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유행했을때 나온 만화에요. 즐겁게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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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지역에서 패배했지만 적(프랑스군)은 여전히 상황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그들은 디엔비엔푸를 쉽게 점령한 나머지우리가 그곳을 공격할 만큼 강하지 않다고 여겼다집단전술기지가 매우 강력하게 구축된 데다디엔비엔푸와 아군의 후방지역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우리가 병참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베트남 콘툼성, 콘툼성은 베트남 중부고원지대에 있다. 이 지역은 이후 미국이 치른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콩과 미군이 결전이 벌어지는 전쟁터가 된다.)

 

적은 우리가 여러 전선에 걸쳐 공격을 진행중이므로디엔비엔푸에 대한 공격을 주저할 것이고보급의 어려움을 안고 있으므로 조만간 북서지방으로 달아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리고 우리가 일련의 문제를 감수하고 그들을 공격하더라도우리 정규군의 일부를 격멸하고 뚜언자오(Tuần Giáo)와 손라(Son La)를 점령하여 최종적으로 나산(Nà Sản)에 복귀하는 기존의 계획을 이행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안케 전투 당시 베트민군과 교전을 하고 있는 프랑스군과 장갑차)

 

적이 15개 대대를 동원해 1954년 1월 20일부터 제5연합구역 내에 위치한 푸옌(Phú Yên) 남부에 공세를 전개한 것도 동일한 맥락이었다아틀랑트 작전으로 명명된 이공세는 나바르 계획의 전략적 공세로중부의 남쪽지역에 있는 모든 해방구의 점령이 목적이었다적이 우리 해방구를 공격했음에도불구하고5연합구역의 우리 군대는 가장 결연하게 그들의 계획을 이행했다적에 대항하고 우리 후방지역을 엄호하기 위해 후방에 극소수의 부대만 남겨놓고주력은 적이 상대적으로 노출된 전략적 요충지역인 떠이응우옌(Tây Nguyên)을 점령했다.

(전투에서 손실된 프랑스군 탱크, 손실된 탱크가 M4 셔먼인걸로 봐선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것으로 보인다.)

 

공세는 1954년 1월 26일에 시작되었다다음날우리는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지방인 망덴(Măng Đen)구역을 확보했다뒤이어 닥또(Dacto) 초소를 무너뜨리고콘툼성의 모든 북부지역을 해방시켰다. 2월 5우리는 콘툼시를 해방시키고 적을 떠이응우옌 북부에서 밀어내어 9번 국도까지 전진했으며한편으로는 플레이쿠(Pleiku)시를 공격했다적은 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제5연합구역에 대한 공세를 멈춰야 했다그리고 떠이응우옌의 남부에 위치한 일련의 요새와 플레이쿠시에 병력을 증원하여 우리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많은 프랑스 부대들이 중부 라오스와 빙찌티엔에서 철수했다.

(당시 전투에 투입되었던 베트민군)


콘툼의 승리는 동춘 전역에서 거둔 우리 인민과 군의 또 다른 위대한 성공이었다우리는 제5연합구역에서 적의 꽝남성꽝응아이성에 대한 위협을 불식시켰으며떠이응우옌 북부에 16에 달하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해방시켰다우리 해방구는 꽝남과 꽝응아이 해변에서 베트남-라오스 국경선까지 확장되어해방된 라오스의 볼라벤 고원지대와 연결되었다이번 승리는 당중앙위원회 지도 원칙의 가치를 전적으로 입증시켜주었다적은 점점 더 수세로 몰려갔다적은 중부 라오스 중원을 위해 북부 삼각주의 병력을 전환시키고이후에도 라오스 방면과 빙찌티엔에서 떠이응우옌으로 전환시켜야 했다.

(안케 전투 승전 기념 행사, 2015년 베트남에서 열린 행사 같다.)

 

적은 제5연합구역을 공격점령할 목적으로 전투력을 집중시켰으나이제 우리 공세에 맞서기 위해 계획을 중지하는 수밖에 없었다적은 병력을 집중시키기를 원했으나계속 분산을 강요받았다플레이쿠와 떠이응우옌 남부에 있는 일련의 요새들은 프랑스 부대들이 몰려드는 4번째 지역이 되었다떠이응우옌에 대한 아군의 공격은 승세를 타고 1954년 6월까지 계속되었다우리의 대성공 중에는 한국에서 막 돌아온 제100기동연대를 각개격파한 안케의 승리도 포함되었다우리는 안케를 해방시키고 많은 차량무기와 탄약을 노획했다.

