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닝 포인트 포스터, 이 포스터는 9.11 테러 당시 긴박한 상황을 제법 잘 담아낸 것 같다.)

몇 일 동안 안보던 넷플릭스 다큐인 터닝 포인트를 봤다. 지난 번에 내가 쓴 리뷰를 보면 다큐가 ˝소련 침공에 대한 얘기를 하면서, 본인들이 키운 탈레반에 대해 여성인권 운운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썼다. 또한 미국의 애국주의를 다소 강조하는 부분에 불편함을 느낀 것도 글에서 낱낱이 드러냈다.

나는 그러한 감정을 잠시 내려놓은 뒤, 몇 일 전 보다가 말았던 2화를 오늘 다시 봤다. 2화는 2001년 9.11 테러에 대한 얘기를 보다 광범위하게 확장한다. 9.11 테러 당시 뉴욕 현장에 있던 이들과 워싱턴 펜타곤에 있던 이들 그리고 당시 대통령이던 부시의 측근들까지로 말이다.

1시간 정도의 러닝 타임을 자랑하는 이번 편에서는 당시 9.11 테러로 인한 미국인들의 충격과 공포 그리고 분노를 보여준다. 즉 미국이 어떤 식으로 전쟁에 들어가게 됐고, 정서상 들어갈 수 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다큐는 9.11 테러를 당한 현장에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지옥같은 현장으로 뛰어 들었던 사람들의 용기와 헌신을 있는 힘껏 보여준다. 군복무를 소방서에서 했던 나로서, 위험한 현장에 자발적으로 들어가 희생한 경찰과 소방관 그외 직원들의 희생정신은 당연히 공감한다. 9.11과 같은 테러 현장은 아니더라도 나 또한 생활전선에서 소방관 대원들의 극한직업을 체험해봤기에, 그들의 희생이 안타까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얘기가 9.11 테러 이후 미국의 행동과 잘못된 분노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나는 이걸 많이 강조하고 싶다. 다큐는 9.11 테러의 현장과 긴박한 상황을 설명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신속히 넘어간다. 전쟁 초기 탈레반과 내전 중이던 북부동맹은 미국의 도움을 받아 대다수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점령했다. 여기까지가 2화의 내용이다.

나는 이 다큐가 미국에서 만든 다큐로서, 9.11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할애한 것에는 크게 불만이 없다. 다만 지나친 피해자성 부각에 약간의 불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얘기에서의 결정적인 문제점이 아직까지 크게 언급되지 않았다. 그 문제점이 뭔지는 총평에서 언급할 예정이다.

그래도 당시 미국인들의 정서가 어떤지는 제법 잘 알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이 점에서 미국인들이 1991년 걸프전쟁을 통해, 소위 베트남 증후군을 이라크 사막에다가 뭍어버렸다는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아무튼 베트남 전쟁에서의 교훈을 잊어버린 이들이 결국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라는 실수를 반복했음을 유의하면서 감상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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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의 저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2003321241,500명의 미군과 3만 명의 영국군, 2,000명의 호주군과 200명의 폴란드군이 이라크 영토에 진입했다. 미군을 포함한 연합군은 단기간에 이라크의 정규 군대를 손쉽게 무너뜨렸으며, 개전 3주만인 49일에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장악하고 지도자 사담 후세인(Sadam Hussein)을 포로로 붙잡았다. 이것이 바로 이라크 전쟁(Iraq War)이다. 이라크 전쟁은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그로부터 2년 전 미국은 21세기가 시작됨에 따라 9.11테러로 충격을 받았다. 9.11테러는 미국에게 새로운 전쟁인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미국은 2001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을 2003년에는 이라크를 침략했다.

(딕 체니)

 

9.11 테러를 주도한 인물은 알카에다의 오사마 빈라덴이었다. 오사마 빈라덴을 중심으로 핵심 인물 19명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들 중 16명은 미국의 중동 동맹국인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놀랍게도 미국은 사우디 아라비아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으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내세운 논리는 바로 중동 여성의 해방과 민주주주의 전파였다. 물론 이는 말 그대로 허구였다. 미국의 진짜 목적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패권 장악을 통한 중국 및 러시아 그리고 이란에 대한 군사적 견제였다. 이라크 침공의 목적은 말 그대로 석유를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미국의 전문가들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확인된 원유 매장량이 2,590억 배럴인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미국의 적대국인 이라크의 원유 매장량은 1,120억 배럴로 전 세계 원유 매장량의 1/3 수준이었다. 심지어 이라크의 실질 매장량이 4,000역 배럴 이상이라는 주장도 있었을 정도다. 이라크 침공 이후, 이라크 전역을 장악한 미국이 우선적으로 하고자 했던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라크 측 국영기업들을 해체해 석유 부문을 석유 관련 다국적기업들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2004년 딕 체니가 소유주로 있던 핼리버튼은 12억 달러 규모의 이라크 남부 석유시설 재건 계약을 따냈고, 미국은 자신들이 세운 이라크 정부에게 지지부진한 석유화학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라고 계속 압력을 가했다.

