흰색 위장복을 입고 어둠을 틈타 얼어붙은 우수리강을 건너 전바오섬에 도착했다. 이 섬의 러시아 이름은 다민스키섬이었다. 이 섬은 소련의 시베리아 지역 주요 도시인 하바롭스크에서 남쪽으로 240km 지점에 있었으며, 소련과 중국 간에 소유권 분쟁이 있었다. 중국 병사들은 각자 눈 속에 개인 참호를 파고 들어가 매복 공격을 준비했다.

 

다음 날 아침 중국은 이 섬을 향해 약간의 병사를 이동시켰다. 소련의 반응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다. 중국군의 이동을 확인한 소련군은 정찰대를 보내 중국 병사들의 이동을 저지하게 했고, 그러자 잠복해 있던 중국 병사들이 일제히 발포했다. 소련은 보충 부대를 투입했고 중국 병사들은 결국 퇴각했다. 이 과정에서 소련 측은 죽거나 부상당한 병력이 30명이 넘었다. 같은 장소에서 2주 뒤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이번에는 규모가 더 컸고 소련은 60, 중국은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세 번째 충돌은 317일에 발생했는데, 이 충돌은 당시에는 공식적으로 발표되지 않았다. 이 충돌에서 소련은 전차와 대포까지 동원했다.

 

마오의 계획은 놀랄 만큼 단순했다. 만일 소련이 중국의 주적이 된다면, “나의 적은 적은 친구라는 원칙에 따라 미국이 중국의 잠재적 동맹이 될 것이다. 비록 현재 미국이 중국의 또 다른 동맹인 베트남과 중국 남부 국경선 근처에서 잔인하고 파괴적인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지만, 어쨌든 마오의 계획은 그러했다.

 

전바오섬 충돌은 새로 당선된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에게 중국의 외교 정책 우선순위가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납득시키려는 중국의 장기적 노력의 첫걸음이었다. 마오의 의도를 몰랐던 소련은 군사적 압력을 강화하여 중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오히려 마오가 노리는 바대로 소련과 중국의 충돌이 더 격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해 봄과 여름에 걸쳐 중소 국경 분쟁은 몇 배로 크게 증가했다. 모스크바는 바르샤바조약군의 개입할 수 있으며 핵무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고 강력하게 암시했다(이는 1958년 타이완 해협 사건 때 미국이 핵무기 공격을 내세워 위협했던 것과 똑같은 행동이었다). 소련 정부는 몽골 지역에서 대규모로 군비 증강을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국방 예산을 30% 늘렸다. 8월에는 민간 방위 계획이 베이징과 다른 주요 도시에서 시작되었고 수백만 명의 주민이 동원되어 방공호를 팠다. 핵 공격에 대비하려는 것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치적 의도를 충분히 드러낸 마오는 그리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를 적절히 보인 다음, 9월에 저우언라이와 소련 총리 알렉세이 코시긴(Aleksei Kosygin)이 회담을 여는 데 동의했다. 이 회담은 마치 과거 중국이 오랑캐들을 성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시절을 상기시키듯, 베이징 공항에서 진행되었다. 두 사람은 국경선을 현 상태로 유지하기로 하고, 국경 협상을 속개하며 더는 군사충돌이 없도록 하자는 데 합의했다. 이리하여 위기가 종식되었다.”

 

출처 : 마오쩌둥 2 p.418~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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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625일 새벽 440,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마오는 전쟁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6주 전 북한의 최고 지도자 김일성이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으로 와서, 모스크바가 한반도를 통일하기 위한, 군사 공격을 승인했다고 말했던 것이다. 항상 책략이 비상했던 스탈린은 북한의 군사 작전에 한 가지 전제를 달았다. 먼저 마오의 찬성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이렇게 다짐했다. “만일 당신이 혼쭐이 나더라도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것이고.” 이는 북한이 난관에 봉착할 경우 구원해줄 사람은 바로 마오쩌둥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김일성은 스탈린의 이 말을 중국에 알리지 않았다.

 

한국전쟁은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전혀 환영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미국의 대응을 도저히 예측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당시 중국 정부는 타이완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의 이야기를 의심한 마오는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 북한의 공격 개시를 정말로 승인했는지 확인했다. 스탈린은 마오에게 사실을 확인해주면서도 마오가 최종적으로 결정해야 할 문제라는 점을 암시했다. 스탈린의 답신은 다음과 같았다. 최종 결정은 중국과 조선의 동지들이 함께내려야 함이 마땅하다. 만일 중국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결정은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마오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과거 만주 지역에서 조선인 10만 명이 중극 병사와 함께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다. 그런데 어떻게 김일성이 자신의 땅을 해방하겠다고 하는 것을 말릴 수 있겠는가? 북한은 중국의 동의를 받아냈다.

