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장제스 총통이 비밀리에 푸른셔츠단이라는 엘리트 조직을 결성했다. 푸른셔츠단의 한 대원은 "처음에는 파시즘을 후진적으로 생각했다"면서 "그러다가 국가를 발전시키는 진보적인 수단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파시즘의 일차적인 목표는 국가 보전이었다. 푸른셔츠단의 기관지는 사설에서 "파시즘이란 파멸 직전의 국가를 구원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파시즘은 이탈리아와 독일을 구했다. 이탈리아와 독일 파시스트 정신을 모방해 폭력 투쟁의 길로 나서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

 

장제스 총통은 파시즘 도입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푸른셔츠단 대원들에게 "파시즘이 중국을 구원할 것인가"라고 물은 뒤 "그렇다. 파시즘이야말로 중국에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장제스는 서구인들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싫어했으며, 히틀러의 지도자 원리를 수용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민주주의와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느라 세월을 보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장제스는 히틀러의 집권 8개월 뒤 당 간부들에게 "파시즘의 핵심은 현명하고 능력 있는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라고 말했다. 국가는 지도자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으면 재건될 수 없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자연히 혁명 정신을 갖춘 위대한 인물로서 모든 당원의 본보기로 일한다. 한편 개별 당원들은 지도자와 집단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는데 간접적으로는 사회와 국가, 혁명을 위한 일이다. 우리는 혁명집단에 참여한 순간부터 권리와 생명, 행복까지 집단에 위임하고 이들 모두를 지도자에 바쳤다. 그래야만 진정한 파시스트라 불릴 수 있다."

 

히틀러의 첫 임기 4년간의 치적은 생각이 같은 다른 사람들을 고무했다. 파시즘은 불평불만자나 권리를 빼앗긴 사람뿐 아니라 선의를 가진 책임자들을 파고들었다. 젊은이뿐 아니라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신선한 대안으로 받아들인 지식인 계층들도 끌어들였다. 국가마다 개성을 가진 파시즘이 발호했지만 히틀러나 무솔리니 등의 추종자는 정신적인 단합만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여겼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었다.

 

출처: 아들프 히틀러 결정판 1 p.687~68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징어 게임에서 ▲■● 씹쌔끼들이 우리는 기회를 준다는 소리할때, 진심으로 씹역겨웠다. ▲■● 범죄자들이 씨부리는 기회란 400억 상금 수령이라는 무슨 벼락 맞는 것 보다 더 받기 힘든 로또를 해서 돈받을 기회를 얻으라는 것과 같은 맥락의 헛소리다. ▲■● 씹쌔끼들이 참가한 456명을 최소 3,4억 이상의 빛을 진 사람들로만 묘사했는데, 탈북자나 외노자는 거기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잖아. 난 이 사실에서 ▲■●가 얼마나 말안되는 같은 소리를 해대는지 알 수 있었음.

 

그리고 빛을 몇억씩 준 사람들에게 기회를 준다면, 그 사람들 대다수에게 적어도 먹고 살수는 있게 만들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 기관 자체의 재정이라면 그 정도는 하고도 남을 수준인데? 그러니까 ▲■●의 기회운운은 말 그대로 "부자들 재미를 위해 사회의 가망없는 빈곤층을 희생시켜 즐거움을 느끼자."는 궤변을 돌려말한 것임.

 

▲■●와 이들을 이끄는 검은 가면 그리고 짐승보다 못한 부유층은 사탄일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친애하는 중국 유격대 동지들,

 

나는 당신들이 골짜기에 살포한 선전문을 읽고 당신들이 공산당 유격대임을 알았습니다. 당신들은 애국주의자인 동시에 국제주의자입니다. 나는 당신들과 만나서 공동의 원수를 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파시스트 야수들에게 포위되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운반해온 10만 발의 탄알을 귀군에게 드립니다. 그것은 북쪽 소나무 숲 속에 있습니다. 바라건대 그 탄알로 파시스트 군대를 사격하십시오.