 

출처 디엔비엔푸 p.439~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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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킹만 사건 직후, 미국 전투기들이 북베트남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1965년에만 20만 명이 넘는 미군 병사가 남베트남으로 파병됐고, 1966년에는 20만 명이 추가로 파병됐다. 1968년 초에 이르러 남베트남에는 50만 명 이상의 미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고, 미 공군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규모로 폭탄을 투하하고 있었다. 이런 폭격으로 야기된 대규모 재난을 어렴풋이 보여주는 몇 가지 사건이 외부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196565일자 뉴욕타임스에는 사이공발 급보가 실렸다.

 

공산주의자들이 꽝응아이(Quang Ngai)에서 철수하던 지난 월요일, 미군 제트폭격기들은 그들이 퇴각하는 언덕에 맹포격을 가했다. 이 공습으로 많은 베트남인들이 사망했다. 혹자는 5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은 그들이 베트콩 병사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폭격이 이루어진 뒤 네이팜탄, 즉 젤리형 가솔린으로 인한 화상을 입고 베트남의 한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온 사람들 4명 가운데 3명은 마을 부녀자들이었다.”

 

96일에는 또 다른 급보가 사이공발로 도착했다.

 

“815, 사이공 남쪽[동북쪽의 오기] 비엔호아(Bien Hoa) 지방에서 미군 항공기가 불교 사원과 가톨릭교회를 오폭하는 사고가 있었다. 1965년에만 세 번째로 불교 사원이 폭격을 당한 것이다. 같은 지역에 있는 까오다이교 사원 한 곳도 올해에만 두 번의 폭격을 당했다. 또 다른 [동나이 강] 삼각주 지역에는 네이팜탄으로 화상을 입어 두 팔이 떨어져 나가고 눈꺼풀에도 심한 화상을 입어 눈을 감을 수조차 없게 된 여성이 있다. 잘 시간이 되면 가족들이 여자의 머리를 담요로 덮어 준다. 이 여성은 자신을 불구호 만든 공습으로 두 아이를 잃었다. 미국인들은 자기 나라의 공군이 베트남에서 무슨 행위를 하고 있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남베트남에서는 매일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남베트남의 많은 지역이 무차별 포격지대로 포고됐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민간인, 노인, 어린이)은 적으로 간주하며 마음대로 폭탄을 투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베트콩을 숨기고 있다고 추정되는 촌락은 수색 섬멸작전의 대상이 됐다. 군대 갈 나이의 남자들은 살해하고, 가옥은 불태웠으며, 여자와 어린이, 노인들은 난민수용소로 보내버린 것이다. 저너선 셸(Jonathan Schell)벤숙 마을(The Village of Ben Suc)에서 수색 섬멸 작전을 묘사했다. 한 마을을 포위하고 공격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남자 한 명이 총에 맞아 쓰러졌고, 강변에 소풍을 나온 3명이 총격으로 사망했으며, 가옥이 파괴되고 여자와 아이, 노인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을 뒤로 한 채 돼지처럼 떼를 지어 이동했다.

 

