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당시 이승만
(이승만과 부인 프란체스카, 이승만은 스위스에서 만난 오스트리아 여인 프란체스카와 결혼했다. 이승만과 결혼한 프란체스카는 그가 죽은 이후에도 이승만을 재조명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평가절하했던 이승만은 1932년 11월 10일 국제연맹에 한국 독립을 탄원할 전건대사로 임명되었다. 또한 임시정부의 배려로 1933년 3월 국무의원으로 선출됐다. 이것은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 국제연맹과 미국과의 관계에서 이승만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이승만은 1925년 탄핵당한 이후 8년만에 다시 임시정부 각료로 복귀한 것이었다. 이 시기 이승만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여성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와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났다. 결국 그때의 인연이 이어져 그는 1934년 미국으로 이민온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이승만이 국제연맹일로 스위스 제네바에 있을 당시 그는 몇 개월 뒤에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를 방문하게 됐는데, 쫓겨났었다.
1930년대의 국제정세는 급변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1933년엔 국제연맹을 탈퇴하면서 본격적인 파시즘 체제로 전환했다. 일본이 중국 대륙에서 침략의 길을 걸을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독일에선 파시스트 히틀러가 민주적인 투표로 지도자가 되었다. 1935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에티오피아를 침략했고, 1936년 히틀러는 라인란트 지방을 점령했다. 더 나아가 1937년 일본은 노구교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세계를 감돌게 됐다. 1936년에는 스페인 내전이 일어나 파시즘 진영과 민주진영으로 나뉘어 전투를 치르게 됐고, 제2차 세계대전을 예고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스페인 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1939년 9월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일본 내막기, 이 책은 1941년 이승만이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을 예상하고 쓴 책이다. 또한 이 책은 현재 뉴라이트 세력들에게 경전급으로 찬양받는 서적이기도 하다.)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이후 계속 하와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은 1939년 3월 수도 워싱턴으로 가서 임시정부에 구미위원부 부활을 요청했다. 또한 이승만은 그해 10월 중경 임시정부의 주석인 김구에게 편지를 보내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임시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해주기를 거듭 요청했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이 히틀러의 서유럽 정복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 이승만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를 출판했다. 그가 쓴 일본 내막기는 “미국과 일본사이에 곳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실이 됐다. 또한 그는 그 시기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구성하고 외교위원으로 임명됐다.
이승만은 매우 반공적인 인물이었기에 불화를 일으켰다. 1940년 광복군 창설이 있을 당시, 백범 김구는 약산 김원봉을 임정에서의 입각을 추진했는데. 반공성향을 가진 이승만은 “김원봉 등을 절대 참여시켜서는 안된다”라고 하며 김구와 조소앙 등에게 항의 전보와 전화를 했다. 이것은 비록 반공적인 성향이 있더라도 일제에 맞서 좌우를 연합시키려던 백범김구의 행적하고도 매우 대조적이었다. 이처럼 이승만은 공산주의하면 치를 떨었던 극반공적인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920년대 초부터 공산주의에 대해 매우 혐오하고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그는 “소련과 연대하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조선을 노예국화 하는 것이기에 오직 미국의 성의있는 원조에 기대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뉴라이트를 포함한 극우세력들은 미국과 일본이 전쟁이 일어나는 시점인 1941년 이승만이 일본 내막기를 집필한 것에 대해 큰 의의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일본 내막기 서술은 어떤면에선 기회주의적 처사였다. 그가 미국과 일본의 전쟁을 예상한 것은 사실 크게 이상한일이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국 대륙에 대한 팽창으로 나섰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켜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940년 일본은 나치독일과 이탈리아와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이것은 소위 미영프(미국, 영국, 프랑스)로 대표되는 서구제국주의 체제에 도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 이승만이 그 책을 쓰던 1941년 미국은 일본에 대한 석유 금수조치까지 내렸다. 즉 당시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전황으로 치닷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놓여있던 조건이라면 아주 불가능한 예측이 아니었던 것이다.