 

내 몸은 비록 죽지만 혁명정신만은 영원할 것입니다. 신성한 공산주의 위업을 하루빨리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관동군 간도 치중대 일본 공산당원 이다 스케오

 

1933330

(이다 스케오의 초상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해외여행이 자유롭던 COVID-19 이전 인천공항을 제외한 국내의 기타 지역 공항에는 동남아시아행 비행편들이 제법 있었다그 중에는 쿠알라룸푸르도 있었는데제법 한국 사람들이 많이 놀러가는 곳이라 제주도 국제선이나 김포공항 국제선에서도 비행편을 예약할 수 있을 정도였다한국에서 6시간 정도 걸리는 쿠알라룸프르는 바로 말레이시아의 수도다. COVID-19 이전에는 베트남캄보디아태국 등과 더불어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놀러가는 동남아시아 국가였던 말레이시아는 20세기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다만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오늘은 20세기 말레이시아의 현대사 그것도 좌파들의 투쟁사와 반동의 역사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말라야 공산당의 지도자 첸핑, 게릴라 전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2013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동인도회사(East Indian Company)를 내세워 인도를 식민지화 했던 소위 대영제국은 18세기 말 비슷한 방식으로 말레이시아를 식민지화 했다천연고무를 비롯하여 야자유·주석·원목·원유 등이 풍부한 말레이시아는 근 현대 시기 지배자 영국에 의해 착취당했다. 20세 당시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말레이시아에서는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과 1921년 중국 공산당의 창당 등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났고, 1928년 말레이시아 안에서 남양공산당이 결성됐다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창당되던 1930년 영국 지배 하의 말레이시아에서도 남양공산당은 말라야공산당(MCP: Malayan Communist Party)으로 개칭했다.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며 파시즘 대열에 완벽히 합류했다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더 나아가 1941년에 미 해군 기지가 있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며이에 따라 동남아시아 전체를 점령하려는 제국주의적 야심을 드러냈다. 1941년 12월 일본은 말레이 반도 북부지역에 병력을 상륙시켰다이 일본군대는 말레이시아 점령 절차를 이어나갔다. 1942년 2월 싱가포르를 함락시킨 일본 제25군 사령관인 야마시타 도모유키(Yamashita Tomoyuki로 아시아의 롬멜 혹은 말레이시아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는 당시 영국군 사령관이었던 퍼시벌의 항복을 받고 말레이시아 점령을 궁극적으로 완료했다.

(말라야 반일 인민군의 깃발)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은 타국을 침략하면서 이른바 아시아를 해방시킨다는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웠지만이는 말 그대로 허상이었다일본 제국주의가 점령지역에서 불러온 것은 억압과 그 나라 국민을 대상으로 한 탄압이었으며학살과 전쟁범죄도 일어났다인도네시아나 버마베트남에서와 같이 말레이시아에서도 일부 민족주의 세력이 영국으로부터 지배를 벗아난다는 명분으로 일본을 해방자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범했지만앞에서 언급한 사례처럼 일본은 이들을 궁극적으로 조직을 해체하거나 활동을 통제하려 했다결국 일본은 과거의 지배자 영국을 대체한 새로운 지배세력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말레이시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자말라야공산당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이들이 전개한 독립운동은 무장투쟁이었다비록 영국은 말레이시아를 지배한 지배자였으나반파시즘인민전선 논리에 따라 말레이시아 좌파들은 좋든 싫든 영국의 SOE와 협력관계를 구축하여반일투쟁에 나서기도 했다이들은 영국의 SOE 지도자들 휘하에서 정글에 산재하는 소수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는 것과 훈련하는 것을 돕도록 했으며특히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 이 독립투쟁에 많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도시로 입성한 말라야 인민 해방군)

 

이에 따라 이들에 대한 일본의 탄압도 가속화 됐는데, 1942년 8월 일본 헌병대가 싱가폴에 있는 당 최고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했으며바투 지역에 있는 은신처를 습격하여 중앙위왼회와 게릴라 지도자들 중 상당수가 제거되기도 했다이런 큰 손실을 입었음에도 좌파 세력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당서기장인 레이텍(Lai Teck)과 그의 보좌인 첸핑(Chen Ping)의 지도를 받으며좌익 세력이 반일 독립운동은 지속됐다.