(딕 체니가 CEO로 있는 기업 핼리버튼)

 

핼리버튼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쿠웨이트에서 이윤을 긁어모았다. 이라크에만 4만 명의 직원을 두고 있던 핼리버튼은 200824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윤 대다수는 의문스러운 수의계약을 통해서 나온 것이었다. 핼리버튼은 이라크 침공을 통해 미군 군납업체 순위 19위에서 1위로 등극했다. 미국 상원 의원 패트릭 레이히 상원이 당시 부통령이자 핼리버튼 회사 소유주인 딕 체니(Dick Cheney)에게 핼리버튼 회사의 부당한 폭리 추구에 이의를 제기하자, 딕 체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좆 까 이 새끼야(Fuck yourself)!”


(딕 체니가 이라크 전쟁을 통해 번 돈)

 

핼리버튼과 자회사 KBR은 여러 차례 발주처에 비용을 부당하게 과다 청구했다. 이들이 이라크 전쟁이라는 혼란을 통해 막대한 자본과 부를 축적하고 있는 동안, 이라크의 상황은 악화됐다. 후세인 정권 몰락 이후 인민들의 삶은 더 나락으로 떨어졌고, 더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의 폭탄 테러가 빈번히 발생했다. 그뿐만 아니라,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종교적 교리 갈등도 더 심각해졌으며, 베트남 전쟁에서 그랬듯이 이라크에 배치된 미군들은 전쟁의 수렁에 빠져 전사자가 급증했다. 이렇게 해서 2009년까지 최소 4,500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하고 3만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의 피해는 급증하여, 이라크인 65만 명에서 100만 명이 사망했다. 이라크의 여성들은 미군에게 강간당했으며, 양민들은 미군의 직접적인 학살과 드론 공습 그리고 무차별 헬기 사격의 공포와 미국 자본주의 체제가 재생산한 빈곤에 고통받았다.

(영화 바이스)

 

따라서 미국의 부통령 딕 체니는 이렇게 끔찍하고 무책임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놓고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 남에게 총을 쏘고도 사과하지 않는 인성을 가진 딕 체니는 당연하게도 이라크 전쟁에 대해 단 한 번도 국민에게 사과한 적이 없다. 아니 오히려 더 뻔뻔하게 자신이 일으킨 명분 없는 전쟁을 옹호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아주 뻔뻔스럽게 잘먹고 잘살고 있다. 딕 체니는 자신의 자본가 동료인 럼스펠드와 콜린 파월을 따라 이승탈출하길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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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넷플릭스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터닝 포인트)

 