중앙정보국은 불사조 작전(Operation Phoenix)’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지하 공산당원이라는 혐의가 있는 남베트남인을 적어도 2만 명이나 비밀리에 재판도 없이 처형했다. 19751월에 한 친정부 분석가는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이렇게 썼다. “불사조 작전으로 많은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 투옥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산당 하부구조의 많은 당원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공개된 국제적십자사의 자료를 보면, 전쟁이 정점에 달했을 때는 65,000명에서 7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구금되어 종종 구타와 고문을 당했던 남베트남 포로수용소에서 미국 측 고문단이 이를 감시하고 때로는 직접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적십자 참관인들은 베트남의 두 주요 포로수용소-푸콕(Phu Quoc)과 퀴논(Qui Nhon)에 있으며 미국 고문단이 머물고 있었다-에서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야만행위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700만 톤의 폭탄이 베트남에 투하됐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과 아시아에 투하된 폭탄 전체의 두 배가 넘는 규모였다. 베트남의 모든 국민에게 거의 200kg짜리 폭탄 하나씩을 안긴 셈이었다. 이 나라에는 거의 2,000만 개의 폭탄 구멍이 생긴 것으로 추산됐다. 게다가 나무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생물을 파괴하기 위해 비행기로 독성 액체를 살포했다. 매사추세츠 주 크기의 지역이 독극물로 뒤덮인 것이다. 베트남 여성들은 기형아를 낳았다고 신고했다. 쥐를 대상으로 동일한 독극물(2,4,5,T[제초제의 일종으로 지방족 산제 중 하나이며 보통 2,4,5-T로 표기한다])을 실험한 예일 대학 생물학자들은 기형 쥐가 태어났다고 보고하면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다를 것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1968316, 미군의 한 중대가 꽝응아이 성의 미라이[My Lai 4 숫자 4는 미라이1, 미라이2 식으로 미군이 작전 편의상 붙인 것이다] 마을에 진입했다. 병사들은 노인과 아이를 안고 있는 부녀자들을 비롯한 주민들을 전부 한 곳으로 집합시켰다. 주민들에게 구덩이를 파라고 명령한 병사들은 구덩이가 완성되자 주민들을 구덩이로 몰아넣고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훗날 열린 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 중위에 대한 재판에서 소총수 제임스 더시(James Dursi)가 증언한 내용이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캘리 중위와 눈물을 흘리는 폴 D. 메들로(Paul D. Meadlo)라는 소총수-아이들을 쏘기 전에 사탕을 먹인 바로 그 병사이다-가 포로들을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캘리 중위가 사격 명령을 내렸는데, 정확한 구절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사격 개시같은 말이었습니다.

 

메들로가 나를 보며 말했습니다. ‘, 왜 안쏘냐?’

 

그는 울고 있었습니다.

 

저는 말했지요. ‘쏠 수가 없어, 난 안 할 거야.’

 

그러자 캘리 중위와 메들로가 구덩이를 향해 총부리를 돌리고 사격을 가했습니다.

 

사람들은 차곡차곡 쓰러졌고, 어머니들은 애들을 감싸 안으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시모어 허시(Seymour Hersh)미라이4(My Lai 4)에서 이렇게 썼다.

 

미국 내의 미라이 사건 조사와 관련해 196911월에 그 황폐한 지역에 도착한 육군 조사단은 세 곳의 집단무덤과 시체로 가득한 구덩이 한 곳을 발견했다. 450에서 500명 정도가 살해되어 그곳에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육군은 이 사건을 그냥 덮어 버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미라이 학살에 관해 들은 론 라이더나워(Ron Ridenhour)라는 병사가 보낸 편지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로널드 해벌리(Ronald Haeberle)라는 육군 사진사가 찍은 학살 장면 사진도 퍼졌다. 당시 급보통신(Dispatch New Servic)이라는 동남아시아의 반전 통신사에서 일하고 있던 시모어 허시는 이를 기사화했다. 19685월 프랑스의 두 간행물에 미라이 학살에 관한 이야기가 실렸는데, 하나는 투쟁중인 남베트남(Sud Vietnam en Lutte)이었고 다른 하나는 파리 평화회담에 참석한 북베트남 대표단이 출간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언론은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미라이 학살로 몇몇 장교가 재판에 회부됐지만 윌리엄 캘리 중위만이 유죄를 판결받았다.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두 차례의 감형을 받았다. 캘리 중위는 결국 3년을 복역한 뒤-닉슨은 정규 교도소가 아니라 가택연금에 처할 것을 주문했다-사면됐다.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그를 옹호했다. 어떤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해 필요했던 그의 행동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또 어떤 이들은 단순히 수많은 잔학행위가 벌어지는 전쟁에서 유독 캘리만 부당하게 본보기로 찍혔다는 느낌 때문에 그를 옹호했던 것 같다. 미라이 학살을 은폐한 총책임자였던 오런 헨더슨(Oran Henderson) 대령은 1971년 초에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단 규모의 부대라면 어떤 부대든 미라이 사건과 비슷한 사건을 어딘가에 감추고 있든 법입니다.” 사실 미라이 학살은 세부적인 사항에서만 독특한 사건이었다. 허시는 한 병사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어느 지방 신문에 실었다.