 

이 좌파세력들은 중국계 인사들이 중심이 된 조직이었고이들은 말라야 반일 인민군(MPAJA: Malayan Peoples' Anti-Japanese Army) 조직을 바탕으로 일본군에 맞선 무장투쟁을 벌였으며해를 거듭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초기 일본군은 말레이시아에서 일어나는 좌익들의 투쟁력을 꺾기 위해 기존에 말레이시아에서 있던 민족 혹은 인종 갈등을 이용하여 최소 6,000명에서 많게는 4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을 숙청하는 작업을 벌였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라야 반일 인민군은 일본 통치 막바지 무렵 전국에 산재한 게릴라 부대를 동원해 며칠 안에 말레이시아를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무장 세력으로 급성장했다일본이 패망하던 1945년 말레이시아에 있던 좌익 게릴라 조직은 7,000명 이상의 정규군대를 보유한 군대 조직으로 성장했고항일무장투쟁 기간 동안 최소 수백 명 이상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소병국 교수의 저서 동남아시아사에 따르면일본이 항복한 시점부터 대략 3주 정도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고 한다이 과정에서 말라야 반일 인민군은 밀림 지대에서 벗어나 말레이시아 전역을 장악하기에 나섰고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말레이인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자행하기도 했었다항일 투쟁을 전개한 좌파 세력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겠지만이것은 말레이시아가 가지고 있던 고유의 인종 갈등 그러니까 중국계와 말레이계의 민족적 혹은 인종적 갈등이 되었다고 소병국 교수는 책에서 주장했다.

(일제 패망 이후 수도 쿠알라룸푸르로 입성한 말라야 반일 인민군 부대)

 

그로부터 3주 뒤인 1945년 9월 다시 복귀한 영국은 말레이시아의 재식민지화 하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했다. 1946년 영국 정부는 친영파 출신의 인사들과 일부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을 규합하여 말라야 연합을 출범시켰다가, 1948년에 가서 말아야 연방 체제를 도입했다영국의 주도로 만들어진 이 나라는 당연하게도 전쟁 전 영국 식민지배하에서 말레이인 사회가 누렸던 전통적인 특권을 고스란히 유지하는 방향이었고새로운 친영정부는 미소냉전 초기의 흐름과 더불어 반공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군 점령 시기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첸핑은 영국과 일부 민족주의 진영의 주도로 친영 꼭두각시 정부가 세워지자이에 대항했다따라서 말레이시아 좌파들은 과거 일본군에 맞서 싸웠듯이이번에는 영국군과 친영정부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이게 됐다첸핑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지휘했던 소규모 게릴라 부대들을 다시 활성화시켰고이러한 무장투쟁은 냉전 초기이던 1947년에서 1948년 사이에 가속화 됐다말레이 좌익 게릴라들의 무장 투쟁은 모스크바로부터 지령을 받기도 했으며필요에 따라선 테러와 암살은행강도 등의 전술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 비상사태(좌익 게릴라들의 무장 투쟁을 벌일)당시 민간인을 조사하고 있는 경찰과 영국군)


(말레이 정부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좌파 게릴라)

 

사실상 말레이시아를 지배했던 영국은 1948년부터 이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고친영정부 또한 이러한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따라서 영국과 친영 말레이 정부은 민중들과 좌파들을 대상으로 검열과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영국의 지원을 받은 친영 정부는 경찰병력과 군병력을 증강했으며영국 정부군 또한 이 사태에 관여했다세계게릴라전사를 집필한 로버트 에스프레이는 책에서 말레이 좌파 게릴라들이 지나치게 테러에만 의존해서 대중적인 지지를 크게 못 얻었다는 점과 대다수가 중국계로 구성되어 인종적으로 말레이인들과 갈등이 있었다는 점을 게릴라 투쟁이 결국 실패로 끝난 원인으로 분석했다이런 점에서 말레이 좌파 게릴라들은 대대적으로 베트남의 유일한 대중조직이었던 베트민이나 베트콩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그래도 말레이의 좌파 게릴라들은 수십만에서 많게는 100만 이상의 동조자를 획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53년 당시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해 밀림을 수색하는 군인들)