Netflix에 있는 다큐멘터리인 터닝 포인트(Turning Point) 1화를 오늘 봤다. 시작은 2001년 전 세계를 뒤흔든 9.11 테러부터 시작한다. 9.11 테러에 대한 묘사를 하다가, 미국의 중동전쟁의 기원을 얘기하기 위해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말한다. 그리고 무자헤딘과 냉전 이후 탈레반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하지만 미국에서 만든 것 답게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그들이 강조하는 소련 침공은 아프가니스탄 좌파들을 지원하는 형식이었고, 미국은 이러한 진보를 막기 위해 탈레반의 사실상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무자헤딘을 물적 인적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무자헤딘 간부 중 한 사람이 부르카를 안 쓰는 아프가니스탄 여성 얼굴에 염산을 뿌렸다는 것과 1996년 탈레반 집권 시기 여성 인권이 바닥을 달렸다는 것은 얘기하지만, 소련군이 들어 왔던 시점이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자유분방하고 가장 많은 여성 인권이 보장되었으며, 그걸 반동적인 탈레반을 동원하여 막으려 했던 것이 미국이었다는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이 다큐멘터리가 전반적으로 볼만한 다큐멘터리이자, 제법 미국의 실책을 비판하려는 시도는 맞다고 생각한다. 제법 나쁘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여전히 미국 중심의 미국 지배층들과 아프가니스탄 친미주의자들의 인터뷰 중심으로 진행되는 구조는 이 다큐멘터리가 미국 중심주의적 편향을 못벗어났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다양하게 인터뷰를 진행했던 넷플릭스의 전 시리즈 중 하나인 PBS 베트남 전쟁과 크게 차이가 나며, PBS 베트남 전쟁이 미국 중심적 사고관에도 불구하고 왜 훌륭한 명작인지 다시 한번 직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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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이 세계를 제패하던 13세기 몽고군의 침략을 3번이나 격퇴했던 나라가 동남아시아에 있다그 나라가 바로 베트남이다당시 베트남은 리 왕조의 뒤를 이어 쩐 왕조가 수립됐고그 왕조는 대략 200년간 장기 집권했다이 정권이 베트남에서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베트남의 명장이자 영웅인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 왕의 존재 때문은 아닐까오늘은 베트남의 명장이자 쩐 왕조의 왕이었던 쩐흥다오가 어떻게 몽골의 제1차 침략을 막아냈는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현재 호치민시에 있는 쩐흥다오 동상, 몽고군의 침략을 3번이나 막아낸 그는 현재 베트남에서 이순신이나 을지문덕 혹은 강감찬 장군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칭기즈칸 사후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지역까지 영토를 팽창했던 몽골 제국은 북중국을 정복한 후 서방으로 팽창하는데 주력했었다이 과정에서 쿠빌라이칸은 현재 중국의 운남 성의 대리국으로 진격하여 국경을 현재 베트남과 맞대게 되었다당시 쿠빌라이칸은 베트남에 사절을 보내남쪽에서 송을 공격할 수 있도록 길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으나쩐 왕조는 이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오히려 사신을 투옥시키고 몽고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육군과 수군에 대한 지휘를 쩐 리에우의 아들 쩐 꾸옥 뚜언(Trần Quốc Tuấn) 쩐흥다오에게 맡겨 국경지대의 방비를 강화했다.

 

사실 몽고군은 남하했을 시기베트남의 일부분을 점령했었다그 이유는 베트남의 군민을 대송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였다당시 몽고군을 지휘했던 인물은 우량하타이였다우량하타이의 군대는 베트남 국경을 넘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몽고군은 홍강과 로강을 따라 두 길로 나뉘어 남하했는데수도인 탕롱(현재 하노이서북쪽 약 50km 지점까지 접근했다. 1258년 1월 몽고군과 쩐흥다오가 이끄는 베트남 주력군은 홍강과 로강다강이 하나로 합쳐지는 비엣찌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1차 침공 당시 몽고군의 진격도, 몽고군의 진격은 매서웠고 초기 베트남군 또한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초기 몽고군은 주저 없이 강을 건너 베트남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퇴각하는 베트남군을 따라 진격했다베트남군은 급히 병력을 수습해 탕록 북쪽 푸로(phù lỗ)에서 2차 방어선을 편성했다물론 이 방어선도 몽고군에게 허무하게 무너졌으며베트남군은 탕롱을 버리고 후퇴했다탕롱에 입성한 몽고군은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몽고군에게 패전을 거듭하자 태종의 동생 등 일부 인사들은 송나라로 피신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그러나 쩐흥다오는 흔들리지 않았다.

(전쟁 시기 베트남군이 사용했던 전투 코끼리, 열대지방에 위치해 있는 베트남 또한 코끼리를 전투용으로 사용했다. 참고로 베트남 이웃나라인 라오스는 한때 코끼리 왕국으로 불렸었다.)

 

당시 쩐흥다오가 이끄는 몽고군은 후퇴하며 건물과 다리 그리고 도로를 파괴했고몽고군의 식량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불태웠다이는 1812년 조국전쟁 당시 나폴레옹의 침공에 맞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사용했던 전술이나, 1941년 독소전쟁 초기 히틀러의 침공에 맞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군이 사용했던 전술과 유사하다쩐흥다오의 병력이 후퇴한 이후 몽고군들은 텅 빈 도시에서 식량을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렸고낯선 풍토병으로 고전하기 시작했다결국 베트남을 침공한 몽고군의 사령관 우량하타이는 베트남에게 화의를 제의했지만 단번에 거절당했다.