 

어머니 아버지께

 

오늘 저희는 한 임무를 수행했는데, 저는 제 자신이나 친구들, 아니 제 조국이 전혀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오두막이 보이는 대로 족족 불태워 버린 것입니다! 그곳은 서로 연결된 조그만 농촌 마을이었고 주민들은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저희 부대는 그 사람들의 보잘것없는 물건들을 불태우고 약탈했습니다. 상황을 자세히 설명 드릴게요.

 

이곳의 오두막들은 야자나무 앞으로 지붕을 잇습니다. 집집마다 마른 진흙으로 만든 구덩이가 있습니다.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죠. 일종의 방공호 같은 거에요.

 

그런데 저희 부대 지휘관들은 이 구덩이가 공격용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구덩이가 있는 오두막을 발견하는 즉시 완전히 태워 버리라고 명령을 내리는 거에요.

 

오늘 아침 이 오두막집들 한가운데 헬리콥터 10대가 착륙하면서 잠자리(chooper)’ 한 대당 여섯 명씩 뛰어내렸고, 우리는 땅에 내리자마자 사격을 개시했습니다. 오두막이 보이는 족족 총으로 갈겨 버렸지요.

 

그리고 나서 오두막마다 돌아다니며 불을 지릅니다. 자기들을 갈라놓지 말라고, 남편과 아버지, 아들과 할아버지를 데려가지 말라고 너나할 것 없이 울고 사장하고 싹싹 빕니다. 여자들은 울부짓고 통곡을 합니다.

 

그러고는 우리가 자기들의 집과 개인 소지품, 식량 등을 불태우는 모습을 겁에 질린 채 바라보지요. 맞아요. 우리는 쌀을 전부 태우고 가축도 모조리 쏴 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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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대한민국은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와 반공주의적 군부 지도층이 정치인이 된 세상이었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는다는 정권은 공산주의의 자만 나와도 사회주의의 자만 나와도 검열과 감시를 일상적으로 일삼았다. 이런 군사독재 정권 시기 민주화 운동가들이 겪어야 했던 지적 사상적 암흑기는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을 정도다. 1964년 미국의 통킹만 사건 조작으로 전면화된 베트남 전쟁(Vietnam War)은 당시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는 전쟁이었다. 중국이나 소련 같은 사회주의권 국가들뿐만 아니라 영국이나 프랑스 등과 같은 서방 진영 또한 이 전쟁을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전쟁에 자발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참전한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가 바로 박정희의 한국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와 박정희 군사 정권을 겪던 한국은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 1960년 한국의 국민들은 4.19 혁명으로 이승만을 몰아냈지만, 가난에 허덕였다. 그로부터 1년 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이른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라 하여 경제성장을 주도했고, 이 경제성장 과정에서 황금 빛 엘도라도와 같은 시장을 찾았다. 그 시장이 바로 베트남 전쟁이었다. 이들에게 있어 베트남 전쟁은 돈을 벌 수 있는 기회이자, 국민들에게 반공투쟁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따라서 박정희는 이른바 월남파병을 단행하며 조국을 떠나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는 거룩한 전쟁으로 국민들에게 교육시켰다.

 

1950년 한국전쟁의 경험이 있던 한국사회는 이승만 시절부터 강력한 반공국가였다. 이승만을 이은 박정희 정권은 그 반공주의를 더 구체적으로 체계화시켰다. 반공을 제1의 국시로 삼은 박정희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국제적인 인식과 시각을 국민들의 반공정서를 이용해서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박정희 정권의 행보에 반기를 든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저항적 지식인의 표본이자 민주화운동가인 리영희(李泳禧)였다.