 

말레이 게릴라의 무장투쟁은 1952년도가 되어서 힘을 잃기 시작했고영국 정부가 고안해낸 이른바 전략촌 계획에 실행됨에 따라 게릴라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전략촌 계획은 농민과 게릴라를 분산시키는 전략이었고이 전략은 말레이시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그만큼 영국과 말레이시아 친영정부가 크게 신경을 썼다는 얘기다좌파들의 게릴라 투쟁은 1952년에서 1954년에 이르는 2년 동안 게릴라들의 2/3가 소탕되었고 테러의 발생건수도 한 달에 500건에서 100건으로 희생자의 수도 300명에서 40명으로 감소했다물론 말레이 친영정부와 영국 정부도 게릴라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많은 잔혹행위를 벌였으며이에 따른 희생자들도 분명 적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공격 단계는 1955년에 가서야 종결됐고, 1957년 말레이시아가 공식적인 독립국가가 된 시점에서도 계속되었지만산발적인 저항은 1960년까지 이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농촌 지역을 수색하고 있는 영국군)


(말레이시아 비상 사태에 관한 관련 서적)

 

이 전쟁에서 총 수천 명의 민간인이 죽고친영 정부군 1,300명과 영국군 500명이 전사했다그리고 공산당 휘하의 좌파 게릴라들은 조직원 6,700명 이상을 잃었다이 전쟁은 적잖은 사상자를 냈다.

 

말레이시아에서 영국이 추진했던 이른바 전략촌 계획은 이후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에서 디엠의 동생 응오딘누와 그들을 지원하는 로버트 맥나마라에 의해 추진됐다그러나 말레이시아의 상황과는 달리베트남 전쟁에서는 전혀 성공적이지도 못했고오히려 전략촌에 있던 농민들이 정부에 협력하기 보단 베트콩의 무장투쟁에 동조하는 역효과가 만들어졌다참고로 말레이시아에서 사용된 이 전략촌 계획은 그 이전에 미국이 개입한 그리스 내전과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에 대항해서 발생한 제주4.3항쟁에서도 사용된 방식이었다.

 

참고문헌

 

동남아시아사소병국책과함께, 2020

 

세계게릴라전사 2, R.B 에스프레이편집부일윌서각, 1989

 