(1258년 뀌화 전투 당시 게릴라전으로 기습 공격을 했던 베트남군과 우왕좌왕하는 몽고군, 1차 침공 당시 쩐흥다오가 사용한 게릴라 전술은 이후 레러이의 대명항쟁과 응우옌 후에의 대청항쟁 그리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민의 게릴라 전술과 베트남 전쟁 시기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까지 이어진다.)

 

전열을 가다듬은 쩐흥다오의 베트남군은 반격을 시작했다퇴각했던 베트남군은 몰래 홍강을 넘어 탕롱 건너편에 있는 동보더우(Đông Bộ Đầu)의 몽고군 주둔지를 공격해 점령했다이는 개전 후 처음으로 베트남군이 거둔 승리였다이후 베트남군은 강을 건너 아군 진지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승리의 기쁨에 겨워 미친 듯이 강둑을 내달리는 베트남군 기병들을 탕롱 성벽 위에서 바라본 몽골 병사들은 충격을 받았다결국 우량하타이는 군대를 북쪽으로 돌려 철수했다철수하는 길드 순탄치 않았다몽고군은 탕롱에서 국경 사이 중간쯤 되는 옌바이 성 뀌화(Quy Hóa)에서 소수민족인 무엉족 군민의 기습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1258년 뀌화 전투 재현 모형, 위에 있는 사진과 같다. 게릴라전을 통해 몽고군을 몰아냈던 베트남을 보면, 베트남이 20세기 당시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침략을 무찌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퇴각하는 몽고군은 허겁지겁 이동하느라 주변을 약탈할 여유도 없이 지나가 베트남 북부에서는 몽고군이 진짜 불적(부처 같은 적)이었다라는 조롱 섞인 우스갯소리가 유행하기도 했다결국 몽고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했고베트남은 몽골에 사신을 보내 강화를 맺은 뒤 3년에 한 번씩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이는 또 다른 침략을 막으려는 베트남측이 벌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1차 대몽항쟁의 승리는 베트남 측의 극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게 여러 가지 소중한 자산을 안겨주었다. 1차 대몽항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몽고군도 무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으며최선을 다해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몽고군의 가장 큰 무기인 공포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배웠고그들이 청야전술과 유격전에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해서도 전술적인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무엇보다 아무리 강한 외적이 쳐들어오더라도 왕부터 백성까지 하나로 뭉쳐 막아내겠다는 강력한 투쟁 의지를 갖는 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유인선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이산, 2002

 

오정환천년전쟁종문화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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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시절 약산 김원봉)


2015년에 개봉했던 영화 암살은 박근혜의 국정 교과서 사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얻었다. 관객 1,270만 명을 동원한 영화 암살에서는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카리스마 넘치는 독립운동가가 나온다. 그가 바로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58년에 생을 마감한 약산 김원봉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립운동가다. 그는 1919년에 창설된 의열단의 단장이었으며, 민족혁명당 총서기였고, 조선의용군을 창설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이었다. 그는 명실상부 독립운동가였고, 수많은 독립투쟁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19191110일에 창설된 의열단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였고,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를 대상으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영화 암살도 엄밀히 따지고 보자면, 김원봉의 의열투쟁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누군가를 암살하거나 어떤 기관을 파괴하는 독립운동을 생각한다면 백범 김구가 했던, 이봉창 의거나 윤봉길 의거를 생각할 것이다. 물론 김구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민당의 장제스로부터 독립자금을 지원받게 되었으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한국광복군 창설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김구가 추진했던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는 의열투쟁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왜냐하면, 1920년대와 1930년대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이 했던 투쟁들은 김구가 한 것에 비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이 쓴 약산 김원봉 평전에는 1920년대 당시 의열단 주요활동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9203~6월 곽재기, 이성우 등이 국내활동에 사용할 폭탄을 밀양으로 반입하려한 의거

 

19209월 밀양 폭탄 반입사건에 대한 응징으로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장을 폭사시킨 의거

 

192011월 최수봉이 밀양 경찰서를 폭파한 의거

 

19219월 김익상이 종로 경찰서를 폭파한 의거

 

19223월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한 의거.