 

출처 : 마오쩌둥 2 p.13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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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베트남 전쟁이 공산주의 세력의 통일로 끝난 이후 당연히 베트남은 전후처리 과정을 거쳤다. 남베트남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난 이후 통일을 이룬 북베트남 정부는 과거 남베트남에 협력했던 이들에 대한 재교육 및 청산 작업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고, 학살당했다는 주장들이 과거 대한민국에서 정훈교육이나 반공교육 차원에서 많이 강조되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는 이러한 인권도 없고, 자유도 없다는 식으로 선전하는 차원에서 이용된 것이다. 물론 그 시기 대한민국 사회가 인식하는 현실 사회주의권은 말 그대로 1978년에 나온 똘이장군 수준의 상상이었다는 점에서 분명히 걸러야할 점이 있지만 말이다.

(보트피플들, 베트남 전쟁 이후 남베트남에 협력하던 이들은 이렇게 도망쳤다. 마치 쿠바혁명 이후 카스트로를 피해서 미국으로 망명한 공화당 지지자들 처럼 말이다.)

 

이러한 영향 때문인지는 몰라도, 베트남 전쟁 이후 전후처리 과정에서 수백만 즉 200만 혹은 그 이상으로 죽었다는 일종의 유언비어가 퍼졌고, 과거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으로 참전하거나 남베트남에서 반독재운동 혹은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이 토사구팽 당했다는 식의 주장들이 많이 퍼졌었다. 이러한 주장들은 정말 사실인 것일까?

 

우선 수백만이 학살당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이러한 루머의 출처의 근원을 찾는 건 많이 힘든 일이지만, 확실한건 현재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루머가 일부 티비 조선을 포함한 곳에서 각본대로 읽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하는 것처럼 베트남 전쟁 이후 통일 베트남의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얘기 또한 상당히 과장되고 부풀려져서 알려졌다. 대표적으로 소련 시절 굴라그에 대한 얘기가 그러하다. 냉전시기 소련의 굴라그에 대해 엄청난 루머를 퍼뜨렸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최소 10배 이상의 수감자 수치를 과장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1980년대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문서고가 개방이 되면서 그것이 매우 과장되었음이 드러났다.

(1918년부터 1953년까지 소련에서 선고된 사형선고와 감옥에 수감된 정치범의 숫자. 출처는 정정진 교수의 저서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p.200쪽이다.)

 

솔제니친이 쓴 <수용소 군도>라는 책에 따르면 수천 만 명의 죄수가 수감되었던 것처럼, 주장을 하지만 실제로 수감되었던 이의 숫자는 그것보다 한참 아래였다. 또한 영국의 반공주의 성향의 학자 로버트 콘퀘스트는 1937~1939년 사이 900만 명의 정치범이 감금되었고 이중 300만 명이 죽었다고 주장했었다. 물론 콘퀘스트의 자료에 따르면 그 이후에 거친 수감자는 그러나 더 많은 셈이다. 소련의 젬스코프 같은 학자가 문서고를 토대로 연구를 진행하면서 그 당시 반()혁명활동 판결을 받은 사람이나 살인, 강간 등의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이가 보내지는 노동수용소는 53, 규율이 느슨했던 노동이주지는 425개가 있었고, 여기에 토지가 몰수된 부농이 보내진 개방 특별지역이 있었다. 이곳 전부를 합해서 약 200만 명이 수용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물론 이 굴라그라는 곳이 단순히 감옥이 아닌 인근마을과 굴라그 수용소를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말이다.

 

더 와 닿지 않는다면, 이걸 예시로 들어볼 수도 있다. 마리오 소사는 "1996년 역사상 가장 많은 550만 명이 미국의 형벌체계 하에 있다"1997AP 통신의 기사를 인용하며 전쟁 직전의 소련과 평화 시기의 미국을 비교한다. 이 숫자는 미국 성인 인구의 2.8%에 상당하는 규모다. 형벌체계 하에 있다는 것은 교도소 수감자와는 다소 다른 의미다. 여기에는 보호관찰까지 포함된다. 그렇다고는 해도 2007년 말 기준 미국 법무부 통계는 730만 명이 교도소 수감, 보호관찰 등의 형태로 교정기관의 관리대상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7년 말 기준 미국 성인의 3.2%가 수감되어 있거나 지역 공권력의 감시 하에 있다.