(진주만 기습 공격,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미국 하와이에 있는 미해군 기지를 기습 공격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물론 미국과 일본의 전쟁 상황을 예견했던 미주지역 독립운동가는 이승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정적이자 재미한족연합회의 국방봉사원으로 있던 한길수라는 인물도 이를 예언했다. 그는 중일전쟁이 한참이던 1937년 반일 목소리를 드높이기도 했고, 주기적으로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는 발언을 했었다. 또한 그는 중경 임시정부 내에 좌파세력과 연계해 반일 활동을 벌이며 선의의 과대 선전을 계속했고, 이는 임정과 한독당을 지지하는 미주 한인 단체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그는 이승만과 사사건건 충돌했고 1942년 2월 재미한족연합회로부터 면직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한길수라는 인물을 ‘공산주의 이중 첩자’라며 매도했었다.
1939년 구미위원부 부활을 요청했던 이승만은 1941년 4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자기자신을 대미외교위원으로 임명하면서 미국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유지하는 대미 외교에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는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했을 때부터 이 시점까지 절대로 혁명가나 철저한 독립운동가가 되지 못했다. 그가 보다 적극적으로 대미활동을 전개하게 된 시점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 진주만에 기습공격을 가하면서 부터였다.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은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뛰어들었다.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이승만에게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승만은 1943년 3월말 하원의원 오브리엔을 통해 한국 임정의 승인을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의회에 제출했으나, 국무장관 헐이 “미국의 대외정책에 혼란과 오해만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하여, 이 결의안은 본회의에 상정되지 못한 채 기각되었다.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추축국에게 선전포고를 감행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고자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강대국들은 이들을 인정하지 않았다.)

(김구와 윌리엄 도노반, OSS의 책임자였던 도노반은 중경 임시정부의 주석 백범 김구와 대일전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이승만의 구미위원부에는 정한경, 이원순, 임병직 등이 그를 도와 일하게 되었다. 이들은 뒷날 이승만이 집권했을 때 외무장관(임병직), 주일대표부 초대공사(정한경), 대한상공회의소 주미대표(이원순) 등의 요직을 지내게 되는 인물들이다. 그는 주구장창 외교활동을 견지했지만,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에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는 1942년 미국과 일본간의 전쟁이 지속중이던 와중에 소위 ‘미국의 소리(Voice of America)’를 통해 태평양 전쟁의 전황을 알리는 활동을 했지만, 한편으론 무장투쟁을 주장하기도 했다. 어쨌든 그 시기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미주 대표 자격을 갖고 있었고, 미국 CIA의 전신인 OSS(Office Strategic Service)를 통해 실제로 무장투쟁을 준비하기도 했었다.

(미국의 카탈리나 섬,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로스엔젤레스 롱비치 인근에 있는 카탈리나 섬은 CIA의 전신인 OSS를 훈련시키는 훈련소로 활용되었었다. 당시 이승만이 추천한 일부 한인 대원들은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2년전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필자는 고래투어 하는 배에 올랐다가 우연히 카탈리나 섬을 육안으로 보게 되었는데, 당시 이 사연을 선원에게 얘기해주니 흥미로워 했다.)

