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킹만 사건 직후, 미국 전투기들이 북베트남을 폭격하기 시작했다. 1965년에만 20만 명이 넘는 미군 병사가 남베트남으로 파병됐고, 1966년에는 20만 명이 추가로 파병됐다. 1968년 초에 이르러 남베트남에는 50만 명 이상의 미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고, 미 공군은 역사상 전례가 없는 규모로 폭탄을 투하하고 있었다. 이런 폭격으로 야기된 대규모 재난을 어렴풋이 보여주는 몇 가지 사건이 외부 세계에 알려지게 됐다. 196565일자 뉴욕타임스에는 사이공발 급보가 실렸다.

 

공산주의자들이 꽝응아이(Quang Ngai)에서 철수하던 지난 월요일, 미군 제트폭격기들은 그들이 퇴각하는 언덕에 맹포격을 가했다. 이 공습으로 많은 베트남인들이 사망했다. 혹자는 5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은 그들이 베트콩 병사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폭격이 이루어진 뒤 네이팜탄, 즉 젤리형 가솔린으로 인한 화상을 입고 베트남의 한 병원에 치료를 받으러온 사람들 4명 가운데 3명은 마을 부녀자들이었다.”

 

96일에는 또 다른 급보가 사이공발로 도착했다.

 

“815, 사이공 남쪽[동북쪽의 오기] 비엔호아(Bien Hoa) 지방에서 미군 항공기가 불교 사원과 가톨릭교회를 오폭하는 사고가 있었다. 1965년에만 세 번째로 불교 사원이 폭격을 당한 것이다. 같은 지역에 있는 까오다이교 사원 한 곳도 올해에만 두 번의 폭격을 당했다. 또 다른 [동나이 강] 삼각주 지역에는 네이팜탄으로 화상을 입어 두 팔이 떨어져 나가고 눈꺼풀에도 심한 화상을 입어 눈을 감을 수조차 없게 된 여성이 있다. 잘 시간이 되면 가족들이 여자의 머리를 담요로 덮어 준다. 이 여성은 자신을 불구호 만든 공습으로 두 아이를 잃었다. 미국인들은 자기 나라의 공군이 베트남에서 무슨 행위를 하고 있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남베트남에서는 매일 무고한 민간인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남베트남의 많은 지역이 무차별 포격지대로 포고됐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 남아 있는 모든 사람(민간인, 노인, 어린이)은 적으로 간주하며 마음대로 폭탄을 투하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베트콩을 숨기고 있다고 추정되는 촌락은 수색 섬멸작전의 대상이 됐다. 군대 갈 나이의 남자들은 살해하고, 가옥은 불태웠으며, 여자와 어린이, 노인들은 난민수용소로 보내버린 것이다. 저너선 셸(Jonathan Schell)벤숙 마을(The Village of Ben Suc)에서 수색 섬멸 작전을 묘사했다. 한 마을을 포위하고 공격했는데, 그 과정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남자 한 명이 총에 맞아 쓰러졌고, 강변에 소풍을 나온 3명이 총격으로 사망했으며, 가옥이 파괴되고 여자와 아이, 노인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집을 뒤로 한 채 돼지처럼 떼를 지어 이동했다.

 

중앙정보국은 불사조 작전(Operation Phoenix)’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지하 공산당원이라는 혐의가 있는 남베트남인을 적어도 2만 명이나 비밀리에 재판도 없이 처형했다. 19751월에 한 친정부 분석가는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이렇게 썼다. “불사조 작전으로 많은 무고한 민간인을 살해, 투옥한 것은 사실이지만, 공산당 하부구조의 많은 당원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공개된 국제적십자사의 자료를 보면, 전쟁이 정점에 달했을 때는 65,000명에서 7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구금되어 종종 구타와 고문을 당했던 남베트남 포로수용소에서 미국 측 고문단이 이를 감시하고 때로는 직접 가담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적십자 참관인들은 베트남의 두 주요 포로수용소-푸콕(Phu Quoc)과 퀴논(Qui Nhon)에 있으며 미국 고문단이 머물고 있었다-에서 지속적이고 조직적인 야만행위가 벌어지고 있음을 알아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700만 톤의 폭탄이 베트남에 투하됐는데,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과 아시아에 투하된 폭탄 전체의 두 배가 넘는 규모였다. 베트남의 모든 국민에게 거의 200kg짜리 폭탄 하나씩을 안긴 셈이었다. 이 나라에는 거의 2,000만 개의 폭탄 구멍이 생긴 것으로 추산됐다. 게다가 나무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생물을 파괴하기 위해 비행기로 독성 액체를 살포했다. 매사추세츠 주 크기의 지역이 독극물로 뒤덮인 것이다. 베트남 여성들은 기형아를 낳았다고 신고했다. 쥐를 대상으로 동일한 독극물(2,4,5,T[제초제의 일종으로 지방족 산제 중 하나이며 보통 2,4,5-T로 표기한다])을 실험한 예일 대학 생물학자들은 기형 쥐가 태어났다고 보고하면서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다를 것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고 지적했다.