 

자세한 자료는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45981?no=245981#0DKU

 

지금까지 소련에 존재했던 굴라그에 대한 자료를 길게 이야기 했다. 소련의 사례를 예시로 든 이유는 일각에서 공산주의 정권의 학살 혹은 인권유린으로 알려진 사건들을 지나치게 부풀리거나 과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트남 전쟁 이후 통일 베트남 정권이 단행했던 재교육 수용소 같은 경우에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많이 부풀려지거나 과장되는 이유는 확실하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상당한 옹호력을 호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에서 폴포트의 학살을 다뤘던 영화 킬링필드가 강조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재교육 과정을 거치고 있는 사람들)

 

베트남 전쟁 이후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내용은 생각보다 자세하게 연구된 주제는 아닌 것 같다. 미국의 영화 혹은 다큐멘터리 감독은 켄 번즈(Ken Burns)2017년 거의 20시간 가까이나 되는 러닝타임의 베트남 전쟁 10부작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거의 몇 년 동안 모은 많은 이들의 인터뷰와 자료를 토대로 제작되었고, 북베트남군, 남베트남군, 미군, 반전운동가 그 외의 다양한 사람들을 인터뷰해서 만들어졌기에 상당히 신빙성 있는 다큐멘터리다. 다큐멘터리의 마지막 화인 10화에서는 잠시나마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결국 많은 이가 두려워하던 피의 대학살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베트남의 시골에서는 수백 명 혹은 수천 명의 사람이 개인적인 혹은 정치적인 보복차원에서 살해되기도 했습니다. 응우옌반티에우 정권에 가담했던 장군부터 평범한 직원들까지 모두 재교육을 받았습니다. 남베트남군에 입대했던 사람은 3일간만 교육받는다고 했습니다. 장교들은 1달만 출석하라고 했죠.” (PBS 베트남 전쟁 10화중에)

 

남베트남 군장교로 참전했던 한 사람의 증언이 이어진다. 다큐멘터리에서 그가 한 증언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어떤 이들은 짧은 기간 동안 캠핑을 간다고 믿었습니다. 물론 저는 아니었습니다. 저는 7년 반 동안이나 재교육 캠프에 갇혔습니다. 마지막으로 풀려난 100명 중 하나였죠.” (PBS 베트남 전쟁 10화중에)

 

베트남 전쟁 이후 재교육 캠프에 수감된 이들은 짧게는 3일에서 1주일 혹은 1달 길게는 1년에서 3년 아주 길게는 10년 혹은 15년을 갇혔던 이들도 있었다. 최병욱 교수의 <베트남 근현대사>라는 책에는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남베트남 군인 전직 관료 등 잠재적 적대 세력으로 간주되던 100만 명 중 90%나 되는 사람들을 새 조국 건설에 동참시킨 아량은 높이 평가되나, 나머지 10만 명(재교육 대상자)에의 가혹한 처사는 통일 베트남 전권을 두고두고 괴롭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베트남 근현대사(2016년 개정판) p.173쪽을 참고함)

 

캐나다 출신 종군기자로서 호치민의 장례식과 닉슨의 크리스마스 폭격 등을 직접 목격했던 마이클 매클리어는 1980년대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라는 책을 집필했다. 원래는 다큐멘터리로 만들었지만, 1980년대 초에 책으로 출간 됐다. 마이클 매클리어는 자신의 책 저자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재교육 수용소에 대해 쓰고 있다.

 

이 서글픈 전쟁의 성격과 아직도 치유되지 않은 전쟁의 원인은 여전히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다. 종전 후 남아 있던 미국의 전쟁 물자는 도시와 공장 건설에 사용되었고, 구정권은 철저히 숙청되었다. 그러나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150만 명이 노력봉사장에 배치되었으며, 20만 명에 이르는 고위 공무원과 중견 장교들은 재교육장(Re-education Camp)’으로 보내졌다. 즈엉반민(사이공 함락당시 항복문서에 서명한 사람)도 예외는 아니었다.”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p.615 저자 후기)

 

2002년 당시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를 집필한 베트남사 전공 교수인 유인선 교수는 2018년에 책 개정판을 내놓았다. 개정판에선 1986년의 도이모이 정책까지의 내용을 보다 확장했는데, 책에서 그는 재교육 수용소에 대해 언급했다. 내용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과거 사이공 정부의 공무원·군인·사업가 등 최소한 수만 명은 각지에 설치된 재교육수용소에 억류되어 지위에 따라 몇 주일 내지 몇 년을 보내야 했다. 남부의 통합 후 10년이 경과한 1985년에도 수용소의 억류자 수는 수천 명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의 역사(2018년 개정판) p.427을 참고함)

