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로 전세계 고통받고 있는 현재 2021년은 21세기의 시작을 알린 9.11 테러와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발발 20주년이다. 많은 사람들이 외면하고 있거나 잘 모르는 사실이지만 20019월에 미국의 일방적인 침략으로 시작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2021년인 현재까지도 아직 끝나지 않은 상태다.

 

코로나 1차 유행이 있던 20202월 전쟁을 하고 있던 미군측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측과 이른바 도하합의를 성사시켰고, 올해인 2021년에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전 미군을 철수시키기로 했다. 2020년 아프가니스탄에 주둔하던 미군은 대략 12,000명이었는데, 철수를 진행하고 있는 현재는 대략 3,500명이 남아 있다.

 

미군 500명 이상이 전사했던 2010년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숫자가 11만 명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현재는 많이 철수한 시점이다. 2의 베트남 전쟁이라 불리는 아프가니스탄은 과거 존F.케네디와 린든B.존슨 그리고 리처드 닉슨이 밟았던 절차를 거의 그대로 밟아온 것 같다.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상황은 리처드 닉슨이 베트남 전쟁에서 추진했던 닉슨 독트린과 비슷하다.

 

1968년 구정 공세 시기 남베트남 주둔 미군은 549,000명을 넘겼는데 1973년 파리 평화회담 이후 남베트남에는 아주 극소수의 고문단만 남았던 역사를 생각하면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과거 베트남 전쟁의 상황과 소름끼칠정도로 닮은 부분이 있다.

 

1973년 파리 평화 협정 이후 완벽히 철수한 이후 2년 뒤에 베트남 전쟁은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는데, 올해 미군이 완벽히 철수하고 현재 미국이 세운 아프가니스탄 정권이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 분명히 올해 안에 미군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완벽히 철수할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이 완벽히 철수하면, 과거 베트남 전쟁에서 그랬듯이 약간의 미군고문단이 대사관을 중심으로 남을 것이다.

 

미군 정규군이 철수하면 탈레반 측은 자신들이 확보한 거점에서 전열을 가다듬고 현 아프가니스탄 정부군을 상대로 전투에 총 공격에 나설 것이다.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군벌 집합체에 소수민족의 통합도 안된 상태다. 거기다 이들의 부정부패는 과거 남베트남의 친미관료들 못지 않다. 어쨌든 탈레반은 총공격에 나서 아프가니스탄을 단기간에 접수할 것이다. 즉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제2의 베트남 전쟁으로 끝을 맺을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서의 북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탈레반은 너무나 큰 차이가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민족해방을 싸웠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을지는 몰라도 북베트남이나 베트콩의 경우 남녀평등과 부의 불평등 해소, 식민주의 타도 그리고 사회주의를 위해 싸운 것이라면,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은 반미 반공이다. 또한 희잡을 쓰지 않은 여성의 얼굴에 염산을 뿌릴정도로 전근대적인 이들이다. 이들이 정권을 잡으면 분명히 여성에 대한 억압적인 조치들이 취해질 것이다. 또한 관념적이기 짝이 없는 종교적인 교리를 인민들에게 강요하고 전근대적인 가치들을 사회영역에 뿌리내릴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의 탈레반을 지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전쟁은 베트남 전쟁처럼 미국의 제국주의적 패권경쟁에서 일어난 침략전쟁이라는 점을 절대로 잊어선 안된다. 그리고 이들이 과거에 주장했던 아프가니스탄의 무슬림 여성들 해방이나 민주주의 전파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기만적인지를 알아야 하며, 이런 점에서 역시 미국을 지지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나올 것이다. "그런 누구를 지지해야 하느냐?"와 같은 질문 말이다. 구체적인 대안이 없는 건 맞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탈레반이나 미국을 지지하는건 좌파들이 해서는 안 될 짓이다. 물론 미제국주의 침략에 맞선 이들의 투쟁을 방어하고 옹호해야한다. 그러나 이것이 탈레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인 동맹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답은 중동지역에 남아있는 잔존좌파들을 지지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빈약한 대답이다.