(서울 1945에서 재현된 OSS 훈련, 한국근현대사를 배경으로 한 71부작짜리 드라마 서울 1945에서는 드라마 주인공 중 한명인 이동우가 전쟁 막바지에 캘리포니아 카탈리나 섬에서 OSS 대원으로 훈련받는다.)
이승만은 당시 OSS의 책임자 윌리엄 도노반의 오른팔이자 조직의 2인자였던 굿펠로우로부터 큰 호감을 받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기 미국의 OSS가 중경 임시정부의 백범 김구와 함께 협력하여 대일무장투쟁을 준비했었다. 여기에는 이후 민주화운동가인 장준하도 관여했다. 아무튼 이승만은 굿펠로우와 만나 미주에 있는 한국인을 대일전에 참가시킬 계획을 세웠다. 1944년 한일 게릴라 부대를 한반도에 투입한다는 넵코(NAPKO) 프로젝트가 수립되었고, 이때 이승만이 추천한 50명 정도가 OSS에 관여했다. OSS에 참가했던 인물들 중에는 대한민국 정권 초기 활동했던 장석윤, 장기영, 유일한 등이 있다. 그들은 1944~1945년 당시 켈리포니아에 있는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유격훈련, 무선훈련, 폭파훈련, 촬영 훈련 등을 하며 대일전을 준비했었다. 즉 이들이 해방 후 이승만의 정치적 자산이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시기 태평양 전쟁의 전황은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연합국에게 유리해지고 있었다. 1943년 일본은 과다카날 전투에서 패배했고, 1944년에는 일본령 사이판섬에 미군이 상륙했으며, 미국의 B-29 폭격기가 일본 본토를 폭격하기 시작했다. 1945년 3월에는 이오지마가 함락됐고, 마지막으로 그해 6월에 오키나와가 미군 수중에 들어갔다.
1945년 5월 나치독일이 연합국에게 항복한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연합 즉 UN을 창설하기 위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회의에 참석한 이승만은 “얄타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했다.”라는 ‘얄타 밀약설’을 폭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당연히 이것은 이승만의 반공주의적 사상에 기반을 둔 발언이었다. 즉 이승만은 예전에 그랬듯이 반소련 입장을 미국에게 강력히 보여주고 싶었던 목적도 있었던 것을 보인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가던 1945년 7월 이승만은 태평양 전쟁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에게 전문을 보냈다. 이승만은 이 전문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강력한 반소 반공의 입장을 맥아더에게 전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이 강력했던 맥아더는 당연히 이승만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됐고, 이를 계기로 이승만을 전적으로 돕게 된다. 또한 이승만은 미국 체류 중에 여러 차례 반소 반공의 입장을 밝히는 언론 기고를 하였는데 맥아더에게 보낸 것은 이후 자신의 한반도에서 기반을 다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가 맥아더에게 보낸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공동 점령이나 신탁에 반대한다. 만약 점령이 필요하다면, 미국이 흘린 핏값과 소모한 막대한 비용의 대가로 미군만의 단독 점령 (한국-필자)을 환영한다. 대일본전은 민주주의를 위한 세계 안보를 달성하기 위해 승리한 것이다. 왜 우리가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에 들어와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고 한국에서 유혈내전의 씨앗을 뿌리도록 허락해야 하는가?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극동 평화를 위해 트루만 대통령과 각하가 단일한 통일 민주주의 독립 한국을 주창하는데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트루만 대통령에게 본인을 한국에 들여보내, 그곳에서 어떤 자격으로라도 미군과 협력하고 지원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미주리 호에서 공식적으로 치뤄진 일본의 항복,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끝났다.)
결국 이것이 맥아더로 하여금 이승만을 한국의 반소 친미 지도자로 인식하게 만들고 그의 귀국을 전적으로 돕게 되는 계기였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아시아에서도 끝이 났다. 이승만은 해방의 소식을 미국에서 들었다. 그는 이제 해방된 한반도로 돌아갈 채비를 했다. 그로부터 2개월 뒤인 1945년 10월 4일 그는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떠나 10일 뒤인 14일에 일본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에 도착한 이승만은 거기서 맥아더를 통해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를 만났다. 당연히 이승만은 미국인들의 비위를 맞추기 바빴을 뿐 독립투사들의 노고에 대해선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

(맥아더와 이승만, 이 사진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당시 맥아더와 이승만이 같이 찍은 사진이다.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가 가득했던 맥아더는 반공주의자 답게 이승만을 좋아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승만의 행적을 보면 일제가 조선을 합병하던 초기 때와는 상당히 대조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것은 당연히 이승만이 추종하는 나라 미국의 입장이 일본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으로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는 제국주의 국가 미국을 섬기면서 미국의 비위를 맞추는데 아주 최적화 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할 수 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독립운동의 분열을 낳기도 했고, 독립운동을 하게 만들기도 했으며, 미국을 위해선 친일적인 발언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어쨌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면서 35년간 일제의 지배를 받았던 한반도가 해방되었다. 하지만 해방의 기쁨은 잠시 이승만의 한반도 귀국은 또 다른 분열과 갈등을 암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