 

일단 이 책에서 나온 재교육 수용소의 수감자에 대한 수치는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확실하게 판단해볼 수 있는 것은 일각에서 얘기하는 수십만이 죽었다거나 수백만이 재교육 수용소에서 죽었다는 루머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일부 억울한 사례가 없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몇몇 루머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많다. 거기다 당시 베트남의 인구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986년 도이머이를 하기 이전까지 베트남의 인구는 남북을 아울러 4,000만 명 안팎이었다. 그런데 통일 이후 공산당 정부가 수백만 명을 처형한 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손해 보는 일이고, 또한 그럴만한 행정체계가 갖추어진 것도 아니었다.

(베트남의 주석이었던 쯔엉던상, 그는 남베트남에서 학생운동을 했고 베트콩 활동을 했던 인물이다.)

 

베트콩이나 학생운동이 대량으로 토사구팽당했다는 루머가 있다. 물론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한 근거가 부족하다. 물론 일부 처형된 사례가 있다고는 한다. 그러나 학생운동가들이나 반정부 종교인들 그리고 베트콩 출신들이 무조건적으로 토사구팽당한 것은 아니다. 2016년 당시 베트남 주석이었던 쯔엉던상의 경우 남베트남에서 학생운동하다가 베트콩이 된 케이스였고, 당시 베트콩의 지도급 위치에 있던 응우옌흐윽토나 호앙반타이 등의 인물들도 공산당 내에서 당적과 지휘를 계속 유지했었다. 이 루머에 대해 정리해보자면 극히 일부의 사례를 확대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베트남 재교육 수용소와 수백만 처형에 대한 루머를 다소 길게 정리했다. 이 글의 핵심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남베트남 패망 후 수백만이 처형당했다는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다.

2. 남베트남 패망 이후 베트콩이나 학생운동가들이 토사구팽 당했다는 것 역시 근거가 없다.

3. 일각에 알려진 재교육 수용소에 대한 루머는 한국의 탈북자들이 티비조선에서 퍼뜨린 것처럼 말 그대로 루머에 가까운 것들이 많다.

4. 남베트남 패망 이후 대규모의 학살을 공산당이 주도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일부 개인적인 보복에서 일어난 사례들은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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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만주는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이었다. 1931 9 18일 일본이 시작한 만주사변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만주에 들어왔고, 1932년이 되었을 당시 일본은 만주 전역을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1920년대부터 만주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했던 중국 공산당은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적극 항전을 주장했다그리고 여기에는 조선인 출신들도 결코 적진 않았다이들의 저항이 결코 작지 않았기에 일본군은 1932년 간도에서 대유격전을 시작했었고일본군의 무자비한 학살이 벌어졌었다.

(민생단 사건 당시 민생단 관련 문서를 불태워 없애는 김일성, 북한에서 만든 상상화인 것 같다.)

 

일단 북한 측 자료에 따르면 이 기간에 일본군에 의해 죽은 이들은 대다수가 농민이었고대략 2만 5,000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이 수치는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분명한건 일본군에 의한 무자비한 대규모 학살이 있었다만주에서의 이러한 경험은 이후 북한에서 <피바다>라는 가극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간도에서 대유격전을 전개했던 일본군은 당시 만주에서 창설한 친일단체인 민생단을 이용했었다민생단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이 조선인을 앞세워 만든 친일단체였다한마디로 일제의 어용단체였던 것이다.

 

1932년 10월 공산 유격대에 있던 송영감이라는 자가 민생단의 일원인 것이 밝혀졌다간첩행위가 들통나 유격대로부터 심문을 받게 된 그는 일본이 부여했던 임무까지 다 털어놓았다이에 따라 동만특위 서기 동장잉은 즉시 송영감 사건의 전말을 옌지·허룽·왕청·훈춘 등 젠다오 4현에 알리고 민생단 색출을 지시했다이것이 바로 민생단 사건의 시작이었다이에 따라 젠다오 전역에는 반민생단투쟁이라는 광풍이 불어 닥쳤다수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희생자가 되었다.