 

아직도 아프가니스탄에선 전쟁이 지속되고 있다. 2010년의 킬 팀 사건이나 2013년의 칸다하르 학살 그리고 그외에 미군 폭격으로 인한 아프간 민간인 학살 등에 있어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저지른 전쟁범죄의 폭력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 앞으로도 이런 제국주의적 전쟁범죄들은 비판받아야 한다. 어쨌든 아프가니스탄에 다시 평화의 길이 열리는 것 같다. 이들이 더 이상 전쟁으로 고통받지 말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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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민족 동포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대회가 열렸습니다. 이는 매우 즐거운 민족모임입니다.

 

나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대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나와 정부의 마음은 항상 여러분 곁에 있습니다. (Kinh) 다수민족의 동포와 토(Thổ), 므엉(Mường)이나 만(Mảng), 자라이(Gia-Rai) 또는 에데(Ê-đê), 써당(Xơ-đăng)이나 바나(Ba-Na) 그리고 다른 소수민족의 동포들은 모두 베트남의 아들딸이며 모두 피를 나눈 형제자매입니다. 살아 있건 죽었건, 행복하건 불행하건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습니다. 풍족할 때나 궁핍할 때나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합니다.

 

이전에 우리는 서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첫째로는 우리사이에 연계가 없었기 때문이며 둘째로는 우리 내에서 불화와 분열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베트남은 우리 모두의 조국입니다. 국민의회에는 모든 민족의 대표가 있습니다. 정부에는 소수민족부가 있어서 소수민족에 관계된 모든 일을 맡고 있습니다.

 

우리 조국과 정부는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따라서 모든 민족은 조국을 방위하고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긴밀히 결합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공동의 행복과 후손들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서로 도와야합니다.

 

강과 산이 마르고 닳아 없어지더라도 우리의 단결은 깨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의 힘을 결집할 것입니다.

 

대회가 성공하기를 빕니다.

 

1946419

호치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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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소치 동계 올림픽 준비와 개최로 바쁘던 2013년과 2014년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복잡했다. 수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서우크라이나 지역에선 반러시아 시위가 확산되었고, 2014년에는 동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내전이 일어났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에서 대학교 1학년이던 나는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점차 러시아와 NATO 간의 긴장 상황으로 가는 것을 직감했다. 미국과 러시아의 전쟁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FPS 게임 콜 오브 듀티 모던워페어 시리즈의 내용이 단순히 허구를 기반으로 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였다.

 

대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친누나와 함께 부모님이 지원해준 덕분에 대략 1달간 서유럽을 여행할 수 있었다. 여행을 하던 도중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러시아가 쏜 미사일로 인해 말레이시아 항공이 격파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프랑스 파리에 있는 샤를 드골 공항에서 귀국행 비행기에 오르던 나와 누나는 이런 소식을 들었기에 비행기에 오르기가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었다. 물론 무사히 귀국했으니,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이처럼 우크라이나 상황은 전 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우크라이나 사태가 점차 소식이 뜸해진 것은 중동에서 ISIS라는 테러 조직이 등장하면서 부터였던 것 같다. 그러면서 세계는 점차 우크라이나 문제에 관심을 덜 가지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사태 당시 서방의 언론들은 우크라이나의 시위대를 옹호하고, 크림반도 문제에 개입했다고 알려진 러시아에 대해 비난하기 일쑤였다. 물론 이것은 우크라이나 사태의 본질적인 문제를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편향된 보도는 우크라이나는 착한 놈 그리고 러시아는 나쁜 놈으로 만드는 색깔 프레임을 형성했다. 당시 국제 정세를 잘 모르던 나는 이런 편향된 보도에 휩쓸러 갔던 것 같다.

 

2013년에서 2014년 당시 우크라이나 사태가 일어나자 한국 언론이 보도하던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친 서방 반러시아의 흐름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았다. 87년 민주화 이후 탄생했다던 자칭 진보 언론 한겨레에서도 우크라이나 측의 입장만 대변하는 보도들만 늘어놓았었다. 경향신문 또한 마찬가지였다. 당연하게도 조선일보나 중앙일보 동아일보 같은 어용매체들 또한 이 입장을 100% 대변했다. 그렇다면 우크라이나 사태의 숨겨지고 혹은 알려지지 않은 진실은 무엇인가?