세계게릴라전서 3, R.B 에스프레이편집부일윌서각, 19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계사 적인 측면에서 19세기의 역사는 현재 미국이 죽을힘을 다해 끝까지 유지하고 또 세계적으로 지키려고 하고 있는 체제 자본주의(Capitalism)가 성장의 가동을 밟기 시작한 시점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대량의 공장생산 체제에 돌입하면서 과거하고는 비교가 안 될 생산력을 보일 수 있었다물론 이러한 이면에는 노동자 계급에게 비인간적인 노동을 강요하고 아동착취여성의 중노동과 그로인한 유아사망을 급증시키기는 어두운 면이 아주 극명하게 존재했었다이러한 현실을 알게 된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산업혁명을 통해 탄생한 자본주의 체제를 아예 타도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산력이 확장되자 자본주의 체제는 값싼 시장 확보와 궁극적으로 무절제한 이윤을 창출해내기 위해또 다른 것을 시도하는데 그것이 바로 식민지 확장이었다자본주의와 제국주의는 일란성 쌍둥이로써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현재까지도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이 신제국주의라는 형태로서2차 세계대전 이후 무수히 많은 나라들을 침략했고반인륜적인 전쟁범죄와 학살극을 벌였고 벌이고 있는 것처럼제국주의적 야욕을 유지하게 만드는 자본주의는 19세기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게 그러한 욕심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1991년 미소냉전이 소비에트 연방 해체로 종결이 되면서 한국 운동권들은 대단히 충격에 휩싸였다이런 과정속에서 사회주의에서 극단적 극우주의로 사상을 전향하는 사례가 있었는데현재 반일 종족주의와 더불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망언을 일삼고 있는 이영훈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이영훈은 2000년 저서 하나를 출간했는데바로 한국 시장 경제와 민주주의의 역사적 특질이라는 책이다이영훈은 그 책에서 이른바 ‘19세기 위기론이라는 것을 주장했는데주장을 짧게 요약하자면 “19세기 위기론은 내부적 동력에 의한 근대 이행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고외세의 작용이 없었더라도 조선왕조는 자멸해 나가는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영훈에 따르면 19세기 위기론에 따라서 우리 역사는 필연적으로 일제 식민지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귀결된다즉 19세기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아 자본주의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이런 식으로 일본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고 미화하기 위한 수단 내지는 목적으로 이용된 논리가 바로 19세기 위기론이다이영훈 교수는 19세기 위기론을 합리화하기 위해 드는 근거가 있다그것은 바로 19세기 논농사 생산성의 감소산림 황폐화가뭄과 흉년을 포함한 잦은 자연재해 그리고 18세기부터 따른 인구감소 등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가장 큰 치명적인 실수가 있다이러한 일련의 논리적 구조가 결과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그리고 제국주의의 일란성 쌍둥이인 자본주의에 대한 맹신적인 옹호로 간다는 점이다이영훈이 제시한 구체적인 자료와 통계 그리고 근거 등은 차명수 교수가 반박 연구를 발표하면서 그 진실이 드러났다심지어 같은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말이다우선 이영훈 18~19세기 조선의 조선왕조의 쇠퇴와 혼란했던 시기로 인해 인구 파악 능력이 약화되었을 것을 간과했다또한 18~19세기 조선의 인구가 연평균 0.62%의 속도로 증가하고, 19세기에 0.83%로 증가했던 사실도 무시했다생산성 하락의 문제도 총 생산량이 아닌 두락당 지대 수취량을 취사선택 한 것이었다즉 이영훈 교수의 연구는 이러한 일련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다.


여기서 식민사학에 대한 대응으로서 나온 자본주의 맹아론이 옳은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나의 대답은 물론 아니다자본주의 맹아론은 이른바 식민사학에 대한 반대급부의 이론 그 자체로는 의미가 있을지언정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영훈 교수가 맹신하는 그 자본주의의 논리로써조선 사회를 해석하고자본주의 그 자체를 옹호하는 논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그리고 여기에는 조선이 서구에 비해 후진적이었음을 인정하는 함정즉 서구중심적이고 근대중심적인 한계도 존재한다.


다시 이영훈의 ‘19세기 위기론으로 주제를 돌리겠다무엇보다 이영훈 교수의 ‘19세기 위기론의 문제점은 바로 그가 천박한 자본주의 논리와 제국주의 논리를 합리화 한다는 사실에 있다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이영훈이 맹신적으로 추종하는 이런 자본주의와 식민주의는 결과적으로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적 논리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이러한 관점들은 결국 19세기 서구 제국주의가 타국을 식민지배하기 위해 내세웠던 논리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실제로 영국과 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타국을 식민 지배할 때 내세운 논리와 아주 같다예를 들면 영국의 경우 서남아시아의 강국이었던 인도를 식민지배할 때이러한 논리를 내세웠고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포함한 여러 식민지들의 지배를 합리화 할 때 내세웠던 논리가 이러했다.


이러한 지배논리에 대한 비판을 이영훈의 ‘19세기 위기론에선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결과적으로 이러한 문제점은 이영훈 교수의 친제국주의적 그리고 자본주의적 관점에 있고크게 보면 친서방 그리고 친미 친일적인 제국주의 관에 있다고 할 수 있다따라서 ‘19세기 위기론이라는 것은 이러한 기만과 위선 속에서 만들어진 제국주의적 논리다이영훈 교수의 친제국주의적인 ‘19세기 위기설과 이런 식민사학에 맞대응하기 위해 나온 자본주의 맹아론 둘 다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이에 따라 역사를 유물론적이고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이 필요한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