 

19233월 김시현, 남정각, 유석현 등이 경기도 경찰부 황옥 경부를 동원해 무기와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려 한 의거

 

19241월 관동 대지진 때 한인 학살에 대한 응징으로 구여순, 오세덕 등이 국내폭동을 시도한 의거

 

19253월 이인홍과 이기환이 북경에서 일제밀정 김달하를 처단한 의거

 

192511월 이종암, 배중세, 고인덕 등이 국외로부터 무기를 반입해 거사를 준비했던 경북 의열단 사건

 

192612월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한 의거

 

출처: 약산 김원봉 평전 p.75

 

그 외에도 여러 활동들을 김원봉은 전개했다. 무엇보다 내가 김원봉이라는 인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1930~1940년대 당시의 무장투쟁에 있다. 193810월 약산 김원봉은 조선 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는 엄밀히 따지자면 전투부대가 아니었지만, 이들이 일차적으로 맡은 임무는 대적선전공작이었다. 이것은 일본군 병사들에게 반전과 염전의 정서를 주입하고 사기를 저하시켜 투항을 유도하는 작전이었으며,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온 조선청년들을 독립군 쪽으로 끌어오는 역할이었다.

 

이들은 주로 일본군 주둔지역 주민들에게 국제정세와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강연을 하고 창가를 가르쳐 반일분위기를 고취시키기도 했고, 일본어와 중국어로 된 소책자와 전단·삐라 등을 수십만 장씩 만들어 살포하고 일본군이 투항할 때 쓸 신변보호용 통행증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이 선전활동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 또한 중국군과 합동하여 일본군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40323일에는 매복전에서 일본군 탱크 2대와 차량 8대를 파괴하고 적군 30명 이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었다. 즉 이러한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에게 군사적인 타격을 가했었다.

 

조선의용대은 19416월 조선청년전위동맹쪽 조선의용대원 80여 명 정도가 북상하여 팔로군 지역인 화북으로 가게 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 이후 조선의용군에 있던 대원들은 대대적으로 북상하게 되면서 19427월에는 조선독립동맹으로 창립됐다. 이 조선독립동맹은 창립선언에서 당파를 망라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며, 중국 특히 중국공산당과 공동전선을 결성하여 항일전에 참가하고, 무장부대를 확충하며, 대중을 조직하고, 동방 피압박 민족해방운동 및 일본의 반전운동과 연계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모여 생긴 군대가 바로 조선의용군이다.

 

조선의용군은 주로 화북지역에 근거지를 둔 무장 선전 부대임과 동시에 전투 부대였다. 이들은 주로 태항산 일대에서 전투를 치렀다. 이들은 조선의용대에 있을 당시 194112월에는 호가장 전투와 형태 전투 그리고 19425월에는 편성 전투 등을 치렀다. 조선의용군은 화북 지방의 각지에 흩어져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전지공작과 병사모집, 선전활동, 첩보활동 등이 있었다. 19436월에는 중국 팔로군과 함께 태항선 곳곳에서 이른바 일본군 반소탕전을 전개했다. 이와 동시에 조직의 규모도 확장해 나갔으며, 1945년 해방 시점에서 최소 1,000명 이상의 군대로 성장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마오쩌둥 휘하에 있던 중국 공산당 측의 조선인 부대와 합류하여, 냉전 초기에 벌어진 제2차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맞서 활약을 펼쳤으며, 중국 통일 이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 인민군에 편입됐다.

 

김원봉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일각에서는 그를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범이라고 한다. 즉 그가 1948년에 월북하여, 북한의 고위직을 맡았고, 그것은 결국 한국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냥 반공주의 콤플렉스일 뿐이다. 단순히 북한에서 고위직을 맡았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써 재조명 받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과 주장 그리고 사상은 지극히 편향적이고 친일중심적인 사고관이다. 그렇다면, 악질 친일경찰이자 고문왕이던 노덕술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애국자가 되는 것은 말이 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지금까지는 반공주의 콤플렉스에 도취되어 노덕술이나 김창룡 그리고 하판락같은 악질 친일파들이 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애국자로 대우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원봉에 대해서 그런 구차한 변명을 하는 것은 편향과 역사조작 그 자체일 뿐이다. 설사 그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그의 독립운동 업적이 폄하당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독립운동가는 김구나 이승만 일부를 빼면 거의 없다. 아무튼 독립운동사에서 그런 유치한 이데올로기 트집을 잡는 것은 반공주의자들의 특징일 것이다.

 

나는 약산 김원봉을 존경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김원봉은 독립운동 시기 의열투쟁을 전개했고, 무엇보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중국 연안과 화북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만주와 소련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면, 김원봉은 중국 연안과 화북에서 했다. 조선의용군의 존재는 김원봉이 독립운동사에서 높게 평가받아야할 이유를 알려준다. 따라서 김원봉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은 좋은 것이며, 비록 우익적 색체에서 진행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앞으로 약산 김원봉의 업적은 독립운동사에서 더 높게 재조명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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