 

영화 플래툰‘74일생그리고 ‘JFK’등으로 유명한 영화감독이자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의 저자이기도한 올리버 스톤(Oliver Stone)2016년 다큐멘터리 하나를 만들었다. 그 다큐멘터리가 바로 Ukraine On Fire. 이 다큐멘터리는 2013년부터 2014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우크라이나 사태를 중심적으로 파헤친다. 당시 우리가 서방과 국내의 언론 매체를 통해 전파되던 우크라이나 사태의 이면에는 제국주의 국가 미국과 그 NATO의 제국주의적 패권경쟁이 존재했다.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미국은 반러시아 시위를 지원했고, 미국과 서방의 지원은 서구 제국주의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인들과 재벌 그리고 권력자들의 야합의 산물이었다. 이들은 노골적으로 친서방적 성향이 강한 우크라이나를 후원해주었다. 심지어 우크라이나 내에서의 친미적인 쿠데타를 획책하기도 했으며, 러시아를 압박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이 사태를 이용했다. 유럽 연합의 통합을 지지하는 유로마이단의 시위는 즉 이런 무대에서 진행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과거부터 반소련 반공주의 그리고 반러주의적 성향이 강했던 우크라이나인들의 대대적인 참여도 있었지만, 이것을 자신들의 패권정책으로 이용한 것은 미국이었다. 실제로 유로마이단 시위를 주도하는 이들 중에는 미국 정부로부터 후원을 받은 이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실제로 미국정부와의 정치적인 커넥션이 강하게 있었다.

 

2013년 말에 시작된 유로마이단 시위는 처음에 평화적이었는데 두 번째 그리고 세 번째를 거치면서 폭력적으로 변했다. 시위가 격해지면서 이를 진압하는 경찰측들의 대응이 강경해졌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노골적으로 폭력적인 시위를 계획했던 이들도 있었으며, 이들은 사전에 계획된 각본대로 폭력 사태를 이용하기도 했다. 이들 중 상당히 많은 이들은 네오나치와의 커넥션이 있거나 이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하는 이들이 많았다. 즉 유로마이단 시위에서 폭력사태를 주도했던 이들은 네오나치였고, 이들은 이후 돈바스 내전이 터졌을 때, 우크라이나 정부군의 일환으로 반군을 진압하는 군대로 활동했다. 심지어 이들 중 일부는 유로마이단 시위의 희생자를 일부러 만들어내고자 했었다. 당연히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서방의 언론은 외면했고, 오직 우크라이나의 시위대를 진압하는 경찰의 폭력성만 부각시켰다. 그리고 여기에는 서방의 언론 플레이가 한몫했다.

 

올리버 스톤 감독은 우크라이나와 서방 그리고 나치주의자들의 커넥션은 20세기부터 있어왔던 사실을 다큐멘터리에서 강조한다. 1930년대부터 반소련적인 감정이 강했던 우크라이나는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침략자 독일군은 해방자로 맞이했다. 이들 중에는 나치를 환영했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가 있었는데, 스테판 반데라도 그중 하나였다.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민족영웅으로 미화하는 스테판 반데라는 대학살자이자 파시스트였다. 1930년대 후반부터 반소련 투쟁을 해오던 우크라이나의 극단적 민족주의자인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OUN(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이라는 조직을 이끌었다. 스테판 반데라와 이 조직은 나치에게 적극 협력했고, 나치의 인종정책에도 협력하여 폴란드인이나 집시 유대인을 포함한 수십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인종청소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특히나 스테판 반데라는 폴란드인 집단 인종청소로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고 난 뒤, 미국은 소련과 경쟁하는 이른바 냉전체제에 돌입했는데, 여기서 미국은 소련군의 진격을 피해 도망친 스테판 반데라와 그의 조직 OUN을 반공 반소련 조직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당시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선 유대인 학살을 포함한 나치의 반인륜적 범죄자들을 재판했지만, 소련과 대립하던 미국은 스테판 반데라를 포함한 OUN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전쟁범죄 사실을 묵과했다. 미국의 CIA로부터 지원을 받았던 이들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반공투쟁을 벌였고, 이런 반공투쟁은 195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관계를 들며 감독 올리버 스톤은 냉전시기 미국이 인도네시아와 쿠바, 칠레, 이란 등과 같은 무수히 많은 나라에서 어떠한 공작행위를 했는지를 암시해준다.