 

베트남 전쟁이 한참이던 1960년대 리영희는 현재 조선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했었다. 영어 실력이 매우 뛰어났던 리영희는 베트남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이 전쟁의 진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한국의 어용언론들이 반공성전으로 미화시키는 것에 반대했고,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목소리와 베트남 전쟁의 역사적 본질을 사실대로 보도하고자 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근무했던 그는 어용언론사에서 베트남 전쟁 취재 및 한국군 파병에 대한 긍정적인 보도를 써 줄 것을 강요당하고 회유를 받았지만, 끝까지 거절했다.

 

1974년 그는 전환시대의 논리라는 책에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작성했다. 그가 집필한 전환시대의 논리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의 독립전쟁이자 민족해방전쟁이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어떻게 해서 1세기에 걸친 베트남 인민의 독립전쟁이자 민족해방전쟁인지를 구체적인 사실관계와 근거를 들어 논증해냈다. 이 책에서 리영희는 베트남 전쟁이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식민지배와 일제의 침략, 프랑스의 재침략 그리고 미국의 침략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어떻게 해서 미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인지 밝혀냈다. 1964년 미국이 베트남 전쟁 참전 구실로 내세웠던 통킹만 사건이 사실은 미국의 조작극이었다는 사실과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명분아래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공화국(Republic of Vietnam)이 사실은 베트남 식민지 세력의 잔재라는 사실도 아주 구체적인 증거를 통해 입증했다. 따라서 리영희는 박정희 정권이 참전한 베트남 전쟁은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서방 연합국의 침략전쟁이며, 이들이 부도덕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입증해냈다. 리영희는 호치민이 한 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살아왔고, 당시 호치민이 치르고 있던 베트남 전쟁 또한 미국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투쟁이라고 주장했다. 무엇보다 지적 암흑기이던 시대 이런 사실을 주장하면 처벌받고 빨갱이로 몰릴 수 있던 시대에 이런 역사적 사실을 얘기한 인물이 바로 리영희였다.

 

전환시대의 논리에 나온 베트남 전쟁의 진실은 1970년대와 1980년대 당시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전환을 선물해주었다.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리영희가 베트남 전쟁을 통해 입증한 사실은 박정희 군사정권에서 가르쳐온 반공주의가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많은 이들에게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또한 그가 입증해낸 베트남 전쟁의 진실은 지금까지도 변함없는 사실로서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고 있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 리영희가 입증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은 지금 생각해봐도 참으로 훌륭한 일이고 대단한 업적이다. 그는 베트남 전쟁을 통해 반공의 논리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기만적인지를 증명해냈다. 물론 이걸 두려워한 박정희 정부는 1975년 베트남 전쟁의 종결과 더불어 그를 긴급조치 9호 위반 즉 반공법 위반으로 감옥에 가두었지만 말이다. 그가 제시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시각은 수많은 이들에게 철학전 전환 즉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선물해주었다. 그리고 그가 가진 시각은 베트남 전쟁의 명백한 진실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이들은 반공주의자들 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리영희 선생의 베트남 전쟁사는 새로운 전환점을 제시해준 위대한 흐름이었고,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었다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전환시대의 논리에 있는 내용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미국이 월남 내란을 월맹과 공산주의자의 원조·지령·사주에 의해서 시작된 침략이라는 명분으로 전면적인 군사개입을 하기까지의 베트남 정세는 대체로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한마디로 그것은 프랑스 제국주의·식민주의에 반대해 싸운 베트남 인민의 80년의 투쟁과 반민중적 권력에 대한 민중의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고려돼야 할 전쟁이다.”

 

출처 : 전환시대의 논리 p.3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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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LG트윈타워에서 예고도 없이 대량 해고 당한 청소 노동자들과 연대투쟁했습니다. 대기업 LG가 오랜 기간 동안 고용했던 청소 노동자들을 이유도 없이 해고한 것에 대해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에 이들의 복직을 위해 연대했습니다. 한동안 코로나 시국이고, 집회도 제한되는 상황에서 우리 청년학생들이 모여서 연대투쟁을 했습니다. 코로나 방역도 중요하지만, 노동자들의 삶과 생계 또한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들을 복직시키기 위한 투쟁은 계속되야 합니다.

 

오랜만에 연대투쟁했습니다. 여러 뜻 있는 동지들과 학생들이 청소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해 지금도 여의도에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복직하는 날 까지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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