(민생단 사건 당시 중국 공산당 지부의 명령)

 

반민생단투쟁이 가속화되면서 숙청의 범위는 유격대 근거지 내의 일반 조선인들도 확대되었다민생단으로 지목되는 이유는 다양했다그 중에는 너무 터무니 없는 것들도 많았다심지어 일본군이 공산당 유격대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민생단 숙청 사업은 멈추지 않았다일제의 토벌과 동만특위의 민생단 학살로 근거지의 군중 수는 1933년 2만여 명에서 1934년 봄에는 4,000명에서 5,000명 수준으로 급갑하기에 이르렀다반민생단투쟁 당시 중국 공산당에 의해 감옥에 갔었던 한 조선인 유격대 지휘관이 있었다그가 바로 북한의 김일성이다.

 

1912년에 태어난 김일성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던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20살의 나이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던 김일성은 10대 시절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과 레닌의 제국주의론을 탐독했었던 열혈 사회주의 청년이기도 했었다만주사변 이후 만주에 있던 중국공산당은 구국군으로서 항전했는데당시 조선인 당원들도 거기서 활동했다. 1932년 봄 김일성은 안투(安图)에서 구국군 사령부대에 속하는 별동대로서의 조선인 무장대를 조직했다이것이 김일성이 최초로 조직한 항일 유격대였다.

(동북항일연군, 1936년 당시 찍은 동북항일연군 사진이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중국인과 조선인을 민생단 사건 이후 1935년 코민테른 지령에 따라 연합시켰다는 사실이다.)

 

1933년 2월은 김일성은 왕칭(왕청)현의 유격근거지 마춘으로 나아가 부대와 함께 이른바 왕칭유격대에 합류했는데그는 여기서 왕칭유격대대의 정치위원이 되었다여기에는 김일성이 중국인 중학교에 다닌 경력이 힘을 발휘했던 것도 있었던 것 같고실제로도 그러했다그가 왕칭유격대의 정치위원으로 발탁된 것은 1933년 6월이었다또한 3개월 뒤 김일성은 둥닝 전투(둥닝현성 전투라고도 불림)에서 구국군의 스중헝과 스중헝의 부대를 구출하는 전공을 만들었다그 이후 김일성은 중국 최고의 지도자들의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하지만 김일성 또한 반민생단투쟁의 광풍을 피해가지는 못했다김일성 또한 민생단원으로 몰려 정치위원직에서 해임되고 투옥되었었다물론 감옥생활은 길지 않았고단기간에 풀려날 수 있었다김일성이 단기간에 풀려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구국군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기 때문이었다따라서 반민생단투쟁 과정에서 김일성은 억울한 숙청의 희생자가 되지 않았다거기다 사령관 스중헝은 김일성 같은 위대한 인물이 일본의 주구일 리가 없다고 단언했고김일성이 유죄선고를 받으면 자신의 유격대를 이끌고 중국 공산당을 떠나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둥닝전투에서 스중헝을 구출해줬던 김일성은 당연하게도 살아남았고박탈당했던 정치위원직을 회복했다.

 

반민생단투쟁사건으로 조선인 431명이 밀정 혐의를 받고 억울하게 처형됐다반민생단투쟁으로 동만주 한인들의 유격투쟁은 크게 위축되었고그런 가운데 남만주에서는 1933년 기존의 유격대들을 모아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가 건립되었다이 부대의 규모는 최소 300명 정도였고사장은 중국인 양정우참모장은 조선인인 이홍광이었으며부대의 1/3은 조선인들이었다또 동만주에서도 1934년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성립되었으며사장은 조선인인 주진이 맡았으며병력의 2/3는 조선인이었다또한 북만주의 밀산에서도 1934년 밀산유격대와 중국의용군이 통합되어 동북인민혁명군 제4이 편성되었다.

 

1934년 6월 김일성은 동만의 유격대를 통합한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저우바오중의 수녕반일동맹군 그리고 구국군과 함께 나자구 전투에 참가할 때 지휘부의 일원으로 복귀했으며그해 9월에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3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그리고 이 시기는 그가 민생단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게 된 시점이었다이후 김일성은 1935년 2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 제3단으로 편성되어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다그리고 1935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 7차 대회 보고 이후 공산당의 정치노선이 이른바 반파시즘인민전선전술로 바뀌면서 이에 영향을 받았고민생단 사건도 최종적으로 종결되기에 이른다또한 여기서 김일성은 동만주 당의 지도자 웨이정민이 코민테른 중공당 대표부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라 개성적이고 역량있는 공산당 간부로서 주목받고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참고문헌

 

한국의 레지스탕스조한성생각정원, 2013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와다 하루끼남기정(), 창비, 2014

 

한국독립운동사박찬승역사비평사, 2014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브루스 커밍스조행복(), 현실문화,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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