 

2014년 우크라이나 영토였던 크림반도는 러시아의 영토로 합병됐다. 크림반도가 러시아의 영토가 되었을 당시, 서방의 언론과 한국의 언론이 보였던 태도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는 것이었다. 즉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침공했다는 것이 당시 서방과 한국 언론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달랐다. 러시아의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을 수시간에 걸쳐 인터뷰 했던 올리버 스톤은 푸틴의 증언을 들려주는데, 푸틴의 증언에 따르면 러시아군이 크림반도를 침공한 적이 없으며, 어떠한 총성도 어떠한 전투행위도 없었다.

 

거기다 크림반도의 경우 그 지역 국민의 최소 90%이상이 러시아로의 통합을 원한 결과였다. 러시아가 이 투표에 부정선거로써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크림반도는 예전부터 러시아로의 통합을 원하던 지역이었다. 일각에서는 크림반도에 러시아 해군이 있는 것을 예시로 드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영웅적인 전투가 있었던 세바스토폴은 소련 연방이 해체 된 이후에도 계속 러시아령으로 있었던 지역이었다. 즉 서방의 언론은 이러한 사실관계들을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왜곡했다는 것이다.

 

2014년에 시작된 돈바스 내전도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러시아가 먼저 침공한 것이 아니었다. 도네츠크를 포함한 동부 우크라이나의 경우 그 지역 국민들이 러시아로부터의 통합을 원했다. 2014년 도네츠크를 포함한 일부 지역에서 사회주의 공화국과 같은 친러성향의 국가 내지는 공동체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는데, 우크라이나 정부가 군대를 동원하여 전투를 먼저 벌였다. 이것이 바로 돈바스 내전의 시작이었다. 즉 양측의 교전에 있어서 먼저 시작한 측은 바로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크라이나였다.

 

그 외에도 올리버 스톤 감독은 이 90분짜리 다큐멘터리에서 우크라이나의 친미 친서방 친네오나치적 성향의 시위대가 어떠한 커넥션이 있었는지를 아주 상세하게 밝혀낸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네오나치 성향의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이 소련 연방 해체 이후 어떻게 성장했는지도 아주 명확하게 얘기한다. 이 다큐멘터리를 본 반공주의자들은 올리버 스톤을 친러시아적 빨갱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올리버 스톤이 이 다큐멘터리를 만든 이유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정치적인 사건의 다른 이면을 파악하고자 만든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나는 이런점에서 올리버 스톤이 정말로 훌륭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현재 이 다큐멘터리는 한국어 자막을 패치한 버전이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나 또한 이 다큐멘터리를 100% 이해한 것은 아니다. 다만 70~80%는 어떠한 이야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현재 넷플릭스에는 이 다큐멘터리와 매우 상반된 우크라이나 사태 관련 다큐멘터리가 있다. 역시 넷플릭스는 반공주의에서 벗어난 작품은 잘 소개 안하려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올리버 스톤의 다큐멘터리는 나에게 단비와도 같은 상식을 알려주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그의 객관적이고 통찰력 있는 시각에 감탄했다. 영어가 좀 되는 이들에게 이 위대한 역작의 감상을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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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중국은 이른바 군벌들이 다스리는 나라였다.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중화민국이 탄생한 이후에도 상당히 많은 군벌들이 중국 전역에서 정권을 잡고 있었고쑨원 사망 이후 국민당의 지도자 장제스가 이른바 북벌(北伐)을 단행하게 되었다이러한 군벌전쟁은 1930년대 초에 끝나게 될 정도로 길고 긴 전쟁이었다중국에서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가 북벌을 성공적으로 단행하자 베트남에서도 우파 민족주의적 성격을 띈 조직이 1920년대에 탄생했다그 조직이 바로 베트남 국민당(Viet Nam Quoc Dan Dang)이다베트남 국민당은 1927년 12월 응우옌 타이 혹(Nguyen Thai Hoc)의 지도 아래 교사·학생·언론인과 같은 인텔리겐치아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창당되었고이 조직의 모태는 1925년에 만들어진 남동서사(Nam Dong Thu Xa)였다.

 

당연히 베트남 국민당의 당수는 응우옌 타이 혹이었다이 조직의 한 가지 특징은 기존의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에 비해 상당히 구체적인 강령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이들은 민족적·민주적 혁명의 완성과 아울러 각지에서 억압받고 있는 민족들에 대한 원조를 주장했었다이들은 3단계로 구성된 혁명 전략을 가지고 있었는데문제는 식민주의 타도 이후의 베트남 사회에 대해서는 어떠한 국체적인 계획이 전혀 없었다이것이 한계였다.

