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봄에 자신의 첫 번째 유격대를 조직한 김일성은 꼭두각시, 즉 ‘취해진 조치‘의 지배자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1933년 9월 둥닝전투 전까지는 무명 인사에 불과했다. 둥닝전투에서 중국 지도자들은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인 유격대 2개 중대의 지원을 받아 이 도시에 전에 없이 대규모로 공세를 퍼부었다. 김일성의 부대는 이 전투에서 중국인 지휘관 스중헝을 구했고, 그때 이후로 김일성은 중국 최고위 지도자들의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그 덕분에 반역 혐의로 중국인 동지들에게 체포되었을 때 목숨을 구했다. 사령관 스중헝은 "김일성 같은 위대한 인물"이 "일본의 주구"일 리가 없다고 단언했고, 김일성이 유죄 선고를 받으면 자신의 유격대를 이끌고 공산당을 떠나겠다고 말했다.

김일성은 중국어가 유창했기에 만주의 유격전에서 중국인과 조선인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데 주된 역할을 담당했다. 만주국이 설립된 이후 항일 유격대의 약 80%가량이, ‘중국공산당‘ 당원은 90%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1936년 2월 막강한 동북항일연군이 출현했고, 김일성은 여러 명의 중국인 연대장들을 거느리고 제3사단을 지휘했다. 1930년대 말 조선인들은 두 연대에서는 80%, 다른 연대에서는 50%를 차지하는 등 여전히 가장 큰 민족 집단이었다.

한홍구의 평가를 빌리자면, 이때쯤이면 김일성은 "만주 동부에서 큰 명성과 높은 지위를 지닌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였다. 서대숙은 이렇게 쓴다. "김일성은 1938년과 1939년 내내 주로 남만주 및 남동만주 일대에서 싸웠다. 그 가운데에는 1938년 4월 26일의 류다오거우 공격과 1939년 5월의 또 한 차례의 국내 진격등 수많은 기록이 있다. - P93

진실화해위원회는 북한이나 남한 좌익에 의한 처형도 똑같이 진중하게 다루었다. 예를 들면 김제에서는 북한군과 현지 좌익 우익 활동으로 고발된 기독교인 23명, 정판석이라는 지주와 그의 가족, 경찰이었던 그의 사위를 학살했다. 인천 상륙 작전 이후 북한군과 그 협력자들은 서울, 대전, 청주 등지에서 수백 명씩 살해했다. 전부 1100명이 넘었는데 대개는 억류되어 있던 경찰과 우익 청년단체 회원들이었다. 미국인의 감수성에는 크게 불편하겠지만, 기록은 공산주의자들의 잔학 행위가 전체 사례에서 대략 1/6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이 사람을 가려가며 처형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P277

미군 병사들은 민간인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거듭 되돌아와 그들이 모두 죽었는지 확인했다. 이는 당연히 그들이 노근리 학살 사건을 증언할 생존자가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싶었다는 뜻이다. 마치 ‘미라이 학살’이 발생한 베트남이 미국이 개입한 유일한 사례라는 듯이. 한국전쟁의 이 학살 사건은 집단기억에서 사라졌다. - P235

진실화해위원회에 거의 1만 1000건에 달하는 잘못된 죽음이나 학살이 위원회에 신고되었는데, 이 중 9461건이 민간인 학살이었다. 2008년 말까지 3269건이 조사되었다. 154곳의 매장지가 발굴되어 수백 구의 시신을 찾아냈다(남양주 460구, 구례 400구, 경산 코발트 광산 240구, 울진 256구 등등). 대부분 10살 미만이었던 어린이의 시신도 수십 구나 발견되었다. 추측컨대 일가족 몰살의 희생자였을 것이다. 결국, 6월에 전쟁이 시작된 후 남한 당국과 이를 보조했던 우익 청년단체들은 대략 10만 명을 처형하여 참호와 광산에 내버리거나 바다에 수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 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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