 

1968316, 미군의 한 중대가 꽝응아이 성의 미라이[My Lai 4 숫자 4는 미라이1, 미라이2 식으로 미군이 작전 편의상 붙인 것이다] 마을에 진입했다. 병사들은 노인과 아이를 안고 있는 부녀자들을 비롯한 주민들을 전부 한 곳으로 집합시켰다. 주민들에게 구덩이를 파라고 명령한 병사들은 구덩이가 완성되자 주민들을 구덩이로 몰아넣고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훗날 열린 윌리엄 캘리(William Calley) 중위에 대한 재판에서 소총수 제임스 더시(James Dursi)가 증언한 내용이 뉴욕타임스에 실렸다.

 

캘리 중위와 눈물을 흘리는 폴 D. 메들로(Paul D. Meadlo)라는 소총수-아이들을 쏘기 전에 사탕을 먹인 바로 그 병사이다-가 포로들을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캘리 중위가 사격 명령을 내렸는데, 정확한 구절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사격 개시같은 말이었습니다.

 

메들로가 나를 보며 말했습니다. ‘, 왜 안쏘냐?’

 

그는 울고 있었습니다.

 

저는 말했지요. ‘쏠 수가 없어, 난 안 할 거야.’

 

그러자 캘리 중위와 메들로가 구덩이를 향해 총부리를 돌리고 사격을 가했습니다.

 

사람들은 차곡차곡 쓰러졌고, 어머니들은 애들을 감싸 안으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시모어 허시(Seymour Hersh)미라이4(My Lai 4)에서 이렇게 썼다.

 

미국 내의 미라이 사건 조사와 관련해 196911월에 그 황폐한 지역에 도착한 육군 조사단은 세 곳의 집단무덤과 시체로 가득한 구덩이 한 곳을 발견했다. 450에서 500명 정도가 살해되어 그곳에 묻혀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육군은 이 사건을 그냥 덮어 버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미라이 학살에 관해 들은 론 라이더나워(Ron Ridenhour)라는 병사가 보낸 편지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로널드 해벌리(Ronald Haeberle)라는 육군 사진사가 찍은 학살 장면 사진도 퍼졌다. 당시 급보통신(Dispatch New Servic)이라는 동남아시아의 반전 통신사에서 일하고 있던 시모어 허시는 이를 기사화했다. 19685월 프랑스의 두 간행물에 미라이 학살에 관한 이야기가 실렸는데, 하나는 투쟁중인 남베트남(Sud Vietnam en Lutte)이었고 다른 하나는 파리 평화회담에 참석한 북베트남 대표단이 출간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언론은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미라이 학살로 몇몇 장교가 재판에 회부됐지만 윌리엄 캘리 중위만이 유죄를 판결받았다. 그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지만 두 차례의 감형을 받았다. 캘리 중위는 결국 3년을 복역한 뒤-닉슨은 정규 교도소가 아니라 가택연금에 처할 것을 주문했다-사면됐다.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그를 옹호했다. 어떤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에 맞서기 위해 필요했던 그의 행동을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했다. 또 어떤 이들은 단순히 수많은 잔학행위가 벌어지는 전쟁에서 유독 캘리만 부당하게 본보기로 찍혔다는 느낌 때문에 그를 옹호했던 것 같다. 미라이 학살을 은폐한 총책임자였던 오런 헨더슨(Oran Henderson) 대령은 1971년 초에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단 규모의 부대라면 어떤 부대든 미라이 사건과 비슷한 사건을 어딘가에 감추고 있든 법입니다.” 사실 미라이 학살은 세부적인 사항에서만 독특한 사건이었다. 허시는 한 병사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어느 지방 신문에 실었다.

 

어머니 아버지께

 

오늘 저희는 한 임무를 수행했는데, 저는 제 자신이나 친구들, 아니 제 조국이 전혀 자랑스럽지 않습니다. 오두막이 보이는 대로 족족 불태워 버린 것입니다! 그곳은 서로 연결된 조그만 농촌 마을이었고 주민들은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 저희 부대는 그 사람들의 보잘것없는 물건들을 불태우고 약탈했습니다. 상황을 자세히 설명 드릴게요.

 

이곳의 오두막들은 야자나무 앞으로 지붕을 잇습니다. 집집마다 마른 진흙으로 만든 구덩이가 있습니다.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죠. 일종의 방공호 같은 거에요.

 

그런데 저희 부대 지휘관들은 이 구덩이가 공격용이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구덩이가 있는 오두막을 발견하는 즉시 완전히 태워 버리라고 명령을 내리는 거에요.

 

오늘 아침 이 오두막집들 한가운데 헬리콥터 10대가 착륙하면서 잠자리(chooper)’ 한 대당 여섯 명씩 뛰어내렸고, 우리는 땅에 내리자마자 사격을 개시했습니다. 오두막이 보이는 족족 총으로 갈겨 버렸지요.

 

그리고 나서 오두막마다 돌아다니며 불을 지릅니다. 자기들을 갈라놓지 말라고, 남편과 아버지, 아들과 할아버지를 데려가지 말라고 너나할 것 없이 울고 사장하고 싹싹 빕니다. 여자들은 울부짓고 통곡을 합니다.

 

그러고는 우리가 자기들의 집과 개인 소지품, 식량 등을 불태우는 모습을 겁에 질린 채 바라보지요. 맞아요. 우리는 쌀을 전부 태우고 가축도 모조리 쏴 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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