(응우옌 타이 혹, 그는 베트남국민당을 창당한 인물이다.)

 

그런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국민당은 세력을 급속히 확산했고, 1929년 초에는 대략 120개의 세포조직과 1,500명의 당원을 보유하게 되었다물론 당의 기반은 프랑스령 통킹 지역이 핵심이었다하지만 이들은 1929년 초부터 조직적 난관에 부딪쳤다당시 프랑스 식민지에서 노동자를 알선하는 프랑스인 사업가 바쟁이라는 인물이 그해 2월 하노이에서 한 노점상에게 살해되는 일이 발생했다이 사건을 빌미로 프랑스 식민지 당국은 베트남국민당에 대해 조직적인 검거에 나섰고그로인해 총 400명 정도가 체포됐다그중 80명 정도가 5년에서 10년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국민당의 당수였던 응우옌 타이 혹은 도피한 상태였고, 1929년 여름 그러니까 미국발 세계 경제 대공황이 시작되기 2~3달 전에 국민당 대회를 소집하고 빠른 시일 내에 전면적인 무장봉기를 일으키자고 주장했다이러한 타이 훅의 주장은 국민당 내의 온건파들의 반대에 시달리기도 했지만궁극적으로 이 제안이 받아들여졌으며, 1930년 초 통킹 지역에서 프랑스군 병영에 대한 공격을 결정했다.

(응우옌 타이 혹과 베트남국민당 관련 서적)

 

1930년 2월 초 베트남국민당은 서북쪽 105km 지점에 있는 옌바이(Yen Bai)의 프랑스 병영을 습격했다이것이 바로 1930년 베트남 독립운동사에서 있던 전국적인 무장 봉기의 신호탄이었다베트남국민당이 프랑스 병영을 공격한 이유는 당시 프랑스군에 속해 있던 베트남 병사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이었다그러나 프랑스군에 있던 베트남 병사들은 대부분의 경우 봉기에 합세하지 않았고오히려 이들에게 반격을 가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트남국민당이 주도한 공격과 봉기는 고무적이었다베트남국민당이 계획했던 봉기가 일어났다이에 영향을 받아 당시 홍콩에서 창당된 호치민(당시 이름은 응우옌 아이 꾸옥)의 인도차이나 공산당 또한 응에안 성을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의 봉기는 프랑스군의 군사력 앞에 굴복했다이 농민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 당국은 전투기까지 동원한 공격에 나섰고무자비하게 진압 당했다이 과정에서 수만 명 이상의 베트남인이 죽었다여기에는 프랑스군 전투기로 인한 노골적인 학살도 있었다그리고 이와 비슷한 비율의 숫자가 프랑스 당국에게 체포되었다베트남국민당의 경우 지도자 응우옌 타이 혹을 포함하여 거의 다 처형됐다말 그대로 조직 자체가 거의 초토화 되었다일부 소수의 생존자들은 중국 광둥과 광시 지방으로 망명하여 소규모 운동을 계속 했지만 그 영향력은 미미했다따라서 이것은 베트남 독립운동사에서 비공산주의 세력이 궤멸됨에 따라 공산당의 입지가 훨씬 더 넓어지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후 살아남은 베트남국민당의 잔존 세력들은 공산당에 비하면 규모가 작았지만활동을 계속 이어나갔다물론 장제스의 국민당처럼 반공성향이 있었는지베트민하고는 거리를 두었으며 이는 제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 그리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까지 그러한 성향을 보였다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이 남북으로 갈리면서 베트남국민당 지도부는 활동지를 남베트남으로 옮겼다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이들은 응오딘지엠 정권에 의해 탄압 받았다응오딘지엠이 CIA에게 암살당한 이후에도 남베트남에서 조직활동을 하다가 1975년 베트남 전쟁이 공산주의의 승리로 종결됨과 동시에 미국으로 망명하여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현재까지도 남아있는 베트남국민당, 베트남 전쟁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로 망명한 이들은 친미 반공 친남베트남 성향을 보이고 있다.)

 

미국으로 망명한 베트남인들이 반공주의 성향을 보이듯이 이들 또한 강경한 반공주의 그리고 현재의 베트남 사회주의 체제와 그 역사를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즉 정치적으로 패망해버린 친남베트남 성향을 보이고 있다이들의 당사는 웨스트민스터에 있으며연설회나 집회때 당기와 함께 남베트남국기를 걸어놓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참고문헌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유인선이산, 2002

 

베트남의 역사유인선이산, 2018

 

동남아시아사소병국책과함께, 2020

 

https://ko.wikipedia.org/wiki/%EB%B2%A0%ED%8A%B8%EB%82%A8_%EA%B5%AD%EB%AF%BC%EB%8B%B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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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봄에 자신의 첫 번째 유격대를 조직한 김일성은 꼭두각시, 즉 ‘취해진 조치‘의 지배자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1933년 9월 둥닝전투 전까지는 무명 인사에 불과했다. 둥닝전투에서 중국 지도자들은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인 유격대 2개 중대의 지원을 받아 이 도시에 전에 없이 대규모로 공세를 퍼부었다. 김일성의 부대는 이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 스중헝을 구했고, 그때 이후로 김일성은 중국 최고위 지도자들의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그 덕분에 반역 혐의로 중국인 동지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목숨을 구했다. 사령관 스중헝은 "김일성 같은 위대한 인물"이 "일본의 주구"일 리가 없다고 단언했고, 김일성이 유죄 선고를 받으면 자신의 유격대를 이끌고 공산당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중국어가 유창했기에 만주의 유격전에서 중국인과 조선인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데 주된 역할을 담당했다. 만주국이 설립된 이후 항일 유격대의 약 80%가량이, ‘중국공산당‘ 당원은 90%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1936년 2월 막강한 동북항일연군이 출현했고, 김일성은 여러 명의 중국인 연대장들을 거느리고 제3사단을 지휘했다. 1930년대 말 조선인들은 두 연대에서는 80%, 다른 연대에서는 50%를 차지하는 등 여전히 가장 큰 민족 집단이었다.

한홍구의 평가를 빌리자면, 이때쯤이면 김일성은 "만주 동부에서 큰 명성과 높은 지위를 지닌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였다. 서대숙은 이렇게 쓴다. "김일성은 1938년과 1939년 내내 주로 남만주 및 남동만주 일대에서 싸웠다. 그 가운데에는 1938년 4월 26일의 류다오거우 공격과 1939년 5월의 또 한 차례의 국내 진격등 수많은 기록이 있다. - P93

진실화해위원회는 북한이나 남한 좌익에 의한 처형도 똑같이 진중하게 다루었다. 예를 들면 김제에서는 북한군과 현지 좌익 우익 활동으로 고발된 기독교인 23명, 정판석이라는 지주와 그의 가족, 경찰이었던 그의 사위를 학살했다.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북한군과 그 협력자들은 서울, 대전, 청주 등지에서 수백 명씩 살해했다. 전부 1100명이 넘었는데 대개는 억류되어 있던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 회원들이었다. 미국인의 감수성에는 크게 불편하겠지만, 기록은 공산주의자들의 잔학 행위가 전체 사례에서 대략 1/6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이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P277

미군 병사들은 민간인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거듭 되돌아와 그들이 모두 죽었는지 확인했다. 이는 당연히 그들이 노근리 학살 사건을 증언할 생존자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싶었다는 뜻이다. 마치 ‘미라이 학살’이 발생한 베트남이 미국이 개입한 유일한 사례라는 듯이. 한국전쟁의 이 학살 사건은 집단기억에서 사라졌다. - P235

진실화해위원회에 거의 1만 1000건에 달하는 잘못된 죽음이나 학살이 위원회에 신고되었는데, 이 중 9461건이 민간인 학살이었다. 2008년 말까지 3269건이 조사되었다. 154곳의 매장지가 발굴되어 수백 구의 시신을 찾아냈다(남양주 460구, 구례 400구, 경산 코발트 광산 240구, 울진 256구 등등). 대부분 10살 미만이었던 어린이의 시신도 수십 구나 발견되었다. 추측컨대 일가족 몰살의 희생자였을 것이다. 결국, 6월에 전쟁이 시작된 후 남한 당국과 이를 보조했던 우익 청년단체들은 대략 10만 명을 처형하여 참호와 광산에 내버리거나 바다에 수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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